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는 뜻밖의 만남을 허락해 주셔서 많은 대화를 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안목의 정욕, 솟구치는 자기주장의지....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죄 많은 인생,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오늘도 십자가를 밝히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본문 주해)
10~12절 : “성서에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꾸준히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언제나 저주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공동번역)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하는 근거는 신명기 27장 26절의 말씀이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는데 오히려 그 율법으로 자신들의 의로 삼았기에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율법의 의로는 결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가 없고, 오직 저주 아래 들어갈 뿐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구약 성경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11절 : “그러니 율법을 통해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살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공동번역)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에 그렇게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의지한다면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다.
12절 :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율법은 다만 그것을 지킴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13~14절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그것은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가 저주받은 자들이다”(신21:23b)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을 행하여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만일 율법을 행하여 구원을 받았다면 율법을 행하여 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행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달리신 십자가로 하나님의 저주가 끝났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받으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그 약속된 성령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15절 : 사람도 한번 언약(유언)한 것을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지 못한다.
사람의 언약도 이러한데 하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더 확정적이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미 창세전에 확정된 내용이다.
사람들이야 언제나 변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반드시 그 언약대로 이루어내시는 분이시다.
16절 : 아브라함의 자손이 많지만 그 자손들에게 주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단수로 네 씨에게 준다고 하셨다는 말씀에 바울이 주목한다. 그 후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이란 그 씨,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방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이 약속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의롭다 함의 복을 받았다.
17~18절 :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맺으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에 생긴 율법이 이를 무효로 하여 그 약속을 폐하지 못합니다.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그것은 절대로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거저 주셨습니다.”(새번역)
시내산에서 계시된 토라(율법)로 말미암아 그보다 4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취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알지 못했고, 무엇보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것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방식을 무효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유업, 영원한 생명, 아들의 나라, 하나님의 아들을 받는 것은 율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다.
(나의 묵상)
율법(행위)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니 바울 사도가 계속해서 믿음과 율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러하였듯이 나도 행위로 나의 의를 삼기를 원했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하는 행위를 가지고도 의기양양했었던 때가 있었다.
율법을 주신 이유가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인데, 고작 몇몇 가지의 열심, 그것들로 나를 치장하기 바빴던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것들이 영원한 생명은커녕 오직 저주 아래로 들어가게 할 뿐인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주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은 매일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으로 주어진 것이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이, 나의 행위로 말미암아 쌓여진 저주를 사라지게 하신 것이다.
이번 열흘 간의 프랑스 복생 캠프에서 돌아오니 지체들의 인사가 ‘피곤하지 않냐?’하는 것이다. 시차도 있거니와 다들 우리들의 사역이 어떠한 것인가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대답은 ‘아빠와 함께 춤을!’이었다.
외국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으로, 어린 딸이 아빠와 손 잡고 왈츠를 추는데 딸의 발은 아빠의 발등에 얹혀 있으니 딸을 스스로 춤을 춘다기보다 아빠에게 전적으로 안긴 듯이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장면이다.
아빠 품에 안겨서, 아빠가 추는 춤을 함께 추는 것이다.
내 발은 땅에 닿지도 않고, 스텝도 신경 쓸 필요 없이, 그저 아빠의 발등 위에서, 아빠 손 잡고 춤을 추니 피곤할 것이 뭐 있겠느냐고....했다.
육체적으로 완전 쌩쌩하다는 말이 아니라, 영적으로 충만한 기쁨이 육체의 피곤을 잊게 한다.
행위에 마음을 두었다면 지금쯤 나는 교만하여 잘난 체한다고 정신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서 믿음을 가진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니 오직 아빠와 함께 한 그 기쁨의 춤이 어떠하였는가만을 말하게 된다.
율법의 저주를 풀어주시고, 십자가 보혈 아래에서 생명의 춤을 추게 하시는 나의 주님을 찬양하는 아침이다.
(묵상 기도)
주님,
저를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풀어내실 뿐만 아니라,
아빠와 함께 영생의 춤을 추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창세 전의 약속을 이루시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고,
새 언약을 이루시는 주님이십니다.
제가 늘 주님 안에 거하는 자 되길 소원합니다.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