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유형조합법입니다.
오늘은 바쁘니 별로 복잡한 글은 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히 고려 초 혜종~광종까지의 정권교체들을 다루기로 하죠.
아, 들어가기 전에 용어 설명 하나. 이 때는 모든 왕자들을 태자(太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보통아는 그 태자는 정윤(正胤)이라고 불렀고요.
아시다시피 태조의 아내는 29명(...)이었습니다.
이유는 호족들과의 혼인동맹을 위해서.
하지만 그 중 중요한 왕후(王后)는 6명이었습니다.
1. 정주(貞州)의 유천궁(柳天弓)의 딸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
2. 나주(羅州)의 오다련(吳多憐)의 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
3. 충주(忠州)의 유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유씨
4. 황주(黃州)의 황보제공(皇甫悌恭)의 딸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
5. 신라 문성왕(文聖王) 김경응(金慶膺)의 후손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
(원래 왕후가 아니었으나 1010년 현종에 의해 왕후로 추증)
6. 정주의 유덕영(柳德英)의 딸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
이들 중 신성왕후는 현종 전까진 왕후도 아니었고,
정덕왕후는 외손자가 성종으로 즉위하지만 나중 일이니 일단 제외합니다.
또한 신혜왕후는 아들이 없었으니 역시 제쳐둡니다.
즉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명은
나주의 장화왕후 오씨,
충주의 신명순성왕후 오씨,
황주의 신정왕후 황보씨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세 명의 태자들이 중요해집니다 -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인 왕무(王武),
그리고 신명순성왕후 오씨의 아들인 왕요(王堯)-왕소(王昭) 형제.
먼저 왕무.
왕무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왕요가 태어나기도 전인
태조 4년(921년)에 정윤으로 책봉되었습니다.
태조는 신임하던 무장인 섭지 아버지박술희(朴述熙)에게 왕무의 후견을 맏기죠.
이는 박술희가 밑바닥부터 올라온 신흥 세력인지라
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겸이 외가나주 오씨는 충주 유씨에 비하면
호족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왕건은 진주(晉州, 지금의 진천)의 임희(林曦)의 딸을 왕무의 비로 들이지만,
진주 임씨는 실세와는 거리가 먼 가문이었습니다.
왕건은 또한 광주(廣州)의 호족 왕규(王規, 원래 성은 함(咸)씨입니다)의 딸을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 왕씨로 혜종과 맺어주지만,
왕규는 기본적으로 문신이었고 군사적 기반이 약했습니다.
결국 박술희가 혜종의 군사적인 기반의 거의 전부였던 셈인데,
박술희도 군권을 제외하면 정치적인 기반은 거의 없었기에
왕무의 세력은 매우 불안정하였습니다.
반면 왕요-왕소 형제의 경우 외가가 강력한 호족 세력인 충주 유씨였습니다.
이걸로 끝이 아니고,
왕요의 비는 견훤(甄萱)의 사위인 승주(昇州, 현재의 순천)의
박영규(朴英規)의 딸들(...)이었습니다.
또한 평주(平州, 현재의 평산)의 호족인
개국공신 박수문(朴守文)-박수경(朴守卿) 형제도 끌여들였읍니다..
왕소의 비는 태조 왕건과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이었습니다(모계 성을 따랐습니다).
또한 왕요는 세조(世祖) 왕륭(王隆)의 동생 왕평달(王平達)의 아들, 즉 태조의 사촌동생 -
태조는 외아들이었기에 사실상 형제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
인 서경 수비대장 왕식렴(王式廉)까지 끌어들였습니다.
후궁인 청주(淸州)의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 김씨는 덤.
자, 여기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왕무 | 왕요-왕소 |
외가 | 나주 오씨 | 충주 유씨 |
처가 | 진주 임씨 | 승주 박씨, 청주 김씨 황주 황보씨 |
주요 지지 호족 | 박술희 광주 함씨 | 왕식렴 평산 박씨 |
이상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머릿수가 중요합니다.
게다가 개별 호족들의 세력까지 고려하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943년 태조가 사망하고 정윤태자 왕무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고려의 2대 황제 혜종(惠宗)입니다.
혜종은 위와 같은 배경 속에서 권력이 제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혜종 2년에 왕규의 난이 일어납니다.
자, 여기서 고려사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2년(945). (중략) 대광(大匡) 왕규(王規)가 왕의 동생 왕요(王堯)와
왕소(王昭)를 참소했으나 무고임을 안 왕은 그들에게 더욱 두터운 은총을 베풀었다
(주: 왕소에게 딸을 시집보낸 것을 의미합니다).
왕규가 또 자신의 일당들을 시켜 벽에 구멍을 뚫고 왕의 침소로 침입하게 해서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으나 왕은 거처를 옮겨 피했을 뿐, 문책하지 않았다.
가을 9월. 왕의 병환이 위독했지만 신하들은 들어가 볼 수 없었고
간사한 아첨배들이 항상 곁에서 시중들고 있었다.
무신일. 왕이 중광전(重光殿)에서 죽으니 왕위에 오른 지 2년이며 나이 34세였다.
왕은 도량이 넓고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으나 왕규(王規)가 반역을 꾀한 뒤로부터는
의심하고 꺼리는 일이 많아져 항상 무장한 군사들을 시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소인배들이 다 벼슬에 올랐으며
장병들에게 함부로 상을 주었기 때문에 안팎에서 탄식과 원성이 자자했다. (후략)
- 고려사 권2 혜종세가
기록이 영 부실합니다. 왕규전의 기록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왕규(王規)는 광주(廣州)사람으로 태조(太祖)를 섬겨 대광(大匡)이 되었다.
태조가 왕규의 두 딸을 받아 들여 각각 열다섯째, 열여섯째 왕비로 삼았는데,
그 중 열여섯 번째 왕비가 낳은 아들이 광주원군(廣州院君)이다.
혜종(惠宗) 2년(945)에 왕규는 왕의 동생 왕요(王堯)와 왕소(王昭)가
모반한다고 참소했으나 혜종은 무고임을 알고서
동생들에게 더욱 두터운 은혜를 베풀었다.
사천공봉(司天供奉) 최지몽(崔知夢)이, 유성(流星)이 자미원(紫微垣)을 침범했으니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나올 것이라고 보고했다.
혜종은 왕규가 왕요와 왕소를 모해하려는 징조라고 판단해
장공주(長公主)를 왕소의 처(妻)로 삼게 해줌으로써 친족관계를 더욱 강화하니
왕규가 음모를 실행하지 못하였다.
또한 왕규는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번은 밤에 왕이 깊이 잠든 것을 보고서
자신의 부하를 왕의 침소로 잠입시켜 시해하려고 했다.
마침 혜종이 잠에서 깨어 한 주먹으로 쳐 죽인 후 시종들을 시켜 끌어내게 하고는
다시 따져 묻지 않았다.
어느 날 혜종이 몸이 불편해 신덕전(神德殿)에 있었는데
또 최지몽이 장차 변란이 일어날 것이니
적당한 때를 보아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건의했다.
혜종이 은밀하게 중광전(重光殿)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왕규가 밤에 일당과 함께 벽을 뚫고 침실로 들어갔으나 이미 비어 있었다.
왕규가 최지몽을 보더니 칼을 빼어들고,
“주상이 침소를 옮긴 것은 필시 너의 꾀이리라.”
하고 욕하였으나 최지몽이 끝까지 입을 닫고 있자 물러갔다.
혜종은 이것이 왕규의 소행인 줄 알고 있었지만 죄를 주지 않았다.
왕규가 진작부터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미워하다가
혜종이 죽은 후 정종의 명령을 사칭해 박술희를 죽였다.
애초 혜종의 병이 위중해지자 정종은 왕규가 역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고서
은밀히 서경(西京)의 대광(大匡) 왕식렴(王式廉)과 의논해 변란에 대비하였다.
왕규가 변란을 일으키려 하자 왕식렴이 병사를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와서 숙위하니
왕규가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
이에 왕규를 갑곶(甲串)으로 쫓아낸 뒤 사람을 뒤딸려 보내 참수했으며
그 일당 3백여 명도 처형했다.
- 고려사 권127 반역열전 왕규전
말이 안 됩니다.
세상에 어떤 나라에서 저러는데도 문책하지 않습니까?
반란이 두려워서? 말도 안 됩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왕규는 문신 세력이었기에 군사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으며,
박술희에게 심하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군사력이 충분했다 하더라도 최정예병이었던 왕식렴의 서경 수비군이 있습니다.
(오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이건 후술) 또한 왕규는 혜종의 장인입니다.
뭐하러 정통성 만렙에 지금 이미 왕으로 있는 사위를 놔두고
왕위 계승 서열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는 외손자를 왕으로 세우려 하겠습니까?
게다가 왕규가 박술희를 죽였다고 하는데 이건 더더욱 말이 안 됩니다.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던 혜종이 죽고 자신과 대립하던 왕요가 즉위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군사력이 조금이라도 더 있어야 하는데 거기서 박술희를 죽이겠습니까?
또한 왕식렴이 왕규의 군세를 맞이해 궤멸시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왕규의 세력기반은 광주(경기도 광주입니다. 廣주에요)고
왕식렴의 세력기방은 서경(평양)입니다.
광주와 개성의 직선거리는 80km, 평양과 개성의 직선거리는 140km입니다.
실제 거리와의 차이는 크지 않으니 무시하겠습니다.
고려사의 서술에 따르면 왕규가 광주에서 출발해 80km를 진군하는 동안
왕식렴은 광주에서 왕규가 난을 일으켰다는 첩보를 가지고
전령이 80km를 이동해 개경에 도착후 다시 140km를 이동해 왕식렴에게 소식을 전하고
왕식렴이 140km를 행군해 개경에서 왕규를 맞았다는 것이 됩니다.
파발마가 보통 하루에 100km 정도를 갔으니
왕식렴에게 소식이 가는 데는 대충 이틀이 걸렸다고 계산할 수 있습니다.
즉 왕식렴은 이틀 더 늦게 출발해 60km나 더 먼 거리를 더 먼저 진군해야 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덤으로, 정작 왕규가 옹립하려 했다던 광주원군이 처벌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고려사의 내용보다는 혜종이 붕어한후
왕요가 왕식렴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박술희를 제거했고,
이를 막으려 개경으로 진군한 왕규가 왕식렴에게 격파되었다는 가정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섭지 아버지박술희와 왕규는 제거되었고,
혜종그리고 선겸이의 외가인 나주 오씨는 몰락했습니다.
혜종의 뒤를 이어 왕요가 고려의 3대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정종(定宗)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