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고난당하는 자다.
3:2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어, 빛도 없는 캄캄한 곳에서 헤매게 하시고,
3:3 온종일 손을 들어서 치고 또 치시는구나.
3:4 주님께서 내 살갗을 약하게 하시며, 내 뼈를 꺾으시며,
3:5 가난과 고생으로 나를 에우시며,
3:6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서 살게 하신다.
3:7 내가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아 가두시고, 무거운 족쇄를 채우시며,
3:8 살려 달라고 소리를 높여 부르짖어도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3:9 다듬은 돌로 담을 쌓아서 내 앞길을 가로막아, 길을 가는 나를 괴롭히신다.
3:10 주님께서는, 엎드려서 나를 노리는 곰과 같고, 몰래 숨어서 나를 노리는 사자와 같으시다.
3:11 길을 잘못 들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외롭게 하신다.
3:12 주님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아서, 활을 당기신다.
3:13 주님께서 화살통에서 뽑은 화살로 내 심장을 뚫으시니,
3:14 내 백성이 모두 나를 조롱하고, 온종일 놀려댄다.
3:15 쓸개즙으로 나를 배불리시고, 쓴 쑥으로 내 배를 채우신다.
3:16 돌로 내 이를 바수시고, 나의 얼굴을 땅에 비비신다.
3:17 내게서 평안을 빼앗으시니, 나는 행복을 잊고 말았다.
3:18 나오느니 탄식뿐이다. 이제 내게서는 찬란함도 사라지고, 주님께 두었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
◈ 주해
1. 요시야의 종교개혁부터 예루살렘의 멸망을 지켜 본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낙심하지 않고 애가를 부르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다.
1) 애가는 하나님 탓, 남 탓을 하지 않고 나의 죄로 인한 심판의 무게임을 알고, 주님이 하신 일은 옳으나, 나는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고 고백한다.
애 1:20 주님, 나의 절망을 살펴 주십시오. 애간장이 다 녹습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자주 거역하였던가를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아픕니다...
2. 이스라엘의 원수가 된 것처럼 시온을 불태우신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집인 성전도 파괴하신다.
1) 하나님의 본심을 아는 예레미야는 계시가 끊어져도 애가를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나간다.
2) 예레미야의 눈은 눈물로 상하고 그 몸은 고통으로 불탄다(2:11-12)
3) 시온의 파괴된 가장 큰 이유는 선지자들이 “그들의 죄를 분명히 밝혀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2:14).
4) 그러므로 이제라도 밤낮으로 눈물을 강물처럼 흘리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외친다.
3. 3장에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고난 당한 자는 “나”라고 한다.
3:1 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고난당하는 자다.
1) 하나님은 나를 어둠 속으로 이끌어 가시며 날마다 나를 손으로 치신다(2-3절).
4. 하나님에게 맞은 예레미야의 몰골은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이다.
3:4 주님께서 내 살갗을 약하게 하시며, 내 뼈를 꺾으시며,
3:5 가난과 고생으로 나를 에우시며,
3:6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서 살게 하신다.
1) 하나님께 맞은 예레미야는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처럼 “무덤” 속에서 살아간다.
5. 흑암 속에서 살아가는 예레미야는 당연히 필사적으로 이 무덤을 빠져나가기 위해 출구를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담을 쌓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두시고 무거운 사슬로 채우신다.
3:7 내가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아 가두시고, 무거운 족쇄를 채우시며,
3:8 살려 달라고 소리를 높여 부르짖어도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3:9 다듬은 돌로 담을 쌓아서 내 앞길을 가로막아, 길을 가는 나를 괴롭히신다.
1) 도망갈 수 없는 예레미야가 할 수 있는 일은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것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그 기도도 듣지 않으신다.
6. 하나님은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사자 같이 공격하여 내 몸을 찢고,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신다. 그로 인하여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가 된다.
3:14 내 백성이 모두 나를 조롱하고, 온종일 놀려댄다.
3:15 쓸개즙으로 나를 배불리시고, 쓴 쑥으로 내 배를 채우신다.
7. 매일 맞으면서 흑암에 갇히고 몸이 찢기며 조롱거리가 된 예레미야의 마음에는 소망이 없다.
3:17 내게서 평안을 빼앗으시니, 나는 행복을 잊고 말았다.
3:18 나오느니 탄식뿐이다. 이제 내게서는 찬란함도 사라지고, 주님께 두었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
[개정] 3: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1) 예레미야에게 있던 평안까지 빼앗자, 행복을 잊고 만다.
2) 예레미야는 스스로 자신에게 말한다.
- 나의 모든 힘은 다 사라졌고, 여호와께 대한 마지막 소망까지 끊어지고 말았다.
8. 한 때는 도망치려고 했고, 한 때는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고, 한 때는 길을 따라 벗어나려고 했고, 한 때는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1) 그런데 마침내, 예레미야의 모든 힘이 사라졌다. 더 이상 버틸 힘도 없고, 도망칠 힘도 없고, 부르짖을 힘도 없다.
2) 모든 힘이 사라짐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힘도 없어지고, 평안도 사라지자, 하나님께 두었던 마지막 소망마저 사라졌다.
3) 하나님께 두었던 첫 소망이 아니라, 마지막 소망까지 사라졌으니 모든 소망이 사라진 것이다.
9.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그 백성을 자신과 연합시킨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게 쏟으신 하나님의 분노는 자신에게 쏟은 분노다.
1)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자신을 연합시킨 것은 곧 그리스도가 우리와 연합한 것에 대한 예표다.
2)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죄된 우리와 연합되어 죄가 되시고, 죄가 되신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당하시고 죽임을 당한다.
3) 연합의 결과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고, 함께 일으킴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10. 예레미야는 점점 절망을 향해 가다가, 마침내 완전히 모든 소망이 끊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마지막 소망마저 끊어진 절망의 상태다.
1) 예레미야는 육체적 고난, 정신적 재난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영적 재난을 당한다.
2)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리고 영과 혼과 몸에 모두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 임함으로 “여호와께 대한 소망이 끊어졌다.”
3) “끊어졌다”의 히브리어 “아바드”는 “잃어버렸다” 또는 “소멸되었다”이다.
4) 내일 묵상 본문을 보면 이 처절한 절망, 완전한 절망의 상태에서 “마음속에 곰곰이 생각함”으로 인하여 도리어 소망이 생긴다(20절).
11. 예레미야는 절망의 끝에서야 비로소 열리는 생명의 빛을 본다.
1) 하나님의 심판은 장사 복음을 증거한다.
2) 예레미야가 무덤에서 본 소망, 무덤에서 본 인자와 신실함을 우리도 보기 원한다.
◈ 나의 묵상
십자가 복음과 부활복음도 신비이지만, 장사 복음은 참으로 신비다. 모든 소망이 끊어진 자리에서 소망이 솟는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죽는 자가 곧 산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순신도 결은 다르지만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산다고 하였다. 그런데 막상 전쟁터에 나간 군사들이 “살고 싶어서” 죽고자 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예수님 안에서 죽는 자가 곧 산다. 그렇다고 예수님 안에서 죽을 수 있는가? 스스로 죽이면 자살인데, 예수 안에서 자살할 수 있는가? 없다.
다행인 것은 예레미야는 소망을 가지고자 절망으로 간 것은 아니다. 소망을 끝까지 붙들었지만 결국 절망에 이르고 말았다. 그의 의지와 반대로 결국 모든 소망이 사라졌다. 그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절망, 완전한 절망, 그 곳에서 예레미야가 생각하지 못한 소망이 발견되었다.
장사복음은 선포다. 무덤에 들어가면 성전이 지어진다. 그렇다고 성전을 짓고자 무덤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다. 무덤에 스스로 들어가는 자는 없다. 그냥 들어가지는 것이고, 예레미야처럼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갈 뿐이다. 부르짖어도 도움이 없어서 그 곳에 있을 뿐이다. 육체의 재난과 정신적 재난과 영적 재난을 자초하여 부활에 이를 수는 없다.
원하지 않게 무덤에 들어가고, 원하지 않게 무덤에 살고, 원하지 않게 절망하게 된 예레미야에게 소망이 생긴다. 그것은 주님을 잠잠히 생각함으로 인함이요, 주님의 은총이다.
예레미야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짐작은 가지만, 궁금하다. 짐작되는 것은 절망의 끝에서야 비로소 모든 탐심과 욕망과 헛됨을 내려 놓아 졌을 것이다. 마음이 비우지고 겸비하여졌을 것이다. 흑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마저 사라지자, 비로소 흑암 속에서 잠잠히 거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흑암에서 곰곰이 생각함을 통하여 “영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예레미야의 의도와 계획과 결단으로 그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의도와 계획으로 그리스도의 무덤에 잠잠히 머물 수는 없다.
다만, 예레미야의 하나님이 그를 붙잡으시고 은총으로 그 곳에 이르게 하신 것처럼,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이 나를 무덤에 잠잠히 머무는 곳까지 이르게 하실 것이다. 나는 그 길을 모르지만, 주님은 그곳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소망이다. 나를 소망이 끊어진 그 자리에 있게 하실 하나님이 나의 소망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주님의 사랑과 능력이면 예레미야가 머물렀던 그 무덤에도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 묵상 기도
주님, 깨닫고, 생각하고, 공부하고, 열심을 내어서 이를 수 있는 신앙의 지점이 있는가 하면, 애가 3장의 그 지점은 무엇을 깨닫고 결단하고 원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장사복음이 실현되는 그 곳, 주님만이 그곳에 계시며, 주님만이 그 겸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다윗이 머물렀던 그 곳에 저를 인도하여 주시고, 그 곳에 이를 수 있는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제 뜻과 의지로는 장사복음에 연합되지 못합니다. 주의 은혜와 인도함으로만 장사복음에 연합되오니 장사복음에 연합되어 애벌레의 모든 몸이 녹아지고 새창조되듯이 저를 조성하여 주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디를 가던지 주님이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 레바논의 룻과 다니엘라 가정을 돌보아 주십시오. 부족한 종과 셀장님들, 그리고 팀장님들을 주의 사랑으로 붙드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십시오. 각 셀이 주 사랑안에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수험생들의 하루 하루 여정을 은총으로 채워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