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서 글을 올려 봅니다.
저는 올해 스물 세 살이고, 대학 입시를 사실상 처음 치뤘습니다. 수시 2학기가 있는 줄 알았다면 진즉
시험을 쳤겠지만, 저는 그 당시만 해도 한예종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한데
한예종이 12월 27일까지 원서 접수인것을 한달 이상이나 앞으로 땡겨버렸더군요. 저는 마감날에 가서야
지인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힘들게 일하고 왔더니 이게 웬 청천벽력:;;입시생은 늘 촉각을 곤두세
워야 하는데, 제가 너무 무덤덤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봅니다.
음...서울예대에 시험을 쳐야 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예대이고 등록금이 비싸니까, 2차적으로 생각
해보자 그런 수준이었죠. 집안에서도 반대가 극심했고 돈 벌어서 시집이나 가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참
막막했습니다. 과외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력이 빵빵한 것도 아니고, 갈 마음은 없고...서울예대
다니다가 한예종 시험을 보자 싶어서 부랴부랴 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시험 준비를
2주 정도밖에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공모전 외에는 습작은 거의 해보지도 않았고, 입시용
글은 한편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시험을 보러 갔지요. 원서 넣을 때도 극작을 넣을지
문창을 넣을지 계속 망설였답니다 아하하::
1차 시험장은 그렇게 추운 편은 아니었지만 너무 긴장되서 혼란스러웠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시로 상을 탄 적은 있어도 산문으로 상을 탄 적은 한번도 없었지요. 시 주제는 엘리베이터였고, 콩트
주제는 ()가 떠나기 5분 전이었습니다. 시간이 째각째각 가고 있고 사람들은 쓰고 있고 저는 한 줄도
못 쓰고 시험지를 노려보고만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관한 이야기와 ()가 떠나기 5분 전은 사실
표제를 받자마자 떠올려서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관건은 어느 걸 더 빨리 쓸 수 있느냐였습니다.
결국 저는 ()가 떠나기 5분 전을 택했습니다. ()안에는 '궁녀'라고 써 넣었구요. 내용은 간단하게 말해서
임금의 후궁을 주살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궁녀가 궁을 떠날 채비를
하고 궁을 떠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 세분화시켜서 떠날 채비를 하는 궁녀의 심리 상태만을
묘사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도 듭니다. 저는 뭐, 거의 부들부들 떨면서 적어내려갔습니다. 제출
하고보니, [나]는 수방궁녀인데 수방궁녀의 모습은 하나도 묘사가 안되어 있고 결말부가 너무 성큼
다가선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궁에 가지고 들어온(혹은 스승에게 선물받은)경대에 핀 곰팡이와
비듬과 서캐가 낀 머리칼을 빗어내리다, 마중을 나온 생각시 및 스승과 옛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퇴
궐합니다. [나]는 나를 쫓아낸 장본인인 스승과 친구를 원망하지는 않죠. 그럴 수도 있지, 세상 살면
서. 근데 왜 하필 나였지? 하는 의문은 품죠. 경대를 챙길까 말까 하다가 챙겨들고 궁을 나선 [나]는
수졸들이 쬐고 있는 모닥불 가에 경대를 던져넣습니다. 경대가 불꽃에 살라지면서 곰팡이들도 사라
지지요. [나]는 [도성 바깥에 무수하게 패어 있는 밭고랑들처럼] 놓여 있는 생을 생각하며 불꽃을 바
라보는 것으로 끝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뭐 이렇습니다 으하하하::;곰팡이 핀 경대, 불꽃에 사
그라드는 경대, 쇠락한 나의 몸 빼곤 묘사가 없는 것도 같고...::;
내러티브가 너무 부족해서 1차 보고 아 떨어졌다, 했는데 붙었습니다.
2차 시험을 보러 갔을 때는 긴장이 안 풀려서 책을 봤다 덮었다 했지만 소용이 없었죠.
사실, 제가 서울예대 출신 작가들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국내 젊은 작가의 경우는 김영
하님과 김연수님이 아니면 작품을 아예 안 봤을 정도니까요. 국내 작품은 주로 남성 작가의 글만 봤
습니다. 책도 조금씩 읽지만 일단 마음에 드는 사람 작품은 데뷔작부터 최근작까지 싹쓸이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에 아하하하::;
그러던 제가 일부러 찾아서 읽으려니 죽겠더군요::;면접에서 많이 언급되는 책을 골라서 읽
고, 그 중에 취향에 맞는 작품을 다섯 편 골랐습니다.
김영하-검은 꽃/ 김연수-부넝쒀/하성란-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신경숙-지금 우리 곁엔 누가 있는 걸까요/
김훈-화장
결국 제대로 대답한 건 없고 엉뚱하게 천운영님의 바늘을 얘기했습니다 T_T:;;
저는 이광호 교수님, 박기동 교수님, 김혜순 교수님 세 분이 질문을 하셨는데...제가 답변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실수가 박기동 교수님이 질문 하시려는 걸 두번이나 잘라먹었고, 두번이나 3질문 어택을 하시는데
대답을 못하고 멍하니 눈만 깜짝깜짝거리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때 저를 다 쳐다보시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숙이고 노트북을 매만지시더군요 아하하하::;
졸업하고 뭐했는지를 아주 집요하게 물으셨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도 집요하게 물으셨습니다. 생각해보니
생활기록부에서 성적이 제일 좋은 게 역사 관련 과목이었기 때문에, 역사 이야기를 하시고 싶었던 것은 아
니었나 싶습니다.
2차를 보고 나서 부랴부랴 짐을 챙긴 뒤 셔틀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저 자신에게 너무도 분하고 화가 나서
엉엉 울었습니다. 집에 가서도 울고, 자면서도 울고, 매일같이 울었습니다. 덕분에 눈이 번데기 사촌이 되
어버렸죠 ^^
저는 결국 예비번호를 받았습니다. 예비번호도 가능성이 너무 없기 때문에 사실상 불합격이죠.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뭐...그렇게 슬프지도 허망하지도 않습니다. 진정으로 마음에 없는 학교에
가느니 차라리 정말 가고 싶은 학교에 가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서일까요.
한예종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이제껏 받아두었던 자료가 실종된데다 홈피에 가보니 입시자료들이 사라
져서 어쩐 일인가 싶지만::;
음, 나름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쫓겨서 저처럼 헤매지 마시고, 평소에 조금씩 연습을 해두셨으면
좋겠습니다. 면접하실 때 너무 버벅대지 마시고요. 긴장하지 마시구요. 긴장하면 저처럼 바보됩니다 T_T:;
기를 쓰고 준비해가서 정작 하나도 대답을 못하는 경우는 없어야죠. 번호가 빠르신 분은 청심환을 권해드려요.
전 청심환을 챙겨간다는 게 깜빡해서 T_T
아무튼 격려해주시고 도움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카페지기 정서님께도 무한한
감사를. 많이 위로가 됐어요^_^
첫댓글 힘내세요 저도 면접을 망쳐서 남일 같지 않네요..ㅠㅠ
힘내세요. 떼르님께서 면접때 해주신 말씀들이 많이 도움이 되었는데... 감사합니다.
저도 예비번호입니다.. 그래도 아에 탈락보다 더 잔인할지도 모르지만.. 희망이라는게 있으니까 힘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