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돌의 재발견
10여 년 전에 숫돌을 사 놓고 별로 쓰지 않다가 요즘은 손톱을 가는 데 쓰고 있으니 내게는 다시 석기시대가 도래한 것인가. 2023년 8월 12일 오후,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시 생각해 봐도 뜻밖의 용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숫돌에 손톱을 갈고 그 경험담을 한 편 글로 쓴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긴 내가 처음인지도 모른다. 뭐 큰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글까지… 하겠지만 내게는 신선한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불어 수필 소재가 끝없이 확장될 수 있음에 답답함이 풀린다.
칼을 간다고 하면 복수를 준비한다는 뜻인데 칼 대신 손톱을 갈고 있으니 무엇을 준비하는 것일까. 어쨌든 남을 할퀴려고 손톱을 뾰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끝을 갈아 긁혀도 상처가 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이니 앞으로 좋은 일거리가 많이 생길 것이고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누구나 손톱깎이로 손톱을 깎고 나면 예리하게 잘라진 열 손톱의 끝을 갈아서 다듬어 주어야 한다. 전에는 손톱 줄을 썼는데 어딘가 가볍게 갈리며 울리는 촉감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어디 두었는지 손톱 줄을 한참 찾다가 불현듯 숫돌을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나 마침내 긴 직륙면체의 돌덩어리, 숫돌을 찾아내 싱크대 쪽에 갖다 놓았다. 연한 녹회색 자연석을 잘라 만든 것인데 깨진 부분과 갈라진 금도 그대로 놔 둔 거친 물건이었지만 칼 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문제될 건 없었다.
칼을 갈지 않아 거친 면을 찾아 물을 묻혀 가며 손톱을 갈아 보니 제격이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아주 부드렵게 갈렸다. 숫돌을 오른손 왼손으로 번갈아 들고 엄지와 검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 끝을 이어 이응 모양을 만들고 가니 한 손가락만으로 가는 것 보다 누르는 힘에 안정감이 있어 더 잘 갈리었다. 마치 숫돌에 칼을 갈 때 손으로 잡은 칼이 흔들리지 않고 숫돌과 칼의 각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하고 적당한 힘을 주어 마찰력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과 같았다. 쓰다듬어 보고 수도를 틀어 씻기도 하면서 다시 갈곤 하는데 기구가 무거운 돌덩어리여서 경박한 느낌이 전혀 없다.
버려지다시피 했던 숫돌을 찾아 잘 어울리지 않는 곳, 싱크대 옆에 갖다 놓고 지내다 보니 눈에 좀 거슬리기도 했지만 그놈에게 맡길 일이 몇 가지 더 생겼다. 바로 연필 심 갈기이다. 깎기는 이른데 무뎌진 연필심은 몇 번만 갈면 한동안 쓸 수 있어 편리하다. 그리고 계란 껍질 깨기였다. 접시 테두리 같은 것에 비해 모서리가 예리해서 한 번만 탁 치면 아주 쉽게 계란 껍질을 둘로 가를 수 있다. 또 숫돌은 계란에 비해 워낙 무겁기 때문에 계란을 깰 때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라는 속담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우리집 계란은 임자를 만난 게다. 흰자위가 좀 묻을 수 있지만 가끔 물로 닦아 주면 그만이다.
오늘 아침에는 오랜만에 숫돌이 본업을 찾았다. 손톱을 정리하고 나서 식칼이 너무 무디다는 생각이 들어 갈기 시작한 것이다. 한동안 식칼 가까이에서 지내게 되면서 숫돌이 그동안 품고 지내던, 칼을 향한 굳은 의지와 열정이 이심전심으로 내게 전해졌는지도 모른다. 역시 숫돌은 온몸으로 칼을 갈 때 신명이 나는 모양이다. 넓은 면을 다 사용하니 미세하게 칼 갈리는 소리가 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찰에 의해 만들어진, 검은빛을 띄는 금속과 돌의 가루가 물과 섞이면서 숫돌 표면을 덮기 시작했다. 갈고 물을 뿌려 씻기를 반복하면서 무뎌진 칼날이 설 때를 기다렸다. 칼을 다 갈고 나니 어울리지 않는 곳에 놓여 있는 숫돌이지만 자기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흡족한 미소를 띄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질감은 여전하다. 오늘은 주방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숫돌 밑에 작은 수건 하나를 깔아 주어야겠다.
첫댓글 나이 드니 발톱 무좀으로 안해 엄지 발톱이 무척 두꺼워 지고 그냥 일반 손톱 깍이로는
감당이 안 돼 특별한 손톱 깍이를 사용합니다
한 달 몇번씩 물에 불겨 작업을 따로 해야 견뎌 낼 수 있어 발톱 깍는 날을 정해
큰 작업을 하고있습니다
오호라, 숫돌의 응용이 좋네요. 묵묵히 기다려온 숫돌의 활약이 많아지겠네요. 강한 것은 영원한 것 같습니다. 호호호~
풋볼님 Evergreen님, 방문 감사!
수필은 유머가 좀 있어야 하는데 속담 활용도 한가지 방법입니다. 사전을 많이 찾아 보면서 국어 공부 열심히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