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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3: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3: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3: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3: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3: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3: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3: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3:34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3:35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3:36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3:37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3:38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3: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 주해
1. 예레미야는 이 심판의 나의 죄의 무게임을 안다.
애 1:20 주님, 나의 절망을 살펴 주십시오. 애간장이 다 녹습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자주 거역하였던가를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아픕니다...
1) 예레미야의 눈은 눈물로 상하고 그 몸은 고통으로 불탄다(2:11-12)
2) 그렇지만 이제라도 밤낮으로 눈물을 강물처럼 흘리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외친다.
2.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고난당한 자는 “나”라고 한다.
1) 계속해서 슬프고 아팠던 예레미야지만, 3장에서 고백하는 그의 어둠과 고통과 재난은 상상을 초월한다.
2) 하나님은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서 살도록 그를 치셨다.
3) 그는 필사적으로 이 무덤을 빠져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고 무거운 족쇄를 채우셨다.
[개정] 3: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4) 그는 육체적 고난, 정신적 재난에 이어서 영적 재난까지 당하자, 마침내 완전히 모든 소망이 끊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마지막 소망마저 끊어진 절망의 상태다.
3. 하나님에 대한 소망마저 끊어진 자리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기억하여 달라고 기도하며, 지금의 상황을 마음에 담아 둔다.
[개역개정] 애 3: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3: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1) 예레미야는 자신의 처지 그대로를 하나님께 기억하여 달라고 한다.
2) 그리고는 자신의 마음으로 이 모든 상황과 자신의 처지를 기억한다.
3)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기억할수록(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새번역) 낙심이 된다(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새번역)
4. 21절은 3장과 애가 전체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는 중요한 말씀이다.
[표준새]애 3:21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개역개정]애 3: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현대어] 21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오히려 희망이 있다.
[쉬운말] 21 그러할지라도 다시금 마음속 깊이 곰곰 생각해보면, 도리어 소망이 생겨나는 것은,
1) 여호와께 대한 소망마저 끊어졌고, 계속되는 낙심 속에서도 예레미야는 이 상황을 마음에 담아 두고,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였다.
2)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다시, 한편으로”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3)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절망밖에 없던 이 상황 속에서 오히려 희망이 보였다.
5. 다른 관점으로 보니, 완전히 망하기는 했지만 “진멸되지 않았고” 진멸되지 않은 이유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임을 보게 되었다.
[표준새]애 3:22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개역개정]애 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바른성경]애 3:22 여호와의 인애로 우리가 소멸되지 아니하였으니, 참으로 그분의 긍휼이 무궁하십니다.
1) 흑암에 가두시고, 흑암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긍휼마저 사라졌다고 여겨져서 절망했다.
2) 그런데 돌이켜보니 포로로 잡혀가는 비참한 신세이지 진멸되지는 않았고, 70년 후에 회복
된다 약속의 말씀도 있다.
3) 그러자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무궁하고,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진멸되지 않음을 보게 된다.
- 심판과 진노의 이면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심을 본 것이다.
4)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고, 지금도 그 인자와 긍휼이 미치고 있다면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주님의 인자와 긍휼을 더 주목하게 된다.
6. 그러니까 놀랍게도 주님의 인자와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고 그의 성실하심이 실로 크심을 보게 되었다.
[표준새]애 3:23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개역개정]애 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1) 죽을 것 같은 흑암의 재난 가운데서도 아침마다 주의 인자와 긍휼이 새로웠다. 이것은 주님의 성실이 크시기 때문이다.
2) 이렇게 심판받아 마땅한 자에게까지 주의 신실함이 일하여서 주의 인자와 긍휼의 빛을 비추고 계셨던 것이다.
7.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주목한 예레미야가 새롭게 주목하며 믿게 된 것이 또 있다.
[표준새]애 3:24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개역개정]애 3: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1) 예레미야는 영과 혼과 몸의 재난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었다고 여겼는데, 가장 중요한 기업이신 주님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2) 모든 것을 잃었고,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되었다.
- 그런데 주님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면, 주님이 나의 기업이면, 어찌보면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업으로 받은 가나안 땅은 “기업이신 하나님”의 모형과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모형은 잃었지만 진짜는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3) 주님이 여전히 인자와 긍휼을 아침마다 새롭게 하시고, 주의 성실로 다가오심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는 너의 기업이다”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다.
4) 그러기에 예레미야는 나의 기업(몫)이신 주님을 바라며 기다리기로 한다. 이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다”는 고백의 내용이다.
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받은 기업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곧 영생이다(갈 4:7, 히 1:4).
1) 예루살렘 백성들처럼 철저하게 망하고, 영과 혼과 몸의 재난으로 여호와께 대한 마지막 소망이 끊어졌을 때, 여전히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얻은 것,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 오히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된다.
2)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모든 것을 기업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9. 바울은 감옥에서 모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생의 복, 이 기업으로 인하여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며,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하였다.
1) 바울이 감옥에서 찬양하고 기뻐한 이유도 주님이 크신 신실하심으로 아침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의 인자와 긍휼 때문이었을 것이다.
2) 바울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아는 위기에 이른 적이 있었지만 주님의 인자와 신실함이 그를 큰 사망에서 건져 내셨다.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0.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왜 완전한 절망에서도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바라보고 주의 구원을 잠잠히 기다려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1) 주님이 나의 기업이므로 주님을 기다리는 자를 주님은 선하게 대하신다.
3: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 절망은 이해가 가지만 여전히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다.
11. 절망 가운데, 너무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기다릴 수 있는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
3: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3: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3: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새번역] 3:27 젊은 시절에 이런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좋고,
3:28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에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고,
3:29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니 겸손하게 사는 것이 좋다.
1) 짊어진 멍에가 너무 무겁기 때문에 그 멍에를 벗으려 하지 말라고 한다. 태산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멍에를 벗어 던지고, 무덤을 벗어나려고 하면 도리어 절망하게 된다. 이는 예레미야가 이미 경험한 바다.
2) 그러기에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바라보면서 잠자코 있는 것이 좋다.
3)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대신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겸손하게 사는 것”이다.
-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나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대라”고 조언한다.
[쉬운말] 29 입이 땅의 흙먼지에 닳을 정도로 그렇게 바짝 꿇어 엎드려,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복하라. 그러면 혹 절망 가운데서 소망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12. 이렇게 기다리면 되는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은 너무 비참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렇게 재난이 끝나지 않는다.
[표준새]애 3:30 때리려는 사람에게 뺨을 대주고, 욕을 하거든 기꺼이 들어라.
[개역개정]애 3: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1) 하나님께 바짝 엎드려 겸손하게 되면 이런 치욕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2)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이 도망할 때, 시므이는 말도 않되는 저주를 다윗에게 퍼부었다. 부하들이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할 때, 다윗은 말도 않되는 저주를 하나님이 하신 것일 수 있으므로 내버려 두라고 한다. 다윗은 겸비함으로 치욕으로 자신을 배불린 것이다.
13. 왜 무거운 멍에를 매고, 치욕으로 배불리며 주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설명한다.
3: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1) 이는 이미 19-24절에서 했던 고백이다. 그러나 무거운 멍에와 치욕을 당하면 이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다.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바라볼 때만 이 무덤에서 견디고 버틸 수가 있다.
2) 핵심은 이 고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본심”을 알고 믿고, 항상 기억하는 것이다.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4. 무거운 멍에와 치욕을 지고 주님을 기다리는 자가 반드시 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이 심판이 나의 죄로 인함임을 알고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1) 하나님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긍휼의 하나님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2) 그러므로 흑암가운데 주를 기다리는 자는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고 있음을 인정하고 절대로 원망해서는 않된다.
3:38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3: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3) 먼저 하나님의 본심, 즉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함을 반드시 알아야 하고, 또 하나는 나의 죄들 때문에 벌을 받으니 절대로 원망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
15. 광야생활은 비록 고단하나 자신을 낮추고 말씀으로 사는 것을 배움으로 언약적 복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1) 이 은총을 방해한 최대의 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탓”이었다.
2) 애굽에서 체질화된 자신들의 죄, 구원의 여정가운데 우상을 섬기고 불평한 자신들의 죄들로 인한 광야임을 알고 원망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광야생활은 영광스러웠을 것이다.
3) 비록 광야에 거하지만 출 24장에 나오는 언약적 복, 하늘에 속한 충만한 기쁨이 항상 있었을 것이다.
16. 동일한 은혜와 구원을 받고도 하나님의 본심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다.
1) 하나님의 본심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은 “창세전에 우리에게 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어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2) 그 본심은 십자가로 확증되었다.
3) 하나님은 악하고 교만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나 그 본심과 본질은 사랑이다.
4) 고난당한 공동체와 각 성도들은 “이것을 마음에 담고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5) 그러면 심판을 통해 의를 세우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뜻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시 94:14-15).
17. 하박국 선지자와 애가 3장은 동일한 고백이다.
1) 하박국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주의 긍휼을 바라보는 것을 부흥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2) 진노 중에라도 주의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면 이는 “부흥”이다.
18. 우리가 잠잠히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주님과 함께 해야 한다.
1) 죄 없으신 낙심 중에 있는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잠잠히 고난을 당하셨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입을 열지 않으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2) 주님께 매 맞는 우리와 흑암가운데서 함께 기다리기 위하여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매를 맞으며 질고와 슬픔을 당하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 나의 묵상
주님(예레미야)이 인간의 절망의 끝자락을 아시고, 그 곳에서도 소망이 되신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슬퍼하고, 쉬지 않고 한숨 쉬고, 범사에 절망하는 상황을 이해하신다. 처절한 절망, 여호와께 대한 마지막 소망까지 끊어진 그 자리에 주님은 정죄가 아니라 동참하신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당하심으로...
나는 예레미야처럼 본능적으로 무거운 멍에는 벗어 던지고, 흑암에서는 담을 넘어서라도 벗어나고자 하며,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다. 어떤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망갈 모든 길을 막으시고, 도움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모든 소망이 끊어져서 절망에 이르면, 그럴 힘도 없어진다. 그러면 그럴 힘도 없는 것이 낙심이 된다.
그런데 주님은 낙심하지 말라가 아니라, 그 낙심 중에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곰곰이 생각하라고 하신다. 내가 보는 관점도 인정하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라고도 하신다. 성급하게 답을 찾지 않아도 된다. 천천히, 잠잠히, 곱씹어서 마음에 담아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하신다. 성경이 말하니까, 사람들이 권면하니까...가 아니라, 곰곰이 생각한 그 끝자락에 오히려 소망이 있다고 하신다. 절망과 낙심 가운데서 곰곰이 생각한 그 끝자락에서 주의 인자와 긍휼로 진멸되지 않았음을 보라고 하신다. 만약 그 인자와 긍휼을 보았다면 아침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새로워지는 곳까지 가라고 하신다.
성경은 진리이기에 언제나 정답이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정답이니까 성경대로 하겠다고 하지 않는다. 성경도 알고, 심판도 알고, 비참함도 알고, 동시에 자신의 정서에서 일어나는 절망과 낙심도 안다. 그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통합적으로 마음에 담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예레미야처럼 탁월한 사람은 며칠일 수 있고, 나처럼 마음이 완악하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다만, 하나님이 바로 정답인 성경대로 순종하고 행하지 않고 낙심가운데서 곰곰이 생각하는 것을 잠잠히 사랑으로 바라봐 준다는 것이다.
나는 장사복음을 듣고, 너무 일찍, 너무 성급하게, 그 절망과 생각의 끝자락에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심판은 옳다’고 하면서 성전을 지으려고 한 것 같다. 하나님의 시간이 필요한데 말이다. 감사한 것은 심판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기다리고 구하였는데, 주님은 이런 나에게 선하다고 하신다. 완악하고 고집세고 악독하다고 하지 않고, 선하게 대하신다. 그리고 멍에를 벗으려 하지 말고 잠잠히 그 멍에를 매고 입을 땅의 티끌에 대라고 하신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다윗처럼 멍에를 매고 나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대기를 원한다. 내 마음을 내가 알지 못하니, 주님의 손으로 내 마음을 치유하고 만지사 겸비하게 빚어주시길 간구한다.
또 감사한 것은 주님의 본심만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세전 하나님의 약속과 십자가로 그 본심은 확증되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이 경험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본심은 영원한 진리로 내 안에 있다. 비록 주의 인자와 신실함으로 성전을 짓지 못하고 낙심가운데 내 생애가 끝난다 해도, 주님의 본심은 사랑이며, 나를 향한 생각은 평안이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해도 주님의 본심과 주의 인자와 긍휼과 신실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 평생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내 평생에 주님을 만난 것이 가장 복된 일이고, 내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은 주님을 섬긴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멍에를 매고 치욕으로 배불리며 잠잠히 겸비한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주 성령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계속해서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나타내 보이시기를 간구한다. 그리고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 묵상 기도
주님, 마음이 슬프고 힘이 없는 중에 애가 3장을 묵상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비교가 되지 않는 절망과 슬픔과 낙심 중에서도 예레미야가 정답이 아니라, 마음에 담고 곰곰이 생각함으로 오히려 소망을 보았다고 하니, 감사합니다. 저도 정답은 알지만, 정답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학의 답을 알아도 풀이과정을 잘 모르는 것처럼 주님의 본심과 복음은 알지만, 그 본심과 복음의 풀이과정을 알지 못합니다. 주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며, 알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본심, 즉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아침마다 새롭게 하시고, 나의 죄들로 인한 재난이니 절대로 원망하지 않고 잠잠히 주의 구원을 기다리게 하옵소서. 치욕으로 배불릴 수 있는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빚어 주십시오. 주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곰곰이 생각하고 묵상하도록, 그리하여 생명을 주는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서 생명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참된 부흥이요 참된 종교개혁입니다. 주님, 코로나를 거치면서 청년부가 많이 약해졌습니다. 주님이 각 청년들을 찾아가서 만나 주시고, 지금 있는 청년들과 셀장, 그리고 수험생들에게 특별한 보화처럼 돌보시고 지켜주시고 만나 주시옵소서. 주님의 주권과 은혜 가운데 주의 긍휼로 삶의 인도함을 받고, 주님을 예배하게 하여 주소서.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들로, 교회의 허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