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팔을 앞으로 똑바로 뻗어봐.”
“팔을 뻗은 채로 몸을 한 바퀴 돌려봐.”
“그 자리에서 발을 움직이지 말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까 돌아보라구,
컴퍼스처럼 말이야.”
“지금 네 주먹이 그린 원의 크기가 대충 너란 인간의 크기다. 그 원 안에 꼼짝 않고 앉아서,
손 닿는 범위 안에 있는 것에만 손을 내밀고
가만히 있으면 넌 아무 상처 없이 안전하게 살 수 있다.“
그런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따분합니다.“
"권투란 자기의 원을 자기 주먹으로 뚫고
나가 원 밖에서 무언가를 빼앗아오고자 하는 행위다.
원 밖에는 강력한 놈들도 잔뜩 있어.
빼앗아오기는커녕 상대방이 네 놈의 원 속으로
쳐들어와 소중한 것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
게다가 당연한 일이지만 얻어맞으면 아플 것이고,
상대방을 때리는 것도 아픈 일이다.
아니 무엇보다 서로 주먹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도 권투를 배우고 싶으냐?
원 안에 가만히 있는 편이 편하고 좋을 텐데.“
”배울 겁니다.“
ㅡ플라이대디
-가네시로 가즈키 [GO]
루져
루져 억지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오래 사귀었던 여자친구에게 차인 후 고향인 인천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 친구와 소주 한잔을 하면서 루져 두 글자가 머리 속을 둥둥 떠다녔다.
오랜만에 고향에 왔다는 핑계로 중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연락해 술 얻어먹는 일이 슬슬 실증나고 있을 무렵.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다가
갑자기 체육관을 찾게 되었다.
사실 ‘일’이 아니더라도 삶을 사는 데 일정한 루틴이 하나정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꾸준히 해왔던 와중이었다.
“자네는 운동하기 위해 여기에 온 사람이야”
정우관에 등록한 첫날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정우관 관원분들은 사범님들의 친절한 상담을 통해 체육관을 안내받는데, 그날따라 사범님들이 단체로 자리를 비우셨고 나는 관장님과 꽤나 오랜시간 대면을 하게 되었다.
운동경험이 있는지 물어보시는 관장님께 건성으로
“그냥 어쩌다보니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한 나에게 관장님이 말씀하셨다.
“여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그냥 거쳐가지만
자네는 운동하기 위해 여기 온 사람이야“
나는 잠시 멍해졌다. 대답이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색다른 영업방식인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잠깐 스쳤지만 그러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관장님에 말씀에 동의하였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가장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것을 관장님이 본능적으로 느끼신 걸까?
꽤나 오랜 기간 정우관을 다니고 있고 수 없이 많이 관장님 수업을 들으면서도 그 때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아직도 묻지 못했다.
망했다는 말과 온갖 부정적인 단어를 입에 달고 살던 나에게 친구녀석이 위로랍시고 물어봤다 네가 밑바닥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냐고.
“너 같은 놈한테 술 얻어먹고 있으니까 망한거지.”
라고 웃으며 술잔을 부딪혔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이 인생에서 밑바닥을 치게 되면 이상하게 거기서 오는 희열이 있다.
여기서 더 망해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니 어떠한 노력이라도 할 수 있는 몸 상태.
정우관에 처음 등록 했을 당시에 내가 그런 상태였다.
힘들다, 강해지고 싶다.
운동하는 딱 두 세 시간 동안 힘들다와 강해지고 싶다는
단 두 단어만 머릿속에 남는 게 좋았다.
정우관에 도착하기 전까지 매듭짓지 못한 많은 생각들 때문에 괴롭다가도 집중해서 운동이 끝날 때 쯤이면 딱 저 두 단어 힘들다, 강해지고 싶다 만 남는다.
결국 운동전에 내가 했던 많은 생각들은 전부 쓸데없는 고민들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아니 어떤 생각을 하면서 체육관에 왔는지도 기억이 안날정도로.
친구들이 묻는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너 좀비트립 나갈꺼냐고?
열심히 하는 건 사실이다. 하루에 2~3시간씩 수업을 듣고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니까.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는 아무리 내가 운동신경이 떨어져도 중간은 하겠지 라고 생각해왔는데, 지금 마인드로는 체육관에서 중간만 할 수 있다면 영혼도 팔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도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고 체육관을 나갔다. 지금도 피치못할 사정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면 내 생활 루틴이 정우관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5년차가 다 되어간다.
하지만 아직도 킥린이라고 확신한다.
건강하려 시작한 운동인데 운동을 시작하고 아픈 곳도 많다.
왼쪽 킥만 하면 아팠던 발목과 고관절은
이제 아무런 동작을 하지 않아도 아프다.
병원도 많이 다녔지만 나아질 기미도 없고
의사 선생님은 쉬라는 말만 반복적으로 하신다.
통증이 유독 심한 날에 수업을 못듣게 되면 기분이 우울하다. 부상이 더 심해질까봐 겁이 나서 동작도 엉망이다. 그럼에도 가끔 고관절과 발목 컨디션이 좋아서 평소에 안되던 동작이 잘되면 그 몇 번의 쾌감이 그동안의 모든 통증과 우울함을 가볍게 누른다.
사실 난 투기종목운동을 처음 해본 것은 아니다.
복싱과 주짓수도 20대 때 어느정도 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복싱관장님이 줄넘기만 시키고 가끔 본인 기분 좋을 때만 기술을 가르쳐주셔서 욕심에 비해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고, 주짓수 체육관은 요즘처럼 인기가 많아지기 한참 전이라 관원이 많지 않아서 폐관했었다.
배나온 사람은 지도자 하면 안된다.
언젠가 관장님이 하신 말씀이다.
7시부 수업을 듣는 관원들은 알겠지만,
관장님께서는 학창시절 담임선생님처럼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
사실 텍스트로는 특별하지 않은 말이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인데도 관장님이 말씀을 하시면 관장님의 위상과 수업 중간중간 보여주시는 실력, 또 나이가 가늠 되지 않는 완벽한 몸을 보면 그 말의 무게가 몇 배 무거워진다.
성실히 수년간 체육관을 다닌 내게 훈장은
늘 제자리인 킥복싱 실력이 아니라 이제는 제법 선명해진 복근에 王자와 단단해진 대흉근인 것 같다.
피곤한 날이나 운동에 실증이 난 날이라도 팔굽혀펴기와 플랭크, 풀업까지 100개는 채웠다.
아무리 능력이 없는 사람이어도 성실하면 중간을 간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들만 대단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어도 오랫동안 꾸준히 그 일을 해온 사람도 못지않게 대단하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내게는 저 세가지 운동이 그랬다.
화려한 킥 스킬도 묵직한 주먹파워도 없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들로 나를 무장했다.
얼마 전 처음으로 조사범님 경기를 직관갔다. 하루 전체를 소비하는 일정이라 꽤나 부담스러웠을 텐데도 수많은 관원분들이 함께였다. 영상을 통해 수없이 봐왔는데 막상 직접 마주보게된 경기장은 감동이었다.
유튜브를 통해 볼 때 연출적으로 아쉽다고 느꼈던
선수등장을 보는 데도 살짝 눈물이 고였다.
상투적인 표현이겠지만 무대 위 모든 선수들의 동작하나하나에서 삶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시합에서 지려고 링에 올라가는
선수는 없겠지만 항상 패자는 존재 한다.
이기는 경험은 중요하다.
지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본인이 시합이 끝나도
승리와 패배를 구분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한번 이겨본 사람만 언젠가 다시 이길 수 있는 거랬다. 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라고.
루져,
LOSER 외톨이
센 척하는 겁쟁이
못된 양아치
거울 속에 넌
JUST A LOSER
좋아하지 않는 그룹의 노래이지만 운동 시작하기 전 딱 내 상황을 나타내는 가사다.
그래서 정우관 때문에, 킥복싱 때문에 뭐가 변했냐고 묻는다면 사실 변한 건 없다.
지금도 계속 끊임없이 모든 일에서
패배만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끝까지 버틸수 있는 몸을 만들자는 것이다.
딱 한번 뿐이라도 승리할 때까지.
승리가 더 익숙해 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