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카페의 선생님 글에 부쳐올렸던 답글을 여기에 옮겨 다시 올려놓습니다)
金文億선생님, 안녕하세요?
時調作家이신 金선생님의 글을 읽고 어줍쟎이 선생님 글에 답글로서 몇 말씀 사뢰어드립니다.
소생은 어쩌다 더러 남이 쓴 글을 접하게 되면 글쓴이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읽습니다만,
평생토록 문학 -詩/隨筆은 물론이려니와 더더욱이나 時調創作-과는 전혀,
아주 조금도 인연지어진 바 없는, 그러니까 글 한 편 써본 일 없는 門外漢입니다.
어려서 감자 먹고 자랐던 緣由로써 얼마전 ‘강원수필문학’을 들러보게 되면서부터 아주 가끔씩 '일반회원’ 방을 기웃거려 오다가 偶然히, 그야말로 아주 偶然하니, ‘초정’ 선생님의 글들이 거기 無盡藏하니 간직되어 있는 寶庫를 발견해내고서는, 요지음 들어 주옥같은 선생님 글을 찾아가며 읽는 재미로 三昧의 지경에 沒入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어렸을 적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시어 쓰셨을 감자꽃(시조/수필글)을 비롯하여,
어쩌면 선생님 자신의 모습과 思惟하심을 그리어내셨을 ‘종소리의 추억’, ‘외상 장사’, ‘늙는 재미’,
‘완행 연습’, ‘꽃상여’, ‘저승서 온 편지’ 등의 글에 더하여, 나아가서는 선생님댁의 애잔한 가족사를 엿볼 수 있는 ‘아방가르드 우리 어머니’, ‘客鬼와 항아리할멈’, ‘잊을 수 없는 그 사람’. ‘비봉가는 길’, ‘불쌍한 우리 형님’
. . . 그 모두가 어쩌면 내 자신의 주변사*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크게 공감이 이는 그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 (저희 일가 중에서도 日帝下에 仲伯父님께서 徵用을 당해 가셨더랬는데, 함께 가셨다 소식이 두절되셨던 堂叔님께선 해방 후 仲伯父님께서 돌아오시고나서도 한참이나 더 지난 다음서야 그만 유골로 돌아오셨던 가족사가 있습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먼저 올려드렸어야 했을 제 소개가 늦어졌네요.
저 또한 컴퓨터 덕분에 고맙게도 금세기 문명이 베풀어주는 편리함을 만끽해가며 살아오고있는 중늙은이입니다. 제가 컴퓨터를 열 적에 쓰게되는 열쇠말이 ‘chojung’이기도 한지라 어쩌면 그래서도 '초정' 선생님이 더욱 친숙하니 느껴졌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제 식별기호 옆구리를 어찌어찌 슬적 건드리다 보면 뜻 아니하게 ‘junghee’란 이름이 뜨기도 하는지라 더러는 소생이 혹 묘령의 여인네는 아닐가 여겨질 때가 간혹 있습니다.
어쩌다 먼 나라로 떠나와 오래 살다보니 고국 카페(다음)에 가입할 적에 제 신원확인이 아니 되던지라 어쩔 수 없이 남의 이름을 빌어다 썼었더랬기 그런 일도 생기더군요.
소생은 오늘로서 일흔하고도 네 번 째 되는 생일**을 맞았는 바, 서울 上道町서 胎中養育 되어서는, 태어나기로는 강원도 楊口땅 外家에서, 그리고
해방 이후론 春川에서 자라나며 昭陽國民學校에 이어 昭陽中學校를 다녔으니, 봉의산 아래 春川(邑)보다는 昭陽江(水沒以前의) 강물을 더 가까이 느끼면서 자라났다 할 것입니다. ** (陽曆으로 12月 2日, 癸未年生입니다)
내 사던 데가 비록 명색으로는 春川市內라 일컬어지기는 했었으나, 邑/市內로부터는 昭陽江 木다리 (現昭陽第二橋) 건너 편 하고도 썩 위 끄트머리 께로 뚝 떨어져있던, 舊東邦製絲工場서 썩은다리를 지나서도 한참을 더 오른, 玉山浦 아래 ‘윗가래목(가래모기)’이란 데였섰던지라, 거기서 昭陽江을 건너고 시내를 지나 春川의 南東녁 끝인 師範學校에 이르던 이십리 통학길은 걸어서 꼬박 두 시간씩 걸렸더랬었습니다. 덕분에 한 때 고향땅에서 초등교사직에 봉직하다가 강원도를 떠나 ‘촌놈’ 허물을 벗고 일약 ‘서울놈’으로 변신해서는 중등교사직에 좀더 몸담아 있다가 급기야는 이 먼 미국땅으로까지 이사를 와 살아온 지 어언 스물하고도 예닐곱 해째가 되는군요.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 곧
6/25가 勃發하여 그 첫 피란을 충청도 忠州땅 仰城面 中田里 '닥방말(楮田/닥나무밭 마을)'에 두세 달 가량 머무다 국군의 북진에 힘입어 잠시 귀향하였었다가,
1/4후퇴를 맞아서는 다시 驪州를 거쳐 어찌어찌 淸州에까지 밀려내려가게 되었섰더랬었는데, 거기서 엄동에 맨 처음 머물었었던 곳이 벽채는 물론 높다란 천정까지도 온통 폭격으로 뚫려진 구멍 투성이었던지라 썰렁하기 짝없이 몹시도 춥고 을시녕스러웠던, 더하여 疫病이 猖獗하여 무시로 사람이 죽어 들려나가던, ‘大麻工場收容所’이었고, 뒤이어 무척 널다란 광장(대운동장이었거나 연병장이었음직한)을 곁에 두고 담장이 높다랗니 둘러쳐진 곳에 그 용도가 군대의 병영막사였었던 듯 똑같이 생긴 기다란 兩通 건물 여섯이 나란하니 竝列을 이루고 있었던 '淸州避難民收容所'에 1년여 머무며 ‘避難民聯合國民學校’를 다니다가, 살던 집 다 타버려 온통 폐허 뿐이던 고향 마을에 돌아왔었던 때가 아직은 포화가 끊이지 않고 있던 1952년 봄으로서,
포성 여전하고 밤낮으로 쌕쌔기(濠洲機)며 방구비행기(偵察機) 소음이 요란하기만 했었던 그런 戰時 때였었더랬습니다.
당시 春川은 收復되기 전이어서 피난민들의 귀향은 일체 허용이 아니 되었던지라 짐 가득 실은 화물 트럭 위에 귀향 피난민 여러 가족이 빼곡하니 얹혀 타고 오다가는 (연봉)검문소를 지날 적이면 하차하여 마치 밀항이라도 하듯 몸을 숨겨 산비알을 에워돌아서는 멀직하니 떨어진 곳까지 옮겨가 승차를 해야만 했었더랬는데, 그때 우리 짐 속엔 당시 그토록 유명했었던 鳥致院風爐와 함께 1갤런 짜리 깡통***이 보물처럼 소중하니 간직돼 있었더랬습니다.
*** (부연하여 쓰자면 실은, 피란 중 먹을 것 없어 꼼짝없이 굶게 될 적이면 저희 어머님께서 들고 나가 동냥그릇으로 사용하셨던 깡통으로서, 귀향 길 路中서도 혹 이 그릇이 필요할지 몰라 버리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또한 듣건대 폭격에 온 마을이 다 불타버려 몸 둘 곳 없는 폐허에서 당장 쓰실 요량으로 가져갔었던 풍로였습니다.)
고향집 근처 ‘안말’엔 우리 땅으로 무논 천여평과 자갈밭뙈기 이백여평이 있어 그 농사로써 연명만은 되겠기에 그토록 위험을 무릅쓰고 귀향을 감행했었던 바이나, 고향 마을에 돌아와 보니 사던 집은 폭격에 全燒되어 오직 하나 부억 아궁이를 받치고있던 쇠붙이 불門만이 저 있던 자리 잿더미 속에 묻히어 남아 있었더랬습니다.
쓰다 보니 제 얘기가 너무 장황해졌네요. 전가족 이끌고 미국땅 시카고를 와 눌러 앉아 살다 보니 난리 통에 서른도 못되어 靑霜되셔서는 평생 온갖 모진 고생 다 겪으시며 나 어렸던 자식 남매를 지켜 길러주신 저희 어머님께선 10년 전 이맘 때 善終/作故하셨고, 그러다 보니 바야흐로 이젠 제 차례가 언듯하니 目前에 다가와 있네요.
추억 아련한 옛 피난지 淸州엔 이민 오기 얼마 전 家率 데불고 찾아를 가서는 일부러 하루를 묵어가며 아직은 개발의 흔적 같은 것이 눈에 띄어 뵈지 않았었던, 선생님의 향리 椒井(藥水)에도 들러를 보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접하자면 문득문득 지난 난리 때 피난 가 그 모진 세월 속에서도 근근하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청주 상당/우암산 아래 (수동)마을과 그 인근의 모습들이, 그리고 미류나무 줄지어 서있던 미호천변 둑방길이며 기찻길로 이어졌었던 조치원/신탄진에 이르기까지, 아련하게나마 기억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요지음 들어 선생님의 글에 크게 魅了되어 밤낮 가리움없이 耽讀해가며 그 중 크게 감동어린 글들은 더러 보쌈(스크랩)하여서는 제 보물창고에 옮겨 소중하니 간직해놓고 있는 중입니다. ‘말이 섰다’에 ‘똥구녕의 파업’이며 ‘게가하는 말’, 그리고 '거시기 거세한 육고기'며 '계집들이 여러 층이더라'에다 '논두렁은 비틀어졌어도 모내기는 바로 하라고' 등등의 글들에서는 諧謔 가득 넘치는 滑稽美를,
‘글쎄유’를 읽고서, 또 저에게는 매우 생소하기만 한 ‘고쿠락(아궁이)’이란 향톳말을 알게 되면서는 더더욱, 구수한 忠淸道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러 編에 걸쳐 긴 論文형식으로 올려주신 선생님의 '辭說時調論'은 꼼꼼하니 거듭 되읽어가며 공부해야 할 내용이라 여겨집니다.
요지음 날씨로서는 매우 드물게 光明燦爛한 오늘 큰아들 데불고 어머님 墓所를 다녀와서는 내쳐 밤이 새고 날이 밝아올 지음까지 선생님 글을 마저 읽어 通讀하기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末尾/最近記事****의 글에서 이르시기를 '모든 카페에 더이상
글을 올리지 못하게 되실 것'이란 취지의 말씀이 있어 이를 봉독하고 보니, 저토록 귀한 글들을 '일반회원' 방이 차고 넘치도록
올려놓아주신 노고에 제 고마움을 전해드려야 되겠다 여겨져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 (某카페 일반회원방 2237, 카페를 떠나면서, 초정, 17.09.26)
바라옵기는,
향후로도 선생님께서 늘 건강하셔서 情感 넘치는 좋은 글을 더욱 많이 쓰시어 世上에 有益을 크게 더해주시길 바래어 마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귀한 작품 오래 두고 되새겨가며 읽겠습니다.
미국 시카고 근처 한적한 곳에 살고 있는 趙甲默이 椒井(金文億) 선생님께 感謝한 말씀을 올려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