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배경 만들기 1 / 윤석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품을 쓸 때, <상황(situation)>과 <배경(setting)>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중심이 되는 이야기만 잘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를 쓰든 산문을 쓰든 상황과 배경부터 설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상황과 배경은 존재체(存在體)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독자들은 그를 따라 작품 속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작품의 성공과 실패는 인물이나 테마에 의해 결정된다기보다는 그에 얼마나 알맞은 배경과 상황을 설정해 주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컨대, [외디프스] 신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과 콤플렉스를 다룬 것이라고 하지만, "살부혼모(殺父婚母)"라니,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운명을 미리 설계한 신을 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뿐, 신화 속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배경과 상황을 타당하게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를 죽인 것은 어려서 버림을 받아 아버지인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결혼한 것은 애욕 때문이 아니라, 남편을 잃은 여왕으로서는 여왕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스핑크스를 퇴치해야 하고, 그래서 누구든지 스핑크스를 물리치면 결혼하여 나라를 주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고, 그 퇴치자가 바로 자기 아들이 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작품을 쓸 때 소홀히 취급하는 탓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어의 개념도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배경은 작중 인물이 등장하는 무대를 말합니다. 물리적(物理的)이고, 고정적(固定的)이며, 중립적(中立的)인 성격을 띠고,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으로 나눠집니다. 그리고 상황은 작중 인물이 처한 <처지>를 말합니다. 인격적(人格的), 가변적(可變的), 유동적(流動的)인 성격을 띠며, <인적>·<사회적>·<문화적>·<역사적> 상황으로 나눠집니다.
이런 차이로 인해, 서정에서는 배경을, 서사와 극에서는 상황을 중시합니다. 그것은 서정의 화제가 현재 이 순간으로 제한되고, 서사나 극의 화제는 시간과 공간의 이동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배경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작품 속의 배경은 필연적이고 의도적이며 심리적이어야 한다.
작품을 쓸 때 흔히 배경의 설정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시적 대상이 존재했던 시공을 그대로 모방하면 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입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가 실제 시인이 아니듯, 배경 역시 시적 대상이 존재했던 실제 시공이 아니라 화자와 화제에 맞추어 재편성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차이를 지니는 천만에 말씀이냐고요? 실제 배경은 <우연적>이며, <비의도적>이고, <물리적>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책상 위의 풍경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이리톨 껌통 옆에 전화기가 있고, 그 옆에 제가 발행하는 계간문예지 <다층>이 있고, 노트북 왼쪽에는 육각수 물병이 있고, 다시 그 옆에는 이 원고를 출력한 초고와 대낮인데도 켜 져있는 스탠드와 스태플러와 지갑 등이 놓여져 있습니다.
아니, 이 정도가 아닙니다. 출력한 초고를 올려놓은 독서대 위에는 엠이(M.E, marriage encounter)를 갔을 때 사온 열쇠고리가 있고, 그 뒤에는 안경집과 백악관이라는 술집의 개스라이터와 디멘탑이라는 설사 식체 토사 약 6개 캡슐과 지난 해 역사교과서 파동 때 일본인인 호사카 교수가 MBC에 출연해 왜 일본은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하는가를 밝힌 걸 녹화해 보내준 테이프와…. 일일이 열거하자면 이 페이지를 다 채워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우연히 그렇게 놓여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글로 쓸 때는 아주 다릅니다. 가령, "책상 위는 지저분했다."라고 쓰거나, 몇 가지만 열거했다고 합시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들은 다른 것과 관계를 맺으면서 무언가 의미해야 합니다. 디멘탑을 이야기했으면 배탈이 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자이리톨 껌통을 이야기했으면 담배를 끊기 위해 줄곧 껌을 씹는다는 식으로 연결을 지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 지금 배탈이 나지 않았거든요. 또 아주 단순하게 "책상 위는 매우 지저분했다"라고 써도 며칠 째 원고를 쓰느라고 치울 틈이 없었다든지,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지저분한 사람이라며 무엇인가 의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텍스트 속의 배경은 <필연적>이고 <의도적>이며 <심리적>이어야 합니다.
또, 실제 배경은 <등장적(等張的)>이고 <연속적>이며 <중립적>입니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 같은 길이입니다. 그리고 이 끈끈한 날씨는 저만 괴롭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괴롭힙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의미 없는 것들은 여지없이 생략하고, 의미 있는 것들은 단 1분간 등장해도 몇 페이지로 확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비등장적>이고, <단속적(斷續的)>입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과 공간도 누구에게는 유리하고 불리하게 작용하므로 <가세적>입니다. 따라서 실제 배경은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텍스트 속의 배경은 <심리적 법칙>과 <미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작품 속에서 제 역할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기능적 배경(functional setting)>과 <중성적 배경(neutral setting)>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능적 배경은 화자의 심리 상태를 은유하고, 그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조장하거나 억제하며,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다음 작품의 배경은 기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밤비가 내리네
어둠을 흔들며 조용히 내리네
그리움이 늘어선 언덕에
마른 수수잎 소리가 들리네
아련한 파도 소리
고향집 울타리에 철석이는데
낮닭 우는 소리도
가슴에 차오르네.
- 차한수(車漢洙), [손·47 : 고향]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상상적으로 귀향(歸鄕)하고 있습니다. 조용조용 내리는 밤비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촉발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둠"이 화자를 감상적으로 만들고, "밤비"가 부채질한 데 원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이 기능적이라는 것은 다른 것으로 바꿔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쾌청한 날의 대낮이나 폭풍우 치는 밤으로 바꿨다고 합시다. 아마 전자로 바꾸면 독자들은 화자를 참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일 할 시간에 고향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후자로 바꾸면 조용조용 내리는 밤비를 맞으며 화자를 따라나서던 독자들은 "어휴 별나라, 당신이나 가"하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 겁니다. 궂은 날씨에는 누구나 꼼짝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중성적 배경은 단지 작중 인물의 등장 무대 구실만 하는 걸 말합니다. 고전문학에서는 모두 이런 배경을 택하고, 현대문학으로 접어들면서 기능적 배경이 채택됩니다. 하지만 시의 경우 아직도 상당수의 시인들이 중성적 배경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사(詩史)에서 가장 빛나는 시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김소월(金素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1-2연
이 작품의 배경은 언뜻 보면 기능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화자가 등장하는 시공을 진달래꽃이 활짝 핀 약산 밑으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특정한 순간의 특정한 배경"을 채택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달래꽃"과 "약산"은 이 작품의 테마인 이별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것은 화자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꽃을 뿌리면 어떨까 하는데 미쳤고, 그러다가 그냥 약산의 진달래꽃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산 진달래꽃이 아니라 바닷가에 피어있는 개망초 꽃도 상관없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의 배경은 중성적 배경에 속합니다.
이와 같이 중성적 배경을 채택하면 배경은 그냥 배경으로 떨어지고 시인의 말만 전달됩니다. 그로 인해, 못마땅한 테마일 경우에는 독자들은 그 작품을 거부합니다. 특히, 현대시 같이 사적이며,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주제는 거부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독창적인 인물과 테마를 제시하려는 사람은 우선 기능적인 배경을 설정하는 방법부터 터득해야 합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