사자성어 중에 ‘일석삼조(一石三鳥)’라는 말이 있습니다. 돌 하나로 3마리의 새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고도 합니다. 지금은 인터넷 게임에 자리를 내어 주었지만 국민놀이였던 ‘고스톱’에서도 ‘일타삼피’라는 말도 있습니다. 주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제게도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일이 생겼습니다. 창고가 오래되어서 수리를 해야 했습니다. 비가 오면 누수가 있어서 창고에 있는 물건이 젖기도 했습니다. 알아보니 적지 않은 금액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창고를 깨끗하게 수리해 준 형제님이 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대신에 창고의 일부를 사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신문사 사무실에 오더니 형광등을 모두 엘이디 등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사무실이 밝아졌습니다. 형제님 덕분에 창고도 깨끗해졌고, 사무실도 밝아졌고, 든든한 이웃도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부제님이 본당 신부님에게 “부활 축하드립니다.”라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당 신부님이 “왜 나에게 부활 축하합니다.”라고 하느냐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부제님은 순간 당황해서 제대로 답변을 못했다고 합니다. 본당 신부님이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도 아니지 않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제님은 더 당황해서 “그러네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학교에 돌아온 부제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왜 축하하는지 생각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느님의 아들은 죽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부활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은 축하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두려워서 숨어있던 제자들은 이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죽더라도 다시 부활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축하할 일입니다. 셋째는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죽더라도 다시 부활 할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은 우리들 또한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였던 ‘바오로’를 회개시켜서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처음에 공동체는 바오로를 경계하였습니다.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의 진심을 보았던 교회는 이제 바오로를 사도로 인정하였습니다. 바오로가 교회로 들어오면서 교회는 더욱 성장 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해박한 성경의 지식과 심오한 그리스의 철학으로 교회의 신학적인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교리는 바오로 사도가 정립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통해서 공동체에 용기를 주었습니다. 공동체가 하느님과 멀어질 때는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은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무엇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선교하였습니다. 매를 맞기도 하였고,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풍랑에 배가 난파되어서 죽을 뻔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선교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역사를 ‘기승전결’의 과정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중에 있는 백성을 모세를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의 생활은 낡은 관습과 관행을 정화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왕에게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백성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 중에 이스라엘을 이끌 메시아가 오셨는데 그분은 예수님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던 세례자 요한이 증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바로로 사도의 이야기를 읽으면 구원의 역사가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바오로 사도처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부활 축하합니다.’라고 인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