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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3:41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3:42 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3:43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추격하시며 죽이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3:44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3:45 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3:46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3:47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3:48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3:49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3:50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3:51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도다
3:52 나의 원수들이 이유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3:53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3:54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 주해
1. 그 눈은 눈물로 상하고 그 몸은 고통으로 불타던 예레미야는 비참한 예루살렘과 자신을 연합시켜 동일시한다.
1) 하나님은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서 살도록 그를 치셨다.
2) 하나님은 이 흑암에서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고 무거운 족쇄를 채우셨다.
3) 육체적 고난, 정신적 고통에 이어서 영적 재난까지 당하자, 모든 소망이 끊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마지막 소망마저 끊어진 절망의 상태다.
2. 낙심 가운데서 그는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곰곰이 생각한다.
[표준새]애 3:21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1) 완전히 망하기는 했지만 “진멸되지 않았고” 그 이유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임을 보게 된다.
애 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보자,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므로 주님을 바라겠다”고 한다.
3) 주님의 구원을 바라고 기다리는 자를 주님은 선하게 대하신다.
4)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는 겸손함으로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다.
5) 하나님의 본심, 즉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함을 반드시 알아야 하고, 또한 나의 죄들 때문에 벌을 받으니 절대로 원망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
3. 예레미야는 19-39절에서 깨닫고 고백한 것을 가지고 “심판을 내리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외친다.
1) 심판받은 백성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 그는 백성의 고통, 절망, 낙심, 여호와께 대한 소망마저 끊어진 것을 모두 경험하였다.
2) 그런 백성들에게 “무엇을 하자,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정답 같은 답답한 소리”에 불과하다. 절망이란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결정에 이른 상태다.
3) 그러나 나와 같은 마음으로 동일한 고통, 절망, 낙심에 처한 자가 “소망과 회복”의 여정을 거친 후에 하는 말이라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인다.”
4) 흑암에서 벗어나려다가 불가능하여 포기했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이 흑암에서 나가고 싶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그의 조언을 듣게 된다.
4. 예레미야는 절망 중에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곰곰이 생각한 결과 소망이 되었던 것들을 이야기 해 주면서, 우리의 죄들로 인한 벌이니 원망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호소한다.
3: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1) 이 비참한 현실만으로 숨 쉬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해 봐야 한다.
2) 부패한 사람의 마음은 우주에서 가장 잘 방어된 곳이다. 자기합리화와 자기변명 때문에 그 누구의 조사도 받는 척만 하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우리 스스로 조사하는 것조차 방어하고 방해한다.
3) 그래도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담고 곰곰이 생각한 결과 겸비한 마음으로 주님의 구원을 잠잠히 바라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행위를 조사한다면 하나님이 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위를 볼 수 있다.
5. 예레미야는 자신이 소망 가운데 소성된 것처럼, 백성들에게 우리의 행위를 스스로 조사하고, 우리의 죄들로 인한 멸망이니 원망하지 말고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외친다.
1)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멸망한다고 하였다.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2) 예레미야조차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절망하였다. 그러나 여호와의 본심과 그분의 인자와 신실함을 아는 지식이 새롭게 되자, 소망 가운데 소성하였다.
3)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을 알고, 나의 죄들과 교만을 알면 “여호와께 돌아가게 된다.”
6.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므로 여호와께 돌아갈 때,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가?
3:41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표준새]애 3:41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손을 들어서 기도하자.
1) 우리의 마음은 겸손함으로 열어야 하고, 우리의 손을 들고 회개하며 돌아가야 한다.
7. 예레미야의 절절한 절망, 그 곳에서 다시 소망으로 소성되어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하면 모두가 여호와께 돌아가고, 모두가 소망 가운데 주의 인자와 신실함으로 감사하는가?
1)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깊은 흑암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뼈에 박히는 생명의 말씀조차 단번에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2) 예레미야는 이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도 마음에 담아두고 곰곰이 생각하는 여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도 단 번에, “아하” 하면서 아침마다 새로운 인자로 나온 것은 아니다.
8. 그래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공감해 준다.
1) 비참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인자와 긍휼, 크신 신실함”이 아니라, 주님이 진노로 우리를 추격하고 죽이고 긍휼을 베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2) 주님이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심판하셨다는 것은 이미 1-2장에서 예레미야도 고백했던 것이다.
9.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손을 들어 기도하며 돌아가자”는 말도 공허하게 들림을 예레미야는 알고, 공감하는 말을 한다.
3:42 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3:43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추격하시며 죽이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3:44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3:45 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3:46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3:47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10. 예레미야는 자신이 거친 믿음의 여정이면 충분하니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 돌아가면 다 해결된다”고 하지 않는다.
1) 그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신 것”을 공감하고 동참한다.
2) 쓰레기와 폐물은 재활용되지 못한다. 긍휼은 끝났고, 기도는 무용지물이다. 오직 우리는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 밖에는 없다고 말하는 것에 동의해 준다.
11. 하나님이 “쓰레기와 폐물로 삼았는데” 무슨 소망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는 백성들에게 예레미야는 훈계하거나 정죄하는 대신에, 그들과 함께 그치지 않는 눈물을 흘린다.
3:48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3:49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3:50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3:51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도다
1) 아침마다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봄으로 소망을 회복한 예레미야지만, 여전히 “딸 내 백성”의 파멸로 인하여 그 눈에는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흐른다.
2) 그리고 이 눈물은 하나님이 그들을 살피시고 돌아볼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 아침마다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보며 주의 구원을 기다리지만, 동시에 비참한 여인들을 봄으로 인하여 그 심령은 상한다.
12. 그러면 “딸 내 백성”이라고 하면서 그치지 않는 눈물을 흘리는 것은 예레미야만인가?
1)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고 통곡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눈물이기도 하다.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여정에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와 비교도 않되는 영혼육의 고통 속에서도 주님은 주님의 고통보다는 우리의 고통을 더 아파하셨다.
13. 예레미야는 주님의 눈으로 이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하고 보면서 소망으로 나왔다.
1)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눈으로 이 현실을 보는 입장도 알고, 대변해 준다.
2) 눈에 보이는 현실, 육안으로 보는 현실은 “이유 없이 사냥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3:52 나의 원수들이 이유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3:53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3:54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14. 저 원수들이 나를 사냥하는데, 나는 그럴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이유 없이 당하는 억울한 고통이다.
1) 이유를 알면 그나마 고통을 견딜 수 있다. 이유 없는 고통이 가장 극심하다.
2) 그 고통의 결과 “이제는 멸절되었다”는 절망에 이르게 된다.
15. 예레미야는 이 과정을 다 지나 주님의 본심을 보고, 주의 인자와 신실함 안에서 잠잠히 주님을 기다린다.
1) 주님의 눈으로 보면, 깨달은 자의 눈으로 보면 자기 죄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을 “이유 없는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완악한 말이다.
2) 또한 하나님이 반드시 회복하신다고 하신 약속을 듣지 않고 “이제는 멸절되었다”고 하는 것은 불신이다.
16. 예레미야는 진짜 참 선지자요,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된 선지자다.
1) 예레미야는 백성과 연합되어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함께 절망하였기에, 그들의 관점을 자신도 그대로 느낀다.
2) 그래서 한심한 그들의 눈으로 함께 보며, 그들의 아픔에 참여하며,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린다.
3) 그러면서도 그는 생명으로 살고, 하나님의 본심을 알며,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외친다.
17. 자기 죄로 인하여 무한한 절망과 고통 속에 있는 자에게 “예레미야 같은 친구”가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1) 그리고 예수님은 예레미야처럼 우리와 함께하시는 친구이시다.
2) 이는 “십자가로 확증” 되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며, 진리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영과 혼과 몸의 모든 재난을 더 깊이 경험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3) 주님은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드렸다. 예레미야처럼 우리와 연합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주와 같은 분은 없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 나의 묵상
예레미야가 정말 좋은 선지자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친구가 있다면, 이런 목회자가 있다면, 이렇게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진리가 있고, 진리로 살면서, 어떻게 이렇게 믿음 없고, 악을 행하고, 무지한 백성들과 철저히 연합하고 그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동참하며 그들보다 더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가? 진리를 가진 자는 진리를 가르치려 하고, 깨우치려고만 하지, 이렇게 공감하고, 그치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억측같은 그들의 주장에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한다. 또한 함께 울며 고통에 참여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보는 사람은 또한 진리가 없다. 그저 사랑이면 된다고 말하면서, 진리와 공의와 심판을 알지 못한다.
예레미야가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목회자라면 성도들이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도리어 핍박하고, 끝까지 그의 말을 듣지는 않았다. 진짜 좋은 목자인데, 그 복이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렇게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백성들의 총체적인 부패와 죄들과 무지와 배척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의 짝사랑과 체휼과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예레미야가 예수님의 모형과 그림자라면, 하물며 예수님은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레미야보다 더 진하다.
주님은 나의 죄들로 인한 심판이니 절대로 원망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나의 행위를 스스로 조사하고 여호와께 돌아가라고 하신다.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곰곰이 생각하면 주의 긍휼이 없는 비참한 상황에서 진멸하지 아니하신 긍휼을 보고,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신 주님의 본심을 알면, 그의 인자와 긍휼과 신실함을 보게 된다. 계속해서 십자가 복음과 장사복음과 부활 복음을 제시하신다.
그러나 복음에 연합하여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정죄하지 아니하신다. 그것도 모르냐고, 그것도 못하냐고 정죄하지 아니하신다. 도리어 그런 나를 위하여, 그런 나와 함게 그분의 눈에는 눈물이 그치지 않고 시내처럼 흐르신다. 내가 회복될 때까지 이 눈물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도 마음이 상하고 있다고 하신다. 이렇게 답답한 나, 이렇게 완악한 나, 생명의 길을 다 제시해도 갈 수 없다고 하는 나를 정죄하지 않고 동참해 주신다. 함께 울어 주신다. 나의 죄로 인한 심판인 줄 모르고 억울하다고 하는 나의 마음에 함께해 주신다.
참으로 주님과 같은 분은 없다. 이렇게 좋은 친구가 있을까?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고, 나와 함께하고, 나를 이해해 주고, 나보다 더 아파해 주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해 주고, 나보다 더 눈물을 흘려주고, 나보다 더 억울해 하는 이가 있을까? 나를 지독히 사랑하는 나도 나를 위해 이렇게 하지 못한다. 오직 주님만이 나를 위해, 나와 함께, 나와 하나되어 이렇게 하신다. 그래서 흑암에 있어도 여전히 감사하다. 예레미야처럼 아침마다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보지 못한다 해도, 여기까지 이렇게 함께하시는 주님이 있으니 감사하다. 그 십자가 사랑을 마음을 열고 받아 먹는다. 그리고 그 십자가 사랑안에 거한다. 그 사랑을 다 알지 못하지만, 그 사랑으로 함께하시는 주님이 있어서 감사하고 좋다.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주의 이름은 영원히 찬양 받기에 합당하시다.
◈ 묵상 기도
주님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고, 주와 같은 분은 없다는 찬양이 참으로 옳습니다. 오, 하나님, 그러나 저는 그 아름다움과 그 깊고 진한 인자와 신실을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는 백성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주님, 지각의 눈을 여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주님을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를 알되 힘써 여호와를 알아, 일정한 빛같이 다가오시는 주의 인자와 신실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십자가에서 확증된 그 사랑과 공감하시고 동참하시고 체휼하시는 그 사랑도 맛보아 알게 하여 주십시오. 흑암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십자가 사랑, 주의 인자와 신실함,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마음에 담고 곰곰이 생각함으로 소망이 되게 하옵소서. 지식이 없어 망하지 않도록, 주님의 본심을 몰라 망하지 않도록, 저의 행위를 스스로 조사하고 회개함으로 주께 돌아가게 하옵소서. 두 손들고 겸비함으로 주께 돌아가는 가난한 마음으로 빚어 주십시오. 다음세대를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교육부, 신정아 전도사님과 교사들, 새소식반, 복음충신학당과 교사들을 통하여 다음세대가 주께 돌아오고, 이 지역과 각 교회마다 다음세대가 돌아오는 부흥이 있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몸된 교회와 각 성도들, 특별히 마음과 몸이 상한 성도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