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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여기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를 받는다.(9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가능하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목숨을 얻어라.”(19절)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의 손 안에서 평안과 안전을 누리게 된다. 이런 말들이 오늘의 본문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오늘 본문은 나쁜 소식으로 가득 차있고, 우리고 겁먹게 하고 희망을 잃게 하는 내용을 채워졌다.
이 본문이 묘사하는 것은 마태복음 8장 24-26절이 묘사하는 폭풍과 비슷하다. 예수와 같은 배에 타고 있었던 제자들은 폭풍 때문에 공포에 빠지게 된다. 이때 예수는 배 안에서 누워 편안하게 잠을 잔다. 이는 아무도 깨뜨릴 수 없는 하늘의 평화로만 설명된다. 오늘의 본문은 폭풍 때문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잠에서 깨어난 예수가 준 말씀과 비슷한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의 머리의 털 끝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예수의 격려의 말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슷하게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위태롭다.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안전망은 우리 주변에서 모두 부서지고 있다. 예수의 말씀이 옛날 사람만을 위한 것일까? 우리가 오늘 본문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 예수의 말씀은 2000년 전만큼 지금과도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2차 세계 대전 이래로 크고 작은 “전쟁”들이 계속 있어 왔다. 각국의 군비가 계속 증가하면서 위협은 더 심각하게 다가온다. 오늘날 테러리스트에 의한 “난리”가 일어나고 있으며, 증권거래소에서 “지진들”이 일어난다. 극지방의 빙하는 녹고 있다. 전염병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면역력이 없는 바이러스로 인류가 전멸할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빵과 물이 없어 죽어 가고 있다. 부국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약소국의 자급자족이 위협받지 않는가? 2000년 동안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많은 부작용이 있다. 이 부작용이 날로 심해지지 않는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와 같은 상황에서 오래되었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답은 이것이다: “우리가 내일 죽을 것이기에 우리로 먹고 마시게 하라.”(사 22:13; 고전 15:32) 오늘날 많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지구적인 붕괴의 위험 앞에서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매우 이기적인 현실도피적 생각이다. 예수는 본문에서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너희의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장에서 그는 경쾌한 확신과 함께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선하신 손에 항상 놓여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와 같은 확신이 있는 곳은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얻을 참을성에 의해 주어진다. 그와 같은 참을성은 오직 “먹고 마시는” 사람의 게으름이 아닌 인내를 요구한다. 전설에 의하면 마틴 루터는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될 때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만약 내일이 심판의 날이라면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고 싶다”고 말한다.
여전히 강조할 만한 가장 악한 위험이 있다. 전쟁과 지진보다 더 나쁜 것은 예수가 경고한 바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다’라고 말하며 ‘때가 이르렀다’고 말하나 그들을 좇지 말라”는 말씀이다. 몇 개의 이미지들은 예수의 경고를 분명하게 떠오르게 한다. 거짓 선지자를 따르는 한 남자는 외견상의 안전 로프에 의지하여 급락하는 남자와 같다. 또 굶주림에 죽어 가는 거지가 빵을 받았지만 사실 그것이 돌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설득력 있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우리는 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긴급한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이름으로 소위 전도자로 불리는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멸망에서 구원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 그들이 멸망으로 이끈다.”
러시안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The Grand Inquisitor”이라는 제목의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써낸 바 있다. 그 이야기는 한 기독교회의 늙은 추기경에 관한 것이다. 이 추기경은 진짜 예수가 그의 마을에 갑자기 나타나 눈먼 자를 치유하고 죽음으로부터 젊은 소녀를 일으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추기경이 이것을 보고나서 예수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은 왜 오셔서 우리를 간섭합니까?” 그 추기경은 화형을 위한 장작더미에서 모든 이단들 중에도 가장 악한 자로서 예수를 불태우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그가 오래전에 했던 것은 오늘날 교회에 의해 훨씬 더 잘 행해졌기 때문이다. 그 교회는 심지어 그의 이름이 불릴지라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추기경은 말한다.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정말로 오지 마라. 결단코, 결단코!” 그리고 그 추기경은 예수를 어두운 ‘square of the city’로 추방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올 것이며 ‘내가 그다!’라고 주장하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는 예수의 이 문장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와 같은 징조의 위협에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에세이의 서두에서 말해진 것에 의해 우리가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와 같은 위협의 직면에는 우리가 예수로부터 배울만한 기술은 따로 없다. 단지 우리 스스로 실천하는 것 뿐이다. 우리의 도움은 스스로 돕는 자로부터 온다. 예수는 우리에게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할 것”이라며 우리를 지킬 것을 약속했다. 예수 없이 우리의 손만 의지하는 경우 우리는 실족하게 되든지 분명히 경건한 체하는 추기경 같이 될 것이다. 우리의 주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동안 우리는 그와 그의 말을 꼭 붙들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누가복음 21장 14-15)
주석적 관점
예루살렘 성전, 세상의 재난과 박해
- 본문이 시작되면 예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성전에 대해 공적 대화를 나눈다(5-7). 이어서 예수는 가짜 지도자, 폭력 그리고 고통(8-11), 체포, 박해, 그리고 인내(12-19),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인자가 오심(20-36)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성전의 파괴(5-6 )
- 예수 당시에 있었던 성전은 주전19년에 헤롯대왕이 다시 세운 거대한 건물이었다. 헤롯은 건물을 두 배나 더 크게 지었다. 사람들은 연설과 치유를 포함한(행3:11;5:12) 여러 가지 목적으로 성전의 주랑이나 현관에 모였다. 성전 자체는 18개월 만에 완성되었지만, 바깥 코트와 장식들은 주후62-64년까지 계속 지어졌다.
- 헤롯 성전이 다 완성되어 10년이 지나기도 전인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눅21:5의 기술은 성전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에 대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파괴 이후에 사람들은 로마를 통해서 그 화려함을 알 수 있었는데 약탈된 비품의 전시나 주후71년 로마의 개선 행진 마차에 실려 보여준 로마포위와 예루살렘 방화 사건에 대한 큰 그림(요세푸스Josephus, 유다전쟁 7.3-5)을 통해서였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자 기독교인들은 이것은 예수의 생전에 예언한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가짜 지도자(7-8)
- 예루살렘 멸망으로 가는 때까지, 많은 사람들은 권력에 저항하는 행동을 하거나 그러한 혐의를 받았고 헤롯과 로마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최근 한 웹사이트에는 주전4년에서 주후70년 사이에 로마군대에 대항하다 진압되었다고 생각하는 15명의 지도자 이름이 게시되었다. 8절에 예수의 말을 인용하여 여려 지도자들을 말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때가 가까이 왔다’라고 종말을 말했는데,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첫 번째 징조였다(7). 누가복음은 체포, 투옥되거나 살해된 여러 지도자들의 모습이 예수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 전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견해를 확정시켜 주는 것으로 본다.
전쟁과 세계의 격변(9-11)
예수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인도한다고 하면서 혼란에 빠뜨릴 것에 대해 경고하신 뒤, 갈수록 강도가 커지는 불행한 사고에 대해 기술하신다. 누가의 설명으로 이것들은 “진통의 시작”(마24:8;막13:8)이 아니다. 도리어 이러한 사건들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까지 늘어나는 재난을 말하는 것이다. 먼저, 전쟁과 난리가 있을 것이다(9). 이것은 아마도 예루살렘 포위와 멸망 전에 69년의 네 로마황제가 급작스레 바뀐 것을 말한 것이다. 둘째로, 민족이 민족을 치고,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다(10). 이 전쟁이 시대의 종말로 가는 전환이 아니라, 누가의 설명으로는 예루살렘 침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셋째로, 큰 지진과 기근과 역병이 있다는 것이다(11a). 누가는 예수와 예루살렘 멸망 사이에 클로디우스황제 시기의 가뭄(행11:28, 주후47년)과 필립보지역의 지진(행16:26 주후50년)을 말하고 있다. 넷째로, 하늘로부터 무서운 일과 큰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11b) 말한다. 학자들은 요세푸스가 예루살렘 성전의 방화시에 칼 모양의 별과 혜성이 나타났음을 서술한(유대전쟁사6.289)것이 누가의 사건전개의 결론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말씀은 첫 번째로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에 초점을 둔 것이지 종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체포, 박해, 미움 그리고 참음(12-19)
- 누가의 설명에서는 예수가 고통과 박해를 종말로 가는 재난의 일부로 제시하지는 않는다.(비교, 마24:9-14;막13:9-13). 도리어 예수는 체포, 박해, 재판, 가족들의 배신과 그들에 대한 미움이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12)-저자가 이 복음서를 쓰기 20년 전인 주후 70년에 일어났다고 알고 있는-이 일어나기 전 재난의 연속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12-19절이 말하는 사건은 누가복음이 완성되고 난 뒤 얼마 뒤에 쓴 두 번째 책 사도행전을 시대의 사건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 누가의 역사신학에서는 교회의 시대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숨을 얻기 위해(19)참아야 할 시대이다. 대조적으로 마24:13과 막13:13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가 예루살렘 멸망을 그것이 일어난 그대로 가깝게 묘사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군대에 포위를 당하는”(20) 것은 로마가 반항하는 백성들에게 진노의 날을 실행한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비슷하게, 예수는 그의 제자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사용한 용어들로 묘사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체포될 것이다(12a, 비교 행4:3;5:18;12:1;21:27). 그들은 또한 관가로 끌려갈 것이다(12b, 행21:11;28:17). 그들은 왕들과 총독들 앞에서 증언할 것이고(12-13, 행24-26), 다른 사람들이 반박할 수 없는 지혜를 줄 것이다(15, 스데반 행6:10). 그래서 예수의 연설에 대한 누가의 설명은 처음 부분에서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 시기에 예수의 제자들의 삶에 일어날 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역사에서 어떤 시대에, 모든 세대가, 지금이 종말의 때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21세기가 시작될 때도 그랬다. 오늘의 세대는 전쟁과 자연 재해와 정치적 혼란을 종말론의 소재로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2001년 9월 11일, 알 카에다와 관련된 테러리스트들이 네 대의 민간 항공기를 공중납치했을 때 자기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한다. “충격과 공포” 작전의 일환으로 수백 대의 탱크가 사막을 건너서 바그다드로 향하는 모습은 미국인의 머리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2004년 12월 26일, 세계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자연재해인 인도네시아 쯔나미로 인하여 놀랐다. 많은 사람들이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지나간 후 뉴 올리언즈에서 전해졌던 뉴스 영상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저런 현상들이 종말론적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언제 종말이 올지는 하나님만 아신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혼돈과 파괴의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가리키신 방향은 그 당시로는 대단히 도전적인 것이었고,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다.
누가복음 21:5-6에서 예수는 성전이 무너질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두 가지 질문을 하게 한다: 언제? 징조는 무엇인가? 예수는 미래에 일어날 세 가지 일들을 설명한다(8-11절): 사기꾼들이 와서 신자들을 속이려고 할 것이다; 전쟁과 분쟁이 진행될 것이다; 자연 재해가 만연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미래에 종말의 시간이 있을 것이며, 이런 일들이 한 번에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인해준다. 그리고 예수는 13절에서 특이한 이야기를 한다: “이것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예수는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증언을 연습하거나 미리 준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대신에 증언하는 순간에 받게 될 반박할 수 없는 지혜에 의존해야만 한다. 예수는 그들의 증언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고 이러한 파국의 때에 그들의 인내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의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고난이 증언의 기회라고 하는 예수의 특별한 명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죽음과 배신을 직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핍박당하는 신실한 사람이 어떤 증언을 할까? 대부분은 좋은 시절, 좋은 일, 구속과 치유와 구조와 구원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증언은 보통 하나님이 어떻게 신실한 사람을 노예에서 해방시키셨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길이 없을 때 길을 만드셨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구원하셨는지를 선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예수의 특별한 말은 우리가 파괴와 배신과 상실을 경험할 때야말로 증언할 기회로 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큰 고통과 증오 앞에서 어떤 증언을 할까?
Shawn Copeland는 “고난은 언제나 고통과 파멸과 분리와 불완전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고난은 우리를 무력하게 하고, 침묵시킬 수 있고, 절망과 좌절로 우리를 밀어낸다.” 파괴의 시간에 증언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끌어 모으는 대담함과 고통 앞에서 말하는 담대함이다. 커다란 고통은 어떤 사람들은 변하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패배시키지만, 견디는 사람은 그들의 생명을 얻는다.
고통은 변화된 사람들에게 희망에 대해 말할 기회를 제공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그야말로 신체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훌륭한 신학자인 Howard Thurman은 고통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아왔다: “그들의 얼굴에 미묘한 광채가 생기고 평온이 깃들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봉인된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생기넘치는 관용이 그들의 관계 안으로 찾아왔다.
상실과 슬픔과 혼란의 시간에서 탄생한 증언이 Thomas Dorsey가 작사한 “귀하신 주님”이라는 노래로 만들어졌다. Thomas Dorsey는 1889년에 조지아주 시골에서 태어난 다작의 작사가였고 탁월한 복음송과 블루스 음악가였다. 청년시절에 시카고로 가서 클럽과 교회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일했고 극장에서 연주했다.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애쓰면서 Dorsey는 클럽에서 연주하는 시간과 교회에서 연주하는 시간을 나누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Dorsey는 그의 예술적인 재능을 교회만을 위해 바쳤다.
1932년 8월에 Dorsey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대규모 부흥집회에서 주요 독주자로 출연하려고 임신한 아내를 시카고에 남겨두고 떠났다. 부흥회 첫날 밤이 지난 후 Dorsey는 “당신의 부인이 죽었습니다”라는 전보를 받았다. 집으로 달려간 Dorsey는 아내가 죽기 전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그 아들 역시 죽었다. Dorsey는 아내와 아들을 같은 관에 넣어 묻고서 슬픔과 고통에 잠겨 가족과 친구들을 멀리했다. 그는 한참동안 어떤 음악도 작곡하거나 연주하기를 거부했다.
여전히 절망의 한 가운데 있었지만,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때, 그를 온통 씻어내리는 평화를 느꼈다고 Dprsy는 말했다. 그는 그의 머리 속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멜로디가 울리는 것을 들었고, 피아노로 그 곡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Dorsey는 고난의 한복판에서 이런 증언을 기록했다.
귀하신 주님, 나의 손을 잡으소서, / 나를 인도하셔서, 나를 일어서게 하소서; / 나는 피곤하고, 나는 약하고, 나는 지쳤습니다; / 폭풍을 지나, 밤을 지나서, / 나를 빛으로 인도하소서; / 나의 손을 잡으소서, 귀하신 주님, / 나를 집으로 인도하소서.
설교적 관점
-지난 주 본문처럼 예수는 여전히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다. 누가복음 21:5-19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것들로 가득 차있다. 제자들은 혼란스럽기 시작한다. 그들은 성전의 아름다움과 그 벽을 이루는 거대한 돌들, 그리고 예물을 드리러오는 부유한 경배자들로 인해 놀라고 있다. 우리가 Town and Country나 People지(잡지들)에서 보듯이 엄청난 부가 공적으로 드러난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흐트러트리는데, 헤롯의 성전과 그의 왕관에 달린 보석이 그러하였다. 신약성서는 헤롯을 피해망상의 폭군으로 기억하지만 역사와 고고학자들은 그를 건축자로 기억한다. 교회 도서관에는 아마 헤롯의 성전을 모델로 한 예술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책이 있을 것이다. 성전 위를 쳐다보면 당신도 역시 놀랄 것이다. 성전을 본 누구나 그랬다.
-하지만 누구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는 마음을 빼앗긴 제자들에게 그들을 현혹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비난받아 마땅한 건물”(Condemned Property)임을 암시하는 말을 함으로써 혼란스럽게 만든다. 거대한 돌들, 아름답고 잘 다듬어지고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성전에 대해 “돌 한 개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라고 말하고 영광스런 하나님께 봉헌된 영광스런 성전이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라고 한다. 성전파괴 후에 쓰여진 누가복음은 예수를 역사적 사건을 통해 그의 말을 입증한 신뢰할 만한 예언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말을 경청했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의 모든 말씀이 진실이었으므로 자신들을 혼란스럽게 만든 이 말들 또한 신뢰할 수 있었다.
-신학적으로 누가는 마지막 때와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을 구분하고 있다. 성전은 종언을 고할 수 있지만 그 때가 마지막은 아니다. 평화가 그치고 전쟁이 활개를 칠 날이 오지만 그렇다고 전쟁으로 이 세상이 끝나는 게 아니다. 지진으로 인해 안전이 흔들리고 보장되지 않더라도 두려움과 불확실함도 역시 끝은 아니다. 예수인 체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예수의 이름을 도용하여 예언을 하겠지만 그런 진실을 흉내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해서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은 아니다. “하늘로부터 무서운 일과 큰 징조가 나타나서”(11절) 너희들에게 이 놀라운 현상에 숨겨진 의미를 해석하여 스스로 예언자인 척 하도록 유혹할 수도 있으나 마지막 때를 아는 것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행전 1:7, 살전 5:1-11을 참조하라). 신학적으로 누가는 중요한 점을 갖고 있지만 수사학적으로 그는 자신의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전쟁, 난리, 지진, 기근, 전염병이 있을 것이고 가장 힘든 일은 개인적 고난일 것이다. 너희는 체포되고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던져져서 권력자들 앞에 불려나오게 될 것이다. 그 때 곧 모든 일들이 캄캄해보이고 거짓된 것이 나타나 진실인 양 하며, 전쟁이 끊이지 않고 땅이 흔들리며 너희들 스스로를 변호해야만 할 바로 그 때에 너희는 “증언할 기회” (13절)를 얻게 된다. 이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사건들-전쟁, 지진, 기근등-은 제멋대로 일어나는게 아니고 종말의 표징도 아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계획 속에서 먼저 일어나야만 하는 일들이다 (9절 “이런 일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그 계획에 주목하지 않았다. 전쟁, 지진, 기근 그리고 전염병등의 확산에 완전히 마음이 빼앗겨서 보다 놀라운 그 무엇인가를 좀처럼 보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의 눈에는 이 드라마틱한 역사적 사건들은 단지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위대한 드라마를 위해 필요한 무대장치일 뿐이다.
-전쟁, 지진 그리고 기근 앞에서 우리는 할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체포, 박해 그리고 기소되는 일은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침묵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계획 곧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13절). 만일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한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준비해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염려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증언함에 있어 우리의 무력함이 가장 본질적인 자격요건이 된다. 다급한 순간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지혜는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거야!” 그리고 “괜찮을거야; 마지막 순간에 떠오를거야!” 등의 격언을 제시한다. 이러한 세상의 처방전은 예수께서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과 다르다. 대신 그는 이렇게 약속한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을 줄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선물로 우리가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험한 세상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고 그 적대자들은 그것을 예측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비록 그들이 이전에 그의 말씀을 거부했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를 통하여 그의 나라의 말씀을 들려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런 말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고 약속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말은 태초에 모든 것을 창조했던 그 말씀이고 (창 1:3, 요1:1-3) 말함을 통하여 계속 창조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말하고 또 들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믿음의 선물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롬 1:17).이것이 바로 예수의 말씀이 지닌 능력인데 그것은 그 나라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삶을 통하여 드러난다.
-누가복음이 쓰여졌을 때, 성전파괴가 예수의 말씀이 진실됨을 증명하였듯이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를 통하여 이 말씀들이 그리스도의 변함없는 약속임을 증언해야 한다. 이 말씀은 수 천년전 공중으로 말하여진 작은 호흡과 같은 말이었지만 눙력을 심지어는 “너희의 영혼을 살리는” (19절)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성전은 파괴되고 돌 하나 남지 않았다. 로마제국은 역사 속에서 붕괴되었다. 하지만 이 말씀들은 견고하고 그 말씀의 약속은 지진, 전쟁 혹은 기근 심지어는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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