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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3일(수)
* 시작 기도
(왕하 4:43-44)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100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주님...
이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심과 같은 엘리사 판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규모에서는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이 적지만 분명 보리떡 20개와 약간의 채소로 100명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는 기적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날마다 생명의 양식을 구하여 먹으라는 어명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그저 주린 육신의 배를 채울 생각만 하나이다.
그 어리석은 자들 중에 제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딴 소리를 할 수 없사오니 이 어리석은 종을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푸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죽이고 또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옛 사람을 오늘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거기에 낙심하거나 자빠지지 않게 하시고 다시 아들을 힘입어 파레시아로 나아가게 하소서.
이 시간 내가 거할 곳은 아버지 품속이오니 거기서 영원한 생명에 잇대어 살 수 있도록 나를 품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갈 3:10-18
제목 :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 나의 묵상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다른 복음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성령의 은사와 기적 또한 경험하였다.
물론 그들은 이 복음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고난도 함께 받았다.
이제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방인들에게도 복을 주었는데 그 복은 복음을 통하여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다.
또한 이 복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임을 천명하고 있다.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반면 오늘 본문의 시작은 믿음이 아닌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는 저주 아래 있음을 천명한다.
그 이유는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계명을 하나라도 행하지 않는 자는 다 저주 아래 있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신 27: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세상에서 율법을 100%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에 노력을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자기들의 의로 드러나고 만다.
율법의 기능이 곧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물론 율법을 다 지키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율법은 세상 누구도 다 지킬 수 없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느껴 이것으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온전한 사람이요 온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내가 신대원을 다니던 신학생일 때 일이었다.
토요일 오전에 갑자기 옆구리가 너무 심하게 결려서 병원에 가야할 지경이었다.
옆에 있는 아내에게 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겠다고 말을 해도 아내가 안 믿는 것이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차를 운전해서 가까이에 있는 병원에 갔다.
가자마다 응급실로 들어갔고 의사는 엑스레이를 먼저 찍으라고 하였다.
엑스레이 촬영 후 응급조치를 하고 병원에 누워있는데 그제서야 아내에게 전화가 와서 어디냐고 묻는 것이다.
병원에 누워있다고 했더니, 그게 정말이었냐고 그러는 것이다. ㅎㅎ
나는 의사가 엑스레이를 찍으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것을 찍으면 병이 낫겠구나, 라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세상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엑스레이는 몸 속의 상태가 어떤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뼈가 부러졌는지, 아니면 장이 꼬였는지, 위가 헐었는지, 뭐 이런 것을 확인해서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의사가 해주는 것이다.
율법도 이와 똑같다.
율법은 엑스레이와 같다.
엑스레이가 병을 고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율법 역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롬 3:20).
이처럼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 그 죄를 자신의 행함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되, 나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요 완전한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를 구원해 줄 구원자가 필요한데, 그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나를 구원으로 인도한다.
물론 이 믿음조차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즉 수동태라는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연약함을 자각하고 주님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자에게는 차별하지 않으신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근거는 내가 선한 일, 착한 일,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다.
오직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만 가능하다.
그 의는 나의 깊은 죄성을 깨닫고 주님이 필요하다는 그 마음으로 주님께 구할 때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義다.
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율법을 지켜서, 또는 오늘날 선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자기 의로 구원 받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엑스레이를 찍고 질병이 나았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의인은 믿음으로만 살 수 있다는 말씀은 신약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나온 말씀이다.
신약은 이 말씀을 계속해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구약에서의 ‘믿음’이란 다른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곧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이 위대한 것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고 희미하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증거를 확실하게 붙잡고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영원한 하늘을 본향 삼았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성을 마련해 주셨다.
그 성은 다름 아니라 전능하신 아버지와 그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가 성전이심을 천명하셨다.
(계 21:22-23)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율법으로 살려고 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
이는 오늘날 율법으로 사는 자는 없으나 율법과 같은 것이 있다.
선한 일을 해서 사람들에게 높은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람들의 영광을 얻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칭찬을 할 때 자기 속에서 뭉클함이 솟구쳐 더 많은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힘도 생긴다.
물론 선한 일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선한 일을 하되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하신 말씀이 있다.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이다(마 6:3).
그리고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하셨습니다.’(고전 15:10)는 고백이다.
우리는 파고 또 파도 나오는 것은 죄 뿐이다.
나의 죄인 됨을 더 깊이 자각하고 인식할 때 내게 필요한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저주 아래서 진짜 십자가를 지고 죽을 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속량하셨는데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을 성취하신 것이다.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처럼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으신 주님은 그 자체로 죄악 덩어리가 되신 것이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죄 덩어리)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죄가 없으신 아들 그리스도를 죄악 덩어리로 삼으시고 십자가의 저주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전혀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않던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성령의 약속까지 받게 하셨다.
(본문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하신 약속이며 아담이 그 약속을 어겼으므로 아브라함에게서 다시 갱신하여 그 복을 주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도 안 되는 그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이다.
(창 15:5-6)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오늘 본문 16절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의 해석이다.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당시 유대 랍비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더욱이 해석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이해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계시로 깨닫게 되고 풀어낸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을 보여주시면서 뭇별(수많은 별들, 오늘날 한국에서는 밤하늘에 별을 보기가 매우 힘들다. 그런데 이곳 베트남만 해도 밤하늘에 별이 너무나 많다. 하물며 지금부터 4,000년 전 아브라함 때에야 오죽하겠는가?)을 셀 수 있는지 보라고 하신다.
뭇별은 분명 셀 수 없이 많은 복수이다.
그런데 그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자손이라는 단수 곧 단 한 명만 주신다는 것이다.
약속은 약속이지만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약속임에도 아브라함은 ‘예쓰’ 하고 받은 것이다.
이것은 막무가내로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자손이라는 의미를 알고 받았음을 뜻한다.
단수로 ‘주시마’ 하고 약속하신 ‘자손’은 역사적으로는 그의 아들 이삭을 의미하지만, 구속사적으로는 오실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를 알 리가 만무하였다.
그러나 계시를 통하여 복음을 깨닫고 예수의 사람이 된 바울은 이 말씀이 깨달아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 말씀을 한다.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너무나 명쾌하다.
그래서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아브라함과 다윗 역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야 말로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내가 무엇인가 행해서 드러나는 선함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고 착각하였던 자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역을 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이 인정을 해주면 신이 나서 더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풀이 죽어서 ‘에이 아무도 안 알아주는데 이런 거 하면 뭐해!’ 하고 속 상해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에게서 찾으려 했던 내가 바로 자기 의로 행하려는 바리새인이요 거짓 교사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이제 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오늘도 주님 주신 은혜로 이 하루를 살기 원한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자족하면서 주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이 자리가 바로 천국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나의 삶이 영원에 잇대어 있는 삶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 역시.....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하나님의 의도도 모르고 악을 행했던 죄인입니다.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서 헤매었던 이 죄인이 여기 있나이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사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주옵소서.
이제 주님과 함께하는 이 교제와 사귐의 자리가 나에게는 생명과 같은 자리이오니 이 자리를 더욱 사모하게 하옵소서.
그저 이 말씀묵상도 나를 드러내는 자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나는 감춰주시고 오직 주님만 드러나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내가 영광을 가로채는 패악을 행하지 않도록 나를 막아주시고 오직 주님 품안에 안겨 주님만 드러나게 하소서.
내가 무엇을 행해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늘 주님을 사모하며 동행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날 위하여 죄악 덩어리가 되어 십자가에 달려주신 주님께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릴 수 있겠나이까?
입이 열 개라도 그저 두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니이다.
내가 재와 티끌 가운데 앉아 주의 말씀을 읊조리오니 이 종을 주의 품에 품어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