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에선 무슨 일이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
서울에도 제일 끝 동내에다 작은 약국을 내셨다. 수 십 여명의 직원을 두셨던 사장님이 약국 아저씨가
되여, 박카스 한 병, 활명수 한 병을 사러오는 손님에게
“ 어서 오세요, 안녕이 가세요” 하며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아버지가 가엾어서 눈물이 났다.
처음에, 우리가족은 살림집 조차도 마련치 못할 형편이라서 열 평 남짓 되는 약국에 딸린
작은 골방에서 세 식구가 살게 되였다. 아버지는 새벽 6시에
골방 문을 열고 가게로 나가셨다. 그 때는 통행 금지라는 것이 있어,
밤 12시 부터 6시까지는 잠을 자야 했는데. 모든 것을 잃어버린 궁핍함에서 벗어 나려는 듯 아버지는 휴일도 없이 일을 하셨다. 사업 할 땐 하루가 멀다 하며 술을 마시며 통행금지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퇴근하셨었는데, 아버지 부도 후에 함께 술 마셨던 친구들이 등을 보였다며, 만나지도
않고 연락도 끊고 외출도 하지 않고 일만 하셨다.
12시에 잠자리에 들어도 연탄까스 중독 환자 때문에 한 두 번은 일어나야 했다. 그때에는
의료보험도 없었고, 특별한 계층만 빼고는 모두가 어렵게 살던 때라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참아가며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됐을 때서야 약국 문을 두두 렸다. 지금은 대형 약국들이 손님을 찾아가는
형편 이지만 그 시절에는 서울이나 큰 도시에나 약국이 있을 뿐 지방에는 약방이나
약포가 있었다. 언젠가 티비에서 보니까. 몇 사람 살지 않는
시골에도 보건소가 있고 그나마 없는 곳에는 보건소 의사 선생님이 왕진도 해 주시는 것 같다. 더구나
놀랐던 것은 섬 마을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하니까 헬기로 이송 하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상상 할 수도 없게 변해버린 현실에 으쓱해 진다. 연탄까스 중독자를 업고 오거나 동치미 국물 한 사발
들이키고서 스스로 기어 오기도 하였다. 가난한 시절에는 참을 성도 대단하였나 보다. 지금처럼 신용카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급할 때 쓰려는 비상금이
있을리 도 없는 일이라 , 때때로 약값대신 물건을 들고 오기도 하였다.
지금처럼 전자제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값나가는 옷도 없기에 돈 대신 들고 오는 것은 남자 코트였다.
아마도 그 집에서 남자외투는 유일한 명품 급의 사치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옷을 들고 오거나
외상으로 달라는 사람들을 그냥 돌려 보내지 않으셨다. 나중에 여유 생기면 가져 오라며 정성을 다해 약을
지어 주셨는데, 약을 가져간 사람 중에는 훗날 와서 감사했다는 인사와 돈을 주고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영영 무 소식인 사람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약 처방이 잘 듣는다고 소문이 나서 손님이 많았다. 십 수년을 고치지 못했던 사람도 아버지의 약을 복용하고는 깨끗하게 완쾌하고 직장까지 얻었다는 소문들이 퍼져., 멀리 부산에서 까지 몰려왔다. 지금은 부산이라고 해도 서울에서
아침 먹고 부산에서 볼일보고 점심 먹고 떠나, 저녁은 서울 집에 와서 먹는 다고 한다 지만 그때는 서울과
부산은 끝에서 끝이라는 생각 이였지만 아버지의 족집게 약 처방은 부산까지 왕래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가족은 불과 1년 만에 작은 골방 살이 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였다. 방 3개짜리 집으로 이사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피나는 노력으로 만들어 진 결과였지만 철없는 나는 감사하다는 생각보다. 이제는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방에서 엄마아버지 하고 웅크리고 자지 않아도 된 것이 좋을 뿐 이였다. 나 혼자만의 방도 갖게 되였고 넓은 마당가장자리에는 넝쿨장미도 올렸고 꽃밭에는 모란과 백합도 심었다. 대문 옆 강아지 집에는 별로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대문 앞을 서성거리지도 못하게 하는 충직한 개도 있었다. 그때 우리 가족은 그 집으로 만족했어야 했는데,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던 옛 어른들 말씀처럼 욕심을 부리고 만족하지 않았다. 약국은 더욱 손님이 넘쳐났고 돈은 싸여 갔다. 돈은 싸였지만 아버지는 절약하고 아끼셨다. 밥 반찬도 2~3가지 이상은 하지 못하게 하셨고 아버지의 옷은 겨울 옷과 여름옷으로만 나눠졌다. 사업 실패 후에 등졌던 친구들에게 받은 상처가 기분파였던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나 보다. 그렇지만 당신 스스로에게는 절약을 강요 하셨지만, 어려운 이웃은
몰라라 하지 않고 뚝방의 어느 새댁이 아기를 낳고 굶고 있다는 소리에, 미역과 쌀을 사서 엄마에게 들려
보내기도 하셨다. 병들어 누워있다는 소식에는 약봉지를 들고 뛰여 가셨으니 나뿐 구두쇠는 결코 아니셨다. 아끼고 절약하느라고 아버지의 낡은 바지길이는 자꾸만 짧아 졌지만 마음만은 넉넉하셨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병원에서 돌아가시고 약국 앞에서 마지막 노재를 지내는데 온 동내 사람들이 몰려와 가족처럼
울어 주었다. 파출소에서 까지 나와 정리를 할 정도였으니 아버지의 나눔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 박카스 한 병 선뜻 마시지 않고 일요일도 없이 일만하시더니
말죽거리가 개발 될 것을 예감하셨는지 말죽거리 어떤 집을 보고 오라고 하였다. 엄마와 나는 버스를 몇
번 씩 갈아타고 돌길을 걷고 걸어서 그 집에 도착해 보니 어이 없었다. 99칸짜리 어느 양반집 이였다. 사람도 살고 있지 않는 집은 전설의 고향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근처에
집도 없고 풀이 무성한 그 집은 대문이 너 뎃 게나 있었다. 대 낮인데도 어두 컴컴 했고 기왓장 아래에서는
곡 소리가 날것도 같았다. 엄마랑 나는 혼이 반쯤 나간 상태로 그 집에서 도망쳤다 .아버지는 그 집 상태를 보고 오라는 것이 아니고 땅을 보고 오라는 것 이였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나와 엄마는
손사래를 쳤던 것이다. 사실 그 집을 둘러싸고 있던 땅의 평수를 보면 아파트 한동은 넉넉히 들어 섰을
법한데 그때 아버지 말씀대로 했으면 지금쯤은 나도 강남 사모님이 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땅투기를 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니고 처자식을 다시는 고생시키지 않으려는 가장으로서의 마음 이셨다. 아내와
딸의 반대로 말죽거리 땅은 포기하고 살림집을 늘려가기로 하였다. 부동산 아저씨를 따라 새집을 보러 갔을
때. 이상스럽게도 섬찍한 느낌을 받았다. 단층집 이였지만
계단이 7~8개로 높혀 지어 있었기에 밝고 시원스러웠는데 버려진 절간 같았다. 하늘을 온통 끌어 안고 있었는데도 불길한 기운을 품고 있는 듯도 같아 보였다.
그런 으스스한 느낌은 끔찍한 일을 겪으며 알게 되였다.
동내 감초인 엄마가 혈압으로
쓰러지더니 심장판막으로 집과 병원을 오가게 되였다. 행복은 가고 불행이 시작하게 된 것인데 불행이란
놈은 떼를 지어 온다고 했던가? 어느
날 엄마를 병원에 입원 시키고 집에 왔는데 나의 한쪽 다리가 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약을 지어 주셨지만
점점 더 심각해졌다. 병명도 이유도 몰랐으니 그저 엄마 병원에 오고 가느라고 힘들어서 그럴 것 이라는
생각으로 몇 일을 보냈다. 별일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아버지도 불길한 마음을 안고 나를 데리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진단결과는 파상풍이라고
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아 다리를 자를 수도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벼락맞은 얼굴에 분노를 가득 담으시고
택시에 나를 싣고 달렸다. 아버지는 결혼도 하지 않은 외동딸의 다리를 자를지도 모른다는 말에 이성을
잃으셨던 것이다. 변두리에 아버지친구가 원장으로 있는 병원으로 갔는데 그 병원은 승강기가 없어서 4층까지 아버지가 나를 업고 올라가셨다. 나는 아버지 등에 업혀서
아버지 손에 눌린 다리가 아프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는데 내 다리의 고통보다, 아버지의 수 백배의 좌절은
보지 못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아프게 했고 아버지에게 죄송 스러워 졌다.
그 병원에서 치료가 잘되어 60넘은 나이인데도 너댓 정거장은 걸어서 다니고 있다. 심지어는 왼쪽
다리였는지 오른쪽 다리 였는지 조차도 모른 체 40년을 살고 있다. 아마도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와 사랑이 아니 였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 모든 것이 그 집으로
이사한 후에 일어났으니 엄마는 심장 병으로 입 퇴원을 거듭했고 나는 이유 없이 파상풍에 걸렸고 일하는 언니마저 엄마의 폐물을 훔쳐 도망치고 아내와 딸이 삶의 모두였던 아버지는 엄청난
불행을 감당치 못하고 쓰러지셨다. 약국을 찾은 손님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간 아버지는 3일만에 지하 영안실로 내려가셨다. 각자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내와
딸의 배웅도 없이 아버지 혼자 가신 것이다. 아버지 장례를 모시고 돌아온 얼마 후에 엄마마저 아버지를
따라 가셨으니.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건들이 그 집에서 1년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가족이라야 단 3식구 였는데 그 집에
남겨진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남겨진 나는 죽을 만큼 고통 스러웠지만 꺽꺽 거리면서도 살아가고 있었다. 그땐 아프다는 말 조차도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아서 눈물도 숨겨야 했다.
숨만 쉬고 있던 어느 날, 이모 할머니가 오셨는데 유명하다는 무속인도 함께 왔다. 무속인은 다짜고짜 삼살 오방“ 으로 왔구만,,, 했다. 그것이 뭔 소린지 몰라 다가 앉으니 우리 가족의 불행은 그 집에서 비롯됐다며
그 집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 집에 처음 들어 섰을 때 느꼈던 불길함이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할머니가 무속인을 데리고 오면서 우리 집 불행을 알게 했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는 그때 모든 것을 잃었었는데도 두려움 이란 것이 남아 있었으니 삶이란 놈은
참으로 징그럽고 불가사의 한 것만 같다. 만약에 지금 나에게 천만금을 줄 태니까 그날의 불행을 다시
한번 겪어 보라고 한다면 나는, 1초의 망서림도 없이 “싫어요, 않되요, 절대로 못합니다. 하며
도망칠 것이다. 부모님이 몆 일 사이에 돌아가셨다는 우리 집의 새로운 이름은 “흉가” 로 불려지게 되였다 .아버지가 바짓단을 접어 입으시며
절약하고 아껴서 마련했던 집을 헐값에 팔아 버리고 먼지 까지도 털어 버리고 그 집에서 탈출했다. 그랬기에
난 그 집에서 일어났던 끔찍했던 불행을 잊은 줄 알았다. 아니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내 심장 깊은 곳에서는 그 집과 함께 내 부모가 울고 있었다. 신께서는 망각이란 선물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는데, 수 십 년의 뒤안길에서 되색임 질을 하고 있다. 그 때 그 집에선,,,
첫댓글 춘몽씨도 많은 일을 겪으셨군요. 얼굴에선 그런 기운이 전혀 없어 행복한 삶을 이어오신 줄 알았지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즐겁게 사시니 얼마나 좋아요.
네 인간도 숙성되기도 하는가 봅니다. ㅎㅎ즐겁게 지내려고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ㅎㅎ
울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나만 가엽어 집니다, 그쵸?
인생은 그 자체로서 한 편의 드라마라는 걸 실감합니다. 긴 글, 잘 읽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소설책 을 가슴에 품고 살다 간다지요,,,하기는 되색임질 할 추억이 없는 삶은 죽은 시간들
이겠내요.눈물이흐르면 씁쓸한 미소로 닦아내며 ,,그런것이 인간 소설책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예전에 TV문학관을 보는듯 눈에 선하네요~~ 역시 신작가님의 든든함이 이런 저력이 있으셨기에 바람에도 끄덕 없으시군요
든든한 저력을 골라서 겪어낼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이런 말이 있지요?
모든것은 지나간다. 그래요 모든 고통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것 같아요. 그래서 살만한 "삶 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