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시차 때문인지,
어제 하루 종일 밀린 집안일을 해서 피곤해서 그런지 오늘은 조금 더 잠을 잤습니다.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로 오염된 영혼을 덮어 주옵소서.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본문 주해)
1절 :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한다. 그 이유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거짓 교사들이 할례를 행하여야 된다고 하니 그들의 말에 흔들리고 넘어간 자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바울이든 갈라디아 교인이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고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이고, 그 끔찍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 주님으로 믿어진다는 것이 밝히 보이는 것이다.
2~5절 : 이와 같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었다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되었다는 말씀이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는 것은 율법적인 행위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는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전적인 은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은혜라고 하고서는 끝에서 행함으로 결론이 내리면 이것이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기에 따르는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고 한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핍박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세력이 있기에 괴로움을 받았지만, 복음의 능력이 그보다 더 강력하기에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았는데 어떻게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적인 행위를 해야 한다는 말에 넘어가느냐는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듣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6~9절 : 바울 사도는 성경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사실은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이었는데 점점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해주신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만백성이 복을 받으리라.’는 복음을 미리 전해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했다’(8절)는 것은 아브라함이 복음을 들었다는 말씀이다. 즉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복음이라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의 복이란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되고, 성령이 임하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다.
(나의 묵상)
많은 교인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성령에 대해 오해했었다.
교회를 다니면 늘 듣게 되는 말이 ‘성령충만’이다. 그래서 ‘나도 성령충만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성령충만한 척 했던 것이다.
새벽기도에 열심을 내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모든 사역에 동참하며, 속이 부글거리지만 착한 척 마음을 누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그러한 행위들로써 나를 드러냄으로, 성령충만한 척 했던 것이다.
성령의 은사인 방언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다.
초대 교회 오순절날 모인 무리에게 임한 방언은 각 나라(지방)에서 온 사람들에게 각기 자기 나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도 확실한 기록된 성경 말씀이 있는데, 왜 굳이 방언을 하려고 애쓸까?
정말 깊은 기도를 하고 싶어서 방언을 하려는지, 아니면 남들에게 성령충만한 척 보이고자 방언을 하려는지.... 씁쓸한 마음이다.
주님 앞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복음을 듣고 생명의 교제를 하기 시작하니 말씀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의 어쭙잖은 방언하기를 멈추었다.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주님께 기도하기보다는, 확실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언어로 내 마음을 토로하는 기도가 주님 앞에 훨씬 정직한 것 같아서 좋았다.
성령의 역사는 무슨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내가 골수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저주의 십자가에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이 믿어지는 것, 이것은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도저히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성령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내게 그렇게 역사해 주셨다.
거짓 교사들의 꾐에 넘어가는 갈라디아 교인이 되지 않도록 내 눈앞에 십자가를 밝히 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 인간의 공로나 수고를 얹으려는 모든 시도를 그친다.
다만 나의 모든 행함은, 나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시고, 나타나 보이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반응일 뿐이다.
날마다 말씀의 교제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날마다 십자가에 연합되어 나를 부인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묵상 기도)
주님,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저도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령을 받게 하시고, 죄를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눈앞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