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에서
글/ 이원익
... 버스 정류장이 아직 하나 남았는데 구둣발을 울리며 무장 경찰 하나가 올라서더니 눈빛을 번득이며 학생들은 다 여기서 내리라고 명령하였다. - 아니 왜요? 오늘 시험 치는 날인데…. 뭔가 공기가 이상하구만…! 이리하여 우리 몇몇 학생들은 학교를 저만치 남겨 두고 한 정거장 앞서 미리 하차 당하였는데 정류장에는 전투경찰이 몇 있었고 우리더러 집으로 되돌아가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 무슨 일이야? 가만히 듣자하니 학교 쪽에서 왁자지껄, 그리고 으쌰 으쌰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데모로구나! 그런데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잠시 머뭇거렸다. 가서 잡히면?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쨌든 위험한 일은 피하라고, 목숨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그런 일 생기면 어미는 눈 감고 죽을 수 없다고…. 지난여름 방학 때 고향집 텃밭머리에서 신신당부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런 심각한 일이 정말 닥쳤고 내가 지금 그 언저리에 발을 디디고 서 있다는 말인가? 잠시 떠오른 영상은 그 순간 같은 과의 부산 출신 해중이가 가방을 들고 불쑥 나타남으로 헝클어졌다. 학교로 가 보잔다. 꼭 친한 친구라서가 아니라 아마도 그래야겠지? 어쨌든 여기서 발길을 돌려 다시 버스를 거꾸로 집어타고 하숙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좀 그렇다. 아주 어리석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싱겁거나 가치가 없는 일같이 느껴졌다. 실은 그런 생각을 깊이 하기도 전에 우리는 경찰의 눈길을 피해 이미 마을의 샛길을 따라 캠퍼스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도중에 학교 쪽으로 가는 남녀 학생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우린 그 때 둘 다 대학 1학년생들이었고 교양학부에 속해 있었으며 그 교양학부의 캠퍼스는 서울 외곽의 공릉동에 공과대학 캠퍼스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 때는 73년도 늦가을이었는데 불함산이 저만치 보이는 그 마을에는 아직까지 배밭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시골과 도회지가 겹쳐져 막 부서지고 파헤쳐지며 아무렇게나 쌓아올려지기 시작하는 서울의 변두리였다. 학교 울타리 근처에 가까워질수록 어느새 긴장감은 높아져 몸이든 마음이든 뱀의 입안으로 들어온 들쥐처럼 물러설 수 없이 한 방향으로만 빨려 들어갔다. 마른 들풀이 엉킨 철조망 너머 교정의 시멘트 길에서는 학생들이 줄줄이 어깨를 겯고 구호를 외치며 교문 쪽으로 뛰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해중이는 개구멍을 알고 있었다. 교정에서 흘러나오는 배수로의 틈에 철조망으로 좀 덜 막혀진 곳을 들치고 안 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뒤따라 쪼그리고 들어오는 여학생을 도와 철조망 자락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쁜 마음에 함께 뛰어가 대열의 꽁무니에 합류했다. 양팔이 닿는 대로 금방 스크럼을 짜는 순간 아까 그 여학생은 어디 갔나 싶어 군중 속에서 고개를 돌렸으나 금방 내딛고 굽이치는 대열에 휩쓸려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대오는 어느새 닫힌 교문 앞에까지 왔다. 걸어 잠긴 철제 교문의 창살 너머로 전투 경찰의 반짝이는 철모의 대열이 겹겹이 가로로 줄을 이루고 기다리고 있었고 확성기 소리가 났다. 섬뜩하고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전쟁이다! 발포는 안 하겠지? 하지만 잘못 되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두 팔을 벌려 어깨를 결은 채 줄줄이 쭈그리고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대열을 정비한 학생들의 머리 위에 누군가가 누런 유인물 뭉텅이를 흩뿌렸다. 조잡하게 급히 등사된 거친 글씨체의 종잇조각이 너풀거리다 앞 사람의 어깨 위에도 내려앉았다. 구국, 분쇄, 파쇼…, 이런 좀 생경하기도 한 낱말들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대열 앞 쪽에서 시위를 이끌고 선동하는 서너 명의 상급생들 중 하나가 이 문서를 소리 높여 읽고는 구호를 선창하였다. - 유! 신! 철! 폐!! 독! 재! 타! 도!! 수백, 수천의 함성이 따라 울렸다. - 유! 신! 철! 폐!! 독! 재! 타! 도!!
뒤늦게 현장까지 쫓아 따라온 교직자들과 좀 나이가 든 고위직 교수들이 당도했다. 머리가 반백인 교양학부의 학장은 앞쪽으로 나가 선동자들을 말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때 그런 지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격이 파탄 된 것이라고 학생들에겐 여겨지는 것 같았다. 그는 금방 포기하고 대열에 비켜서서 멀거니 학생들을 바라보며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양 강의 시간에 그리스 로마의 시민정신과 민주주의를 고상하고 풍부한 어휘로 전해 주던 그 노학자도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그저 자기의 직위에서 자기가 맡은 직책으로 해야 할 최소한의 행위를 누군가에게 직간접으로 보여 주러 온 것 같았다. 우렁찬 구호 복창과 함께 다시 다리를 펴고 일제히 일어선 대열은 무조건 닫힌 철문으로 한꺼번에 돌진하여 들이밀었다. 일제시대부터 그 자리를 지켰을 육중하고도 정교한 무늬의 두 날개 흰 철문이 휘청거렸다. 으쌰! 으쌰! 대열이 대열을 짜고 밀어 앞 줄 학생들의 어깨며 뺨이 차가운 쇠기둥에 짓눌리고 흔들렸다. 그러다 마침내 철문을 가로지른 긴 쇠빗장이 휘어지기 시작하고 돌쩌귀가 박힌 양쪽 콘크리트 시각형 기둥마저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경찰이 일제히 최루탄을 쏘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난생 처음 가까이서 맡아 보는 최루탄 냄새였다. 눈이 따갑고 속이 울렁거렸다. 뒤쪽에서 학생들이 철문 너머로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하자 머리 위 흰 연기 속에서 검은 덩이들이 양방향으로 난무하였다. 자칫 아군 포탄에 맞아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어느 새 균형은 무너져 깡통 최루탄은 산발적인 돌멩이탄을 제압하여 더 많이 날아오르고 대열은 흐트러져 각개전투가 시작 되면서 시야는 더욱 흐려지고 난장판이 되어 갔다. 떨어져 구르지만 아직 터지지 않은, 공처럼 둥근 플라스틱제 최루 수류탄을 집어 도로 경찰 쪽으로 던지는데 해중이가 다가와 뒤로 빠지자고 내 옷자락을 끌었다. 그러고 보니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싸움을 벌이는 학생은 얼마 안 되고 어느새 인원이 많이 없어졌다. 얘는 고등학생 때부터 이런 경험이 있었나? 아무튼 상황 판단이 나보다는 빨라 보였다.
그와 함께 되돌아 뒤로 빠지는데 경찰 쪽에서는 가려져 안 보이는 건물 뒤 쪽에 학생들이 빽빽이 모여 스크럼을 짜며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잃어 버렸던 두툼한 저금통장을 다시 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통장을 가득 채웠던 까만 머리들은 다시 정문으로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틀어 건물 뒤편으로 물러가 옆길로 빠져 방금 터진 수문처럼 울타리 밖 길거리로 늠실늠실 콸콸 흘러 나서는 것이었다. 여기에도 나가는 문이 있었나? 그러니까 교문에서 얼마간의 학생들이 내내 싸우는 것은 경찰을 묶어 두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데모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구먼! 이 정도 책략이라면 해 볼 만한데? 어느새 겁도 옅어지고 전체를 파악하는 안목이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 조금 여유가 느껴졌다.
수천 명이 됨직한 학생들이 허술한 캠퍼스 울타리를 벗어나 아스팔트 지방 도로를 덮고 얼마간을 달리자 그 때서야 경찰은 사태를 알아차리고 다시 차량을 몰고 이쪽으로 여러 대가 돌진해 왔다. 그러자 학생들은 아스팔트길을 벗어나 까맣게 들판을 가로질러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거긴 가을걷이가 끝난 논밭이며 찢어진 비닐하우스가 드문드문 흩어진 곳이었다. 마치 초원을 달리는 들소 떼, 하늘을 무리지어 나는 까마귀 떼 같았다. 주로 남학생이었지만 여학생들도 섞여 있었고 가방을 든 이도 빈손도 있었다. 경찰의 차량들이 이 논밭을 가로지를 수는 없었다. 학생들이 길 아닌 곳으로 쏟아져 들어가자 닭 쫓던 개처럼 잠시 머뭇거리던 경찰들은 다시 차량에 올라타고는 오던 길을 휑하니 내쳐 달렸다. 우회해서 올 모양이었다. 우리들이 논밭을 마구 흩어져 내달리며 보니 앞쪽에 북한산 인수봉이 보이고 그 앞 산자락에는 마을, 마을 앞 쪽에는 한 가닥 아스팔트길이 걸쳐져 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무조건 그 길을 향해 뛰었다 경찰이 오기 전에 먼저 저길 올라서야 하는데…, 누군가 뛰면서 빨리 ‘도로 점령!’ ‘도로 점령!’ 하고 외쳤다. 우리 무리 가운데 발이 빠른 치들이 그 길에 겨우 올라섰는가 하는데 그와 동시에 저 쪽 멀리까지 우회해서 온 경찰 차량의 대열이 사이렌을 울리고 불을 켜며 무섭게 내달려 왔다. 무식한 질주였다. 머뭇거렸다간 차에 치일 것이었다. 무지막지하게 눈앞을 가로지른 경찰 차량들은 저만치 가더니 이내 끼익,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약간 높아진 마루턱에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방향을 백팔십도 돌려 재빨리 하차, 그 유리한 고지에서 내려다보며 겹겹이 방패와 철모의 진을 쳤다. 우리는 이미 숨이 가쁘고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빨리 숨을 가다듬고 힘을 차리고 대오를 정비해서 맞닥뜨려야 하는데…, 누가 지휘자랄 것도 없이 다 그렇게 알고 분초를 다투었지만 생각과 행동은 늘 이렇게 시차가 있나 보다. 역사상의 수많은 전투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단 오 분, 이 오 분이 대세를 판가름할 것이었다. 미드웨이 해전, 허둥대는 일본군 항공모함의 함상으로 내리꽂히는 미군 전투기 군단처럼. 모래언덕을 쏟아져 내리는 저 징기스칸의 기마대와 미처 대열을 맞추지 못한 오합지졸 송나라의 보병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딱 그 오 분이 모자랐다. 내가 숨을 헐떡이며 가까스로 그 아스팔트에 올라서기도 전에 로마의 군단은 이미 대열을 정비해 철벽같은 방패의 담을 앞세우고 박자를 맞춰 우리 쪽으로 착착 전진해 왔다. 아, 오 분! 아직도 많은 남녀 학생들이 이제는 들판을 뛸 힘도 소진 된 채 한가로이 걸어서 허적허적 논밭을 건너오고 있다. 우라질, 저건 다 도회지 출신들일 거야. 평소에 몸 단련 좀 하지! 빨리 오라고 소리쳐도 소용없다. 움직여지지도 서둘러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벌써 최루탄이 날아온다! 우리는 대열을 짤 새도 없이 다시 길 위에서 흩어졌다. 그리고 아무 방향도, 지휘 체계도 없이 산지사방 논바닥으로, 거꾸로 아스팔트길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밀물에서 썰물로, 한 번 물결이 기울어지자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이없고 완벽한 패배의 썰물이었다. 모든 전투의 현장이 이랬겠지? 기세의 꺾임, 크고 작은 운명의 방향타! 나도 마을이 있는 쪽 논바닥으로 뛰었다. 질퍽한 바닥에 발이 빠졌다. 논바닥 여기저기서 최루탄이 터지는 사이에 삑삑거리는 무전기 소리가 들리고 지프차를 탄 경찰 간부의 상대를 갖고 노는 듯한 여유 있는 명령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렸다. 그 때 내 바로 앞에 떨어진 최루탄 깡통이 터졌고 나는 그걸 울컥 들이마시고 말았다. 도망이고 뭐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을 느끼며 나는 논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그 찰나에도 어렴풋이 상황을 파악하는데 경찰들이 논바닥을 마구 뛰며 도망가는 아이들을 잡아 험하게 다루며 우리가 닭장차로 부르던 철망 친 버스에 싣고 있었다. 지나가던 경찰 하나가 쓰러진 나를 얼핏 보더니 그 때 앞 쪽에서 뛰어 달아나던 다른 아이를 쫓기 전에 등에 지고 분무기처럼 쏘는 최루탄을 내 얼굴에다 대고 한 방 쏘았다. 나는 다시 속이 욱 하고 기가 막히며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가운데 꿈속에서처럼 어머니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잡혀 죽는구나, 잡히면 안 되는데…. 몇 분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늘게 정신이 드는데 내 얼굴은 논바닥에 대어져 있고 반 쯤 뜬 눈에 들어온 시야가 마치 무성영화 속의 장면 같았다. 짙푸른 닭장차가 두어 대 대어져 있는 게 벼 벤 그루터기 사이로 보였고 경찰의 구둣발은 훨훨 마구 날아다니고, 여기 저기 몽둥이가 풍차 돌듯 휘둘러지고, 가방과 구두 짝이 다도해처럼 흩어져 있고, 하늘에는 트르르르…, 외계에서 온 커다란 헬리콥터가 공상만화에서처럼 떠 있고…, 그림 한 번 좋다. 그런데 내가 엎어진 데가 바로 논바닥에 부려 놓은 작은 두엄 더미 옆인 것 같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앉는데 닭장차 버스 입구에서 애들을 마구 안으로 밀어 올리던 경찰 하나가 나를 보고는 소리친다. - 야, 너! 이리 와! 하지만 이 때도 다른 상황이 그의 주의를 빼앗았다. 다른 쪽에 벌어진 더 중요한 무슨 일 때문에 고개를 돌려 그 쪽 신경을 쓰는 것 같다. 나는 일어나 닭장차로 가는 척 하다 그저 태연하게 방향을 꺾어 마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경찰은 뛰는 아이들에 일단 주의를 집중한 듯 천천히 걸어가는 나는 아무도 불러 세우지 않았다. 무슨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그 수가 많을 때는 그 틈바구니에서 이렇게 주의를 끌지 않으면 도망칠 기회가 온다. 이렇게 빠져나가 사는 수도 있구나! 몇 십 미터 안 떨어진 마을의 끝자락에 공동 우물이 있고 거기에 민간인들이 몇 사람 모여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물에 볼일이 있어 나온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 틈바구니에 묻히려 다가가는데 속이 다시 울컥, 메스껍고 울렁거렸다. 우물에 둘러진 시멘트 둔덕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데 머리에 수건을 쓴 어떤 젊은 아주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 학생, 학생! 이리 봐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좁스럼한 얼굴의 여인이 나를 내려다보며 한 손바닥을 내 얼굴 앞에 내밀었다. - 이거 먹어요. 소금…. 작은 손바닥을 오그린 곳에 얼마간의 소금가루가 하얗게 담겨 있었다. 내가 좀 의아해 하자 다시 눈으로 재촉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소금을 내 손바닥에 옮겨 받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우물에 좀 더 다가가 누군가에게서 물 한 모금을 받아 삼켰다. 그제야 짠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 기분이 한결 나아짐을 알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려 이번엔 내가 그 여인에게 부탁했다. 빨간 스웨터를 어깨에 걸친 수수한 모습이었다. - 아주머니, 좀 숨을 데…, 없나요? - 그냥 슬슬 날 따라 와요. 그냥 가만히…. 나는 일어서 정말로 슬슬 아주머니를 따라 갔다. 조금 비탈진 곳에 자리한 초라한 그 동네의 이 골목 저 골목에 후다닥 뛰어 가는 구둣발 소리가 나고 목덜미를 나뀐 채 끌려가는 학생을 얕은 담 너머로 볼 수 있었지만 그냥 남의 일인 양, 내가 그 동네 사람인 양 마음을 먹고 굽이진 좁은 골목길을 따라갔다. 나는 그날 하필이면 주로 신입생만 입는 그 대학교의 군청색 아래위 교복 차림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그들의 눈길을 끌지 않았나 보다. - 이 집에 들어가 있어요. 나는 나가 있을께요. 작은 대문의 단층 슬레트 집이었다. 발라진 벽의 시멘트마저 부슬부슬 떨어질 것 같은, 변두리 동네에 급조 된 흔한 모습의 그런 작은 집이었다. 나는 좁은 대문간에 붙은 변소 옆, 광처럼 쓰는 좁고 어두운 공간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곧 안면이 있는 옆 과의 남학생 하나가 문간에 들어섰다. 나를 보고 잠시 반가운 척 하더니 몰려 있으면 불리하다 싶었던지 되돌아 나가 맞은 편 집으로 들어갔다. 나도 이곳에 그냥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 싶어 더 깊이 숨기로 했다. 위가 유리창인 미닫이문을 열고 그 집의 좁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작은 부뚜막에 작은 솥이 연탄불 아궁이 위에 걸려 있고 벽에 박힌 못에는 가지런히 국자며 생선 굽는 철사 그물 같은 것이 걸려 있었으며 그 위에는 장식 없는 간단한 찬장이 하나 좁은 벽에 붙어 있었다. 그때 화들짝 대문이 열어젖히며 몽둥이 든 경찰이 들어서는 게 부엌문 젖유리 너머로 보였다. 내가 조금 전에 숨었던 공간을 휙 살피더니 더 들어오지 않고 다시 골목길로 뛰어나갔다. 누가 뛰어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안 되겠다. 나는 부뚜막 위, 방으로 들어가는 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다 흙 묻은 내 신발을 챙겨 들고 안에서 방문을 닫았다. 낡은 하늘색 벽지의 작은 방에는 횃대가 벽에 걸려 있고 뒤쪽으로 난 작은 유리 들창으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때 아주머니가 돌아왔다. - 학생, 아직 나오지 말아요. 많이 잡혀 가고 있어요. 다시 올께요. 그러더니 내가 들어온 쪽문 고리에 부뚜막 쪽에서 자물통을 끼워 눌러 잠그는 것이었다. 그 때 들창 너머로 마구 뛰는 누군가의 머리끝이 보이고 잇따라 따라붙는 두 명의 경찰모가 베틀의 북처럼 재빨리 담 위를 스쳐 갔다. 나는 긴장하여 벽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경찰이 반대편 이집 마당에 들어섰다. 이제는 끝이구나! 순순히 잡히나 아니면 창문을 깨고 뒤쪽으로 튀어 보나? 판단이 어려웠다. 저벅저벅 걸어온 경찰이 부엌문을 밀어 열었다. 그러더니 자물통을 봤기 때문인지 방문을 마저 열려고 하지는 않고 그냥 돌아나갔다. 휴,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모둠발을 굴러 다시 그 집 벽장 속으로 올라갔다. 캄캄하고 좁은 벽장에는 옷가지랑 책 따위가 있었고 나는 거기에 올라가 문을 닫고 겨우 몸을 눕힌 채 시간을 보냈다. 차차 주위가 좀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거기서 허리춤이 넉넉한 남자의 풍성한 바지와 구겨진 헌 와이셔츠를 집어 골랐다. 그리고선 그 비좁은 속에서 몸을 배배 움직여 갈아입고 최루탄 냄새가 나는 내 교복과 신발은 신문지에 싸서 구석에 숨겼다. 한참을 거기서 머물렀지만 이윽고 너무 답답하기도 하고 밖이 궁금해서 다시 방으로 내려왔다. 이왕이면 좀더 태연해지자. 나는 벽에 기대어져 있던 작은 밥상의 다리를 젖혀 펼치고 앉아 신문을 펼쳐 들고 얼굴을 가린 채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그 때 아주머니가 긴 머리의 상큼한 여학생 한 명과 함께 돌아왔다. 안면이 거의 없는 깨끗한 차림의 그 여학생은 팔에 무슨 큰 봉지를 안고 있었다. - 아주머니, 급해서 아저씨 옷 좀 입었는데요…. - 잘 했어요. 그냥 있어요. 이 학생이 뭘 가져왔네요. 앞집에는 학생 둘이 숨어 있다 잡혔대요. 다 간 줄 알고 이제는 안심하고 둘이서 머리까지 감고서는 타월로 털어 말리며 서로 경찰 욕 정부 욕을 했는데 경찰이 지나가다 들었나 봐요. 교표도 달지 않은 그 여학생은 우리학교 학생이라고만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고서는 봉투에서 카스텔라 두 봉지를 꺼내 주었다. 그리고 이따가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 여기를 떠나는 게 좋다고 했다. 그리고 혹시 잡히더라도 혼자가 아닐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유신은 꼭 철폐 될 것이라고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아무래도 나보단 한두 살 많은 상급생 같아 보였다. 그러고는 꼿꼿하고 의젓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주머니와 함께 대문간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방바닥 구석에 쌓여 있는 그 집 신문을 읽었다. 조선일보였다. 지금에야 비로소 바로 그날그날의 정치면에 실질적인 관심을 갖고 훑어보았다. 요즘 반드시 나야 할 기사가 한둘이 아닐 텐데…, 세상은 온통 벌집 쑤셔 놓은 듯 한데도 그런 일이 어디 있었냐? 어쩌다 겨우 귀띔이라고 할 만한 것이 겨우 한두 건 눈에 뜨일 뿐이었다. 어느 신문사였는지 사주가 정권을 위한 채홍사 노릇을 한다는 미확인 소문도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혹독한 검열을 피해, 어떡해서든 이렇게 해서라도 지면으로 무엇을 알리고자 한다는 느낌이 오긴 왔다. - 어쨌거나 오늘 우리가 벌인 이 짓거리도 단 한 줄 활자화 되지 않겠지? 그리고 혹시 내가 잡혀 가더라도, 가서 뭐가 잘못 되어 영영 못 돌아오거나 신세를 조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리하게 굴어야 되지 않을까? 주모자도 아니고 어찌 보면 얼떨결에 휩쓸린 셈인데 이 피라미에게 설마 무슨 일이야 있을라고? 하기야 아까 그 여학생의 말처럼 어쩌면 이게 굉장히 의미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고 내가 거기에 조그만 몸 담금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그런 역사의 물결에 올라탈 그런 진정한 용기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그런 건 타고나야 하는 것일까? 하기야 무슨 일에나 앞뒤 맥락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뛰어든다는 건 좀 어린애 같은 일일 테지…. 생전 처음으로 역사적이고 시사적인 문제에 관하여 이런 다소 심각해 뵈는 생각을 해 보면서도 꼬르륵 배가 고파 오기 시작하고 오줌이 마려웠다. 그 새 꽤 시간이 흘렀겠지. 이젠 어두워져 글이 잘 안 보이는군. 일어서 백열등을 켜는데 아주머니와 함께 한 눈에 이 집 주인인 듯한 아저씨가 두런두런 문간에 들어섰다. 내 이야기를 이미 한 모양이다. - 아 학생, 괜찮아, 옷이 좀 클 텐데. 그리고 좀 있다 밥 먹고 가라고! - 함부로 옷 입어서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가 어딥니까? 내가 어려워하고 미안해하며 인사를 차리자 아저씨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 창동이지, 도봉구 창동. 옛날에 무슨 나랏님 창고가 있었다나? 그나저나 에이, 나라 꼬락서니하고는…, 학생 괜찮아, 데모 하다 보면 그런 거지 뭐. 여보, 얼른 밥상 차려 와! 내가 이제는 가야겠다고 하자 몸매가 좀 뚱뚱한 그 남자는 자기는 신문사에 다닌다면서 화통하게 내 손을 잡아 다시 방으로 끌었다. 나는 아저씨에 잡혀서 어영부영 함께 셋이서 저녁밥을 뚝딱 비우고는 몇 마디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누고 대문간 구석에서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주인 부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정말 다시 찾아와 인사를 드리리라 속으로 다짐하며 조심스레 골목을 빠져 큰길가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낮의 난장판 흔적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일단 동대문구 휘경동 하숙집으로 갈 양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승객이 드문 입석 버스의 맨 뒷자리에 탔는데도 최루탄 냄새 때문이겠지, 사람들이 가끔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뒤쪽을 봤다. 참 신경 쓰이는구나, 어쩔 수 없지 뭐. 나는 유신 철폐 때문에 이렇게 교복을 버렸는데 저 서민들은 내 냄새에만 신경을 쓰는구나. 이런 걸 야속해 해서는 안 되지. 나는 무슨 이념가나 된 듯한 생각에 그대로 뒷자리에 버티어 앉았다. 내 끝에 앉았던 아가씨 하나가 일어서 앞쪽 멀리로 자리를 옮겼다. 안 되겠구먼, 혁명도 민중들 봐 가며 해야지. 그리고 티를 내어서는 안 되지. 나는 일어서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길거리에서 냄새를 웬만큼 날려 버린 후에 다시 타야지. 종로 어디쯤이었지 싶다. 그런데 붐비는 사람들 틈서리 어디에서도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젊은 데이트 족이든 나이 든 쇼핑객이든 내가 그 자리에 조금만 머물러 있으면 이맛살을 찌푸리고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나를 훔쳐보았다. 째려보는 듯한 사람도 있었다. 넘겨짚어 풀자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후에도 숱하게 들은 상당히 애매한 소리이긴 하지만, ‘뭐 저런 팔자 좋은 것들이 다 있어!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뭔 데모질이야! 근데 학생이 맞기는 맞나?’ 하는 것 같았다. 대처의 알아주는 대학생이 됐답시고 멋도 모르고 우쭐대던 기분을 처음으로 되짚어보게 하는 순간이었다. 세상은 나 따위, 그리고 이른바 이런 역사적이라는 일 따위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쓰고 앞뒤를 안 헤아리는구나. ‘그게 나 먹고 사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며 어쨌단 말이야?’ 그들이 보고 바라는 건 이렇게 단순할지도 몰라. 이 틀을 누가 만들었고 누구 덕에, 누구 희생으로 세상이 돌아가든 그건 상관없어. 일단 돌아가면 그저 순조롭게 지금 이대로 돌게만 놔둬라. 시끄럽게 굴거나 냄새피우지 말고…. 어쨌든 얼마간 혼란스럽고 어정쩡한 기분으로 밤공기 속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하숙집 근처에 가서 내렸다. 그 때는 핸드폰은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이라 하숙방 친구들은 어찌 됐는지 연락할 방도도 없었고 공중전화로 하숙집에 연락하기도 꺼려졌다. 도청 당한다는 얘기가 흔했으니까. ‘내가 주모자도 아닌데 그렇게까지야?’ 하면서도 몇 달 전에 있던 유신 반대 최초 데모 후의 살벌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괜히 겁이나 골목을 들어서다 다시 발길을 돌렸다. - 재수 없으면 얽혀 들어 사형이라잖아. 며칠 동안은 안 들어가는 게 좋겠어. 그럼 어딜 가야 하나? 여관? 돈도 없는데? 나는 한두 시간, 난생 처음으로 정처 없이 낯선 밤거리를 헤매어 보았다. - 여관도 안 되고…, 친구 집도 안 되고…, 파출소에 가서 재워 달랄 수도 없고…, 사창가에 숨기도 한다는데 엄두가 안 나서 안 되고…, 천생 육교 다리 밑에 가야 하나? 정말 갈 곳이 없었다. 집도 절도 없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 땐 절 같은 건 아예 조선시대 민담이나 민화 속에나 있는 것처럼 현실의 내 머리에는 그림이 없었고 따라서 서울 시내에 절이 있는 줄도, 있더라도 어디 붙어 있는 줄도 몰랐다. 교회나 성당은 흔했지만 마치 눈앞의 엉뚱한 신기루들처럼 있어도 없는 거와 마찬가지였다. 나와는 속해 있는 차원, 디디고 선 자리가 아예 달라 접점이 없다고 여겼다. 이렇게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길거리에서 한참을 그러다가 염려는 좀 되었지만 될 대로 되라 하고는 자정이 다 되어 서대문구 영천에 있는 누님 댁을 찾아갔다. - 거기까지 손을 뻗쳤을라고? 내가 주모자급도 아닌데! 그래도 그 시간에 순순히 문을 따 주는 것은 피붙이였다. 누님 댁에 몸을 두고 사흘을 머문 뒤 조심스레 하숙집에 복귀해 대문을 미는데 마침 그 시간, 잡혀 갔다 훈방 돼 나온 두 하숙방 친구들이 막걸리를 사다 놓고 귀환 축하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심하게 당했냐고 하니까 초범이라고 귀싸대기 두어 방 맞고 자필 반성문 한 장씩 썼다고 한다. 그리고 사진 여러 장 찍히고 고향 부모님들에게까지 연락이 갔으며 다시 걸리면 중벌도 감수하겠다는 억지 서약서에 지장들을 꾹꾹 눌렀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더러 어디 가서 놀다 왔느냐고 한다. 누님 집 따뜻한 방에서 쉬고 왔다고 하기도 그렇고, 이 정도였다면 차라리 잡혀 가서 별 하나 달았어도 괜찮았겠다 싶기도 했는데, 그러나저러나 학기고사는 어찌 되노? 학점이나 받겠나? 이번에 빵꾸나면 낙젠데 하는 걱정들이 나왔다. - 야, 나라가 개판인데 학점 타령하게 생겼나! 한 친구가 술김에 다시 호기를 부리자 다른 친구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주의를 줬다. - 얌마, 서약서 쓴 거 잊어 부렀나? 목소리 낮춰! 더러워도 참아야지 별 수 있나! 기분전환 겸 내가 미팅 한 번 주선할께, 완전 X대 킹카로. 어떻나? 그 밤, 그 후로 어찌 됐냐고? 어찌 되긴 어찌 돼. 빈속에 막걸리에다 소주까지 곁들여 부어 마셔 셋 다 오버 이트. 하숙집 아줌마에게 궂은 일 시키고 밤새도록 웃고 떠들며 고담준론에다 고성방가, 비분강개와 음담패설이 짬뽕에 곱빼기로 넘쳤는데도 주인아줌마만 안절부절, 결국 포기하고 문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지만 거미줄 같다던 유신 경찰은 안테나에 고부하가 걸렸는지 이상하게도 콧방귀 하나 안 뀌었지. 그 이튿날 우리는 다들 제풀에 괴로워서 끙끙 앓고 못 일어나 학교는 어찌 됐나, 재시험인가 휴강인가 가서 알아보지도 못하고 뒤척였지. 그래서 어찌 됐냐고? 미팅 주선한다던 놈은 결국 제 갈 길로 갔지. 졸업도 못하고 군대에 잡혀가고…, 제 말로는 별 일도 안 했다는데 제적까지 당해, 나중 월부 책장사로 신입사원이 된 나를 찾아 온 적도 있고, 그러다 결국 종적이 끊겼지. 어디 살아는 있겠지. 나머지 한 친구? 나라가 개판이라며 호통 치던 녀석? 걔는 몇 해 뒤 그 개판 나라의 준엄한 검사가 되더니 잘 나갔지. 한참 뒤에는 무슨 떼기랬나 뭐 그런 당의 국회의원 하나 꿰어 찼었지. 지금은 조금 물 먹었다고도 하지만 여태 무슨무슨 고문에다 이사에다 무슨 봉사회 단장에까지 직함이 뜨르르하지. 물론 다 그 쪽 갈래 낙하산 비슷한 자린데 어쨌든 재주는 좋은가 봐. 언젠가 이른바 주류 언론에 실린 몇 줄 평으로는 마당발의 원만한 인품에다 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를 앞장서 옹호하는 당내의 당당한 대표급 이론가 가운데 하나라나 뭐라나. 그리고 당신은? 에이, 나 얘기는 빼자고. 일찌감치 바다 건너와서 지금껏 무언가에 쫓기고 쫓겨 이제는 어디 깊숙이 숨고 싶어. 가라지에서 거실로, 안방으로, 화장실로, 샤워실로, 다시 다락으로, 더그매로…, 이 미국 땅에 그런 맘씨 좋은 젊은 부부가 흔한 것도 아닐 텐데 말여. 근데 혹시 그 찾아 왔다던 선배 여학생 하고는 뭔 일 없었나? 무슨 일? 카스텔라 두 조각이 마지막이었지. 그리고 한참 지난 후 여기서 우연히 본국판 신문을 보다가 손톱만한 얼굴 사진과 이름 석 자를 알아보겠더군. 객원 기자로 칼럼을 썼던데 하필 유신이더군. 그 시대의 일은 그 시대의 배경에서 이해해 주자고. 어쨌든 그게 다 우리 역사 아니냐고.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런 얘기로 뒤를 이어가데. 보릿고개가 어떻고 한강의 기적이 어떻고…, 끝까지 읽진 않았지만. 아참, 그 신문사 아저씨 아주머니 말이야. 차일피일하다 내가 졸업을 앞둔 해, 그러니까 3년이 지난 4학년 가을이었지. 어느 주말에 하숙생 친구들하고 동네 점포에 학생증 맡기고 자전거 한 대씩을 빌려 타고서는 일부러 멀리 창동을 가 보았지. 그런데 말이야, 그 사이 세상이 확 바뀐 거야. 그 변두리 도시 끝자락이 삼년 만에 완전히 바글거리는 도회지 중심가가 된 거 있지. 내가 숨었던 그 허름한 동네는 싹 밀리어 고층 아파트들이 빽빽이 들어섰고 우물터고 뭐고 죄다 사라져 없는 거야. 어디가 어딘지 기억도 희미하고 온통 헷갈리더군. 논밭도 거의 파헤쳐져 가로 세로 길이 나고 온통 철근에다 레미콘에다 비계로 둘러싸인 건설 공사판이 벌어져 있었고. 그 날 거기서 우리가 깨질 때 한 떼의 학생들이 블록 담이 둘러쳐진 빈터로 몰렸었는데 방패로 장벽을 친 전투경찰들이 마치 만주 팔기군 들짐승 몰아 도륙하듯 밀어붙였지. 그 빈터는 누가 시멘트 블록을 만들어 호스 물을 뿌려 가며 말리던 장소였는데 다 짓밟아 버린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건 어디서 보상 받을 데도 전혀 없었지. 이러니 서민 입장에서 욕 안 나오겠어? 어쨌든 이 훈련 받은 팔기병들은 공황에 빠진 사슴 떼를 교범에 따라 물샐틈없이 에워싼 채 바싹 좁혀 들어오며…, 바투 잡은 단단한 경찰봉으로 우선 사냥감의 여린 아랫도리들부터 부서져라 착착 모질게 후려갈기며 짓쳐나갔지. 비명과 아우성 속에서 한 켠으로 짜밀리고 밀려, 결국 그 학생들의 등어리로 쏠려 떠밀린 힘에 긴 담벼락이 한꺼번에 와장창 넘어가 축대 아래로 쏟아지고 아이들도 그 위로 잇달아 줄줄이 떨어졌지. 낙화암의 삼천궁녀들처럼 말이야. 내가 그 때 우물가에서 소금을 먹으며 훔쳐본 거야. 내 친구 하나는 그 때 쫓기다 축대에서 훌쩍 뛰었는데 아래쪽 슬레트 지붕에 떨어졌다지. 지붕을 뚫고 이불을 깔아 놓은 안방 바닥에 안착했는데 마침 방에 앉아 점잖게 혼자서 바둑판 복기를 하던 할아버지 앞에 난데없이 하늘에서 대국자가 내려앉아 마주 보게 된 거지. 할아버지 왈, 니 누고? 몇 급이고? 내 친구 왈 머리를 긁으며 모르겠십니더, 죄송합니더. 그러다 들이닥친 경찰에 곧바로 뒤꼭지를 낚아 채여 잡혀갔다지? 그리고 그 날 몇몇 남학생과 여학생들은 빨치산이 되려는 건 아니었지만 안 잡히려고 무조건 산 쪽으로 튀었는데 나중 경찰견까지 풀어 다 잡아내었다데. 그 산꼭대기의 인수봉만은 예나 지금이나 그 미끈하면서도 무심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더군. 원격으로 확대하여 그 숲속을 들여다본다면 오늘도 그 여러 가닥 산행길엔 알록달록 가지각색 등산객들이 수입산 옷차림으로 꼬리에 꼬리를 잇고 있겠지. 어쨌든 그 보기 드문 자태의 화강암 봉우리는 마치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권인처럼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푸른 하늘을 찌르는 것 같더군. 힘내라! 뭐든 맞장 뜨지 못하고, 쫓기고 쫓겨 늘 숨어 왔어도 섧기만 하거나 헛된 일 아니야, 너는 뭔가를 해 왔고 결국 이긴다, 그 언제일지라도, 누구에겐가는 주어질 그윽한 그 복락을 위해 참고 버티어라 하고 추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야, 착각일지도 몰라. 뒤집어 보면 오히려 한심한 친구, 옜다 엿이나 먹어라 비웃으며, 흙바닥에 쓰러진 검투사를 간단히 지워 버리라는 네로 황제의 손놀림처럼, 내 남은 멱줄을 향해 거꾸로 내리찌르는 것일지도 몰라. 아무튼 그랬어. 몇 해 전에 한국 갔을 때 지나치며 슬쩍 쳐다보니까 말이야.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불사모를 이끌고 있고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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