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6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요한 15,9-11
자궁에서는 항상 부모와 같은 존재가 만들어진다
오늘 복음도 역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를 통해 가지에 전달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사랑과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 ‘사랑’ 안에 머무시는 것처럼 우리도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머물기 위해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과 계명은 하나인 듯 둘이고, 둘인 듯 하나입니다.
우선 ‘사랑’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사랑은 에너지이고 양식이고 생명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말은 생존을 보장받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영화 ‘알리타’(2019)는 버려진 기계 인간에게 한 과학자가 자신의 딸을 위해 준비한 몸을 붙여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뇌만 살아있던 그 기계 인간은 박사 딸의 몸을 입고 다시 살게 됩니다.
허황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우리가 모두 부모의 태중에서 그렇게 태어납니다.
어디에서 온 지 모르는 영혼을 받아 부모는 자녀에게 몸을 주고 자라면서 세상에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자녀가 생명을 보장받으려면 부모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머물려면 그곳을 만든 이의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자녀도 부모의 법을 따라야 부모 안에 머물며 사랑, 즉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법은 항상 부모처럼 생명을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쫓겨납니다.
예전에 ‘에일리언’이란 영화가 유행했었습니다.
에일리언은 부모에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자신의 숙주로 삼아 인간을 먹으며 성장하는 놈입니다.
인간은 자신 안에 들어온 에일리언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요즘 코로나바이러스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많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공존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생명을 위협할 정도가 되면 인간을 그것들이 죽이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이런 사건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님의 태중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지만, 주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법은 주는 사랑만 받으면 되지 그분의 생명까지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까지 손을 댄 것은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아기가 탯줄과 부모의 살까지 먹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상태라면 그에게 더는 사랑이, 곧 생명이 공급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부모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의 자궁과 같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과 같은 자녀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 품에서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가 원하는, 또 부모가 되라는 법을 어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에일리언처럼 바이러스처럼, 혹은 아담과 하와처럼 그분 품에서 쫓겨나 생명의 양식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영화 ‘터미널’(2004)은 오갈 데 없게 된 이란인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공항에 도착한 주인공의 나라가 내전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리는 설정입니다.
오갈 데가 없어진 나세리는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프랑스 드 골 국제공항 안에서 살았습니다.
1999년에 프랑스 당국이 난민용 여권을 내주어 정식 이민자로 받아 주었지만, 공항 생활이 익숙해져서 미친 척을 하며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야 할 2006년까지 공항에 머물렀습니다.
나세리는 매일 아침 5시 첫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에 공항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했습니다.
매우 당당하게 행동하고 구걸이라든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카트 안에 넣어진 동전으로 먹을 것을 사고 주변 청소를 깨끗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공항 직원들에게 호감을 샀습니다.
직원들도 친절하게 대해주고 나세리의 옷을 무상으로 세탁해 주었습니다.
그의 일기가 『The Terminal Man』으로 출간되고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을 때, 그는 드림웍스로부터 30만 달러를 개런티로 받았고 공항 직원들에게 한턱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공항에서 살기도 했지만, 공항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세리 씨가 18년 동안이나 공항이라는 환경 안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공항이 깨끗하도록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공항 직원들에게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먹고 입고 자고 할 수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세리 씨만큼 공항이라는 본성과 가까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곳에 머물며 그곳의 법칙을 따르다보니 그곳의 본성을 닮게 된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면 그 사람은 더는 생명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모든 생명은 부모로부터 옵니다.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해치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집에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습니다.
부모의 법은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부모 안에 머물 수 있고 계속 양식을 먹으며 생명을 보존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중략)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0.12)
사랑하라는 말은 생명을 내어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다음 생명을 내어주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십니다.
사랑과 생명과 양식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부모만이 사랑의 법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창조자시고 우리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계명이, 부모가 자녀에게 요구하는 계명과 같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부모의 계명이란 생명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본성을 닮아 우리 또한 새로운 창조자가 되어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만이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 안에서 성장하여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6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요한 15,9-11
너무도 멀리 돌고 돌아서
요즘 농부들의 심정과 고초를 많이 헤아리고 있습니다.
농부들이 이른 봄부터 허리가 휘어지도록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립니다.
한 여름의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 몇 시간이고 서서 구슬땀을 흘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농작물들은 주인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며 수시로 찾아갑니다.
마치 자식 키우는 것 같습니다.
눈만 뜨면 걱정입니다. 잠을 자도 걱정입니다.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애쓰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오랜 노고를 기꺼이 참아내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가장 큰 기대는 무엇입니까?
풍성한 수확입니다. 알찬 결실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 왠지 손해 본다는 느낌 드실 때가 많을 것입니다.
억울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안가면 그만인데도 꿀맛 같은 새벽잠을 포기하십니다.
힘겨운 몸을 이끌고 그 꼭두새벽부터 본당으로 향합니다.
봉헌금도 내야지요, 교무금도 내야지요,
2차 헌금은 또 왜 그리 잦습니까?
‘재수 없으면’ 신축본당으로 떨어져 뭉칫돈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때로 야단맞아가며 내 시간 허비해가며 봉사활동에 전념하지만 그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습니다.
왠지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손해 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언젠가 주님 대전에서 거두게 될 풍성한 영적 수확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분께서 우리 각자에게 넘치도록 베푸실 영원한 상급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풍성한 영혼의 열매, 신앙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비결 한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그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너무 쉬워 웃음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비결은 우리가 그분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그분 말씀을 우리 마음 안에 고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멀리 돌고 돌아서 제 자리로 돌아와서 보니
절실히 와 닿는 깨달음 한 가지가 있더군요.
연약한 우리이기에, 흔들리는 우리이기에 가끔씩 우리가 그분을 떠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 위안으로 다가오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떠나간 순간에도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묵묵히 침묵하십니다.
빨리 돌아서기만을 간절히 고대하십니다.
자꾸만 그분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우리, 자꾸만 엉뚱한 길로 접어드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우리의 힘보다 훨씬 더 센 힘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5월 6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사랑을 배웁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사랑은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생경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흐르는 유대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지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주님 사랑에 머무르는 이는 사랑에 흠뻑 젖어들어 사랑에 물들어 갑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닮아가다가 그 자신이 사랑이 되지요. 인위적으로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사랑이 그에게서 자연스레 흘러나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영혼은 사랑밖에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기쁨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누군가 사랑하고 있다면 침울하거나 부정적이기 어렵지요. 진짜 사랑이라면 그렇습니다. 혹 자기중심적이거나 계산적인 욕정을 사랑이라 착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사랑의 허울만 그럴듯하게 흉내낸 것일 뿐이어서 진정한 기쁨을 자아낼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시어서 기쁨의 존재십니다. 아드님도 마찬가지시지요. 그 사랑이 실패만 거듭하는 듯 보이고 번번이 배척과 거부를 당하는 외짝 사랑이어도 그분에게서 기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결과로 성취를 가늠하지 않고, 이미 사랑한 만큼이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부 하느님도 기쁘시고,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시는 성자 예수님도 늘 기쁘십니다.
제1독서는 사도들이 신앙의 길에 들어선 이민족들을 위해 어떻게 그 사랑을 반영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었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사도 15,10)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할례 등의 전통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담대히 질문을 던집니다. 이 말에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개인적, 공동체적 성찰이 들어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가르친 대로 열심히 하느라고 했지만 그것이 늘 버겁고 힘겨웠던 겁니다. 지키느라고 지켰지만 늘 부족과 미완의 불안, 그리고 죄의식을 안고 살았던 게지요. 베드로는 이를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심정에서 출발해 진솔히 토로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받아들여 새롭게 성부, 성자, 성령과의 만남을 시작하는 이들이 굳이 길을 되짚어 죄의식과 불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도 이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지요. 그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사도 15,19)
이제 야고보 사도가 구약 예언에 비추어 하느님의 뜻을 정리합니다. 중요한 건 이론이나 전통보다 누구나 더 원활하고 기쁘게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기존의 기득권이 텃세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사도 17,9)신 하느님의 사랑의 의중을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네."(영성체송)
주님은 유다인만을 위한 신이 아니고, 구원 역시 한 민족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고 구원을 위한 성자의 희생제사도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출신과 인종, 배경과 지위, 가진 바가 우리와 다른 이들 역시 주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진정 기쁘고 감사하다면, 우리는 사랑하고 있는 것 맞습니다. 이 기쁨은 사랑이신 주님과 닮아가는 이에게 베푸신 은총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사랑이신 주님께 머물러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주님의 기쁨을 공유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무리 작고 미소해 보이는 사랑이라도 모든 사랑은 하느님을 담고 하느님을 닮아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하답니다. 사랑이 되어 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