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23
1월2일[성 대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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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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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gnp5EyPqXo
[서울대교구 김준호 하드리아노 신부 집전(대림동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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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1년간의 전문가 양성 코스를 시작할 때가 생각납니다. 첫 시간, 참석자들이 서로를 소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한분 한분 소개될 때마다 저는 무척이나 주눅이 들었습니다.
다들 그간 쌓아온 스펙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에 비해 저는 얼마나 초라하고 일천한 지...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랬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쥐뿔도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누구요?”라며 집요하게 정체를 물어대는 유다인을 향해 세례자 요한도 비슷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 23)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 그 어떤 과장도 덧칠도 없이, 솔직하고 명쾌하게 증언한 지극히 겸손한 예언자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스스로 자신을 소개한 대로, 휘황찬란한 도심 예루살렘을 떠나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고독과 추위, 유혹과 배고픔과 싸워가면서 시종일관 맑고 깨어있는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 영적·육적 깨어있음은 세례자 요한을 용감하고 당당한 예언자로 설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 어떤 정치 세력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지도자들을 향해서도 날 선 경고장을 두려움 없이 날릴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향해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그가 혹시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단호하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나는 한낱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다.”
정신 나간 자칭 이 땅의 지도자들과, 틈만 나면 기승을 부리는 사이비 교주들의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스스로가 왕이 되고 싶습니다. 스스로를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자칭 재림 예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는 행동들을 보면 이미 왕좌에 높이 올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이 ‘혹시 이분이 왕이 아닐까?’ 기대했지만, 정확하고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나는 왕이 아니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오. 나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입니다.”
이토록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신원의식은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무리 없이 연착륙하실 수 있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 역시 때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누구냐?”라고 질문을 던질 때, 솔직하게 소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주님 자비를 힘입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주님 크신 사랑으로 인해 오늘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합니다. 저는 이 세상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외치는 광야의 소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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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xw-TqvXX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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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확연한 차이
비안코(BIANCO)는 1987년에 설립된 덴마크의 신발 브랜드입니다. 2019년 비안코는 ‘승강기’(The lift)라는 타이들의 짧은 공고를 선보였습니다.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두 남녀가 주인공입니다. 승강기에서 종종 마주치던 이들은 금세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머릿속으로는 결혼까지 상상합니다. 하지만 여자가 회사를 그만두는 날까지 두 사람은 서로 망설이다 끝내 입을 열지 못합니다. 그리고 광고의 마지막 메시지가 뜹니다. “Step out of your head(머릿속에서 걸어 나와라).”
사람 대부분은 ‘자존심’이라는 배에 타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면 나는 버틸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과감히 전진하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망망대해에 가라앉고 있는 배 위에 서서 먼 곳만 바라보는 한 남자와 같습니다.
“엄마는 항상 이런 말을 했어요.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 네가 어떤 것을 얻게 될지 결코 알 수 없거든.” 영화 ‘포레스트 검프’ 속 주인공의 말처럼 인생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맛이 없는 초콜릿이 걸릴 수 있고 맛있는 초콜릿이 걸릴 수 있습니다. 실패를 주저하다가는 맛있는 초콜릿을 결코 입에 넣어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행하려면 자존심에 타지 말고 거인의 어깨 위에 타야 합니다.
야구선수 추신수는 롯데 자이언츠 선수였던 외삼촌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야구에 입문했습니다. 이대호와 부산 수영초등학교 동기였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미국에 진출했습니다. 시애틀 매리너스 마이너리그로 시작한 그는 매년 3할이 넘는 타격과 도루도 20~30개씩 하고 홈런도 두 자릿수를 넘기는 장타도 많이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팀에서는 그를 메이저리그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같은 포지션에 메이저리그 안타왕 스즈키 이치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구선수는 최저임금 적용 대상이 아니기에 한 달에 1,000달러(약 120만 원) 정도를 겨우 벌었던 그는 식비를 아껴 아들 기저귀를 사야 했습니다. 빵에 잼을 발라 먹는 게 식사의 전부였습니다.
이렇게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마이너리그에서 7년을 버텼습니다. 그러나 그는 근력 운동과 배팅 훈련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고 코치들을 찾아다니며 더 배울 것이 없나를 찾았습니다. 결국 팀을 옮기면서 메이저리그로 승격했고 점차 주전 선수로 경기에 나서게 됩니다.
2013년에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간 총 1억 3,000만 달러(약 1,600억 원)에 계약했고, 2018년에는 현역 메이저리거 최다 연속경기 출루 기록(52경기)을 세우며 한국인 타자로는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합니다. 2020년 추신수의 연봉은 팀 내 최고액인 2,100만 달러(약 259억 원)이었습니다.
그가 메이저리그로 호출받고 첫 게임에 들어섰을 때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아내가 그 경기를 TV로 봤다. 2회부턴가 3회부턴가 더그아웃 카메라에 내 모습이 잡혔다더라. 내가 장갑 끼고, 방망이 쥐고, 헬멧도 쓰고 감독 옆에 앉아 있었다. 감독이 누군가 대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준비된 상태로 눈에 띄도록. 사실 메이저리그에서 5회 이전에는 대타 안 쓰지 않나. 그런데도 계속 그러고 있었다. 아내가 그거 보고 마음이 매우 아팠다고 했다.”
추신수는 그날 경게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는 기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은 운이 좋은 케이스가 맞다. 하지만 그 운을 잡으려면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갑 끼고, 헬멧 쓰고 감독 옆에 앉아 있었다. 기회는 1년 뒤, 어쩌면 10년 뒤에 올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일 올 수도 있다. 기회가 눈에 띄게 올 수도 있고, 몰래 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잡으려면 준비가 돼 있어야 하고, 나는 그 준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뒤에 누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엄청난 거인이십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누군가를 모시고 오려면 자신의 자존심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그 누군가를 믿으면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가 무릎밖에 안 차는 거인 손 위에서 육지를 찾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가라앉을 일이 없습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항우와 유방은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시대의 라이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격돌은 약 8년 동안 지속되었고 처음에는 항우가 유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항우는 기원전 232년 초나라 명문가에서 태어나 키가 8척이 넘었고 힘은 커다란 쇠솥을 들어 올릴 정도였습니다. 가히 힘은 산을 뽑을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만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자기를 믿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이 몇 번이고 유방을 쳐야 한다고 간했지만, 그는 주저하며 그 기회를 잃었습니다.
반면 유방은 결단에 머뭇거림이 없었습니다. 본래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방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건달들과 어울리던 시정잡배 주정꾼이었습니다. 장년에 이르러서야 하급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유능한 부하들이 생겨났고 결국 빠른 결단력을 내려야 할 때 주저하지 않아 세력을 키워 한나라의 첫 재상이 됩니다.
유방은 항우와의 전투에서 연패했지만 결국 해하 전투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사면초가에 이른 항우는 자결합니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딛고 서 있는지 살피고 깨달아야 합니다. 언제나 성공하는 이들은 수많은 실패도 아랑곳하지 않는 자존심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인의 어깨에 타고 실패에도 두려움 없이 나아갑니다. 세례자 요한의 기개가 그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기대하지 맙시다. 거인에게 파견받읍시다. 우리의 거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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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행동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기꺼이 배우는 것입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도 있습니다. 3명이 길을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문홍보를 다니면서 미주 한인 공동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들의 모습을 봅니다. 신부님들의 사목에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미사 전에 신자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하고, 성체현시를 하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미사의 분위기가 한층 엄숙하고, 정갈하였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신자들과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창틀을 구입해서 신자들과 함께 성당의 창틀을 교체하였습니다. 구역을 찾아가서 미사하였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낮은 자세로 신자들과 함께하니 공동체가 한층 밝고, 따뜻해 보였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분위기를 활기차게 하였습니다. 미사 후에 인사할 때 아이들에게는 스티커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신부님께 인사하면서 스티커를 받았습니다. 스티커를 포도송이에 붙이면 나중에 선물과 교환해 준다고 합니다. 주보에도 짧은 글과 그림을 넣어서 그 주일 복음 말씀을 묵상하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함께하는 공동체는 활력이 넘쳐보였습니다. 저는 2012년부터 특수사목을 하였습니다. 본당을 떠난 지 어느덧 12년이 되었습니다. 저의 사목이 다른 사제들의 ‘타산지석’이 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2024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생각할 정도로 존경 받았습니다. 요한은 따르는 사람이 많았고,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겸손하였습니다. 자신은 하느님께서 보낸 메시아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겸손한 요한은 참된 메시아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메시아를 위해서 길을 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였습니다. 교회는 겸손한 요한을 교회의 스승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알았던 요한에게 사랑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요한의 ‘겸손’을 따르는 2024년 새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빛을 됫박으로 가리는 사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이웃을 환하게 비추는 빛이 되면 좋겠습니다. 소금은 녹아서 음식에 풍미를 더해주고, 맛을 내줍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소금이 되어 공동체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소금이 되어 공동체가 더욱 성장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된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 주교의 삶과 가르침으로 교회를 빛내셨으니 저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사랑으로 충실히 실천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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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9-28: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 세례자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요한은 즈카르야의 아들로 제사장직을 이을 수 있는 혈통이었음에도 그 직분과는 거리가 먼 광야에서 생활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혹시나 그가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묻는 말에 그는 솔직하게 “아니다.”라고 했다(20절). “엘리야요?” 하였을 때, 아니라고 대답하였다(21절).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와서 반대자들을 처리해 주고, 물건이건 사람이건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려주고, 흩어져있던 유다인들을 한데 모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21절) 물었을 때 그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 예언자는 신명 18,15에서 모세가 한 말에 있는 예언자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2절)
세례자 요한은 이사 40,3에 나오는 대로, 왕이 오실 때 그 길을 준비하라고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다(23절). 그러면서 자기를 그렇게 보지 말고 오직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며, 이미 와 계신 분을 바라보라고 하였다.(26-27절)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작고 크고 간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과대포장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나 않는지! 우리는 백마병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백마병이란 백마가 자기가 등에 태운 임금에게 모든 사람이 절을 하니까 자기에게 절을 하는 줄 착각하고 으스대며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자신이 말이라는 것을 잊고 마치 임금인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왜 행복한지를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드러내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하느님 자녀의 몫이다. 요한 세례자의 삶이 이러하였다. 자신의 삶을 오로지 백성들이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주님과 만날 수 있도록 살아갔던 분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요한과 같이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그분을 증언하고,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갖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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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냅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왔다는 것은, 세례자 요한이 당시에 정치권에서도 의식할 정도로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여겨볼 점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도, 그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 증언과 함께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을 향하게 합니다.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 앞에서도 그는 예수님을 증언하여,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훗날 자기 곁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스승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3,26)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참된 증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을 이용해서 나도 주인공이 되고 싶은 유혹을 겪습니다. 내가 기억되기를 바라고 내가 주목받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내 노고를 인정하여 주지 않으면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을 좇다 보면, 우리의 믿음은 어느새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부르심을 받았든지, 어떤 직분을 받았든지,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묵상하며, 교회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곰곰이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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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회 김태오 티모테오 신부님]
<하느님의 어린양>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한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에 해당하는 호칭으로, 아니,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명인 십자가의 희생을 예언하는 호칭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른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오늘날 계약을 맺을 때 먼저 서로의 동의가 확인된 다음 계약서에 서명 또는 도장을 찍는다. 이 서명 또는 도장은 서로 약속한 것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만의 특유의 방법을 개발하였다. 그들은 서로 동의하고 동의한 것을 굳게 지키기로 맹세하고자 하면 계약을 맺고자 하는 상대방과 같이 특별한 예식을 행하였다.
동물을 죽여 반으로 잘라서 양쪽에 놓고 그 사이로 둘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의 계약서 서명과 같았다. 피가 흐르는 제물 사이로 둘이 지나가면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의 피를 생명의 근원으로 보았고, 이 피가 서로간의 동의를 표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하느님과 특별한 계약을 맺었다고 믿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다.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시어 하느님과 인류의 화해 제물이 되셨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시어 피를 흘리셨고, 그 피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미사 때마다 바치는 천주의 어린양을 되새겨 본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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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사는 게 죄지요!” 하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범주는 윤리적인 것보다 훨씬 넓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모든 상태를 ‘죄’라고 말합니다.
요한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죄를 짓지 않으며 하느님은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부르셨다는 말은, 우리가 죄가 없는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보면서 원죄 이전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죄와 허물이 많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 체험하게 됩니다.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의 모습을 과연 발견할 수 있을까?” 하고 우리는 묻게 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대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없애시려고 속죄의 양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죄가 전혀 없는 인간의 모습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삶은 우리에게 인간성의 완성형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희망과 기쁨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 곧 완덕에 이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은 우리 안에 커다란 희망과 기쁨을 일으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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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당신은 누구요?” (1,19)
흔히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을 얻고 옳은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지만 성경에도 아주 의미롭고 심오한 질문이 많이 있습니다. 아담을 향한 하느님의 “너 어디에 있느냐?”(창 3,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태 16,15)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6)라는 질문은 단지 한 개인에게 던진 질문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향한 질문이며, 이 질문에 우리 각자는 필히 지체하지 않고 즉시 대답해야 합니다. 사실 모세는 미디안에서 양들을 치면서도 줄곧 자기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1,19)
옛날 로마 제국 시절,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전한 개선장군들이 로마로 입성하면 백성들이 모두 몰려나와 연도에 늘어서서 환호성을 지르며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때 로마로 입성하는 장군들은 노예 한 명을 마차 뒤에 숨겨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이유인즉슨, 백성들이 환호할 때마다 장군의 뒤에서 그 노예는 ‘너는 신이 아니다! 신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역할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는 참으로 지혜로운 처신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실 사무엘서에 보면,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백성들이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사 18,7)라고 노래하자 사울 왕이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 장군들은 스스로 삼가 조심하였다고 봅니다.
어쩌면 겸손과 섬김의 자세를 갖춘 세례자 요한은 변덕스런 사람들과 세상인심을 간파하고 터득했기에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았기에 사람들의 당신은 누구요?, 라는 질문을 받고 “나는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예언자도 아니다.”(1,19~21참조)고 답변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이전에 우리가 또한 누군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욱 요한복음에서, 세 번의 부정 ‘나는 ~이 아니다.’는 형식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나는 ~ 이다.’라고 반복해서 표현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의 신원이나 정체성을 확언하는 표현입니다. 즉 그분께서 ‘에고 에이미 즉, 나는 ~~이다.’라고 할 때 이는 곧 그분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분의 전 존재를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복해서 당신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포도나무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목자이다.’,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등등.
그러기에, 요한 세례자가 말하는 ‘나는 ~이 아니다.’는 고백은 요한의 겸손함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 신원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한은 분명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자신과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과의 차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이나 신분이나 역할을 착각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솔하게 밝힐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그리고 엘리야도 그 예언자 곧 모세(신 18,18)도 아니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물론 요한은 엘리야가 아니었지만, 엘리야와 같은 역할, 백성들의 회개를 위해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확신한 자신의 정체성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1,23)고 고백하며, 그 정체성에서부터 자신의 소명이란 바로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네가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먼저 너 자신에 대하여 알도록 하라.”는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말처럼, 요한은 진정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던 참된 인간이었으며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늘뿐만 아니라 올 한 해 동안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할 우리의 영적 안내자이자 길잡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당신은 누구요?,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세례자 요한처럼, ‘나는 ~이 아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우리 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 교만의 선을 넘어서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도 세례자 요한처럼, 진리가 아니며 다만 진리를 증언하는 역할을 맡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 안에 굳건히 머묾을 통해서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며, 배운 바를 삶으로 실천하는 올 한 해가 되도록 합시다. 사실 우리가 누구인가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요한이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1,26) 고 증언한 대로 이미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 마음을 모으면서 올 한 해의 마지막 날까지 항구하게 걸어가도록 합시다. ‘그리스도 이미 오셨고, 내 앞에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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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보다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가는 글을 쓸 때 쾅쾅 울리는 시끄러운 옛날 노래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면 글이 잘 써져서 빗소리 ASMR을 듣는다는 분, 클래식을 듣는다는 분, 벌거벗은 채로 글을 쓴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거의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지만(주로 제 방입니다), 잘 써지지 않을 때는 백색 소음이 있다는 카페를 이용하곤 합니다.
글 쓰는 것은 똑같은데 그 상황은 모두가 달랐습니다. ‘같은 일도 다르게 한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다르게 한 것을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다를 수도 있는 부분을 틀렸다고 하면서 자기 방식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까지 잃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라면서 획일화시키려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에게 ‘같은 일도 다르게 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르게 하는 그 과정 안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결과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더 큰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는 것과 남이 찾아주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같은 일도 다르게 할 수 있음’을 주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성장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려고 할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점을 인정하지 못하고 의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고도 그러했습니다. 자기들과 달리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닌, 엘리야의 모습으로 극기와 겸손의 삶을 산 것입니다.
자기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 바리사이들은 따지듯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답인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말했으면 편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남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선택하면서, 스스로 낮춥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얼마나 겸손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교만과 이기심으로 다르게 할 수 있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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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참으로 아는가>
요한 1,19-28 (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는 참으로 아는가>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
어둠 가운데에
빛 계심을
어둠은 모르지만
빛 품은 이는 안다네
비록 빛은 아닐지언정
혼돈 가운데에
길 계심을
혼돈은 모르지만
길 걷는 이는 안다네
비록 길은 아닐지언정
거짓 가운데에
참 계심을
거짓은 모르지만
참된 이는 안다네
비록 참은 아닐지언정
미움 가운데에
사랑 계심을
미움은 모르지만
사랑하는 이는 안다네
비록 사랑은 아닐지언정
절망 가운데에
희망 계심을
절망은 모르지만
희망하는 이는 안다네
비록 희망은 아닐지언정
죽임 가운데에
살림 계심을
죽임은 모르지만
살리는 이는 안다네
비록 살림은 아닐지언정
우상 가운데에
하느님 계심을
우상은 모르지만
하느님 닮은 이는 안다네
비록 하느님은 아닐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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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가 자랑해야 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가끔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을 씁니다. 경중이나 선후가 서로 바뀌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요한을 메시아로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서슴지 않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메시아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엘리야’인지 묻습니다. 이 질문에 역시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시 ’예언자‘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 곧 메시아가 계시는데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자신을 한껏 낮추며 곧 다가오실 예수님의 신원을 알립니다. 만약 요한이 인기에 영합하여 자신을 내세웠다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고 있었기에 항상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도 요한의 모범은 감동을 줍니다. 내가 누구인가? 를 알면 겸손해집니다. 우리도 겸손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가운데 주님께 대한 갈망과 사랑이 커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분, 전해야 할 분은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연장으로 쓰임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면서도 내심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모습들을 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이니 그것으로 만족하여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가운데 더욱 빛납니다.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드러내고 높아지려 합니다. 남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다툼을 일으키며 상처를 주고 잇속을 챙깁니다.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역할이 더욱 크게 필요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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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항구합시다>
-참 아름다운 선물-
동방의 4대교부는 성 아타나시오, 성 대 바실리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네분입니다. 바로 그 네분중 오늘 기념하는 두분이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입니다. 태어난 햇수는 330년 똑같은데 성 대 바실리오는 49세까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60세까지 살았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또 성덕은 얼마나 살았느냐의 ‘삶의 양’에 있는게 아니라, 어떻게 주님 사랑에 치열했느냐 ‘삶의 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 성인의 대한 간략한 소개입니다. 두분 다 소아시아(오늘의 튀르기에) 태생에 절친이었고, 함께 아테네에서 공부했고, 두분 다 주교이자 유명한 신학자였습니다. 바실리오는 아리안이단과 싸운 조직자이자 수도자였고, 그레고리오는 관상적이자 시적인 분이었습니다. 콘스티노플의 주교로 지명된 그레고리오는 곧 사임후 나지안조에서 참 신심깊은 삶으로 인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두분의 절친관계의 우정입니다. 말그대로 주님 안에서의 우정이요, 이에 앞서 두분의 주님과의 우정도 깊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서로간의 우정도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부터는 저는 우정에, 영적우정에 대해 많은 사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동서방을 막론하고 참 아름다운 우정의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아마도 인간관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우정일 것입니다. 우정역시 선물이자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선물이면서 평생 성장, 성숙과정에 있는 우정의 여정이라는 것이지요.
어제 저녁식사중 선물받은 40만원짜리 양주를 약간 서로 주고 받으며 나눴습니다. 고급양주는 부드럽고 색깔, 맛, 향이 깊고 그윽하고 뒷맛이 좋다는 느낌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깊어가는 우정도 이런 고급양주처럼 날로 색깔, 맛, 향기도 깊고 그윽하며 뒷맛 또한 좋고 날로 부드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성인가족으로 하면 교회 역사상 성바실리오 가정을 능가할 성인은 없을 것입니다. 조부모, 부모, 형제자매들이 거의 대부분 성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우정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참 다양함을 봅니다. 스승과 제자, 동료간, 부부간, 남녀간, 남매간, 선후배간 참 다양합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조선시대 동방의 18현에 속하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우정이, 또 정약용과 그의 둘째형으로 자산어보를 썼고 흑산도에서 한많은 생을 마친 정약전의 우정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또 세대 차이를 넘어 수십년 아들뻘, 손자뻘의 제자들과 우정을 나눈 퇴계 이황의 겸손한 인품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친구는 또 하나의 분신과 같습니다.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우정의 본보기를 볼 수 있는지요. 저는 이미 작고하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아랫집 서 마리레몽 수녀님간의 영적우정도 주목합니다. 성서만 해도 다윗과 요나단, 엘리사벳과 마리아, 또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다, 수도생활역사중에도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십자가의 요한과 대 데레사가 있고 최근만 해도 가톨릭 교회의 전임 베네딕도 교황과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우정은 수없이 목격합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오 여사의 우정도 그렇고 제 결혼 주례 1호 부부도 24년 동안 익어가는 우정관계도 참 아름답습니다. 어제 방문하여 함께 식사후 부부 모습이 참 평화로워 사진에 담았고 사진과 더불어 메시지도 전달했습니다.
“정말 멋지고 행복해 보입니다. 환상의 커플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늘 오늘처럼 이렇게 사세요!”
저에게는 수년동안 제 강론을 나누는 한결같이 겸손하고 열심한 교구사제도 있는데 매일 답글을 보내주는 놀라운 분입니다. 한번도 만난적이 없지만 어제의 댓글에서도 보이지 않는 우정이 형성됨을 감지했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는 이 품위를 놓치지 않고 살아가렵니다. 신부님, 새해도 건강하시구요. 늘 기도 안에서 뵙고 있나이다.”
우리의 공경하올 영원한 현역으로 저보다 16세 연상의 92세 수도선배인 진토마스 신부의 역주인 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16 담화 주제는 ‘우정에 관해서’요, 여기 나오는 진정한 우정의 6개 원칙을 소개합니다.
1.이 세상의 재물을 경시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경시하는 태도다.
2.각자 자기 뜻을 끊어버려야 한다.
3.자기가 유익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사랑과 평화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이다.
4.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화를 내서는 안된다.
5.형제가 자기에게 분개할 때, 이유없는 분개라도 자기안에서 일어난 분개와 똑같이 치유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6.악행을 모조리 사라지게하는 틀림없는 원칙으로, 언제든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날마다 갖는 것이다.
우정에 있어서 대화도 얼마나 중요한지 악마의 유혹도 경계해야 함을 봅니다. 베드로 수제자도 “사탄아 물러가라!”는 주님의 호된 질책을 받았고, 창세기에서 유혹당한 하와와 아담, 광야에서 시련중 악마를 물리친 예수님의 예화를 소개하는 지난해 12월27일 일반알현시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도 신선했습니다.
“악마와 대화하지 마라. 결코!(never!) 논의도 하지 마라. 예수님은 결코 악마와 대화하지 않았다. 그는 대화로 응답하지 않았고 단지 성경 말씀으로 응답했다. 조심하라. 유혹이다 싶을 때 결코 대화하지 마라...‘마음을 지켜라!(Guard the heart)’. 무수한 교부들이, 성인들이 그러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보물을 지키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이여, 마음을 지키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적대자들의 질문에 답이 참 간명하며 악마가 유혹할 빌미를 주지 않습니다. 역시 겸손의 대가, 겸손의 달인, 세례자 요한이요 악마도 겸손한 자에게는 결코에게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문득 사막의 성자 마카리오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마카리오를 유혹하다 실패하고 퇴각할 때 악마의 고백입니다.
“나는 네가 하는 것을 다 모방하여 할 수 있다. 그러나 너의 겸손만은 모방할 수 없다. 졌다. 겸손한 너를 결코 이길 수 없으니 나는 떠난다.”
오늘 복음의 다음 대목에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이 빛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 가운데에는 우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하는데, 우리는 그분이 누구신지 압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 파스카의 주 예수님의 현존을 의식함이 겸손을 배움에 결정적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 안에서 자기를 아는 것이 바로 겸손이자 지혜인 것입니다.
새삼 얼마나 주님과 깊은 우정관계에 있는 세례자 요한인지, 우정의 기초에 얼마나 깊이 자리 잡은 겸손인지 깨닫습니다. 주님과의 우정관계를 통해, 주님을 따르면서 닮아감으로 참나의 실현이요, 주님과의 우정은 상호간의 우정의 기초가 됨도 배웁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없이는 참나의 실현도 불가능합니다. 제1독서의 요한이 주님과의 우정에 참 유익한 조언을 줍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하신 약속, 영원한 생명입니다....그분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이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사랑안에 한결같이 머무름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요, 주님과는 물론 이웃간의 영적우정의 여정에 기초가 됨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주시며 형제들 상호간의 영적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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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01월 02일 - 1월 2일
<오랜 새로움>
우리는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처럼 누구인지 질문을 받습니다. 질문을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묻지 않고 물음도 받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며 살게 되겠지요. 그래서 하인인데도 주인처럼 행세하며 살다가 나중에 큰코다치고, 주인인데도 종처럼 일생을 슬프고 불쌍하게 심지어 불행하게 살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아니, 누구로 알고 살아야 합니까?
이 물음에 정답은 있습니까? 있다면 그 답은 무엇입니까?
그 답이 오늘 세례자 요한의 대답이 아닐까요? 아니, 틀림없이 요한의 대답이 정답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우리는, 외치는 분의 소리랍니다. 그런데 소리라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개소리이기도 하고,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이기도 합니다.
무의미하거나 남에게 괴로움만 주는 소리일 뿐이라는 얘깁니다.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라고 하니 가끔 차에 큰 스피커를 달고 다니며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류의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의 소리는 아무리 커도 사람들이 듣지 않아 시끄러운 소리 곧 소음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아무튼 소리는 아무리 그 소리 커도 소리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말을 만나야지만 의미를 지니고 말씀과 만나면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과 같이 말씀을 전하는 소리는 의미가 있고, 성당의 종소리도 그 소리가 예수님을 실어 나르기에 의미 있지요.
그런데 성당의 종소리도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큰 의미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말이랍시고 하지만 제소리를 내기에 의미가 없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에게 제소리는 개소리입니다.
반대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낮추고,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며 주님을 높일 때 우리의 소리는 주님께 영광 드리는 말이 되고 의미 있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왜 많은 사람이 당신을 따르느냐고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많은 은총을 자기에게 주셨기 때문이라고, 같은 은총을 강도에게 주셨다면 그는 자기보다 더 훌륭했을 거라고,자신은 낮추고 하느님 은총은 드러냈기에 우리는 그를 성인이라고 하고 그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제소리는 개소리입니다. 제소리는 아무리 커도 아무 의미가 없는 개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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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요한1,19)
<나의 증언!>
오늘 복음(요한1,19-28)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찾아와서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그들의 이 물음은 '혹시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들의 물음에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1,20)
계속된 그들의 물음에도 요한은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원과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6-27)
'나의 증언!'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사람들이 나에게 예수님에 대해 물으면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가?'
2023년 계묘년은 지나갔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시간은 2024년 갑진년 새해입니다.
예전에 노래방엘 가면 가수 전인권이 부른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노래를 즐겨 부르곤 했습니다. 노랫말이 참 좋습니다.
'그대여 아무 걱정 말아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새로운 꿈!'
2024년 새해에는 새로운 꿈이 실현되는 한해, 예수님 손잡고, 그리고 성모 엄마 손잡고 올해보다 더 기뻐하고 더 부활하는 복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누가 묻거든,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구세주)라고 증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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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BkZ69H5E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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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1.02.화. 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 23)
새 일기장에
새 날을
기록했다.
다시 태어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부딪히고
맞닥뜨리며
깨닫게 되는
삶의
나날들이다.
그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진짜 우리들
소리이다.
어김없이
만나게되는
광야의
시간이다.
삶 속의
광야이다.
같은 것
하나 없는
힘겨운
우리들 광야의
삶이다.
광야에도
사람이 있다.
광야에도
사랑이 있다.
광야에도
햇살이 비친다.
광야는 늘
간절하다.
광야에서
삶의 목적지가
하느님이심을
깨닫게된다.
추운 광야가
우리를
성장시킨다.
괴로운 시간도
필요한 은총의
시간이 된다.
광야에서
우리를 살릴
유일한 말씀을
듣게된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광야도 길을
드러낸다.
이쪽 광야가
끝나면 저쪽
광야가 우리를
기다린다.
광야에서
하느님을
뜨겁게
만난다.
추운 광야에서
깨닫게되는
하느님의
은총이다.
은총으로
지나가는
순간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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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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