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젊은 청년은 예술가들을 좋아했다.
그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주고 자신도 같이 즐겼다.
그렇게 세월을 보냈으나 연이어 사업에 실패를 하고 좌절에 빠졌었다.
그는 어느 날 우연히 기차역 화장시레서 밑 닦을 신문지를 보았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라. 그리하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이다.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는 징검다리가 있으니 의심하지 말고 어서 와라."
많은 사람들은 이 글을 보고 징검다리가 정말 튼튼할까. 다리는 무슨 돌로 만들어졌지.
왜 중간에 있는 돌은 저렇게 생겼을까. 누가 그 다리를 놓았지 등등의 쓸데없는 고민을
한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길로 머리를 삭발하고 수행을 시작했다.
그는 스승 없이 홀로 공부했다.
수월스님 문중의 스님들과 탁발을 같이 하는데, 그 시절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랬지만
보릿고개를 넘겨야 하는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하루 종일 탁발을 해도 쌀이나 보리도 아닌, 겨우 좁쌀 한 줌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끼니를 때워야 했다.
그나마 토굴에 같이 있던 스님 한 분이 자꾸 눈치를 주는 것 같았다.
자신도 먹고 살기 힘든데 수행에 방해를 하는 것 같으니 이곳에서 떠나달라는
눈길이었다.
그렇게 산속에서 겨울을 보내고 더 이상 눈치를 참을 수가 없던 스님은 그 토굴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수행자는 부처님 경전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보러 길을 나섰다.
해인사에 당도하여 노승인 수월스님에게 옛 선사의 말씀을 듣는다.
"나에게 한 권의 경이 있는데 이는 먹과 종이로 쓴 것이 아니다.
아무리 펼쳐 보아도 한 글자도 없는 이 경은 가히 예부터 빛나고 있다."라는 말씀을 듣고
이것이 바로 마음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 길로 경을 볼 것을 접고, 다시 해인사 중봉 토굴에서 홀로 힘겨운 수행을 시작했다.
당시 봉철 스님이 있던 해인사 주지는 성철스님이고, 은사 스님은 성철스님 제자인
해암스님이다.
성철스님은 자신의 방 밑에 몇 수레 분량의 외경과 비서 등을 감추어 두고 읽고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 한 분이 성철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하고 선문을 하니 "남천홍이다."라고 성철스님이 선답을
했다.
그러면서 "이 답을 구해 오는 자는 내 방으로 와라." 하며 성철스님은 법좌에서 내려왔다.
이날 오후 봉철스님은, 남천홍이란 태극을 말한 것임을 대번에 간파하고 법의를 걸치고
성철스님에게 갔다.
봉철스님은 깍듯하게 예를 차려 삼배를 했다.
성철스님은 "무엇 때문에 왔는가?" 하니 "오고 가는 이 도리를 정년 스님께서 아십니까?"
하고 오히려 봉철스님이 반문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하신 선문에 답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하니 성철스님이 대답 대신
"누구의 제자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정말 남천홍을 아십니까?" 하고 봉철스님이 물으니 성철스님은 수좌를 불러
대번에 이놈을 끌어내라면서 호통을 쳤다.
이에 봉철스님은 마치 고약한 냄새라도 맡은 듯이 자신의 코를 쥐어 틀어막고 뒷걸음질치며 그 방을 빠져 나왔다.
다음 날 은사인 혜암스님은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봉철스님에게 절을
떠나달라고 통보했다.
그 길로 봉철스님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해인사를 나오게 되었다.
이때가 스물아홉 살이었다.
이후 승적도 없이 홀로 떠돌던 시절에 오대산 상원사 주지를 맡기도 했다.
이렇게 십여 년을 떠돌다가 조계종 내무국장으로 계시던 스님이 불러서 서울로 올라가니
이 스님은 아무 말도 없이 손을 잡아 끌고 인천 용화사로 봉철스님을 데리고 갔다.
이때 용화사에서 주석하신 분이 바로 그 유명한 전강선사였다.
전강선사는 "자네, 왜 이리도 늦게 왔는가! 잘 왔네, 어서 오게." 하시며 봉철스님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 주셨다.
이리하여 봉철스님은 승적에 올라서 정식으로 스님의 신분이 되었다.
봉철스님은 전강선사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다비와 재산 정리, 유품 정리 등등 모든 절차를
손수 다 치루셨다.
이때 전강스님의 부촉으로 봉철스님이 머리를 직접 깎아 준 이가 수원 용주사 주지스님
정호스님이다.
전강선사의 입적 후 봉철스님은 남해 향일암 토굴에서 홀로 정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국장을 하던 이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스님이 수행하기 좋은 터가
나왔으니 한번 오시라는거였다.
스님이 날을 잡아 올라가 보니 터가 법상치 않음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았다.
효심이 지극한 이의 부모가 돌아가셔서 삼년상을 치르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묘소를
돌아보았다.
이에 감복한 호랑이 한 마리가 새벽길을 다니는 이 사람을 보고 항상 소나무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 사람이 지나가면 등에 태워서 집에까지 데려다 준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기사를 보자마자 그 사람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렇게 한 가지일에 지극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은 미물의 마음도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이 바로 경상북도 풍기, 소백산에 있는 성혈사라는 절이며, 터는 그 위에 복간터라는
곳이다.
복간터에 암자를 세우고 이를 효명암이라고 지었다.
효명암에서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려고 성혈사 주지를 내놓았는데, 삼년 결사중 주지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삼년 결사에 스님은 반 년을 더하여 삼년 반을 수행하고 마침내 불법의 맥을 잇고서
다시 성혈사로 내려왔다.
그러나 효명암에서의 수행에 무리가 있었는지 냉기를 맞아 병치레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였는지 하루는 효명암에서 보낸 시간을 되새기며 자신의 자리가 아니면 빨리
접고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효명암에서는 밤이 되면 꼭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암자가 들썩거릴 정도로 울어댔다.
그러나 스님은 참선을 하면서 자꾸 자신에게로 모든 정신을 집중아여 회광반조하였다.
이후 두려움과 공포는 물러가고 공부를 하던 중이면 호랑이가 오히려 그 암자 앞을 지켰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호랑이는 그 산에서 아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성혈사에서 암자까지 오르고 내리던 밤길이 오히려 더 편하고
좋았다고 한다.
한편 수행을 마친 봉철스님은 정부에서 산중 암자를 철거하면 보상금을 준다기에 이를 철거하고 그 지원금으로 당신이 거주할 목적으로 성혈사에 세평 남짓 작은 방을 만드셨다.
이 후 봉철스님은 성혈사에서 다시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소백산의 오지인 마락리라는 곳인데 산세가 명당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주석하여 암자를 양백정사라고 이름지었다.
먼저 마락이란 마을 이름이 범상치 않은데, 일반인들은 마락을 험한 산세로 인하여
임금에게 진상품을 옮기던 많은 말들이 떨어져 죽었기에 이 마을 이름을 마락이라고
하였으나 스님은 마락을 다르게 풀이하였다.
'마'란 용마루, 산마루요,'락' 이란 말 그대로 떨어졌다는 뜻인데 ,즉 산자락은 무엇인가
백두산에서 시작된 대간을 걸쳐서 온 산마루와 태백산의 산마루 그리고 소백산의 산마루
세 곳이 이곳으로 떨어졌다고 하셨다.
하루는 앞산의 모양이 마치 포대화상을 닮아 있다고 말하니 스님은 앞산의 모양은
연꽃의 꽃잎 모양으로 각각의 산줄기가 하나의 꽃잎을 닮아 있다고 하셨다.
풍수지리상으로는 일명 이 터를 연화동천이라고 부른다.
그 우뚝 선 앞산의 봉우리 옆에는 우측으로 비슷한 크기의 봉우리가 있는데
이는 지도에도 나와 있다는 '활인봉'이다.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의 봉우리는 선사들의 가르침이 중생을 사리기도 하며
죽이기도 한다는 활인검을 연상시켰다. 아울러 정사의 뒤편에 있는 봉우리의
옛 이름은 주저리봉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주석봉이라고 불린다.
즉, 이 정사에 와서 주지로 주석하라는 의미이다.
마을 입구에는 연화동이라는 마을이 있지만 사실 이곳은 연화가 없고, 정작 연꽃이 핀
곳은 지금의 양백정사 터이다.
앞 산 그 뒤편으로는 마구령이 있고 절 뒤편으로는 주저리봉이 있다.
주저리봉은 말의 먹이인 건초더미를 주리를 틀어서 덮은 형상이고, 마구령은 말의 장식인
마구를 의미하는데 형상이 마치 말머리를 떠올리게 한다.
양백정사는 그렇게 맑은 정기를 머금은 명당으로써 수행 정진하는 데 아주 좋은 터이다.
오늘도 도인은 양백정사 연꽃의 법좌에 앉아 모든 중생에게 따스한 미소를 보내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