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0월 21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아담의 생명 안에서 눈을 떴으나 아들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기 원하여 속히 말씀 앞으로 나아가오니 나를 받아주소서.
밤새 오염된 나의 영을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시고 주의 신부로 세워주옵소서.
고단한 인생길이지만 어디에 있든지 주의 품안에 있으면 그 자리가 하나님 나라인 줄 아오니 우리를 품어주옵소서.
오늘도 주의 진리를 위해서 십자가 군기를 휘날리며 살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가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내 속에 나를 주장하는 자기주장의지가 강합니다.
옛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거룩한 불구자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갈 2:11-21
제목 :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나의 묵상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가 율법 때문에 유대인들의 눈을 의식하여 외식하는 것을 바울이 보았다.
‘본문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로 표현이 되어 있는데 이는 야고보가 보낸 어떤 유대인들로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이 아니라 야고보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강조하는 유대 열심당원들이 온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이미 예루살렘 공회의 의장으로서 바울의 이방 선교를 인정하고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율법을 초월한 복음의 자유를 정식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야고보가 그들을 파송하였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이방인 개종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 열심당원들이 온 것을 알아차리고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그 자리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유대 열심당원들이 오는 것을 보고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 모습을 바울이 보았고 바울은 그런 베드로의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려야 할 주님의 제자로서 마뜩찮았던 것이다.
베드로는 남들이 모르게 자리를 피한다고 피하였지만 그 외식하는 일에 바나바 역시 마음이 걸려 베드로를 따라 그 자리를 피하였다.
무엇보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에 마음이 상했을 것은 불을 보듯 명약관화하다.
본문 12절 하반절에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라는 문구에서 ‘떠나’라는 헬라어 원어는 ‘아포리젠’인데 이 말은 ‘~으로부터 떨어지다, 분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한 형제요 하나임을 베드로는 항상 강조하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유대 열심당원들을 보자 거리낌을 느끼고 그 자리를 피했다는 것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그로 인하여 베드로만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바나바와 다른 유대인들까지 외식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식사를 하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 것이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이런 행동을 한 베드로가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도요 지도자로서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바울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성령께서 그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이런 모습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의 말은 이렇다.
베드로 당신이나 나나 모두 태생적으로 유대인이요 이방인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것은 율법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써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예수의 제자들이요 사도인 우리들도 유대인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그리스도께 나아온 것이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면 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자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이 밝히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신 것인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내가 이미 헐어 버린 것을 다시 가르친다면 그것은 분명 내가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 유명한 말을 남긴다.
웬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은 거의 암송하기까지 한다.
바로 갈라디아 2:20절 말씀이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은 그저 보기에 좋고 듣기에 은혜로운 말씀이어서 암송까지 하는 사랑받는 구절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전체를 연결하여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다름 아니라 나를 드러내려는 자기 의, 곧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주장의지란 율법이나 선한 일을 행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지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런 본성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육신이 그런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몸과 육신을 구별하고 있다.
몸은 헬라어 ‘소마’로써 가치중립적이다.
때로는 죄의 세력에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롬 6:12), 또한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쳐지기도 한다(롬 12:1).
이 몸이 바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육신은 헬라어로 ‘사릌스’라고 하는데 이는 죄악 된 본성을 뜻한다.
내가 무언가 선을 행하여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강한 의지는 바로 이 육신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다.
육신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처럼 되게 하려는 탐욕이 있어서 자기 자신을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자기주장의지라고 한다.
하와와 아담이 바로 이 자기주장의지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뱀으로 변장한 죄의 세력 곧 마귀가 하와에게 건네는 말이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거야.’였다(창 3:5).
사람은 선하고 착한 일을 하려는 마음이 많다.
그래서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큰 재난을 당하더라도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것이다.
이런 마음은 참으로 장려하여야 하고 또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으로 선한 일을 하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이다.
‘내가 이런 일을 했는데, 나 좀 알아 줘요.’ 라든지 교회에서도 목사가 무슨 부탁을 하면 최선을 다해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순종을 한다.
그런데 그런 순종을 하고 나서 목사가 알아주지 않거나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바로 마음이 상하고 삐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 나를 안 알아 줘? 나를 뭐로 보고...’ 하는 식이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에게 있던 마음이 바로 이 자기주장의지였던 것이다.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유대 열심당원들의 눈을 피해 슬며시 자리를 떴던 그는 유대인들 앞에서 ‘이것 봐, 나는 이렇게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지 않았어.’ 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야.’ 하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오늘 본문의 19-20절 말씀을 하였다.
그저 단순히 은혜롭고 보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이제 나는 율법을 위해 사는 것을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인하여 나는 죽었기 때문이다(19절).
또한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살기 위함이다(19절).
나(죄의 본성인 육신, 자기주장의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래서 이제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그저 다만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하시려고 자기 몸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말씀이 은혜롭고 보거나 듣기에도 좋은 말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보거나 듣기에 은혜롭다고 해서 좋은 말씀이 아니다.
다만 이 말씀이 참된 복음이 될 때 비로소 그 말씀에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알지 못하였었다.
예전에 나 역시 그저 이 말씀이 너무 은혜롭고 보고 듣기에 좋아서 암송을 하였다.
또한 남들이 다 암송하는데 나도 암송을 해야지 하는 선한 경쟁심리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말씀이 이런 단순한 말씀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내 머리를 망치로 한방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말로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전혀 못 박지 않은 자로 살았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육체를 십자가에 어떻게 못 박는지조차 알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날마다 정욕이 솟아나는 육신, 죄의 본성인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거룩한 불구자로 살아간다.
(롬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여기서 죽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카타르게오’인데 이는 불구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이 옛 사람을 기도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리고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선한 일이라도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오늘도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주님의 은혜로 하루를 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그저 선하고 착한 일을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으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삶인 줄 착각하였나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람 앞에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육신의 자기주장의지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주님의 참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나를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선한 일을 하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사시는 주님께서 하셨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이 하루가 주님의 의를 이루는 삶이 되게 하소서.
주님 주신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