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과 노동 패러다임의 대전환
지난번 <앙드레 고르와 기본소득>이란 글에서 ‘임금노동형 완전고용 패러다임’에서 ‘사회적 필요노동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언급했는데, 좀 더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임금노동’과 ‘완전고용’의 문제를 짚어보자.
여러분은 ‘임금노동’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여전히 ‘임금노동의 철폐’를 외치고 있는가. 예전 운동가들의 관성대로라면, 맑스 혹은 여러 자본주의 비판자들의 논의에 기대어 여전히 쉽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를 반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출발해보자.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한 번 돌아보자. 답은 이미 직관적으로 나와 있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수많은 설문조사 결과도 간접적으로 이를 증명한다. 현재의 ‘임금노동’은 분명히 많은 문제가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로부터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금노동의 철폐’, ‘자본주의 타도’와 같은 구호로 탈출구를 마련할 수 있을까. 자신의 노동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구호에 쉽게 빨려들어갈까. 그냥 강력한 노동조합만 있다면 어느 정도 불만을 해소하면서 현재의 상태에 만족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본소득은 적어도 현재까지 나와 있는 대안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탈출구다. 기본소득을 지렛대로 노동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가능하게 해야 하고, 또한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한다. 여기서 탈출구라는 표현을 썼는데, 탈출구 자체가 탈출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를 보라. 탈출구가 있어도 여전히 수많은 암초들이 도사리고 있다.
다시 ‘임금노동’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보통 놓치기 쉬운 문제를 지적할 것이다. 무엇이냐면, 노동자와 자본이 구조적 공모 관계에 얽혀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적대적 공존 관계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보통 황색노조, 어용노조라고 부르는 것의 뿌리이기도 하고, 노동조합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좀 길지만 잠시 앙드레 고르의 말을 새겨보자.
“상품으로 취급되는 노동, 즉 고용은 ‘노동을 구조적으로 자본과 동질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의 최종목표는 기업이 시장에 내놓은 생산품이 아니라 그것의 판매를 통해 실현하게 되는 이윤이며, 임금노동자의 최종목표는 그가 생산해내는 물건이 아니라 자신의 생산활동을 통하여 벌어들이는 임금입니다. ‘노동과 자본은 ‘돈 벌기’가 그들의 궁극적 목적인 한 서로의 대립을 통해 완벽한 공범이 됩니다.’ 자본의 눈으로 보면 생산의 성격은 그 수익률보다 덜 중요하지요. 노동자의 눈으로 보면, 생산은 그로인해 창출되는 일자리와 그로 인해 받게 되는 임금에 비해 덜 중요하고요. 노동과 임금 양자 모두에게, 그것이 이윤을 가져다주기만 한다면 생산품 자체는 거의 중요하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자본의 가치증식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노동운동과 노조는 임금수준과 노동조건만이 아니라 생산의 궁극적 목적, 생산을 실현하는 노동의 상품 형태를 문제 삼을 때에만 반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임금노동은 자본증식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임금노동의 양태와 임금노동이 어떻게 조직되는지를 보면 노동자를 지배하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앙드레 고르, <에콜로지카>, 143~144쪽)
그렇다면 우리의 방향은 분명해진다. 이러한 임금노동의 성격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대적 공존의 관계를 끝장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임금노동에의 의존성 혹은 고용주에게 종속된 상태를 감소시키거나 벗어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의 궁극적 목적을 ‘사회적 필요’에 놓고 노동력이 단순한 상품이 되는 상태를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자의 핵심 고리가 바로 기본소득이다.
다음으로 ‘완전고용’의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자. 우선 경제적 변화가 있다. 포드주의에 기반한 성장 일로의 복지국가에서 완전고용은 실현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포스트포드주의가 지배적인 지금의 시대에서 완전고용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질문을 하나 더 던져보자. 그런데 가능하기만 하다면 완전고용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그것 전체가 철저히 임금노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앞서 임금노동의 문제를 지적했듯이 쉽게 찬동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사회적 강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자유와 자율의 영역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였다. 이들 사회주의 국가에서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완전고용이 달성되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조차 실제적으로 완전고용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수많은 ‘디오니소스적 노동’의 사례를 보라. 그것은 일종의 실현불가능한 꿈이었다. 또한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공장으로 만들겠다는 꿈은 우리가 꾸어야 할 꿈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점점 좁혀진다. 탈출구도 점차 선명해진다. ‘임금노동’과 ‘완전고용’ 패러다임을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필요노동’ 패러다임이다. 사회적 필요노동은 인간과 사회의 필요를 기본적으로 충족시키는 노동이다. 이미 현재의 생산력은 이를 뒷받침하고도 남는다. 사회적 필요노동은 또한 생산의 성격을 묻지 않는 상품화를 통한 이윤 창출(그리고 임금 획득) 동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따라 협동과 자율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이다. 이는 기존의 성장 혹은 부의 척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도 의미한다. 사회적 협동조합의 중요성은 이것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앙드레 고르의 말을 들어보자.
“생계수당 요구는 이런 맥락에 비추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 목적은 돈과 상품의 사회를 영속시키려는 것도 아니요, 소위 선진국의 소비모델을 반복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목적은 실업자나 고용불안정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팔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베르크만의 말을 따르자면, “인간의 활동을 고용의 독재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실업자단체 가운데 하나에서 펴낸 책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강요당해서 하는 활동들보다는 훨씬 더 정신의 풍요를 안겨줄 활동들을 할 수 있는 수단을(생계수당) 우리에게 주어야만 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개인에게는 스스로의 성숙을 꾀할 수 있는 활동인 한편, 그 어떤 기업도 제조할 수 없고, 월급으로 살 수 없으며, 돈으로는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내재적 부 또한 창출합니다. … 인간능력 및 인간관계의 성숙을 좌우하는 이런 모든 자유로운 활동들, 규정되지 않은 활동들이 가능하려면 무조건적인 사회수당이 요구됩니다.”(앙드레 고르, <에콜로지카>, 162~163쪽)
일부 좌파들이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것의 핵심 논리는 고르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기본소득을 “돈과 상품의 사회를 영속시키려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비판이라는 점은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고 본다. 또 하나의 비판은 브로드웨이에도 자선냄비는 있는데, 기본소득 또한 커다란 자선냄비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 또한 잘못된 비판이다. 자선냄비에는 창조적 활동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오로지 종속과 의존만이 커진다. 반면, 기본소득은 “내재적 부”를 창출하는 새로운 변혁 프로그램, 새로운 정치 프로젝트다.
첫댓글 기본소득 충남 네트워크(준)에서 퍼갑니다. (__)
앙드레고르의 노동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멀리 나간 것이라고 보입니다. 신중히 생각하셔야 할듯... 기본소득운동이 노동운동의 부정은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