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코코 양식
18세기 초에 파리에서 시작하여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양식으로서, 미술사학에서 루이 15세 때에 특징적으로 나타난 미술 사조라고 말한다.
18세기의 프랑스는 전쟁과 식량 부족, 재정 위기가 겹쳤다. 결국은 혁명으로 한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 궁정 문화는 변함없이 이어지면서 전 유럽으로 확산시켰다.
이 시기에 왜 새로운 미술 사조가 유행하였는지는 뚜렷한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미술사학자들은 화가들이 정신적인 자유 의식을 누렸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미술의 ‘무정부 주의’ 때문이라고도 한다.
1720년대 까지는 모든 미술 장르들이 프랑스에서 유행하였다. 이태리 양식, 귀족적인 장르, 루벤스와 플랑드로 양식들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 루이 15세가 통치하면서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장식적이고 섬세한 것을 좋아하였다. 루이 14세의 근엄한 분위기도 연애와 사랑이 침투하면서 무너뜨렸다.
사회 분위기는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불리는 퐁파마루 후작 부인의 살롱을 통하여 문화 예술인들이 모여들면서 새로운 사회 풍조를 만들어 갔다. 미술품 수집도 유행하였다. 미술의 양식도 귀족 문화, 살롱 문화에 맞게 색채가 풍부해지고, 심약한 장식, 깊은 의미를 가지는 주제의 미술이 아니라, 가벼운 소품이 유행하였다. 시정이 넘치는 주제, 목가적이고, 우아함이 넘치며, 명랑함, 온순함이 프랑스적 예술 양식이 되었다.
18세기는 계몽사상이 퍼져나간 시대이다. 뉴톤의 과학주의가 승리를 거둔 시대였다. 자연히 종교의 위상을 추락하여 거대하고, 무거운 주제의 그림은 주춤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회화도 장식이라는 하찮은 분야로 추락했고, 화가들도 장식성을 강조하면서 아카데미 미술과는 다른 방향의 그림을 그렸다.
이런 그림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궁정에서 일어나서 이탈리와 독일로 유행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은 그렇게 심하게 유행하지는 않았고, 영국에서는 초상화에 밀려서 상륙하지 못하였다.
사실은 아카데미의 전통 미술에서 비난을 퍼부으므로 당시에 자랑스러워 할 미술은 아니었다. 푸생이 신화에 몰두하였다면 이 시대의 프랑스에서는 역사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7세기 말에는 푸생 화파와 루벤스 화파 계열이 서로 경쟁하면서 유행하였다. 루벤스를 지지하는 로체 드 필레가 아카데미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색채를 화려하게 사용하는 루벤스 화파가 프랑스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로코코 양식이 일어날 바탕을 마련하였다.
더욱이 마담 퐁파마르 후작 부인이 와토를 후원하므로 미술은 좀 더 부드러워 졌다. 퐁파마르는 계몽주의 학자들을 후원하므로 카톨릭과 귀족들은 싫어 하였다. 그녀가 죽었을 때 ‘여기 20세 까지는 처녀로 살았고, 15년은 창녀로, 나머지 7년은 뚜쟁이로 살다간 한 여인이 잠들어 있다.“라는 묘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에 후원을 한 여인이기도 하였다.
1. 와토(1684-1721)
와토는 클로드 기요라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배웠다. 기요는 이태리 출신으로 극단을 따라다니면서 무대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간판 그림도 그렸으나 대체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와토는 어릴 때부터 따라 다니면서 기요를 도와서 무대 그림을 밐바닥에서 배웠고, 허드렛 일도 하였다. 또 파티에 거는 장식 그림도 그렸다. 어릴 때부터 이 두 양식의 그림을 익혔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고객에게 꽤나 팔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색상이나 여러 가지에서 어색한 부분이 많다.
그가 그린 두 유형 그림의 하나는 풍속화이다. 다른 하나는 젊은 남, 녀가 춤추면서 연회를 즐기는 장면이었다. 이런 그림을 페트 갈랑트(fete gakante)라고 하여 우아한 연회라고 말한다. 이것은 루이 15세 때의 살롱 문화와 함께 귀족 문화를 보여주는 양식이다. 이 양식이 유행한 잠시 동안을 로코코 양식이라고 말한다. 정식 미술사에서는 로코코 양식을 따로 분류하지 않고 고전주의 양식으로 말한다. 그는 루벤스의 그림을 수도 없이 보면서 화려한 색채와 붓질을 배웠다.
와또는 로코코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는다.
그는 로마에 가고 싶어서 로마 유학을 보내주는 아카데미 공모전 프리 드 롬에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그림은 아카데미에서 받아들인 ‘시테라 섬의 순례’를 그린 후였다. 이 그림으로 그를 공식적으로 ‘연애 파티 화가’라는 간판을 달아주었다. 이것은 와토가 화가로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엿다. 그의 미술 양식을 ‘페테 갈랑테’라고 한다.
그의 그림은
1) 인물은 작게 그리고, 풍경의 조연처럼 그렸다.
2) 색상이 화려해지고, 빛이 난다.
3) 자연과 환상을 혼합하여 색칠한 풍경화는 후대의 풍경화 의 길잡이다.
4) 배우를 많이 그렸다.
5) 그는 정식으로 미술 공부를 하지 못해서 색을 다루는 법 이 미숙하다.
색칠을 너무 얇게, 두텁게 하므로 아카데미 기준에 어긋나서 비난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6) 그러나 “제르생의간판(1720”에는 새로운 모색도 보인다.
그러나 일년 뒤에 그가 죽는다.
1745년 경이 되면 그의 그림도 유행에서 밀려나서 사라진다고 한다.(유행은 신고전주의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 그러나 미술 양식이 로코코에서 신고전주의가 선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당 기간 서로 중복하면서 나타난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도 똑 같은 양상을 보인다.
와토가 로코코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양식으로 표현적인 그린 그의 그림이 아카데미에서 받아주므로 (시테라 섬의 순례) 그의 그림도 아카데미에서 역사화로 인정 받았다. 그는 코레지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연극 무대를 많이 그린 것이 특징이다.
그의 무대 그림 중에 '삐에로'를 그린 것은 밑바닥에 인간의 슬픔이 녹아있는 표현을 한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미술사에서는 피에로 길로의 그림으로 그의 존재를 인정받는다.
2. 프랑수아 부세((Francois Boucher 1703-1770)
아버지는 간판이나, 마차 장식을 그리는 하류 화가였다. 허드레 그림이나 그리면서 힘들게 생활하였다. 그는 와토의 '연애 그림'보다 더 품격이 낮다는 평가를 받는 그림을 그렸다. 신화에서 소재를 취한 '목동의 연애' 따위를 그렸다. 크기가 작은 신화 그림, 신화를 소재로 한 춘화도 그렸다.
그는 퐁파두르 부인의 총애를 받고 그의 초상화도 그렸다. 그의 그림을 두고 귀족취향적이고, 로코코적이라고 말한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은 작고, 귀엽고, 아름답고, 순종적인 여인상이다. 귀족 취향에 들어 맞는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