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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1 .카르타고
2.카르타고의정부
3. 카르타고의 군대
4. 카르타고의 농업
5. 카르타고의 부와농업
Ⅱ. 한니발과 그와 관련된 사람들
1. 한니발
2. 하밀카르 바르카스
3. 스키피오
4. 마르켈루스
Ⅲ. 2차포에니전쟁과 그 속의 전투
1. 사군토 전투
2. 트레비아 전투
3. 칸나이 전투
4. 자마 전투
Ⅳ. 포에니전쟁이후의 변화
맺은말
1. 카르타고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에서 튀니스만으로 돌출한 본 곶이라는 작은 곳에 자리 잡은 되로서,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오래 전에 무역업자와 상인으로 유명했던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카르타고의 건국이야기는 로마의 건국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전설들로 덮여 있다. 그러나 고고한 발굴 결과들은 카르타고도 과거의 추측처럼 기원전 860814년이 나닌 기원전 750년경에 건설되었음을 보여 준다. 카르타고는 지중해가 가장 좁아지고 따라서 양쪽 대륙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데 힘입어 제해권을 장악하기에 이상저인 도시였다.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중간에 있는 몰타 섬을 점령한 뒤에는 상업과 식민지 개척에서 가장 힘겨운 경쟁자들인 그리스인들을 지중해 서쪽 절반에서 사실상 몰아낼 수 있었다.
카르타고는 수십 년간 티로스의 충실한 자 도시로 남았지만 기원전 7세기에 모 도시가 아시리아에게 그리고 그 후에는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에게 종속되었다. 티로스는 이제 서쪽에 자리 잡은 페니키아의 식민지시들을 통제하거나 보호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카르타고인들은 상업적 이익을 보호하고 확대하기 위해서 지중해에서 어느 국가도 따라올 수 없는 강한 해군을 창설했고, 결국에는 과거에 페니키아 식민지들과, 동쪽에서 벵가지에서부터 서쪽에서 지브롤터와 포프투갈에 이르는 지역을 세력권으로 하는 제국을 건설했다.
카르타고의 지도자들은 로마인들이 이탈리아에서 사용했던 방식대로 다른 페니키아 정착지들과 본토인들을 충실하고 협조적인 동맹 세력으로 만드는 대신에, 그들을 힘으로 눌러 조공을 바치는 속민들로 만들었다. 카르타고로부터 온화한 대접을 받은 유일한 사람들은 시칠리아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카르타고인들은 그들을 자기들의 속민으로 묶어두기 위해 처음에는 시라쿠사와 경쟁했고, 다음에는 로마와 경쟁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는 근시안적인 제국적 정책을 수행한 결과 우방국들을 얻는 데 실패했고,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 속민들 가운데서 무수히 많은 반란을 진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상황은 전쟁에 임하는 카르타고의 집중력을 저해했다.
2. 카르타고 정부
카르타고의 전부 형태는 과두 공화정으로서, 네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매년 선출된 두 수페스들(집정관)로 구성된 행정부와 3백 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원로원, 민회, 그리고 104명의 법관으로 구성된 최고 법원이 있었다. 그러나 민회는 그다지 실권을 갖지 못하였고, 정부는 부유한 사업가들, 상인들, 지주들로 구성된 소수의 강력한 과두정으로 구성되었다.
두 명의 집정과 모든 장군들이 민회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한 결같이 부자들이었고 이 배타적인 과두 체제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정부의 실권은 최고 법원과, 민회에 의해 원로원의 한 위원회로 가능하도록 선출된 30인 위원회 이 두 기관의 수중에 있었다. 두 명의 집정관이 비공식 회원으로 가담하는 이 위원회는 원로원의 의사일정을 준비했다. 최고 법원의 구성원들은 원로원 의원들이기도 했지만, 30인 위원회와는 달리 민회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재정, 육군, 해군을 관장하는 다섯 명의 행정부 수장들로 구성된 내각에 의해 선출되었다.
최고 법원은 원래 는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서 구성되었지만, 점차 그 자체가 국가에서 가장 두려운 기관 중 하나이자, 5두 정부와 결탁하여 가장 탐욕스럽고 부패한 기관이 되었다. 한니발이 제2차 포에니전쟁이 끝난 뒤에 개혁의 메스를 대기 전까지의 카르타고 정부가 그러했다.
3. 해군과 육군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카르타고의 자랑거리는 대규모 해군이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 서부 무역의 독점권을 보호하고, 선박들의 입출항을 규제하고, 식민시들을 보호하고, 해적을 퇴치하기 위해서 해군이 필요했다. 반역의 소지가 있고 미온적인 승무원들을 배제하기 위해서, 카르타고 해군은 자국 해군 선박들에 해군 전문가들의 지휘 하에 자국 시민들로만 승무원으로 태웠다.
육군은 자국 시민들이 배제되고 주로 리비아, 사르디니아, 히스파니아에서 징집된 본토인들과, 카르타고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되 독립을 유지한 알제리아와 모로코 추장들에게 고용된 군인들, 그리고 지중해 전역에서 선발된 상인들로 구성되었다. 카르타고의 위신이나 부가 바닥으로 떨어진 시기에 그런 이질적 집단이 충성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더욱이 장군의 임무는 어려울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했다. 전투에서 너무 많이 승전을 거두면 독재의 야심을 품고 있다고 고소를 당하고 최고 법원 앞에서 문책을 당할 소지가 있었다. 또한 너무 많이 패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상황이 때로는 중대한 시기에 노련한 지도자를 잃는 데로 비화되기도 했다.
4. 농업
카르타고인들이 과학적 영농에, 특히 노예들을 이용하는 집단 농장의 발달에 이바지한 점은 대개 간과된다. 로마인들에게 대규모 노예들이 노동력을 이용하여 판매용 단일 곡물이나 단일 산물을 재배하는 기법을 가르친 사람은 카르타고인들이었다. 그리스와 다른 고대 도시들에서도 노예 매매와 농장과 상점에서 소규모로 노예들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런 정도의 노예 노동력이란 그리스나 셀레우코스제국 혹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에서의 본토 피해방인들의 노동력과 경쟁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카르타고인들은 그리스와 헬레니즘 세계의 특수 작물 재배를 위한 과학적 영농법에 의존하는 동시에 대규모 노예 노동력을 사용한 플랜테이션 경영 체계를 시행했다.
5. 카르타고의 부와 무역
카르타고는 지중해 연안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장악했다. 사르디니아는 광물 자원이 물량으로는 적었으나, 납, 아연, 구리, 철, 은 등 종류는 다양했다. 히스파니아 광산은 매장량이 보다 비옥했고 250년간 계속 채광을 했는데도 여전히 납, 아연, 수은, 구리, 금, 은뿐 아니라 수백만톤의 철광석을 생산했다. 히스파니아의 기데스를 떠난 카르타고인들은 아마 오래 전에 페니키아인들이 그랬을 것으로 예상되듯이, 북쪽 콘월로 항해해 올라가 값진 주석을 배에 싣고 오곤 했다. 같은 항구를 거점으로 또 아프리카 해안 쪽으로 또 다른 여행이 이루어져 남쪽으로 황금 해안, 카메룬, 심지어 가봉까지 내려갔으며, 거기서 금, 상아, 노예들, 전쟁용 코끼리들을 실어왔다. 카르타고의 선박에 실려온 모든 광물들이 다 카르타고의 주물 공장들에 의해 소화된 것은 아니다. 그 중 많은 양은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세계로 재운송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전의 수세기 동안 서에서 동을 잇는 해운업은 사실상 카르타고가 독점했다. 왜냐하면 그리스, 에트루리아, 혹은 로마의 해운업이 조약이나 해군력에 의해서 지중해 서부의 거의 절반 지대에서 발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중해 서부에서 그리스 선박이 발견되면 십중팔구는 격침되었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카르타고 상인들은 그 지역 내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한 삼품들을 독점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의 제품들 중에서 자유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제품은 직물, 특히 자주색으로 염색 가공한 직물뿐이었다. 카르타고 산 직물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런 카르타고는 수세기 동안 서에서 동을 잇는 해운업은 사실상 독점해 왔다. 이런 시기에 메사나의 문제를 발단으로 로마는 카르타고와 대립하게되고 이에 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쟁은 처음에는 해군력이 처음인 로마가 불리했으나 후에 시칠리아 서단 아이가테스 해전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무조건 항복시켰다.
전쟁패배의 결과로 로마는 거액의 배상금을 얻는 한편, 카르타고 세력은 시칠리아에서 일소되어 시칠리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어 로마는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제2의 속주로 하였다.
그후 2차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이 등장하게 된다. 한니발에 대해 알아보면
Ⅱ. 한니발과 그와 관련된 사람들
1. 한니발 (Hannibal 247-183 B.C)
한니발은 B.C 247년 카르타고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나 1차 포에니전쟁에 패전한 후 아버지를 따라 에스파냐로 갔으며, 하밀카르는 한니발에게 어릴적부터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갖도록 키웠다. 아버지와 매형 하스드루발의 뒤를 이어 B.C 22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에스파냐 주둔군의 총지휘관이 되었고, BC 219년 로마군 점령하의 에스파냐 도시 사군툼을 함락시켰다. 이듬해 에브로강을 건너자, 로마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아 제2차 포에니전쟁(한니발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는 육로로 이탈리아 진공계획을 세우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를 석권하고, 다시 눈덮인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침입, BC 217년 트라시메누스 호반의 전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BC 216년 칸나이전투에서는 교묘한 용병술을 발휘하여 로마군을 철저하게 격파하였으나 전선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다. 점차 전세를 회복하기 시작한 로마군에 의하여 에스파냐로부터의 원군도 격멸당하였으며,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카르타고로 육박하였다. 한니발은 고국에 소환되었으며,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함으로써 결국 제2차 포에니전쟁도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다.
그 후 카르타고의 집정관이 되어 로마에 대한 보복기회를 노렸으나, 정적에 의해 시리아와의 통모를 획책하고 있다는 통고가 로마로 보내졌기 때문에, BC 196년 그는 시리아로 피신하였다.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함께 로마군과 싸웠으나, BC 190년 안티오코스군이 마그네시아에서 로마군에 패배하자, 그는 다시 소아시아의 비티니아로 피신하였으며, 로마가 그의 신병인도를 요구함에 이르자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2. 하밀카르 바르카스 (Hamilcar Barcas BC 270? ~ BC 228 )
한니발의 아버지이며 제1차 포에니전쟁 말기인 BC 247년 이후 시칠리아에 근거지를 두고 카르타고군을 지휘하여 이탈리아의 남부·중부의 해안을 공격하는 등 로마를 괴롭혔다. BC 241년 아에가테스제도(諸島)에서 카르타고군이 패하자, 그는 전권사절로서 로마와의 화평교섭을 하였으며, 전후에 카르타고 용병(傭兵)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민의(民意)를 얻었다. BC 237년 카르타고의 국력 회복을 위하여 광산물(鑛産物)이 풍부한 에스파냐에 건너가 개발에 전념하였고, 원주민의 왕들을 자기 세력하에 두어 카르타고의 속령(屬領)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일족의 사적인 세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3. 스키피오 (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Major) BC236 ~ BC184 )
대(大)아프리카누스’라고 불리며 명문 스키피오가(家) 출신으로 제2차 포에니전쟁 초기의 장군 P.C.스키피오의 아들이다. 제2차 포에니전쟁에는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에 참전한 후, BC 210년 사인(私人)인데도 집정관 대행의 대권이 부여되어 스페인의 카르타고군(軍)을 격파하였는데, 그 때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였다. BC 205년 집정관으로서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공격을 결의하여 스스로 시칠리아섬으로 건너갔으며, BC 204년 아프리카에 군대를 진격시켰다. BC 202년 아프리카의 자마에서 한니발을 무찌르고 제2차 포에니전쟁을 종결시켜 ‘아프리카누스’의 칭호을 얻었다. 그 후 제2차 마케도니아전쟁(BC 200~BC 197)이 시작되자 호구총감(戶口總監), 원로원 수석으로서 친(親)헬레니즘정책을 취하며 로마 정계를 지배하였다. BC 190년 동생과 함께 군을 지휘, 소아시아에서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대접전을 벌였으나, 귀국 후 보수파인 대(大)카토 일파의 반격을 받아 실의 속에서 죽었다.
4. 마르켈루스 (Marcus Claudius Marcellus BC 268? ~ BC 208 )
5회에 걸쳐 콘술(집정관)을 지냈으며 제1차 포에니전쟁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BC 222년에는 켈트계의 인수브레스족(族)을 정복하였다.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는 로마의 검(劍)으로서 로마의 방패로 일컬어진 파미우스와 함께 한니발과 대적, BC 216년 놀라에서 한니발군을 격파하였다. BC 214BC 211년에는 시칠리아로 진군하여 레온티노이를 공략, 최후에는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기계로 방위하는 시라쿠사를 함락시켜 로마에 방대한 전리품을 안겨주었다. 그 후에도 BC 208년 베누시아에서 전사할 때까지 이탈리아 각지에서 한니발과 대적하였다.
Ⅲ. 2차포에니전쟁과 그 속의 전투
2차포에니 전쟁은 한니발전쟁이라고도 한다. 용병의 반란을 진압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스는 이베리아반도의 경영에 착수하였고, 그의 사위 하스도르바르와 아들 한니발이 뒤를 이어 세력을 기른 후 한니발이 이베리아반도의 동해안에 있던 로마의 동맹시 사군툼을 공격, BC 2118년 다시 로마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로마가 해상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보병 2만 명, 기병 6,000명의 대군을 거느린 한니발은 남프랑스를 석권한 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침입, 반도의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티키누스 전투). 특히 BC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의 칸나전투에서는 용병의 묘를 발휘한 한니발이 로마군을 포위·섬멸하였으나, 반도에 있는 로마의 동맹시는 로마에서 이반하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 및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었으나, 로마는 이를 게릴라 전법으로 교묘히 저지하여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BC 207년 리구리아와 갈리아의 군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대규모 군사를 이끌게 된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넘은 알프스의 길을 따라와 북부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 뒤 반도를 내려가 한니발과 합류해 로마를 공격했다. 로마는 전쟁 때문에 지쳐 있었으나 하스드루발을 막기 위해 군대를 내보냈다. 남부 로마군 사령관 가이우스 네로는 북쪽으로 빠져나가 메타우로스 강둑에서 하스드루발을 물리쳤다.
한니발은 BC 203년까지 남부 이탈리아에서 진지를 지키다가 아프리카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리하여 15년 만에 처음으로 이탈리아에서 적이 물러갔다. 끝내 굽히지 않고 마침내 퇴세를 만회한 로마군은 BC 206년 카르타고군의 거점인 이베리아반도를 완전히 평정한 대 스키피오(아프리카누스)의 인솔하에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한니발군을 격파, 두 번째의 전쟁도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카르타고는 해외영토를 모두 잃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한니발은 동방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 곁으로 도망했다가 다시 비티니아왕에게 의탁하여 재기를 꾀하였으나 허사로 끝났다.
1. 사군토전투
2차 포에니전쟁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사군토전투는 한니발이 에스파냐 총독으로 취임한지 2년이 지난 B.C 219년 로마의 동맹도시인 사군툼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에스파냐 동해안에 위치한 사군토은 마르세유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인이 세운도시로 로마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니발군의 맹공격을 받은 사군토 주민들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사군토의 위치가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B.C 226년에 맺어진 협정에 위배되는 것도 아닌데다가 로마내부의 사정도 여의치 않아서 군대를 보내지 못했고 8개월간의 공격에 의해 사군토는 함락되었고 주민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 버렸고 이들을 포함한 전리품을 팔아서 나온 자금을 3등분하여 병사들에게, 본국에, 전쟁자금으로 비축해 두었다. 이 곳을 점령한 후 신 카르타고라고 불리우는 카르타헤나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로마의 선전포고를 받은 뒤 로마를 향해 진격하였다.
2. 트레비아 전투
티치노 강에서 벌어진 기병간의 전투에서 패배한 로마의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트레비아 강 유역에 4개 군단을 위한 요새를 세우고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2개 군단과 합류하였다. 집정관 두 사람이 로마군을 이끌고 있는 경우에는 두 사람이 하루씩 교대로 지휘를 맡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코르넬리우스는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사실상 셈프로니우스가 지휘관이었다.
12월 22일 아침, 한니발은 기병을 앞세워 공격하였고 로마군이 이에 대응하자 거짓 후퇴를 하였다. 로마군은 황급히 대응하느라 식사나 옷을 입을 시간도 없었다. 로마군은 후퇴하는 누미디아 기병을 쫓아 강을 건넜다. 그리고 대형을 갖춘 채로 기다리던 카르타고 군을 맞아 황급히 대열을 정비하였다. 이때 로마군의 병력은 4만여 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기병은 4,000명이 채 안되었다. 한 편, 한니발 군대는 3만 8천의 병력 가운데 기병이 1만여 명에 이르었다. 로마군은 중무장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중앙 돌파를 노렸다.
이와는 반대로 한니발은 중앙에 갈리아 보병을 배치하고 양익에 기병을 배치하여 포위 전술을 노렸다. 로마군의 중무장 보병은 한니발의 보병에 우세한 전투를 치루고 있었으나 기병은 카르타고의 기병에 격퇴 당하였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카르타고의 기병은 로마군을 포위하였고 로마군은 포위되어 섬멸되었다. 적 중앙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여, 하류에서 트레비아 강을 건너 도주한 병력은 1만에 불과하였다. 로마군의 전사자는 2만여 명에 달하였으나 한니발 군대의 전사자는 대부분 갈리아인이었다. 단 코끼리는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거나 도망쳐 버렸다.
3. 칸나이전투
전사상 열세의 병력으로 우세한 병력을 포위·섬멸한 전례로서 유명하다. 한니발은 아드리아 해 기슭을 따라 남진하여 B.C. 216년 봄에는 칸나이에 있는 로마의 병참기지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8월 로마군과 칸나이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이 때 로마는 로마 시민병 4만 명, 기병 2,400명, 동맹국 보병 4만 명, 기병 4,800명으로 총 87,200명에 달하였다. 이에 반해 한니발 군대는 한니발 휘하 보병 2만 명, 기병 6,000명, 갈리아 용병 보병 2만 명, 기병 4,000명으로 총 5만 명이었다.
B.C. 216년 8월 2일은 로마의 두 집정관 아이밀리우스와 테렌티우스 바로 중 바로가 지휘하는 날이었다. 바로는 오판토 강의 오른쪽 연안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오른쪽 연안은 땅이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기병에게 불리한 지형이었다. 그는 중앙에 중무장 보병을 배치하여 중앙 돌파를 노렸으며 후방에 1만 명의 예비대를 두어 보병이 돌파에 성공하면 단숨에 전투를 끝내려 하였다. 하지만 한니발은 이에 대해 앞이 볼록한 초승달 대형으로 군대를 정렬시켰다. 그는 에스파니아 사람과 골족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그 양쪽에는 아프리카인들을 그리고 좌우익에 강력한 기병대를 배치했다. 한니발은 우선 로마의 기병을 패주시킨 다음, 로마 보병이 진격하도록 유인하여 초승달 대형의 앞이 오목해질 때까지 적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고서 그는 좌우의 아프리카인 보병을 불시에 진격시켜 로마군의 선두대열을 돌아 양측면을 치게 했다.
로마 기병을 추격하다 돌아온 그의 기병이 로마군의 후미 대열을 치자 전투는 완결되었다. 로마군은 7만 명 가량이 전사하였고 1만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한니발 쪽의 전사자는 불과 5,500명이었고 그 중 3분의 2는 갈리아 용병이었다. 칸나이 전투 이후, 이탈리아의 중요 도시인 카푸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남부 이탈리아는 카르타고의 수중에 들어갔다.
4. 자마전투
제2차 포에니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전쟁으로 양측의 병력은 약 4만 명이 넘었다. 한니발의 병력이 조금 더 컸지만, 대신 스피키오의 보병은 대부분이 오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었고 기병수에 있어서는 스피키오가 우세했는데, 한니발이 기병에서 열세를 보인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한니발은 병력의 선두에 80마리의 코끼리를 배치했고 보병을 3개 대열로 세웠다.
제 1선은 리구리아인과 골족의 중장보병으로 구성하고, 무어인 경장보병과 발레아레스인 돌팔매병을 사이사이에 배치했다. 제 2선에는 새로 모병한 카르타고인과 아프리카인 등 그가 거의 믿지 못하는 군대를 배치했다. 제 3선은 그의 직속 군대인 이탈리아 출신의 베테랑 보병으로 구성되었고, 제 2선의 약 180미터 뒤에 배치되었다. 우익에 1,000명의 카르타고인 기병을 배치했고, 좌익에는 1,000명의 누미디아인 기병을 배치했다.
스피키오는 적 코끼리에 대응하고 자신의 우세한 기병을 활용하기 위해 통상의 군단 배치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3개 대열의 마니풀루스를 장기판 식으로 엇갈리게 정렬하는 대신 종대로 배치해 코끼리가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었다. 코끼리가 사이로 지나가면 통로에 있던 벨리테스로 하여금 코끼리를 처리하게 했던 것이다. 구는 마시니사의 누미디아인 주력을 기병의 우익에 배치하고, 이탈리아인 기병을 좌익에 배치했다. 전투는 양측의 누미디아인 기병들끼리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코끼리를 출동시켰으나 대부분 로마군 대열 사이를 통과해 버렸다. 로마군의 기병은 혼란한 틈을 타 카르타고의 양 측면의 기병을 패주시켰다.
로마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을 멀리까지 추격하였고, 보병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오랫동안 버텼지만 로마군의 기병이 돌아와 카르타고 군을 포위하였고, 카르타고 군은 전멸하였다. 2차 포에니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전투이니 만큼 군사학적으로도 대단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항복을 하였고 2차 포에니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이후 3차포에니 전쟁도 포에니 즉 카르타고의 패배로 인해 카르타고는 완전히 그 존재가 지워지게 된다.
4. 포에니전쟁이후의 변화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지중해 진출의 길을 열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50년이 채 안돼 로마의 속주제도는 스페인에서 아시아까지 확대되었고, 세계제국 로마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또한 헬레니즘 세계와 직접 접촉하게 됨으로써 헬레니즘 적 사고와 문화 풍조에 노출되었는데, 이러한 접촉은 로마의 전통적 미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포에니 전쟁은 안으로 로마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전 분야에서 변화를 초래하였다. 특히 희대의 명장 한니발로 상징되는 제 2차 포에니전쟁은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로마에 끼쳤는데, 농지는 황폐화하고 중소농민은 몰락하였다. 특히 남 이탈리아의 황폐화는 끔직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오늘날까지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다고 할 정도이다. 이와 병행하여 자본 농업이 발전하게 되었는데, 대농장제도인 라티푼디움이 나타났다. Plinius가 그의 {박물지}에서 '대토지 라티푼디아가 오래 전에 이탈리아를 파멸시켰다'고 말하고 있듯이, 노예노동에 의존하여, 포도나 올리브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하는 새로운 라티푼디움은 경제적으로는, 독립적 소농들의 숫자를 감소시키고, 이들을 소작인과 노예들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정치 사회적으로는 보호자 예속제도를 파괴시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사회의 핵심을 이루었던 자유 신분의 중소농은 사라지고 토지 없는 빈민층이 생기고 부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소유 재산이 없는 사람들의 도시 집중으로 로마는 파산에 이를 지경이 되었고,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즉, 프롤레스, 자식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무산자를 의미)라고 불리는 도시 일당 노동자 계급으로 정착되었다. 이들의 숙박은 비참하였고, 하루 동안에도 굶어 죽거나, 폭동을 일으키거나, 급기야는 군인 정치가들의 사병으로 고용되었다.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의 유명한 연설이 그들의 상황을 대변해 준다. "이탈리아를 떠도는 야수들도 ...자기의 굴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 쉬고 몸을 의지할 곳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위해서 싸우고 죽은 사람 등이 가진 것이란 공기와 햇빛밖에 없고, 집도 가정도 없이 처자들과 헤맨다. 그들의 사령관들은 전장에서 병사들에게 분묘와 신전을 적으로부터 수호하도록 감언이설로 꾀고 있다....그러나 이들은 남들의 재부와 사치를 수호하기 위해서 싸우다 죽으며... 자기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한 뼘의 땅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몰락하던 중소 자영농과는 달리, 이 전쟁으로 재미를 보았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실업가 계층이 바로 그들이며, 정치적으로는 원로원 계층이었다. 실업가요 화폐자본가 계층은 "기사(eques, 복수형 equites)"라고 불리워졌는데, 이들은 로마군의 기병대와 같은 등급이 매겨질 만한, 혹은 이들 기병들을 보조할 만한 충분한 재산인 40만 세스테리우스에 달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은 은행업, 징세 청부업, 고리대금업, 군함과 수송선의 건조 등에 종사하여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었으며, 대규모 전쟁, 식민지의 확장, 대규모 건축 계획 등은 모두 이들의 등장을 부추키는 요인들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신흥 귀족(Nobiles)계층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1세기에는 이전의 자영농민을 핵심으로 한 공화정이 붕괴하고, 두 특권 계층인 원로원 의원과 기사계층에 의한 지배의 새로운 귀족정체가 형성되는 전환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난 이가 바로 그락쿠스 형제이다. 그들의 어머니는 그녀는 바로 한니발을 물리친 시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로, 지성과 미모와 귀한 태생까지 겸하여, 로마 최고의 여성으로 이름이 높았던 코르넬리아였다. 코르넬리아가 로마 귀부인들이 각기 보석을 자랑하던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보석은 바로 자신의 두 아들인 그락쿠스 형제이다라고 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러한 어머니를 둔 그락쿠스 형제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노빌레스의 희생을 무릅쓰고 몰락 자영농민들을 육성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후 평민파와 벌족파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결국 로마는 공화정의 몰락과 독재정치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첫댓글 군사적으로 보자면 포에니전쟁이후 로마인들은 한니발의 전술을 기본으로 채택하게 되죠.(기병의 기동력을 이용한 포위작전)
에스파냐는 유로파에서는 대표적인 철산지로 나오죠. 고대에서 중세까지요. 지금도 나오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