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심의.결정통지서"가 6월 23일(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왔다. 두차례 집으로 배달을 왔으나 공교롭게도 아버지 제사(양6월19일, 음5월 16일)로 시골에 내려가 있어서 받지 못하고 아내가 양천우체국에 직접가서 ?아왔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17조의 3 및 동법 시행령 제20조의 2"의 규정에 의하여 "황봉술(아버지)을 특별법 제17조에 의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로 결정함"이라는 내용의 결정통지서였다.
회사 송별회식(부동산금융본부 정재호 본부장)과 2차 맥주로 인하여 밤 11시 반경에 집에 왔더니 나보다 먼저 집에 와 있었다. 통지서 결정 내용을 보고 감개가 무량하여 통지서를 거실 베란다 쪽에 펼쳐 놓고 아버지께 두번 절하며 고하였다. '결정되었음을...'
아래 사진이 결정통지서이다. 2005년 6월경에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조사신청서"를 "진상조사실무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6월 23일에 결정통지가 날아왔다.
<신청취지> 신청인(나)의 부친 황봉술은 1943년 초 일제의 징병 1기로 강제징집된 후 1945년 8월 15일 해방후인 가을경에 마산항으로 개별 입국한 사실이 있어 강제동원 패해 진상조사 신청서를 제출함.
<피해내용> 1943년에서 1945년에 걸쳐 일본 구주 가고시마현의 일본 해군육전대 항공기지에서 방어 경비중에 미군 폭격기의 폭격으로 인하여 놀란 후유증으로 연세가 들면서 심장병, 고혈압, 협심증 등 합병으로 고생하셨으며, 이로 인해 60대 초반 무렵에 중풍으로 쓰려지셨다가 70대 초반에 다시 쓰러져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치료후 정기 통원 치료중에 1998년 6월 11일 자택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음.
<인우보증서> 상기 대상자는 같은 고향의 우인으로서 상기 대상자가 사망할 때까지 절친하게 지내왔으며 일제강점기에 상기인이 "징병 1기"로 강제 징집된 사실이 있음을 아래와 같이 확인합니다. <아 래> 상기인은 1943년 초반 무렵 일제의 강제동원 "징병 1기"로 징집되어 진해 해군훈련소에서 6개월간의 호된 훈련을 마친후, 일본 구주 가고시마현의 해군육전대 항공기지에서 복무하였으며 동 기지에서 방어 경비중 미군 폭격기의 폭격을 수차례 받았습니다. 종전된 1945년 가을경에 마산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귀국후 나이가 들면서 이때의 폭격 후유증으로 심장병이 심화되었으며 고혈압, 협심증 등의 합병으로 두차례 쓰러졌으며 오래동안 치료를 받아오던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보증인) 경남 창녕군 고암면 감리642번지 김희철 --------------------------------------------------------------------------------------------- 아래 사진 4매는 신청서들이다. 보증인 김희철 선생님은 비록 연세는 5세 아래이나 아버지께서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관계로 어린시절부터 사귀어온 절친한 친구이시다. 이분이 아니었다면 아버지의 가장 젊으신 시절인 20대 초반의 생사의 갈림길과 고생스러운 행적을 알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막연히 아버지께서 일제때 일본 해군의 항공대에서 정비사로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고, 그 증거로 과거 시골집 옷장위에 비행기 유리와 영어로 된 비행정비 교본(아마도 독립된 대한민국 육군의 L-19비행기의 유리, 교본이었을 것이다)이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길이 없다.
아버지의 삶은 신산한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궁핍한 집안의 막내(4남 2녀)로 태어나셔서 위로 형님 누나들은 현대식 정규학교의 혜택을 입지 못하였고 그나마 아버지께서 고향에서 갓 설립된 창락초등학교를 1회로 졸업하셨다.
친구 후배들이 읍내 중학교와 창녕농고를 들어가는 동안 아마도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서 집안일을 도우면서 공부를 계속하신 모양이다. 돌아가신 큰어머니의 증언에서도 막내 시동생은 조그만 않은뱅이 책상에서 공부한다고 비가 와도 마당에 늘어놓은 곡식 설겆이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해방되기 2년전 일제의 대동아 전쟁으로 강제징집을 당하셨다. 다행히 글재주가 좋으셔서 해군육전대의 항공기 정비특기를 받아서 중국 전선이나 동남아, 태평양 전선으로 가지 않고 일본의 가고시마현에서 복무하였던 모양이다. 항공기 정비교육을 받을때는 상급자로부터 몽끼, 스패너 등으로 수시로 머리를 맞았다고 한다.
행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격전지여서 희생이 컸던 동남아나 태평양 전선으로 나갔다면...아마 내가 여기서 이글을 쓰지도 못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일본의 계속된 패전으로 일본 본토가 미군의 폭격기(B-29기)에 의한 폭격을 받았으며 우선 공격 대상이 군수공장과 군사기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때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고 한다.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서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는데 불과 몇 미터 앞의 바위 밑으로 들어가면 살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이미 여기저기 떨어지는 폭탄에 놀라고 얼이 빠져서 그냥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다행이 폭탄은 아버지를 피해서 여기저기 떨어진 모양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나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끔찍한 경험이 노년에 접어들면서 놀란 가슴이 심장병, 협심증으로 변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병원엘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혹시 크게 놀란적이 없었느냐고 하더라면서...그때는 아버지의 말씀을 그냥 듣고 말았다. 아픈 마음을 놀란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같이 아파하는 그런 마음에 왜 없었을까 하는 후회하는 마음이 든다.
1945.8.15일 일본의 항복과 종전으로 전쟁은 끝났으나 귀국하지 못하다가 그해 가을께 배 한척이 마련되어 귀국선을 타고 마산항으로 들어오셨다고 한다. 마산에서 여러명이 한방에서 잠을 자는 여관에서 하루를 지내게 되었는데(그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투숙객들 여럿이 한 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이?날 아침에 일어나니 그동안 모았던 돈을 누가 몽땅 훔쳐가 버렸다고.
유난히 소란을 떨고 친절하게 굴던 사람이 의심이 갔지만 증거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애석하고 안타까웠다는 생각이 난다.
일제 징병시절 휴가를 얻어서 일본에서 거주하던 둘째 형님을 만나러 갔었다고 한다. 이미 가족(큰어미니, 사촌큰누나)과 같이 일본에 살면서 군수공장에서 일하시던 둘째 큰아버지를 만나러 갔었는데 몇 년만의 상봉이었는지 마치 이산가족이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고 이야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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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르막 원문보기 글쓴이: 스톤
첫댓글 내아버님과 어쩜 똑같냐.그런데 사실확인원을 받으면 국가에서 어떤 혜택이라도 있는거냐? 나도 심의결정통지서를 받은것 같은데(형님이). 아무튼 고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