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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쾃의 철학
소유권에 대한 새로운 도전
Philosophy to Squat By
The New Challenge to Property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종종 듣는 말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필요하거나 일해서 얻는 것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우리의 타고난 권리를 빼앗아 가며 목숨을 앗아가도록-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과 결핵에 걸린 사람들처럼-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신은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살기 위해 투쟁하는 삶의 신이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땅과 물은 우리 모두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쿠야 테리오(Kuya Terio), 필리핀 농부, 1976
위 짧은 글에서 쿠야 테리오는 스쾃을 옹호하고 있다.
사람들은 땅에 대한 자연권(natural right)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삶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황폐화시키고 약탈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싸움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며, 이 모든 주장은 빈 터와 빈 집으로 재산이 넘쳐나는 사람들에게 윤리적 책임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스쾃을 옹호하기 위해 다른 점을 이야기 할 수도 있다.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 사람들은 정부뿐만 아니라 집주인에게 간섭받지 않는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스쾃은 사회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문화, 공동체 그리고 고용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한다. 평등은 왜곡된 부의 분배에 변화를 요구한다.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부유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서가 아니라, 전쟁, 정복, 절도 그리고 다른 부정한 방법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이 장에서는 스쾃과 스콰터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철학적 변호를 하고자 한다.
소유를 넘어선 필요, 축적에 앞선 연민
Need over Property, Compassion before accumulation
세계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8억 4천만 명의 사람들이 만성적인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매일 11,000명-8초에 한명 꼴로-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죽는다. 새로운 주택의 건설은 세계 인구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고, 미국 대도시의 황금빛 거리 위에서도 노숙자들은 햇볕과 비바람을 막아줄 집이 없어 죽는다. 영양실조와 머무를 곳이 없어 죽음과 질병에 맞닥뜨린 제3세계의 가난한 많은 사람들은 땅을 점거하는 것 이외에는 방도가 없다.
폐품을 활용한 보드지, 버려진 잡동사니, 또는 플라스틱판으로 집을 만들고,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곡식을 재배한다. “부유한 지주들에게 /땅은 모두 팔렸네, /가난한 사람들은 매일 먹을 빵을 벌기 위한 일도 /더 이상 할 수가 없네” 브라질 마투그로수주(브라질 중서부에 있는 주 -역주)의 민요시인 사트르니노(Saturnino)가 부른 노래이다.
필요성은 스콰터를 지지함에 있어 문화적으로 무엇보다 가장 힘 있는 근거이다. 사회·경제적 인권에 대한 UN헌장은 주거에 대한 권리를 명시하고 있고, 모든 주요 종교는 자선 단체를 가지고 있으며, 불문법은 소유권보다 필요성을 우선시하고 있다. 1960년대에 필리핀의 신학생인 찰스 아빌라(Charles Avila)는 시골을 여행하면서 성경에서 영감을 얻은 영세한 농부들의 이야기를 그의 책 ‘농민 신학(Peasant Theology)'에 적고, 필요성의 정당함에 대해 늙은 필리핀 농부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록했다.
땅은 공기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삶과 노동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그냥 거기에 있던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거의 미친 짓이다. 그러나 나는 살기 위해서 태어났고, 땅과 공기 그리고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들은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중 어느 누가 그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람답게 살기위해 필요한 땅을 소유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가?
몇몇 사람들은 싸우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인다. 사회는 소유권의 이름으로 필요성을 져버리면서, 냉철한 법률주의와 공정한 보상이라는 이름으로 고유한 인간성과 연민을 거부한다. 굳은 사랑은 굳은 마음을 낳는다. 새로운 활력을 얻지 못한다면, 굳어버린 마음은 사랑, 관용, 자비가 아닌 소비자 중심주의, 물질주의, 법, 그리고 탐욕이 넘치는 죽은 사회를 위한 움직임을 거부한다. 다음 절에서, 필리핀 농부는 독실한 지주가 아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성 베드로가 거부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네가 살아오면서, 너의 집 앞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너는 그들을 돕기 위해 손가락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스스로를 신성화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네가 토지개혁을 늘 반대한 탓에, 너에게는 너를 위해 농사를 짓는 많은 소작인들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너의 마음속에는 어떤 배려도, 사랑도 없었다. 나를 떠나라. 왜냐하면 나는 배가 고프지만 너는 나에게 먹을 것을 베풀지 않을 것이므로.
해방신학자가 설명한 예수의 가르침처럼, 필요성에 대한 변호는 전적으로 사랑의 법이다. 그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애와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 가족에 대한 느낌에 호소하고 있다. 냉소주의를 뛰어넘어, 사심 없는 도덕과 학대받는 것에 대한 연민을 회복할 수 있다면, 필요성에 대한 변호는 상호간의 연민에 대한 필요성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연민을 가진 사회만이 경제적 이상과 실제 빈곤의 끔찍한 괴리를 이을 수 있다.
공정한 분배에 대한 요구: 평등의 스콰터 윤리
Demanding a Fair Share: Squatter Ethics of Equality
1974년 5월 13일, 모호크족 인디언과 그 동족의 대표단이 뉴욕의 아디론댁 산맥을 점거했다. 그들을 그 땅을 Ganienkeh라 이름 짓고, 모호크족의 통치권을 주장했다. 여러 달이 지난 후, 지역민들은 이 점거로 인해 국립공원의 휴양 기능이 방해받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역 활동가들은 그 점을 시인하였지만, 넓은 토지를 소유한 다른 지주들에 비하면 자신들의 점거는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미국의 정기간행물 ‘아켄사스 노트(Akwesasne Notes)'는 그 마을에서 Ganienkeh와 기업이 소유한 땅을 비교하였다. “다이아몬드 인터내셔널(Diamond International)은 60,000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고, 록웰 인터내셔널(Rockwell International)의 포목상부(Draper Division)는 75,000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조지아 퍼시픽(Georgia Pacific)은 63,609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고, 핀치 프루이어(Finch Pruyer)는 155,000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반면 Ganienkeh는 612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모호크족은 비난하지만 정당한 몫보다 많은 땅을 소유하는 기업들은 비난하지 않는 행락객처럼, 스콰터를 이기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비평가들은 소수가 가지고 있는 수백만 에이커에 이르는 땅은 무시하고 있다.
좀 더 평등한 분배를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땅이 없는 스콰터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주의(主義)로서 스쾃을 하는 사람들-실제로 땅이 필요하지는 않은 활동가들-역시 그렇다.
샌프란시스코 ‘Homes Not Jails(감옥이 아니라 거주할 집을 달라)’의 제레미 그라함(Jeremy Graham)은 자신의 집세를 지불하기 위한 일을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노숙인을 위해 음식과 거주지를 제공하는 일을 했다. 결국 그라함은 일을 그만두고 스쾃을 시작했다.
톨스토이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소득에 비해 더 많은 자선 기부를 한다. 굶주림과 무주택은 부유한 사람들이 이기심을 극복하는 만큼 개선될 수 있다. 그런 아량을 바라는 것이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 순진한 것만은 아니다.
1950, 60년대 초에, 비노바 비헤이브(Vinoba Bhave)는 그런 아량을 촉구하기 위해 한 인디언 마을부터 다른 인디언 마을까지 40,000마일을 걸었고, 그 주장에 지지하는 지주들이 450만 헥타르의 땅을 기부했다.
이 450만 헥타르는 특권의 양도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린 수백 명의 연합한 지주들의 아량에서 나왔다. 이와 유사한 지주들은 세계 도처에 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흑인여성(Prissy)역을 연기한 조지아주 오거스터의 버터플라이 맥퀸(Butterfly McQueen)처럼. 맥퀸은 1996년에 죽을 때 자신의 임대 주택을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주었다.
또 1996년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근처에 있는 마운트 헤르몬 협회(the Mount Hermon Association)라는 이름의 기독교 단체는 142가구가 집을 지어 살고 있는 임대지를 기증하였다.
“우리는 어떠한 재정적 이윤도 없이 자발적으로 주민들을 위하려는 협회에게 고무됐습니다.”, “아낌없고 헌신적인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대답이다. 와이오밍 주에서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매년 6월 1,200피트 높이의 ‘악마의 탑(Devil's Tower)' 밑에서 종교 의식을 치르는 동안 휴양 온 암석 등반가들이 볼트를 마구 박으며 그 바위를 오르는 것을 반대해왔다.
“등반가들이 그곳을 오르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신성한 장소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과 어긋납니다.” 파인 리지 인디언 보호구역의 존슨 할리 락(78세)이 기자에게 대답했다.
국립공원청이 주최한 수년간의 토론 끝에, 거의 모든 등반가들이 성스러운 6월에는 등반하지 않는데 동의했다. 그 결과 1994년 6월에는 1,293명이 탑을 올랐으나, 1995년 6월에는 193명만이 탑을 올랐다. 이와 같이 소수의 자발적이고 작은 양보는 아량이 명백히 존재하며 이론적으로 물질의 재분배를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불공평한 것을 뿌리 뽑고 이 세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수억 명의 비노바 비헤이브, 버터플라이 맥퀸, 마운트 헤르몬 협회 그리고 사려 깊은 등반가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1980년 세계 농지 소유자의 상위 2.4%가 전체 농지 면적의 76.3%를 차지하고 있고, 하위 82%가 겨우 면적의 8%만 차지하고 있다. 이런 불균등한 분포는 일반적인 부의 집중을 개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유엔개발계획(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에 따르면, 세계인구의 부유한 20%가 1988년 세계 전체 소득의 79%를 차지한 반면, 가난한 20%는 겨우 전체 소득의 0.5%만 나누어 가졌다. 1960년과 1988년 사이 이 불균형은 두 배가 되었고, 21세기에 들어 그 차이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1966년 30억이 넘는 사람들이 하루에 2달러를 벌지 못한 반면, 358명의 억만장자들은 세계 인구의 45%를 차지하는 나라들의 1년 치 소득을 합한 것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부의 분배를 주로 토지의 증가에 한정해 다루다면, 부자들은 1981년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은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연구가 진행된 당시보다도 감소했다. 다시 말해서, 토지는 꾸준히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있다.
이 나쁜 소식은 보여 지는 것보다 한층 더 심각하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엔식량농업기구는 토지가 없는 사람들을 계산하지 않았다. 따라서 1980년의 실제 토지 분배 상황은 나타난 숫자보다 더 불균형적이다. 코넬 대학교 농촌 진흥 위원회(Rural Development Committee)는 토지를 적게 보유하고 있는 대다수의 가정들을 ‘거의 토지가 없는 사람들(near-landless)’로 간주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토지는 생계를 유지하기위한 수단이고 그나마도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작은 토지 기반으로 가족 구성원들이 할 수 있는 건 삯일, 불완전고용, 스쾃 이외에는 거의 없다. 그처럼 ‘거의 토지가 없는 사람들’로 간주된 사람은 아프리카, 아시아(중국을 제외한), 중동, 라틴 아메리카 농가의 58.4%를 차지하고 있다.
더 나쁜 상황의 사람도 있다. ‘거의 토지가 없는 사람들’은 토지를 전혀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운이 좋은 편이다. 토지가 없는 사람들은 아프리카, 아시아(중국을 제외한), 중동, 라틴 아메리카 농가의 13.3%를 차지하고 있다. 종합해 보면, 제3세계 농가의 71.7%는 보유하고 있는 토지가 전혀 없거나 거의 없다.
집중과 강탈의 또 다른 부분은 여성의 부족한 토지 소유권을 고려하면 명백해진다. 유엔의 1988년 세계 경제 보고서(World Economic Survey)에 따르면,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각 나라 농지의 소유권은 아프리카에서 8.1%, 아시아에서 12.1%, 라틴 아메리카에서 13.6% 등 평균 13.8%-개발도상국가를 대상으로 한 수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남녀 간의 토지 불균형은 현재 평균 남성의 70%에 불과한 임금격차 보다 더 심각한데, 미국 여성들이 도시와 농촌에서 소유하고 있는 토지는 전체의 15.7%에 불과하다.
더 심각한 것은 나라마다 다른 토지이용 실태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사람들은 일인당 2헥타르의 경지를 가진 반면, 아시아 국가의 사람들은 일인당 0.18헥타르의 경지만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은 일인당 약 1.7헥타르의 경지를 풍족하게 누리는 반면, 남아메리카의 사람들은 일인당 겨우 0.44헥타르의 경지만 보유하고 있고 중앙아메리카의 사람들은 그보다 적다. 국경제한을 완화하는 것이 지역 간의 심각한 토지 불균형을 완화시킬 수도 있지만, 부유한 자유주의자들은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미국과 같은 나라의 악의적인 반 이민 정서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이민 귀화국(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Service)을 잘 통과할 만큼 운이 좋은 이민자라고 할지라도 내 집 마련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을 어렵게 하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미국의 토지와 집의 편중은 제3세계 국가의 상황과 맞먹는다. 미 국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1986년 미국 인구의 부유한 상위 0.5%가 전체 사유지의 35.6%를 차지하고, 상위 10%가 77.8%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 농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1978년 미국 인구의 80%가 토지를 전혀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 수치는 개인 당 소유 비율이므로 가구 당 소유 비율은 이보다는 높다. 그럼에도 이 80%라는 놀라운 숫자는 여성이나 청소년들이 관리하는 토지의 부족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자가 가구에 대해 자주 인용되는 가정 통계는 성별과 세대 간의 불평등한 분배를 감추고 있다.
게다가 인종 집단 간의 사유지 분배는 미국의 토지 분배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1978년의 토지 소유권 연구와 1980년의 인구 자료로 비교해 보면 비(非)히스패닉 계 백인은 인구의 77%를 차지하지만 사유지의 91%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백인이 다른 인종과 비교했을 때 1인당 토지소유 비율이 가장 높음을 말해준다. 1980년에 인구의 6.4%를 이루는 히스패닉 계는 1978년에 사유지의 0.7%만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북아메리카 원주민은 인구의 0.6%를 이루고 사유지의 0.4%를 소유하고 있었다(맨해튼 내의 얼마 안 되는 값비싼 땅).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인종 집단인 비(非)히스패닉 계 흑인은 인구의 11.7%를 이루고 있지만 사유지의 0.9%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시아인과 태평양 섬 거주민들은 인구의 1.5%를 차지하고, 가장 적은 0.1%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1인당 소유면적에서도 흑인다음으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러한 수치는 가격의 분배가 아니라 면적의 분배를 나타낸다. 그것은 가장 값비싼 땅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지 가장 싼 땅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미국 내의 일반적인 부의 분포로 보아, 위의 수치를 가격에 대해 보정한다면 좀 더 불균형한 분포를 나타낼 것이다. 소득의 불평등이 계속 커져가고, 백인이 아닌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은 시간이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자신의 땅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흑인 농가에게 저리로 대출해주는 애틀랜타의 비상상황을 위한 토지재단(Emergency Land Fund)에 따르면, 흑인의 토지소유는 1910년에 1천 6백만 에이커에서 1981년에는 3백 5십만 에이커로 계속해서 감소해왔다. 흑인들은 다른 미국인들보다 높은 인구 성장률을 나타내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땅을 잃어가고 있다. 도시로 간 흑인들은 자신의 땅을 팔고, 남부지역에 남은 흑인들은 기계화된 영농과 경쟁할 자본이 거의 없다.
미국의 다른 가난한 사람들도 불평등한 주택 분배로 고통 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필수적인 가정집의 임대를 구하고 있다. 1990년 주택조사는 백인가족의 30.9%, 히스패닉계 가족의 64%,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족의 56.2%, 아시아 또는 태평양 섬주민 가족의 47.5%, 그리고 북아메리카 원주민 가족의 45.1%가 임대하여 살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전체 인구를 들여다보면, 1990년에 거주 가구의 64.2%가 자가 가구였다. 얼핏 보기에 이러한 수치는 미국이 자가 거주자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듯 하고, 경제학자들은 평등한 주택 소유 구조의 증거로 이 수치를 인용한다. 아메리칸 드림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집을 소유한 사람들조차도 오리지널 제퍼슨식 농장주의 독립성을 잃어버렸다. 1994년, 새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한 가구당 평균 154,500달러를 지출했다. 이러한 가정이 주택 융자금 상환을 위해 평균적으로 매달 지출하는 돈은 1,028달러로 수입의 약 31%에 달하며 이 돈을 29년 동안 매달 상환해야 한다. 그러한 주택 융자에 이자를 더하면 집 가격의 두 배인 354,000달러에 달하며, 이것은 대부분의 집소유주, 심지어 중산층의 사람들에게도 평생 동안 부담이 된다.
1993년, 자가 거주자의 58%가 주택융자를 받고 있었다. 그 3천 4백 2십만 가구에 같은 해 집을 임대해서 살고 있는 3천 2백 9십만 가구를 더하면 약 73%의 가구가 은행이나 집주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미국 가정의 27%만이 온전히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미국 성인의 86%는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주택융자를 받은 사람이 자신을 소유주로 생각하든 아니든 간에, 그 사람은 집을 임대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매달 돈을 지불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한도 초과된 신용카드가 찾아오면 채무 불이행과 무주택에서 벗어나려는 한 장의 급료 지불 수표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인용된 수치들은 모두 개인 소유자들 사이의 토지·주택의 분배에 관한 것이다. 미국에서 불평등의 또 다른 부분은 공공 영역-연방정부, 주정부, 지방정부-이 소유하고 있는 미국 토지의 42%에 대한 권리의 분배에 있다. 모든 사람이 공공 자원의 혜택을 절대 똑같이 누리지 못한다. 코넬대 농촌 사회학자 척 가이슬러(Chuck Geisler)는 미국의 토지소유 불평등에 관한 자신의 연구에서, 타고난 이익 집단, 기업, 그리고 사설 휴양 복합 단지에 주어지는 숲·목초지·물·채굴권에 대한 편향적인 접근권을 포함하여 공공 토지 정책이 어떻게 부유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도움을 주고 있는지에 관해서 수많은 자료로 증명하고 있다. 한편,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관광객들이 무료 은퇴 휴양지나 고급 민간 리조트처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국립공원에도 접근하기가 어렵다. 심지어 공화당이 주도하는 1996년 의회는 환경 법규와 공공 운영을 뜯어고쳐 공공 토지에 대한 가축 업자와 벌목꾼의 세력을 키워주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스콰터-특히 땅과 집이 없는 스콰터들-를 이기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비뚤어진 소유권의 전체상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이기심을 타인에 대한 배려 없는 자신의 부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정의한다면, 부유한 지주가 많이 가진 빈 땅과 주택에 대한 소유권은 스쾃의 어떤 예보다 더 이 정의에 부합된다.
존재를 표현하는 스쾃: 스쾃을 억압하고 인간을 억압하다.
Squatting Expresses Personality:
Suppress Squatting, and You Suppress Personhood
토지와 주택의 분배가 불공평할 수 있음에도, 성경은 이웃의 물건을 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이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소유권이 필요하며 그로 인해 누군가 부유해진다면 누군가는 불평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스쾃은 소유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스쾃에 반대하는 대다수 주장과의 논쟁은 소유권을 지지하는 주장을 재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 가지 주요 주장이 소유권을 옹호하고 있다. 인성 이론(The personality theory)은 소유권을 개인의 자유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표현하고, 노동가치 이론(The labor-desert theory)은 고된 노동에서 소유권의 기원을 찾는다. 그리고 공리주의 이론(The utilitarian theory)은 소유권을 부를 조정하기 위한 가장 실용적인 수단으로 본다. 스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스콰터에 대항하기 위해 이 이론을 모두 사용하였지만 스콰터는 똑같이 이 이론을 사용하면서 맞서고 있다.
헤겔은 인성 이론을 꾸며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지 보다 더 요약하자면, 헤겔은 조금이라도 부를 소유하는 것이 자신을 나타내는데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근대의 변환기에서, 인성이론은 소유권이 개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정부의 팽창에 맞서 자유, 사익, 사생활, 보호를 보장한다고 얘기한다. 스탠포드 법학교수 마가렛 제인 라딘(Margaret Jane Radin)은 인성이론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소유권은 사람들에게 ‘뿌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기서 뿌리란 안정적인 환경, 자연환경을 둘러싼 관리의 배경, 자치권과 개인성을 길러내는 배경을 의미한다. 소유권은 개인의 소유이며, 소유권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위해 필요하다.”
소유권에 대한 현재적 이해가 틀림없이 지주-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90% 가량이 남성이다-에게는 그가 그 자신이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자가 거주자로 이루어진 가상의 국가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쉽게 표현할 수 있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는’ 집은 아마도 개인 소유의 극한의 형태일 것이다. 영국인에게 집은 그의 성이다.
하지만 스콰터, 소작인, 땅 없는 노동자에게 적용해 보면, 소유권은 자유의 본질이라기보다 지주나 은행이 사용하는 강압적인 도구처럼 보인다. 소유권은 무언가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인간성,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소유권은 지주가 임대료를 징수하고 임차인을 쫓아낼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지주의 자유는 스콰터, 소작인, 노동자들에게는 갑절이나 무거운 비자유(unfreedom)-즉, 자유의 반대-이다.
지주뿐만이 아닌 땅 없는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서 임대료를 징수하고, 쫓아내며, 자신보다 불운한 사람의 희생으로 이득을 얻는 소수의 자유를 사회는 제한해야 한다. 보수적인 소유권 이론가들이 말해온 것처럼, 평등한 자유는 개인, 사생활, 안정성, 독립성을 표현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의미한다. 스쾃과 소(小) 영농은 지주-소작인 관계보다 더 이러한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스콰터와 작은 땅을 가진 사람들-소작인이나 땅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도 충분히 풍성하게 살 수 있다. 대지주들이 소유하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땅을 점거하는 것은 사익을 추구하는 지주에게 조금 피해를 끼칠 수도 있지만, 임차인이나 스콰터에게는 삶에 기초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수 있고 나아가 삶을 회복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소유권에 대한 인성이론의 목표가 개인과 삶의 회복이라면, 집이나 땅의 점거로 자기 존재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을 늘리려는 스쾃과 이 밖의 다른 모든 노력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으로 얻은 것
I Worked For It, I Get It
할아버지가 인성이론이 스쾃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것이다. “거지같은 소리!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는 게으른 것들은 분명히 도둑놈들이야.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서 산 집을 가져갔으니, 혼이 나야할 놈들이지. 우리는 돕고 싶지만,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누구도 땅을 가질 수 없어. 더 열심히 일해야 해.”
할아버지는 응보(應報)의 가치 체계만을 가지고 있었다. 지주-덧붙여 말하자면, 할아버지 자신도 포함해서-들의 의견에 따르면, 자신들은 땅을 구입하고 집을 짓기 위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임대료를 받을 자격이 있다. 따라서 땅이 없는 사람과 소작인들도 땅을 원한다면 다른 지주들처럼 열심히 일해야 한다.
현재의 토지 집중은 과거 노동의 결과라는 할아버지의 믿음은 오랜 혈통을 가지고 있다. 17세기 근대 자본주의 초기 이론가인 존 로크는 현재 ‘소유권에 대한 노동이론(labor theory of property)’으로 알려진, 소유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를 만들었다. 로크는 도시화되기 이전의 자연에서는 사람들이 모든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했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땅에 노동력을 투입하면서 공유지는 개인 소유가 되기 시작했다.
소유권의 등장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로는 최초의 소유-‘움켜진 권리(title by grab)’라고도 알려진-에 대한 관습법상 원리이다. 최초로 소유하게 된 그는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많은 땅과 오랜 시간 동안 사회는 최초의 소유주에게만 소유권을 허락해야 하는가? 찰스 아빌라는 최초의 소유란 아이디어에 대해 극장의 예를 들며 질문하는 농부의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 단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소유했기 때문에 토지에 대한 절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정말 터무니없는 주장이지 않습니까? 그들은 극장에 먼저 들어가서 모든 공간-좌석-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며 좌석의 불균형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그는 자신이 먼저 왔기 때문에, 모든 공간에 대한 절대적인 소유주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앉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로크는 노동으로 소유할 수 있는 땅의 양에 대한 질문에 그의 유명한 단서조항으로 대답하였다. “신이 만들고 남겨 놓은 것에 자신의 노동력을 투입하면 자신의 소유가 된다. 그렇게 해서 소유권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
적어도 다른 사람을 위해 충분하고도 양질의 것을 남겨놓아야 한다(이탤릭체 표시는 저자가 한 것임).” 다시 말해서 사용할 수 있는 땅이 남아있는 한 개인은 땅을 자신의 소유로 획득할 명확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소유권에 관한 장(章)의 마지막에서 로크는 유감스럽게도 부의 집중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동과 동의의 개념에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최종 결론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이 단서조항은 스콰터를 완벽히 정당화하는 사유가 되었고 토지의 평등한 분배 역시 정당화하고 있다. 라딘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있다.
“결국 자연을 취하고 사용함으로써 비소유주가 공유물로부터 소유권을 간단히 획득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사용하지 않는 재산을 소유한 사람의 소유권에는 동의할 수 없지 않는가?” 아무튼 브라질에서 소작인 스콰터는 노동가치 이론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다. 지역의 농업 정치에 대해 수년간 연구한 수 브랜포드(Sue Branford)와 오리얼 글락(Oriel Glock)은 지역 스콰터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가구가 공정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여전히 토지법에 대해 놀랄만한 경의를 보여주고 있다. 만약 브라질의 법체계가 실망시키면 토지 소유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의 합법화에 의지한다. 그들에게 있어 아마존과 같은 점유되지 않은 지역과 불모지는 그곳을 개척하여 성과를 얻은 사람들의 것이다.
아마존 숲에 대한 이러한 원칙의 적용은 성립할 수 없음에도, 숲은 토착민들이 이미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스콰터의 관심은 유휴 농지에 쏠리고 있다.
소유권의 인성이론에 최초 축적에 대한 로크의 이야기를 결부시켜 보면, 사용하지 않는 모든 토지는 그곳에 묶여 자신의 노동력을 투입한 사람이 없는 것이므로 공유지, 또는 인류 전체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땅으로 여겨서는 안 되지 않을까? 실제 소유주든, 소작인이든, 스콰터 이든 간에 인간이 노동하고 토지에 묶여있는 한, 자신의 소유물은 아니지 않은가? 한 늙은 소작인은 아빌라의 농민신학(Avila's Peasant Theology)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땅을 경작하지 않는 몇몇 지주들이 땅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우리의 노동으로 이윤을 얻는가?”
로크의 단서조항에 대한 평등주의적 해석은 땅이 없거나 거의 없는 사람들에 속하는 제3세계 농민 가구의 71.7% 중 어느 누가 행하는 스쾃이라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로크의 의도로 되돌아오면, 토지의 부족으로 사용이 제한받는 곳, 즉, 둘 다 같은 토지를 원하는 곳에서는 토지를 나누는 것에 서로 쉽게 동의한다고 로크는 이야기 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별화된 노동력과 능력, 동의 그리고 공정한 토지 시장은 토지의 불공평한 분배를 낳았다-로크가 ‘정당하게’ 소유한 광대한 토지를 포함하여-. 로크의 이론은 불공평한 분배는 정당하고 스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지주의 믿음에 대한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스콰터에게 그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다.
무엇보다도 로크는 토지가 사적 소유물로 분할되고 난 뒤에 태어난 사람들의 동의를 다루는 데 실패했다. 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똑같은 양과 질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가? 그들은 이전 세대 보다 못한 사람들인가? 하버드 교수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이 점에 대해 그의 저서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에서 로크를 가차 없이 비판하면서, 자연 상태에서 사회화된 소유권의 혜택이 땅이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악화시켜왔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은 풍족하고 질 좋은 토지에 대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노직의 이야기가 놀랍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전 세계 인구의 14%가 기아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성적인 사람들은 아마도 대부분 현대의 고도로 집중된 토지 소유가 아닌 로크의 자연 상태를 택할 것이다. 기아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도 현재 환경 위기에 대하여 로크의 자연 상태를 택한다. 최초의 지구로! 기본적인 주거나 생존을 위한 농업을 위해 땅을 점거하는 제3세계의 많은 사람들, 세계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이들을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오늘날의 홉스주의, 치열하게 경쟁하는 자본주의 보다 로크의 자연 상태가 더 편안하고 살기 좋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워싱턴 대학의 인류학 교수 로버트 제이 웬케(Robert J. Wenke)는 근대 제도 하의 빈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인구의 3분의 2는 음식물, 질병률, 사망률 그리고 삶의 일반적인 기준이 사냥하고 무리지어 생활하는 홍적세(洪積世)와 견줄 수 있는 ‘비자발적 채식주의자’이다. 산업화가 가장 진척된 나라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선사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오랫동안 노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땅이 없는 사람들이 기아를 선택하는 것-텔레비전에서는 ‘비버리 힐즈 90210’이 방영되는 동안-이라 해도 그 선택이 불평등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노직은 우리에게 현재의 자본주의적 소유 시스템과 가상의 자연 상태를 다시 심사하여 선택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자연 상태 모두에게 바람직한 다른 형태의 토지 보유는 노직의 주장을 거부하고 스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지에이 코헨(G.A. Cohen)은 노직이 자신의 자연권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공리주의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자연권 이론이 경험주의 주장에 약점을 노출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노직이 진척시킨 순수한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토지보유 시스템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로크의 단서조항을 넘어선 그의 이론은 힘을 잃고 있다. 에콰도르의 원주민들은 ‘에콰도르원주민연맹(Confederation of Indigenous Nationalities of Ecuador)'을 조직하고 토지를 분배하는 수단으로써 시장을 거부하는 다섯 가지 핵심조항으로 이루어진 토지 개혁안을 발표하였다. "시장은 역동적인 힘으로 활동하고 많은 기업의 이윤을 증가시키지만 토지 이용을 합리적으로 분배할 수는 없다. 게다가 시장을 통제하지 않으면 토지는 몇몇 소수의 사람들 손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더 나은 토지 보유 시스템과 개혁을 필요로 하는 많은 예는 노직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불공평한 토지 분배를 정당화하는 것은 노예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당화나 군주제에 대한 홉스의 정당화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명제에서는 자유로운 상태보다 노예상태에서 더 풍족하게 산다면, 모든 정복은 정당화된다.
위의 내용을 고려해 볼 때, 로크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에도 불구하고, 로크의 단서조항은 불평등한 토지분배 상황에서 스쾃을 정당화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초 소유자에게 소유권을 주고 이후에 온 사람에게서는 모든 것을 빼앗는 행위를 유일하게 정당화 시키는 것은 최초 획득, 즉 움켜쥔 권리(title by grab)이다. 이 주장은 불평등한 자본주의 시스템과 만나면 힘을 잃고 만다. 노직은 그의 노동가치 주장을 설득시키는 데 완벽하게 실패했다. 노동을 기초로 하여 땅을 소유한다면, 그 사람은 땅을 경작하는 사람, 즉, 스콰터, 소작인, 주주, 건설 노동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멕시코전국농부연맹(The National Campesino Confederation in Mexico)은 1935년의 기본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선포했다.
“토지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것이다. ... 거기에는 날품팔이, 거주 노동자, 물납 소작인, 소규모 농부, 그 외 대초원의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포함된다.”
요즘뿐만 아니라 1935년에도 제3세계의 농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힘든 노동자로 손꼽혔다. 나는 할아버지를 일벌레로 생각하지만, 할아버지가 부동산을 사고팔면서 많은 수입을 얻은 것은 로크나 노직에게는 적게 일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간주된다. 부동산을 팔기 위해서 일을 한 건 맞지만, 전 세계 사람들의 평균 수입을 고려해 볼 때 임대로 얻는 수입은 틀림없이 일한 것에 비해서 많은 수입을 얻는다.
운이 나쁜 사람은 오랫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할아버지는 운이 나쁜 사람 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했다. 그래서 원시 공유와 소유권의 노동 이론에 대한 개념은 부재지주가 아니라 스콰터를 정당화한다. 창조주, 즉 신은 지구를 만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지주는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토지는 공유지로 출발했기 때문에 공유지로 남아야 한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토지를 사유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누군가 공유지와 유휴지에 대해 부당하게 소유권을 주장하더라도, 원시 자연 상태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스콰터는 사용할 수 있다.
땅 없는 필리핀 소작인 망 구이모(Mang Guimo)는 700헥타르를 소유하고 있는 지주 돈 호세(Don Jose)의 권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돈 호세와 내가 태어나기 전에 토지는 이미 거기에 있었고, 죽은 뒤에도 토지는 여전히 거기에 있을 것이다. 토지는 진정 누구의 것인가?” 죽음과 소유권에 대한 구이모의 생각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시 “하마트레이아(Hamatreya)"와 아주 비슷하다. 이 시에서 에머슨은 땅의 목소리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들은 나를 그들의 것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나를 통제했다
그러나 누구나 다
머물렀다가, 떠났다,
어찌 내가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으랴,
그들이 나를 껴안지 못해,
내가 그들을 껴안고 있는데
찰나의 인생, 집문서-황제의 옷과 같은-와 같은 하찮은 것들로, 일개 지주가 영원한 지구의 일부이자 아주 근본적인 것에 대한 소유권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대지는 꽃들 속에서 미소 짓는다.” 에머슨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소녀가 자랑하는 소년을 보기 위해서 /아름다운 대지, 그것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소유권은 권리의 묶음-소유권 이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이라 할 수 있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불과하며, 아무도 지구를 진정하게 소유할 수 없다는 건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아무도 땅을 소유할 수 없다면, 빈 땅을 빌리는 스콰터는 잘못된 것인가? 별반 다른 사람이 있는가? 죽음이 우리를 지구에서 데려가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아무도 땅을 소유할 수 없다. 아무도 땅을 소유할 수 없다면, 스쾃터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
소유권이 평화를 만드는가?
역사와 무관한 담장과 좋은 이웃
Property Makes Peace?
Ahistorical Fences and Good Neighbors
로크는 소유권이 평화를 만든다고 이야기했다.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이 토지를 나누어 가질 때 소유권을 통해 다툼 없이 자발적으로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소유권이 자발적인 동의에서 비롯되었다면, 스쾃은 이런 평화 공존을 손상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폭력, 억압, 심지어 혁명적인 운동 등 스쾃에서 연상되는 이런 것들은 분명히 그런 관점에 일조하고 있고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낳게 된다. 소유권이 없다면, 사람들은 이웃의 집, 땅, 심지어 국유지를 마구 사용할 것이고, 게다가 끊임없는 전쟁은 국가 간 분쟁에서 지역 수준으로 늘어날 것이다. 담을 잘 쌓아야 이웃 간에 의가 좋은 법이다.
분명히 평화를 만드는 경계 설정과 소유권도 있다. 성공적인 점거 이후, 대부분의 스콰터 운동은 집을 짓고 농사를 짓기 위해 개별적으로 땅을 재분배-그들이 사적 소유의 한 형태로 고려한-했다. 여기서 소유권이란 본질적으로 경계에 대한 상호인정이며, 경계는 개인에서 국가까지 모든 것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피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땅을 자발적으로 나누고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평화를 만들 수 있다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분배는 그 반대를 만든다. 발칸 반도에서의 인종청소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땅을 둘러싼 분쟁까지 유혈사태를 부르는 소유권 갈등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전쟁의 부재가 평화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필리핀 소작인 여성 아빌라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참된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란 소작인이 지주에게 굴복하는 것과 같은 죽은 평화가 아니라, 살아있고, 투쟁과 갈등을 수반하는 역동적인 것이다.”
이 소작인에게 평화는 갈등의 부재라기보다 마음가짐에 달려있는 것이다. 평화는 정의 또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투쟁과는 별개로 느낌 또는 마음의 상태이다. 소유권의 배경은 소유권이 평화를 만드는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1914년 그의 시 “담장고치기(Mending Wall)"에서 재밌는 속담을 만들었다. “담을 잘 쌓아야 이웃 간에 의가 좋은 법이죠.”
담장을 쌓기 전에 나는 알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안쪽으로, 혹은 바깥쪽으로 담을 쌓는지.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지를.
담장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있어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 이지요
프로스트는 담장이 이웃 간의 관계를 증진시킬 수 있다는 데 동의하기에 앞서 담장의 특성에 대해 묻고 있다. 담장의 특성-평등 또는 불평등, 강요 또는 동의-은 담장이 평화를 증진시키는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소유권의 법적 체계는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를 낳고 불평등한 분배는 다시 반감을 낳는다. 땅이 없거나 거의 없는 사람은 넓은 땅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담장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의 공간은 거의 없거나 없게 된다. 좋은 담장은 좋은 이웃을 만들지만, 나쁜 담장은 나쁜 이웃을 만든다. 불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담장과 폭력은 더 많은 폭력을 부르지만,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담장과 합의는 평화로운 환경을 만든다. 당연히 스쾃은 갈등을 낳으며 그 갈등은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해결책은 은폐 속에서 찾기가 어렵고 이러한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묻게 한다. 갈등 그 자체(스쾃)와 토지와 주택의 불평등한 분배, 어는 것이 도적질인가?
땅이 없는 스콰터는 언제나 최초의 토지 강탈에서 갈등의 기원을 찾는다. 집 없는 치페와 인디언, 제시 존 로 화이트클라우드(Jesse John Roe Whitecloud)는 강과 조세핀 거리에서 일어난 1992년 산타 크루즈 홈리스 연합의 점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과거를 인용하였다.
나는 이 망할 나라를 소유하고 있다. 나는 줄곧 여기서 살아왔는데 어떻게 그들이 나에게 집이 없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그들은 나의 땅을 뺏어갔고 지금은 나의 집을 뺏어가고 나서 내가 내 땅에서 잘 수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곳은 항상 내 것이었다.
역사는 변함없이 스쾃을 일으키는 갈등거리-인구의 대다수를 가난하게 만든 폭력적인 토지 강탈과 불공정한 경제 시스템-를 드러내고 있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소유권의 특정 부분은 노동이 아니라 폭력 또는 도둑질로부터 발생했다는 사실과 불평등한 소유는 평화가 아니라 폭력을 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이 행하는 스쾃은 이해 가능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정의와 평화공존을 위해 궁극적으로 필수적인 것이 된다.
역사는 사건을 푸는 실마리가 된다. 대중적인 스쾃 운동은 지주가 훔쳐간 소유권을 되찾는 정당한 소유자로 스쾃을 묘사하면서 이점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쿠바에서 아바나 주변의 스콰터를 부르는 속어는 palestinos, 즉 '팔레스타인(Palestinians)'이다. 쿠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과 같은 스콰터를 시골농장에서 부당하게 쫓겨난 사람들, 대의명분을 위해 난민 수용소에서 힘든 조건을 견디며 싸우는 사람들로 생각한다. 푸에르토리코에서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스콰터들은 자신들을 rescatadores, 즉 '구조대원들(rescuers)'로 묘사했다.
사파티스타 운동 기간 멕시코 소작인들과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많은 스콰터들은 자신들의 점거를 “토지 회수” 또는 “토지 회복”으로 번역한 recuperaciones de tierra라고 불렀다. 이러한 언어는 ‘회복하는 사람’이 정당하게 소유한 토지를 훔쳐간 실제 도둑으로 정부, 식민지 이주자, 대지주, 외국 기업을 지목하면서 투쟁을 역사화 한다.
당신은 “농부는 이러이러한 땅을 침해하고 있다.”는 글을 본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땅을 침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법적으로 우리에게 속한 땅을 되찾는 것이지만 대지주나 외국 기업들로부터 침해받고 있다. 그들은 침략자다. 우리 가족에게서 땅을 뺏어간 그들이 옳은가?
온두라스 엘비아 알바라도(Elvia Alvarado) 점거를 다룬 신문이 사실을 왜곡한 것처럼, 기자, 지주, 정부기관은 “점령”, “탈취”, “강탈”, “침입”과 같은 단어를 써서 스쾃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려 애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사실과 무관하다. 토지 경계를 넘은 범죄임을 강조하면서, 폭력적인 이미지를 덧씌우고 있다.
1964년에 처음 출간된 ‘도시화된 세계에서 집을 위한 인간의 투쟁(Man's Struggle for Shelter in an Urbanizing World)’이란 책에 실린 찰스 에이브럼(Charles Abrams)의 글은 이러한 의도의 언어를 두드러지게 사용하는 예이다.
인간의 역사는 대지를 통제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다.
정복, 즉 힘으로 소유권을 획득하는 일은 좀 더 무자비한 수단 중 하나이다. 농촌에서 도시로 밀려오는 인파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정복이 개발도상국의 도시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스쾃이다. 스쾃은 천국을 찾아 떠도는 땅 없고 집 없는 사람들이 행하는 토지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 명예, 교역로, 자원을 얻기 위해 추진되는 다른 형태의 정복과는 달리, 스쾃은 집과 땅을 위한 무모한 싸움이다. ... 군사 작전을 펼치는 것처럼, 일부는 새로 설치된 게시판 뒤에 물건 따위를 쌓아놓고 밤새 노숙을 한다. 다음날 보면 새로 생긴 낡은 집들이 줄지어 있고, 그 집은 계속해서 생겨나는데, 이것은 도로나 수로 혹은 피 흘릴 각오가 되어 있는 소유주에 의해 저지당할 때 까지 계속된다.
에이브럼은 스쾃을 대체로 싸움과 정복으로 설명하면서 스콰터를 침략자로 묘사하고 있다. 에이브럼에게 스콰터는 침략자이며 문명 세계-도로나 수로-가 제지할 때 까지 공격하고 침략하는 무시무시한 군대이다. 반면 “피 흘릴 각오가 되어 있는 소유주”는 대부분 정당한 것으로 비춰진다. 침략과 탈취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미디어는 스콰터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고 미묘한 방법으로 대중에게 폭력 진압은 정당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노직을 따르는 많은 활동가들이 소유권의 역사가 현재의 분배 상태를 어느 정도까지는 결정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침략’이 ‘회복’보다는 스쾃을 좀 더 정확히 묘사한다고 여긴다. 모든 대지주들이 실제로 힘든 노동과 합의를 통해 부를 얻었다면, 나의 할아버지, 로크, 노직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집과 땅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노직은 다음과 같은 이론을 세웠다. “개개의 사람들이 획득한 것, 그것은 다른 사람과 무언가를 교환해서 얻은 것이거나 선물로 받은 것이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자원을 관리하고 있고, 개인의 자발적인 교환과 행동으로 새로운 소유가 생겨난다.” 노직은 계속해서 이야기 한다. “현존하는 사회는 공정했던 실제 역사가 이끌어 온 것이다.”
스쾃으로부터 소유권을 보호하는 이 기본적인 이론을 시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공정한 분배에 대한 노직의 매우 공정한 기준-소유권의 기원과 이전의 개입 단계-을 사용할 수 있다. 최종 분배가 공정할 수 있도록 각 단계는 공정해야 한다. 노직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합법적인 수단으로 또 다른 공정한 분배가 생겨난다면 그 분배는 공정하다. 합법적인 첫 ‘이동’은 획득에 있어 공정의 원칙에 의거하여 명기된다. 공정한 단계를 통한 공정한 상황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은 공정함 그 자체이다.
노직은 공정의 원칙이 어떻게 실제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남겨놓았다. 캘리포니아의 핏 리버(Pit River) 부족은 1853년까지 3백 2십만 에이커-이주민들이 19세기 캘리포니아 인디언 인구의 90%를 대량학살 했을 때 캘리포니아 인디언으로부터 빼앗은 6천 4백만 에이커의 일부-의 땅을 잃었다. 그 부족은 1959년 미국인디언권리위원회(U.S. Indian Claims Commission)가 땅 대신에 주는 정착금을 거부했다. 현재 그 땅의 대부분은 P.G.&E.(Pacific Gas and Electric)를 포함한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다. 위원회가 땅의 작은 일부라도 되돌려 주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핏 리버 부족은 1970년 6월 4일, P.G. & E. 야영지를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논쟁 중인 P.G.&E. 야영지를 누가 소유해야 하는가? 도둑은 ‘부정하게 얻은 것’에 대한 자격이 없다고 노직은 이야기 했다. “소유에 있어 공정함이란 역사적인 사실이며, 실제 있었던 일에 의거한 것이다.” 핏 리버 부족으로부터 6천 4백만 에이커의 땅을 빼앗은 도둑이 소유권 이전 과정에서 공정하지 않았다면, 그건 불공정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어떠한 소유주의 권리를 추적하여 불법적인 소유권 이전을 찾아냈다면, 그 땅을 정당한 권리를 가진 소유주나 그 소유주의 상속인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필리핀 소작인 망 파비오(Mang Fabio)는 1976년에 자신이 토지를 빼앗긴 상속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신이 돈 호세(Don Jose)와 지주에게만 땅을 주었다는 기록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면 지주는 지금 가지고 있는 땅을 어디에서 얻었는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 그들은 땅을 어디서 얻었는가? 그들도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 그들의 선조 지주로부터 얻은 사람은 누구인가? 하지만 친구, 토지 소유권의 기원을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실제로 누군가 우리의 선조에게서 폭력으로 땅을 빼앗은 시점에 도달하게 된다네.
노직은 여러 세대가 지난 뒤라 할지라도 불공정한 분배는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간은 불공정함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특히 현 소유주가 원 소유주 자손의 피폐에 의존하여 계속 이득을 취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노직과 많은 지주들이 가진 문제점은 토지와 소득의 세계적인 불공평 분포를 만들어낸 대규모의 부정행위를 시인하지 않는 것이다. 소유권의 폭력적인 역사로 미루어 보아, 노직은 획득과 이전에 관한 그의 원칙을 기록된 역사에 어떻게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적용이 어렵다면 현재의 소유권 분포는 합법적인 권리가 아니며, 합법적이지 않다면 지주는 스콰터에 대항하기 위한 보호책으로써 소유권의 신성함을 확실하게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스콰터는 현재의 대지주들은 과거의 불공정한 폭력과 강탈의 수혜자이며 빼앗은 토지의 상당 부분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토지와 주택에 대한 거의 모든 사회운동이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불공정함에 대해 어느 정도 지각하고 있고, 세부적인 사실에 대해 광범위하게 조사하는 구성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지금 치키타에 대항한 Tacamiche의 예에서 실제 있었던 세부적인 사실에 대해 알고 있다(2장의 내용 -역주). 하지만 토지강탈과 불평등한 토지 분배의 오랜 역사는 일반적으로 스쾃을 정당화하고 있다.
루소는 불평등한 분배가 폭력의 사용에서 기원하였다고 믿었다. 치키타 토지에 대한 스쾃으로 쫓겨난 Tacamiche 농장 노동자 중 한명은 사적 소유권에 관한 동일한 유래를 이론화했다. 처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농부가 어떤 지역이 가장 비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정착한다고 Tacamiche는 말했다.
잠시 후 어떤 사람들은 일하는 게 지긋지긋해졌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해 일하도록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 하게 되었다. 그들은 가장 좋은 땅을 장악하였고 땅이 없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힘들더라도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사적 소유권이라고 불려졌다.
이와 같이 로크와 노직과는 반대로, 오늘날의 토지 불평등의 합법성을 문제 삼고, 현재의 소유권은 불평등을 위한 폭력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소유권에 맞서는 이론이 있다. 토지 소유의 기원이 동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폭력에 의한 것으로 규명된다면 현재 대지주의 소유권은 공정하지 못한 사기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로크가 동의에 의한 소유권의 기원을 이론화할 때처럼, 루소와 Tacamiche 농장 노동자가 이론화한 폭력에 의한 소유권의 기원도 추측한 것이다. 실제로 소유와 불공평한 분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기원전 10,000년에서 6,000년 사이 신석기 시대에 농업과 함께 토지의 소유가 시작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초기 농업은 수렵 채집민 사회의 일시적인 목축생활보다 좀 더 정주적인 문화를 탄생시켰다. 초기 ‘복잡한 사회’, 즉,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인더스 계곡 문명, 잉카, 마야, 모두 농업이 발생한 뒤에야 번성했다. 농업의 보다 큰 안정성은 부의 축적과 반영구적인 주거를 가능하게 하였다.
힘든 노동 또는 폭력으로 시작된 복잡한 사회가 구성되는 시기에 불평등이 존재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고대인들은 고고학 기록을 거의 남겨놓지 않았고 둔기로 맞은 흔적이 있는 두개골 외에는 사회 조직에 대한 단서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선사 시대 이후의 사회조직에 대해 좀 더 믿을만한 것들은 단편적인 문자언어로 발견되었고, 그것은 잘 알려진 대로 불평등의 바탕에 폭력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윤리적으로 볼 때 역사적으로 토지의 사적 소유는 약탈이다.”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에서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주장하고 있다. “사적 소유가 계약에서 발생한 곳은 없다. 정의 또는 편의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는 곳은 없다. 모든 곳에서 사적 소유는 전쟁과 정복을 통해, 이기적인 사용을 통해 나타났고, 교활함은 불합리한 고정관념과 법을 만들었다.” 조지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폭력에 의해 단절된 ‘토지에 대한 초기의 평등한 권리’를 보았다. 이후 지도자와 군사 계급은 전쟁으로 자신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전쟁을 통해 공유지를 독점하여 나누어 가졌으며, 사로잡은 사람들은 농노 계급으로 만들어 버렸다.
초기 그리스와 로마 사회는 토지 분할을 가족 내에서 가장 힘센 남성이 결정을 하였다. 로마황제는 이웃 마을의 토지를 정복하여 로마 상류층에게 나누어 주었고, 서기 4~6세기 사이 게르만 민족은 로마를 공격하여 자신들의 땅을 찾았다. 중세 시대 봉건 지주는 고문과 죽음의 형벌을 가진 법으로 농노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였다. 유럽에서 인클로저 기간 동안 일어난 지방의 지나친 인구 감소는 가구 전체를 강제 추방하고 농부들의 자발적인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식민지 제국 시기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중동에서 절대적 토지 소유라는 서구적 개념의 강요는 군대를 동원하여 주민을 탄압하고 추방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역사는 폭력 없이는 토지의 불평등한 분배란 존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나간 일: 불법 점유와 과거의 혼란?
Water Under the Bridge:
Adverse Possession and the Drowning of the Past?
고대 그리스부터 후기식민주의 사회까지 폭력, 타락, 절도는 토지와 부의 분배를 훼손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철학자와 법학자들은 과거의 불공정함은 지나간 일이라고 얘기한다.
그들은 불법점유에 찬성하고 있다. 스콰터에게는 어느 쪽으로도 이해되는 원리이다. 현 점유자는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땅을 점유했지만 오래전에 한 일이라는 이유로 그 책임을 피해가고 있다. 원 소유자의 권리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야 하지만, 공소시효가 과거를 청산한 이후 현 소유자는 정당한 소유자가 되었다. 현 소유주는 자신의 토지-그것이 누군가로부터 빼앗은 것이란 사실은 알지 못한 채-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여길 수도 있먰, 존 웨인 영화의 영향을 받아 심지어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를 쫓아내기 위해 관념적인 역사 정의를 수호하는 것은, 철학자들이 얘기하듯이, 더 큰 피해를 초래할 수도 있다.
불법 점유 법은 이론상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스콰터를 지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보다는 과거의 불법 행위로 권리를 얻은 경우에 지주가 행한 불법 점유의 책임을 묻지 않는데 이용되고 있으며, 불법 점유는 이제 경제학적 의미를 가진다고 이론가들은 말한다. 권리 박탈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장기간 투자를 할 수 있도록 점유자를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시카고 법학대학 교수 리처드 엡스타인(Richard Epstein)은 이렇게 주장한다. “끊임없는 공격으로부터 합법적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오래된 합법적인 주장을 금지하는 일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강압적이고 빠른 해결책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은 엄청난 사회적 이익을 낳으며 모든 사람에게 더 좋은 방식이다. 따라서 제한을 가하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더 낫다.”
여기서 당신은 치키타의 칼 린드너(Carl Lindner)가 Tacamiches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는 2장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온두라스 정부, 비즈니스 사회, 그리고 다른 많은 사회 영역은 Tacamiche 상황이 지속될 때의 토지 침범, 나아가 잠재적인 위협에 대해 심각한 근심을 표명했다.” 즉, Tacamiches가 토지 점거를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온두라스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땅을 점거하려 할 것이란 주장이다. 최근에 일어난 가장 명백한 불법적인 사례에서 조차 그 책임을 묻지 않는 전례가 만들어 지고 있다. 브라질에서 그들은 그것을 코파카바나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원주민의 땅은 어디든 될 수 있다. ... 원주민에게 이 지역을 제공한다면, 다음번에 그들은 코파카바나 해변을 원할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코파카바나를 원주민에게 돌려주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유권 이론가들은 어떤 형태의 토지 반환에도 반대했다. 그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은 혼란과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다. 엡스타인은 그 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대규모 토지 반환을 시도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기 보다 더 많은 혼란만을 가져오는 일이다. 아주 큰 빨래를 하는 것처럼 모든 잘못을 한 번에 바로잡으려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엡스타인의 ‘아주 큰 빨래’는 그의 공리주의적 주장을 뒤집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쾃은 국가 경제에 직접적으로 공리주의적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엡스타인은 현재의 분배 상황을 바로잡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1995년을 기준으로 8억 4천만 명이 굶주리고 10억 명의 사람이 실직상태이거나 불안정한 고용에 시달리는 세계가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 토지, 주택과 관련한 대부분의 직접 행동은 비어있는 토지와 주택을 점거하고 그것의 가치를 높이며 생산적인 자산으로 만들어 경제활동에 편입시킨다. “‘범죄자’들이 생산적이고 권리 소유자들은 비생산적이라면,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범죄자’들은 정말 나쁜 사람인가?”라고 라딘은 묻고 있다. 스콰터는 국가의 실질국민총생산을 감소시키기는커녕 실업률을 떨어뜨리고, 주택 재고를 늘리며,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스콰터와 자유로운 형태의 생산 없이는,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 대다수는 자선행위에 의존하거나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엡스타인과 다른 소유권 이론가들은 이러한 땅 없는 사람들이 조용히 죽기를 바라는 것인가?
엡스타인은 현 소유주들이 자신의 토지가 누군가로부터 빼앗은 것이란 사실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현재의 소유주는 소유주로 남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토지를 제외한 다른 어떤 재화에 대해서도 그런 주장을 받아줄 법정은 없다. 어떤 사람이 도둑맞은 작품을 모르고 구입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무지가 도둑맞은 사람의 권리로부터 부정하게 얻은 수익을 보호해주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지주는 오래전에 토지 구입 가격보다 많은 수익을 올렸다. 필리핀 소작인 아빌라는 이렇게 말했다. “지주들이 설사 백 년 동안 토지에 투자했다 하더라도 지금은 투자액을 벌써 회수했다는 사실-두 배 정도가 아니라 백 배 이상으로-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어떤 지주가 도둑질한 땅을 구입하고 구입 가격을 갚기 위해서 그 토지로 충분한 수익을 올렸다면, 자신의 땅에 스쾃이 있은 뒤 보상을 주장하는 일은 정말 웃기는 일이다. 게다가 지주가 원래 구입 가격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면, 땅을 도둑맞은 사람들은 지주에 대하여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엡스타인은 개인적 권리의 불법 행위를 추적하는 심문과 소송은 법적으로 매우 부담이 따르는 일이라고 얘기하지만, 대부분의 불법 행위는 지난 백년 또는 수년 내에 일어났고 피해자들은 증거 서류를 가지고 있다. 초기 피해자의 자손들이 불법 행위를 한 특정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면 엡스타인의 주장은 전적으로 틀린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에 잊혀진 불법 행위라 할지라도, 집단적 행위(인종 차별, 성 차별, 정복 전쟁 등)가 사회에 가져온 이득과 피해에 대해 우리는 알고 있다. 법정은 이러한 불법 행위를 바로잡기 위해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집단 소송을 할 수도 있고, 사회운동은 이러한 역사적 근거를 잘 사용해 왔다. 보수적인 노직도 과거의 불법행위는 거시적으로 보면 시정되어야 한다고 마지못해 시인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은 땅을 잃어버려 고통 받는 반면 부유한 유럽계 미국인들은 이득을 얻었다. 범죄와 고통을 저지른 실체는 여전히 집단적으로 존재하고 집단적으로 과거의 영향을 받는다. 부유한 집단에서 가난한 집단으로 부를 이전하는 일은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사회의 출발점이다.
과거의 잘못을 덮어두는 것은 미래의 잘못을 조장하는 일이다. 1940년대 말 전범 재판의 원칙은 1990년대 말 인종청소를 처벌하기 위한 법에 반영되었다. 과거의 폭력을 내버려 두는 것은 비폭력적인 스쾃이 행한 어떠한 불법 행위보다 더 사회에 해를 끼친다. 과거에 일어난 토지 강탈을 바로잡아야만 오늘날의 토지 강탈과 뒤따르는 폭력을 막을 수 있다.
문화, 이웃 그리고 스쾃
Culture, Neighborhood, and Squatting
스콰터의 정착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주거를 제공하고 우리 모두에게는 역사 정의를 가져다주지만, ‘제3세계’ 이든 “제1세계” 이든 간에 부유한 마을 사람들은 거리의 범죄와 마약에 대해 불평한다. 예전에 만났던 어떤 사람은 스쾃이라고 하면 자기 집 옆에서 코카인을 취급하던 다 쓰러져 가는 집을 떠올린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이러한 스콰터-집 주변에 쓰레기를 방치하고, 이웃을 위한 방음장치는 소홀히 한 채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하는-에게서 위험을 느꼈고, 거리의 범죄를 걱정하게 되었다.
이런 마을의 사람들이 얘기하는 스콰터에 대한 불평은 수긍할 만한 것이다. 아직 스콰터를 추방한 것은 스쾃 자체가 반사회적인 행위라고 설정했다기보다 일반적인 반사회적 행위에 영향을 별로 끼치지 않는다.(Yet evicting squatters has less of an effect on general anti-social behavior than does targeting the anti-social behavior itself.) 스콰터가 다른 이웃들 보다 땅을 어지럽히고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하며, 또 무언가를 도둑질한다면, 그 자체로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두 명이 반사회적 행동을 한다고 해서 스콰터 가족 전체를 내쫓는 것은 개인 범죄에 대한 집단적 처벌을 금지하고 있는 기초적인 법리를 위반하는 것이다.
도시의 스콰터 대다수는 코카인을 취급하지 않지만, 좀 더 부유하고 안정적인 이웃들은 집을 비워두는 투기꾼들에게 집을 팔기 때문에, 스콰터라고 하면 부동산 가치의 하락을 연상한다. 하지만 스콰터가 부동산 가치를 떨어뜨린게 아니라 부동산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에 스콰터가 들어온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큰 스쾃 본부 중 하나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스콰터 모집을 결정한 한 마을 조직에서 출발하였다. 1982년 뉴욕에서 마을 조직으로 출발한 ‘개혁을 위한 공동체 조직 연합(ACRON: The Association of Community Organizations for Reform Now)'은 범죄율을 줄이고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드는데 힘을 쏟고 있다. 마을의 집과 땅을 버려두는 것은 세금 체납을 발생시키고 정부가 건물을 탈취하게 하였으며, 집과 땅을 비워둔 채로 방치하는 투기꾼들에게 세금 체납 건물의 경매를 발생시킨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빈 건물은 마약 밀매와 범죄를 끌어들였고 대부분 코카인을 파는 곳이 되었다.
ACORN은 첫째로 투기꾼들에게 건물을 파는 것을 막기 위해 시에 압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저소득 가정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건물의 소유권을 갖는 도시 정주 장려 정책 프로그램을 시도하였다. 시정부가 거절하자, ACORN은 마을로 이사 올 스콰터를 구하는 광고를 냈다. 스콰터 수십 가구-대부분이 라틴 아메리카 사람-가 이사를 왔고 부서진 집을 수리하였다. 한편 ACORN은 시를 압박하여 마침내 1987년 스콰터의 차용권을 합법화하는데 성공했다. 콜롬비아 대학 사회학 조교수 에릭 허쉬(Eric Hirsch)와 뉴욕시 공동 주택 연합(the Mutual Housing Association of New York) 전무이사 피터 우드(Peter Wood)는 ACORN 운동과 스쾃을 마을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 뉴욕의 저소득 주택 재고를 늘리는 중요한 방법으로 기술했다.
낡은 주택을 수리하는 것이 새로 건설하는 것보다 일반적으로 저렴하다. 하지만 건물이 빈 상태로 있다면 여러 사회 요소로 인해 파괴되거나 낡을 것이고, 결국 수리비용이 너무 비싸져서 다시 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ACORN은 살기 좋은 마을을 위해 고도록 조직된 스콰터 운동을 육성했지만, 창문에서 합판을 제거하고 그곳에 누군가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뿐이었다. 반면, 조직되지 않은 스콰터들은 지역의 이미지와 주변 집들의 부동산 가치마저 향상시켰다. 스콰터가 마을에 오래 살고 자리를 잡을수록, 스콰터는 이웃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며, 황폐한 집과 빈 터를 지나야 하는 보행자들에게 더 큰 안정감을 준다.
스콰터가 마을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또 다른 선물은 인종 간 장벽을 허문 것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콰터 아이샤 스톤(Aisha Stone)은 초기에 자신의 백인 ‘스쾃 친구들’은 흑인 이웃들과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동체 프로젝트를 통해 그들은 결국 서로를 존중하게 됐고 화목한 사이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이웃들의 태도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마을에 이사 온 백인들처럼 스쾃 속의 타인들로 보지 않았다. 우리는 나가서 거리를 청소하기로 했다. 그때 경찰관이 왔고 경찰관은 우리가 스쾃 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괴롭히기 시작했지만, 이웃들이 와서 내버려두라고 이야기 했다. 지금도 우리는 거리를 청소하고 있다.
부서진 집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스쾃이 이웃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주장은 책임감 있고 소통하는 스콰터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틀렸다고 생각된다.
제3세계에서 도시지역의 스쾃과 대규모의 조화로운 농지 점거는 마을을 개선시키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빈 땅에서 새로 마을을 만든다. 그리고 추방이나 토지 수용에 저항하는 이전 소작인이나 자가 거주자의 경우에는, 마을 공동체가 지주 또는 정부에 저항한다. 공항 건설에 반대한 일본의 산리츠카 투쟁과 군사 기지의 확장에 반대한 프랑스 라르착 농부들의 투쟁은 추방에 저항함으로써 권리 강탈에 저항한 공동체의 예이다.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많은 개별 지주들은 마을의 파괴에 애쓰기도 한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은 고소득층의 뜻대로 저소득층을 도시 전역에서 점진적으로 추방하는 것이다. 루스 글래스(Ruth Glass)는 1960년대 영국 상류층이 낡은 건물을 사들여 새롭게 수리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gentrify’라는 용어를 1964년에 처음 사용했다. 오랫동안 살기에 적당한 수준을 넘어서 집세를 올리려는 지주 때문에, 내가 예전에 살던 샌프란시스코 미션 지구(Mission District)의 한 마을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고 있고, 젊은 구미인(歐美人)이 치카노(멕시코계 남자 미국인 -역주)와 멕시코 공동체를 대신하여 들어서고 있다.
자본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해칠 수 있는 곳에서, 사회는 임차인을 보호해야 한다. 산리츠카에서처럼 정부가 토지 수용으로 주민을 위협하는 곳에서 사회는 자택 소유 거주자를 보호해야 한다. 지주가 건물을 방치하여 거주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곳에서 사회는 스콰터를 보호해야 한다. 부유한 나라의 도시 펑크족들에서 브라질의 토착 인디언에 이르기까지 스쾃과 토지 투쟁은 주민을 보호하고, 초기 또는 멸종할 위기에 처한 문화의 출현이나 재현을 위해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게으른 스콰터들: 방탕한 젊음의 예
Lazy Squatters: The Case of Dissolute Youth
할아버지의 주장에 따르면 스콰터는 토지나 주택을 구입할 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둑질하는 것이다. 게으름과 개인적 결점이 그들을 스쾃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부한 주장은 많은 부분에서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분명히 제3세계의 스콰터 대부분은 비옥한 평지가 아니라 산중턱의 바위투성이 땅과 사막에 가까운 건조한 모래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스콰터는 예측할 수 없는 날씨뿐만 아니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추방과도 맞서 싸워야 한다. 리고베르타 멘추(Rigoberta Menchu)는 과테말라 알티플라노에 무단 점거하여 살았다. 그녀와 그녀가 살았던 공동체를 게으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돌아온 탕아를 부지런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배고픔과 싸워 살아남기 위해 가장 어린 아이조차 세탁, 채굴, 씨뿌리기, 잡초제거와 같은 일을 오랜 시간 동안 해야 했다. 지주들이 그 공동체를 추방하려 할 때 그들은 정치 조직화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했다.
제3세계의 스콰터를 게으르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노동과 사회에 대한 많은 기여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게으름에 관한 주장은 얼핏 보기에 좀 더 부유한 나라의 도시 지역에서는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뉴욕 타임즈의 편집장은 1995년 5월 뉴욕시 13번가 동쪽에 있던 스콰터를 추방하는 데 지지했다. 뉴욕시가 비영리주택 제공자로부터 주택을 구입한 뒤 그것을 다시 세금명부에 올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소득 가구를 위해 주택을 수리하는 지역 사회 단체가 더 많은 건물에 접근할 수 있다면 주택 문제는 크게 개선될 수 있다. 하지만 스콰터가 살지 않는 다른 수백채의 건물을 제공할 수 있었음에도 스콰터의 추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시 정부는 이런 핑계를 너무 자주 대고 있다. 뉴욕 타임즈가 주장한 대로 스콰터가 쫓겨난 이후 그 집에는 뉴욕 경찰 당국이나 시 재정의 도움 없이 지난 10년간 집을 수리해온 저소득 개인과 가정이 살았다.
시 정부는 스콰터를 쫓아낸 건물에 조만간 사람이 살게 될 거라는 보장은 하지 않았다.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인터내셔널 호텔 앞에 수백 명의 필리핀 소작인들이 모여 추방에 항의했지만, 지주는 건물을 개조할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1977년 지주는 결국 소작인들을 내쫓았고 재건축을 위해 건물을 헐어버렸다. 그곳은 이제 쥐가 들끓게 되었고 악취 나는 구덩이만 남았다. 가난한 사람을 쫓아내는 일이 어떻게 사회에 이로운 일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세원을 늘리고 고용을 증가시키는 일인가?
뉴욕 타임즈는 사설에서, 스콰터는 너무 게을러서 낡은 집을 수리하지 않고, 지주에 대한 이익, 지방 정부에 대한 재산세, 은행에 대한 담보 대출 이자를 지불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여기서 스쾃에 대한 보수적인 주장의 요점-스콰터는 방탕한 삶을 살고 있으며, 그들은 진짜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을 알 수 있다. 1987년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에 실린 기사에서 피터 웨버(Peter Weber)는 뉴욕 주 맨해튼 남동지구 스콰터를 정치적인 딜레탕트(political dilettantes), 마약 복용자, 도둑, 어른스럽지 못하며 ‘절대 가난하지 않은’ 사람으로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풋내기, 대학생 또래, 백인이며, 주택문제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뉴욕 대학교]의 강의나 정말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가 제공하는 음식을 먹기 위해 달려든다. 그들 중의 한 젊은 여성은 가죽옷을 입었고 귀에는 화려한 플라스틱 거미를 뽐내고 있었다. 사년간의 대학생활, 이탈리아에서의 생활, 기업체 일자리 등을 그녀는 포기했고 9일 동안 샤워를 하지 못했다. ... 그녀는 주변에 있는 다른 아이들이 하는 일을 한다. 그건 아마도 나이트 클럽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마약을 복용한다.
웨버의 묘사는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다. 스쾃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가 소유, 세금, 풀타임 고용이 없는 생활을 하게 한다. 하지만 웨버는 이런 생활을 전적으로 비생산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음악, 미술, 정치적 행동주의를 통해 대안적인 문화의 생산에 자기 시간을 무보수로 바치는 사람들에게 사회에 기여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처럼 들린다. 스콰터는 평범한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정치적 운동, 음악 밴드, 예술가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 스콰터는 대안적인 생산 형태를 국내총생산(GDP)로 표시되는 환경 파괴적인 ‘생산’ 형태보다 더 나은 것으로 본다. 국가에게 군국주의, 교도소, 법의 집행-불공정한 부의 분배와 지나치게 간섭하는 법체계를 확보하는-을 위한 자금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수입을 의식적으로 한정하는 전쟁 세금 저항 운동(the war-tax resistance movement)에 가담하는 스콰터도 있다.
부유한 ‘풋내기’ 활동가들이 사회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웨버는 중·상류층 가정의 젊은 스콰터를 경멸하고 있다. 하지만 스콰터가 됨으로써, 이 젊은이들은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걸음을 내딛었다. 일시적일지라도 그들은 특권을 포기한다. ‘감옥이 아니라 거주할 집을 달라(Homes Not Jails)'의 헌신적인 활동가 미구엘 우딩(Miguel Wooding)을 만났다. 매춘부와 마약중독자가 넘쳐나는 16번가 거리와 빈민 구제 시설의 모퉁이-아마도 샌프란시스코 전역에서 가장 누추한 거리인-에서 집세 통제에 찬성하는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집 없는 사람들의 슬픔을 매일같이 바라보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물리학 과정을 포기하고 Homes Not Jails에서 일하면서 여섯 자리 숫자의 봉급을 받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 특권을 포기하는 일은 쫓겨난 사람들이 자산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일만큼이나 사회변화를 위해서 중요하다. 비폭력적인 사회 변화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올바른 것을 위해 싸우고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을 동전의 양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보수적인 독자에게 자신의 주장을 제기하면서, 스쾃에 대한 웨버의 비판은 대안적인 청년 문화의 묘사에 실패했다. 대안적인 형태의 문화들-새로운 것과 아방가르드-은 거의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19세기 프랑스의 인상파와 1950년대 비트제너레이션과 같은 아주 가난한 예술은 전체적으로 아주 귀중한 선물을 주었다. 이렇게 판에 박히지 않고 자유로운 작업가들에 대해 사회가 좀 더 큰 아량을 보여준다면, 문화와 정치적인 이점을 동시에 얻으면서 이 부분의 혁신은 좀 더 빠르게 일어날 것이다.
세금 납부와 GDP의 팽창을 절대선(善)으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스콰터의 일반적인 성격과 스쾃 그 자체의 본질적 특성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라도 게으른 어느 특정 스콰터에 대해 지적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스콰터는 아주 성실하다. 누구라도 젊고 코카인에 중독된 판에 박은 스콰터에 초점을 맞추어 스쾃 전체를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스콰터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어떤 관리직보다 더 제3세계 국가에서 부서진 집을 수리하거나 씨를 뿌리며 열심히 일하고 있고,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제공 하거나 마을의 주택 재고와 국가의 식량 생산을 늘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처럼 스쾃은 공공 주택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거를 제공함으로써 세금을 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이 국가 복지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소유한 땅과 주택을 빈 채로 두는 지주들은 가장 생산적인 자산을 사회에 제공하지 않는 셈이다. 이렇게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스콰터 행동에 주요한 원동력이 된다. 아담 포처니트 이글(Adam Fortunate Eagle)은 자신의 책, ‘앨커트래즈! 앨커트래즈!(Alcatraz! Alcatraz!)’에서 1969년 앨커트래즈 점거를 계획하면서 느꼈던 분노를 기술하고 있다. “방치하여 폐허가 된, 텅 비어있는 20에이커의 땅과 건물들.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부족함과 풍족함, 배고픔과 부유함, 토지의 부족과 광대한 경지, 이러한 것들의 공존이 잠재적인 스콰터를 강력하게 자극하는 요소이다.
버려진 집을 활용하려는 스콰터의 시도와는 반대로, 도시 지역의 지방정부는 건물 구매와 파괴로 주택 공급을 제한하기까지 한다. 1970년대 말, 뉴욕시는 지주들이 수익이 없다고 판단한 수백 채의 건물을 구입했다. 지붕의 구멍과 화장실에 시멘트를 쏟아 붓고, 구조물이 썩도록 방치해두었다. 이 모든 행위는 집 없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잠을 자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낡은 집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거나, 심지어 비품과 동선을 훔쳐가는 곳이 되었음에도, 아무도 시 주택 부서가 대규모로 일으킨 부당하며 돌이킬 수 없는 피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80년대 뉴욕’의 주택 정책은 좀 더 파괴적으로 변했다. 뉴욕시는 300채의 건물을 완전히 부셔버렸고, 전 구역을 빈 터로 남겨두었다. 뉴욕에서 현재 스쾃을 하고 있는 릭 반 새비지(Rick Van Savage)는 그것을 ‘창고업(warehousing)'이라고 부른다.
창고업 이면의 아이디어는 시가 주택 부족을 꾸며내는 동시에 경제성장과 젠트리피케이션 와중에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자산 구성을 시도함으로써 부동산/지주 산업을 원조하는 것이다.
지주와 정부-스콰터가 아니라-는 대부분의 주택을 파괴했고, 이로써 가장 가치 있는 자산을 사회로부터 빼앗아 버렸다. 노숙자, 농부, 노동자, 가장-줄여서, 모든 사람들-은 살 집과 생산할 수 있는 토지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