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求道歷程(구도역정)
 
 
 
카페 게시글
지대방 기도와 참선
성조 추천 0 조회 353 10.08.01 17:18 댓글 3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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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8.02 13:01

    첫댓글 어느 댓글에서 제 아버지를 자랑했는데요.
    아버지는 '공부' 그런 것은 모릅니다. 건강이 너무 안좋아서 단학종류의 수련을 65세에 시작하셨어요.
    단하나! 이 무남독녀인 딸을 고생시키지 않으려는 원을 가지고 시작하셨어요.
    딴 생각을 내지않고, 한결같이 열심히 하시는데요. 몸이 좋아지시면서 마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지극하게 한결같이 열심히 할 수 있는지 제가 보면서 참 감동합니다.
    좌선을 하면서 호흡을 하시는데요. 아마도 선열같은 것을 느끼시나봐요.
    저에게 언젠가 '' 네가 왜 그렇게 출가하고 싶어했는지 이제는 이해를 한다'라고 하시더군요.

  • 10.08.02 16:42


    저번에 잘못적었어요.
    지금 73세이십니다.
    한결같이 하기를 8년 되신거죠.
    .

  • 10.08.02 13:22

    줄탁동시를 말씀하셔서요. 마음이 좀 아프네요.

    아버지가 다음생에는 수행자가 되고 싶다고 하세요.
    꼭 불연이 닿기를 저는 말할 것도 없이 바라는 마음이지요.
    다음생의 불연을 위한 인연을 낸다는 마음에서 적었습니다.
    많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아버지의 우직함과 지극함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 작성자 10.08.02 19:45

    줄탁동시에 마음이 아프다는 말씀의 의미를 짐작은 하지만 확실히 알고 싶습니다.

  • 작성자 10.08.02 19:31

    축하드립니다. 사람은 늘 변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업식대로 변해가기가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자신의 업식을 벗어나는 변화를 이루기도 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큰 기적입니다. 누구나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누구나 그렇게 변하지는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젊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 방편으로 기도는 물론이고 좌선을 꾸준히 하다보면 그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좌선을 하시면서 법열도 느끼시고 또 그런 발원도 하셨으니 반드시 이루시게 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이미 좌선이나 기도가 둘이 아닌 도리로서 해나가고 계시기 때문에 따로이 기도가 필요없습니다.

  • 작성자 10.08.02 19:44

    수행자가 되고싶은 그 마음만 변하지 않으시다면 이미 그 자리에서 알고 있으니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또한 그 자리에서 알고 있으니 이미 불연이 닿은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결연히 결정하여 믿으신다면 그 믿음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지선행님의 글을 읽으시는 많은 분들도 똑 같이 마음내어 드리리라고 믿습니다.

    아버님의 우직함과 지극함도 건강과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굳은 발원에서 생긴 것이니 누구나 자리이타의 굳은 발원을 지극히 한다면 몸도 의식도 자연히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올바른 발원을 내는 것이 사실상 중요합니다.

  • 10.08.02 21:01

    '신심'
    결정된 신심속에서 안심하여 묵연히 정진해 간다...


    '분별심이 많다'
    '신심이 모호하며 아니 없는 것 같다'
    '하근기다'
    '그릇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기본도 안되어 있다'
    '그런 네가 무슨 공부? .. '
    이 과정을 혼란속에서 겪어낼 앞으로의 수많은 행자들을 찬탄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성조거사님,
    정성스럽게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합장합니다.

  • 작성자 10.08.04 01:11

    위 글에서 지선행님께서 지나온 구도여정을 엿볼 수 있군요(아닌가요 ㅎㅎ)
    사실 '신심'이라고 하면 쉽게 생각해서 믿을려고 애쓰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믿어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라 그냥 아버지인줄 아니까 아버지라고 할 뿐이죠,
    그래서 신심이란 깨달아서 아는 것과 결코 둘일 수 없습니다.

    믿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깨닫아 알기 위해서 믿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과 의심 혹은 위 혼란들은 사실상 둘이 아니라는 이치도 성립합니다.

    이미 알게 되었으면 흔들림없이 나아가기 위해서 결연히 결정 하고 실천하는 것이죠.

  • 작성자 10.08.03 05:09

    그러므로 믿지 못한다고 공부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금물입니다.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만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 오히려 공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즉 혼란이 많고 의문이 많을 수록 사실은 더욱 더 많이 공부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큽니다.

    현실적으로도 안심하기 위해서 애쓰는 믿음은 오히려 약이 아니라 독이 될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속으로는 아닌 줄 알면서 겉으로 믿으려 애써보았자 그것이 가슴깊이 울리는 메아리가 될 수 있을까요? 겉으로 알고 속으로 알면 자연히 안심이 따라올 것입니다.



  • 작성자 10.08.03 05:33

    에구! 중간에 댓글이 날아가버렸군요.. 생각도 안나고..ㅋㅋ

    아뭏던 확실하지 않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을 전제로 온갖 번민과 혼란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발버둥치는 수행자들이야말로 가장 축복받고 있는 분들입니다.
    아마도 그 발버둥이 멈출 때가 되면 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지선행님은 이미 알고 계시는 거 같아요.^^

    그러니 수행과정에서 믿지 못하고 혼란스럽다고 해서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혼란과 의문이 자신을 이끌어가는 구원의 동아줄임을 아시면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혼란과 번민을 자초할 필요는 없겠죠.

  • 작성자 10.08.03 05:39

    자기에게 부족한 것은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세상의 풍파는 원치않아도 저절로 닥치게 마련이니 항상 현명하게 대처하려는 노력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우리의 본래 그 자리는 항상 우리들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운 데서 찾고 보라고 합니다. 찾고자 하면 보일 것이고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지선행님의 말씀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쉼없이 정진하고자 발원하시는 모든 행자님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성조 합장

  • 10.08.02 21:19

    안녕하세요 성조님 여름 잘 지내고 계시지요?
    저는 몇 개월간 채식을 하며 다라니를 열심히 했는데요
    가끔은 나태한 마음에 기도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그랬네요 ^^;
    그래도 마음을 고쳐먹고 앉아서 다라니를 염하면서 제 마음을 觀하다 보면
    세상에 언제 그렇게 삼독심이 수풀 우거지듯 솟아났는지 울울창창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을 덜어내고 나면 한 층 정화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 (문제는 삼독심이 잡초처럼 번식력이 아주 강하다는거ㅎㅎ )

  • 10.08.02 22:07

    문제는 삼독심이 잡초처럼 번식력이 아주 강하다는거ㅎㅎ ,,,
    아니, 오뚜기 ㅋㅋㅋ,,,,,,,

  • 10.08.02 21:19

    위에 지선행님과 성조님께서 나누신 댓글보며 저 역시 느끼는 바가 커서 이렇게 두서없는 글 창피한줄도 모르고 올립니다 ^^ 감사합니다 두 분 모두 건강한 여름 나시길 바랍니다 OTL _()_

  • 작성자 10.08.03 04:47

    웬걸요!! 진솔하게 나누는 것이 서로에게도 도움이 되는데요.^^ 꾸준히 정진하시는 모습이 확연히 느껴집니다.찾으면 보이고 보이면 행할 수 있지만, 아예 무관심하면 보이지도 않고 볼 수 없으면 행할 수도 없겠죠.

    무심을 찾아가니 마음이 가라앉고 상대적으로 삼독심이 더욱 더 치성해 보이지만 그만큼 정화되는 것도 당연지사!! 모두가 열심히 더위와 싸운 결과인거 같군요. 앞으로도 기대해봅니다.

    참, 삼독심이 잡초처럼 번식력이 강하다는 비유는 참 재미있군요. 진공포장지에 조금만 틈이 생겨도 공기가 쑤-욱 유입되는 것과 같은 이치겠죠 ^^

    이열치열로 더위 잘 나시기를 바랍니다. 성조 합장

  • 10.08.03 11:53


    흠

    당근, 제 얘기입니다.

    성조거사님, 돋을볕님
    고맙습니다. 평안하세요.

    .

  • 10.08.05 06:44

    소원성취을 위하여 절기도를 간절히 하다보면, 처음에는 기복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절을 하고 있는 자신을 찾아가게 되더군요. 성조님께서 말씀하신, "믿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깨닫아 알기 위해서 믿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과 의심 혹은 위 혼란들은 사실상 둘이 아니라는 이치도 성립합니다" 를 보면서... 기복도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무엇을 믿느냐? 부처님의 위신력을 믿습니다. 과연, 어떤것이 부처님의 가피고 위신력인가? 세상만불이 부처의 위신력이고 가피라는 것을 기도 중에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굳이 깨달으려고 하지 않아도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

  • 작성자 10.08.05 17:19

    부용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위신력을 믿는 것이 '세상만불'? 이라고 하면, 부처님에서 시작하여 부처님으로 끝나는군요.
    위글로 미루어보면, 소원성취의 절기도는 아주 작은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인 거 같아요.. 불교에서 제일 큰 소원은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러기 위해서 소위 말하는 깨달음을 발원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큰 소원성취를 위한 발원을 먼저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부용님이 말씀하시는 소원성취는 세상사와 관련한 유위법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겠죠.

    또 한가지는 화엄스님의 말씀은 염불의 수행과정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부용님은 기도의 목적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 작성자 10.08.05 17:27

    전통적으로 염불수행법의 발생을 살펴본다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타력적으로 구원받는 것 만이 아닙니다. 본래 불성을 찾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그 방편으로써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는 방편이 염불수행법인데, 대중적으로 그 근본 목적은 오히려 2차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염불문에 대한 많은 오해가 성립합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말만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지만 그 말 뒤로 숨어버리는 중생심이 있슴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흔히 기독교인들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하느님이 치 세상만물을 창조하였는데 왜 선과 악, 행복과 불행 등등을 같이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죠

  • 작성자 10.08.05 17:33

    그 질문은 부처님의 위신력에도 똑 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원만한 복덕을 갖추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여 뭇 중생을 건지시는 분이 어떤 사람은 잘살게 하고 어떤 사람은 피눈물 나도록 기도해도 여전히 불행으로부터,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잘사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믿을 수 있겠죠. 자기가 잘 살고 있으니까.. 당연히 기도대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조금 부족하더라도 부처님의 위신력에 대한 고마움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부처님의 위신력이 언제 자신에게도 빛을 발하며 나타날지 기다리면서,

  • 작성자 10.08.05 18:01

    현실의 고단함을 견디면 살아가겠죠. 과연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부처님의 위신력이 그렇게 공평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부처님의 위신력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남녀노소, 온갖 상대적인 가치를 막론하고서 가장 평등한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가 자신에게 책임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기가 책임져야 할 그 자신속에 부처님의 위신력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길이고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즉 부처님의 위신력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지은 대로 받는다는 엄연한 불법의 진리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 작성자 10.08.05 18:26

    없던 것이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발원이 중요하고 그 발원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깨달음도 발원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것저것 모르고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정도 공부가 쌓이면 근본목적을 바로 알고 정방향을 찾아가야 비로소 시작과 끝이 일치하고 그 과정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화엄스님께서 그 과정에 촛점을 맞춘것이라는 말은 바로 그 시작과 끝을 바로 맞춘 상태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 작성자 10.08.05 18:35

    부용님께서 그 결과에 촛점을 맞춘 것이라는 말은처음에 그 끝을 생각지 않고 당면한 현실적인 일을 기도의 목적으로 삼고 시작하였다가 그 끝을 바로 보게 되지만, 그 과정은 자신이 경험한 것에만 우선을 두는 것입니다. 즉 다양한 방편의 수행과정에 대한 세밀한 회통에 대하여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죠.이것은 부용님의 과정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올바른 목적과 다양한 수행과정에 대하여 보다 폭넓은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조 합장

  • 10.08.05 22:19

    제가 온종일 분주했답니다. 내일 서울에 올라갈 일이 생겨서 짐 정리를 하느라 이제야 컴 앞에 앉았습니다.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 '세상만불이 부처의 위신력이고 가피라는 것을 기도 중에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라고 올린 제 글이 오자가 났군요. 세상만불이 아니고 '만물' 이랍니다. 성조님께서 하신 '불교에서 제일 큰 소원은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러기 위해서 ...' 라고 하셨듯이, 번뇌로 부터 벗어나기 위함이 단박에 벗어나지지가 않기에 끊임없이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 10.08.05 22:30

    화엄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꼭 절기도만을 말함은 아니며, 제 경우를 말씀드린것 입니다. 기도의 올바른 목적? 글쎄요. 거기서 부터 출발이 다르다고 하겠죠? 참선도 업장이 두터우면 (번뇌 망념이 많으면) 제데로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업장소멸 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지요. ... 죄송합니다. 지금 제가 분주해서 계속 답글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월요일에 대구로 돌아와서 다시 글을 올려보겠습니다. 합장().

  • 작성자 10.08.06 03:31

    번뇌로부터 단박에 벗어나는 것이 돈오이고, 돈오는 선종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중의 하나입니다. 실제 수행상에 있어서도 돈오를 알거나 믿고서 행하는 수행이 다소 풍파는 심할 수 있어도 훨씬 효율적입니다. 끊임없이 수행하는 이유는 우리의 목숨이 죽는 그 순간 까지는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기도를 하는 목적은 큰 발원이든 작은 발원이든 다를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을 구하든 세상사의 기복을 원하든 모두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한결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그 사실을 모를 뿐이죠. 만약 안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 작성자 10.08.06 03:31

    를 때는 이것저것 가리지도 못하고 당장 세상사 발등의 불부터 끄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목숨이 끊임없이 이어지듯 끊임없이 닥치는 문제들입니다. 지금 당장하는 일조차 끝내지 못하고 다시 해결해야 할 일이 무시로 닥치는 것이 인생사임을 당장 눈앞에서 보고 있군요. 그것에 붙들리기 시작하면 평생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올바른 목적을 바로 잡으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 10.08.05 06:55

    '나를 찾아가는 길'에서 참선과 기도가 어떻게 다른것일까? 오랫동안 궁금했습니다. 절기도는 우스워보이고, 좌선을 하면 뭔가 대단한것 같다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정쩡한 좌선수행 보다는 피눈물나는, 무릎이 닳도록 올리는 절기도가 더욱 간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진참회기도가 바로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기도였습니다. 수행의 방법은 달라도 목적지는 한 곳임을 알됩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 우리는 이제 어떻게 회향을 해야할까를 궁구해야할 때인것 같습니다. 나무 불()()(). (성조님의 말씀이 감사해서, 제 신행생활의 표현을 간단히 올려보았습니다.)

  • 작성자 10.08.05 21:48

    이 말씀에 대하여 위에서 종합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부용님의 치열한 구도여정은 많은 법우님들께 귀감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법담이 오고갈 수 있기를 기원드립니다. 성조합장

  • 10.08.06 06:01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 문제는 마무리해야 될 것 같아서 서둘러 컴 앞에 앉았습니다.
    성조님과 저는 같은 길을 가면서 서로 이방인 인것 같습니다. 저는 이론적으로 따지고 싶지도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깨달음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더 이상 성조님과 대화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님과 소통이 되지 않아서 중단된 적이 있었는데, 오늘도 이만 마치겠습니다. 즐거운 여행길에 숙제를 갖고 갈 수 없으니까요. 모두가 만사형통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열심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나무 불().

  • 작성자 10.08.06 10:58

    원래 이 길은 모두 각자가 갈 길입니다. 이방인이 따로 없습니다. 스스로 짓는 마음일 뿐입니다.

    적어도 기도를 할 때 기본적인 정신은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정신이고,자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인정할 때 비로소 참회도 성립하고 깨달음도 다가올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인정할 줄 모른다면 이 공부에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업장소멸도 결코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용님의 말씀마따나 모두가 만사형통입니다. 저와 소통되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소통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죠.. 아무튼 더운 날 무사히 여행다녀오시고 또 건강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성조 합장

  • 10.08.06 11:29


    저는
    좌선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절을 하거나
    혹은 염불주력 등(의 참회공부/수행)을 하는데

    이는

    3인칭 기표의 (언표적)문자를
    1인칭 기의의 (언행적) 말(/문자)로
    바꾸(려고 하는 것)는 것입니다.

  • 작성자 10.08.06 13:22

    결국 법담의 촛점은 여러 개의 수행법을 종합적으로 하는가 아니면 하나의 수행법을 고수하는가 의 논점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무영님의 말씀처럼 종합적으로 수행방편을 구사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제가 쓴 글의 일관적인 흐름은 사실 그 부분입니다. 그러나 당초 부처님 당시에는 따로이 나누어지지 않던 것들이 동북아 대승불교권으로 넘어오면서 총림을 선원, 율원, 강원 과 같이 나누고 각 종별로 소의경전을 가지고 수행을 해 온 것을 보면 특정수행법을 지향해온 것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 작성자 10.08.06 13:28

    그래서 종합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방대한 수행법들 중에서 자신이 주로 하는 수행법을 끝까지 따라가면서 다른 수행법을 같이 병행하면서 상호교섭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와중에 자기가 주로 따르지 않는 다른 수행법과 비교하여 우월을 논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니다. 수행법 그 자체에 국집할 것이 아니라 수행의 목적에 촛점을 맞춘다면 어떤 수행법이든 모두 거부할 필요없이 모두 수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 10.08.06 15:18

    모처럼 마을에 내려와서 선방에 드니
    반가운 도반이 있어
    척을 하여 흔적을 남겼습니다. ^^;

    제 수행의 목적, 촛점 맞추기는
    鑿開金鋼智慧眼(착개금강지혜안)입니다.

    금강(혹은 업식)을 뚫어 지혜의 눈을 여는 (깨달음의)과정이 구도역정입니다.
    반백의 용광로[미륵포대, 한 통속]에 넣어 불리고 녹이는 同爐共冶(동로공야)의 과정이 구도역정이고요.

    성조거사님 잘 쉬고 계시지요?

    ()

  • 10.08.07 18:36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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