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간힘 외 2편
정이랑
1997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떡갈나무 잎들이 길을 흔들고』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 『청어』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가로수 대열에서,
한 그루 은행나무가 떠나가는 걸 바라본 것
흙과 분리시켜버린 뿌리들이 나뒹굴고,
가지를 지탱했던 잎들도 오무라들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개의치 않는다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사람들은 버스를 탔고
학생들은 학교를 향해 걸어들어 갔다
풍경은 정물화처럼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트럭 한 대가 멈춰 있고 분리시킨 생을 옮겨야 했다
여러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지만
쉽게 트럭으로 옮겨타지 못하고 있었다
저 곳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걸까
사람들이 몸을 들어올릴 때마다
오무라드는 잎들을 떨구고 있었다
그는 지금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겠지
흙 속에 남아 있는 분신을 위해
잎들로 덮어주려고 하는 것이겠지
나는 웅성거리는 바람 속에 서 있었다
한 대의 영구차가 눈 앞에서 사라져 갈 때까지
김씨 아저씨
서문시장에는
물건을 배달해 주는 그가 있다
하루 12시간, 상인들의 콜만 기다린다
고향이 어디인지, 슬하에 자식은 몇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김씨, 김씨 아저씨!
여기 저기 50년이 넘도록 그를 불러대고 있다
그의 소원이 있다면
죽는 날도 상인들의 콜을 받는 것이란다
아, 고향이 따로 있나
한곳에 오래 살면 그곳이 자기 고향이지
입버릇처럼 말하는 김씨 아저씨
리어커 한 대 옆에 두고,
하늘도 한 번 쳐다보고,
담배도 한 개비 꺼내물고,
흥이 돋으면 유행가도 한 가락 뽑는다
<친절 신속 정확> 좌우명으로
그는 상인들의 콜을 지금도 받고 있다
당신을 콜해주는 이가 있습니까?
비가 와서
커피 한 잔 곁에 끌고 와서
배 깔고 박재삼시인의 시선집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를 읽는다
가장 본받고 싶은 시, 사람,
박재삼시인이고 보니 그리워진다
내가 시인이 되던 해,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기고 떠났다
<천년의 바람>, <아득하면 되리라>, <신록을 보며>,
<울음이 타는 가을강>, <과일가게 앞에서>, <춘향이 마음>…
나는 시인인가
누가 시인으로 알아줄 것인가
뒤척이다 낮잠에 빠져들고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눈떠보면
그가 “지금처럼만 살아라”하는 것 같아
창문을 열고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는 휴일
누군가에게 풍등 같은 시 한 편, 남기고 싶다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시에 대해 생각하고, 시인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된다. 100년 인생에서 이제 50년을 살고 보니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자리에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궁금해진다. 그 답을 알려줄 사람은 없다.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내가 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왔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거의 80%는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몇 해 전 아들과 대만 여행을 하게 된 적이 있었다. 그곳을 가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꼭 찾아가는 곳이 스펀이라는 지역이었다. 소원을 적어 하늘로 띄워 보내는, 풍등이 유명한 곳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가족의 건강과 내가 쓰고 있는 시가 누군가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풍등 같은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적어 날려 보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왜 시를 쓰게 되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면 글을 쓴다는 것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빌려 읽고 그 속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상상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 때 나 자신에 대해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생각하였던 것 같다. 대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가정형편이었고 돈 들지 않고 내 자신을 찾는 길은 글을 쓰는 것 밖에는 없다고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되기로 맘을 먹었고 학교 도서관의 책을 선생님으로 삼아 습작을 했었다. 그래서 만난 시가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는 길>이었다. 그 시는 나에게 풍등이었다. 인생에 있어 남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길을 걸어가라는 것에 나는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등단한지 20년이 넘었지만 나를 지금도 가슴 뛰게 하는 시 한 편이다.
시인의 길을 끝까지 가기로 한 이상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천 명의 독자가 한 번 읽어주는 시가 아닌, 한 명의 독자가 천 번을 읽어주는 시를 남겨놓는 것이다. 그런 시 한 편을 나는 남길 수 있을까? 누가 내 시를 읽고 가슴 속에 새겨 놓을까?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한 편 한 편 쓰는 것이 내가 해야 할 몫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의성군 다인면 송화리다. 고향을 떠나 온지도 30년이 넘었다. 자주 갈 수는 없지만 아주 가끔은 한 번씩 찾아가 본다. 뒷산이며, 시냇가며, 논둑과 밭둑을 한 나절 걸어다닌다. 풀냄새, 바람소리, 맑은 하늘의 구름이 내 정신을 살찌게 해주기 때문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유년시절이 그 무엇보다 시를 쓰는 나에게는 참 좋은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그런 것들을 보고 듣고 있으면 욕심이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을 찾아간다. 내 정신이 자연과 친해져야 시도 자연을 닮을 것 같아서이다. 쓰고 있는 시가 그랬으면 좋겠다. 바람, 별, 구름, 달, 풀, 나무, 아무리 들어도 천만 번을 바라봐도 지겹지가 않은 이런 것들처럼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내가 쓰고 있는 시도 새겨지기를 바랄 뿐이다.
2018년 9월에 세 번째 시집 <청어>를 발간했었다. 시집을 읽고 어느 분이 보내온 메시지를 남겨본다. “청어를 읽었습니다. 가슴 속에 누구나 품고 있을 펄떡이는 한 마리 청어. 누구나는 아니겠지요. 다들 일상을 살며 그 숨쉬는 생명의 청어를 애써 외면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어를 시작으로 마지막까지 한 줄 한 줄 애정으로 쓰신 시들 다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완독했지만 들고 다니면서 다시금 음미하며 읽고 싶은 시집입니다. 시인의 말처럼 되셨어요. 시들이 제게로 와서 풍등이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