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2005년 4월 5일 대구 명덕교회에서 영남뉴스앤조이가 달구벌기독학술회와 공동으로 개최하는 '성경적인 교회 개혁 포럼'에 앞서 먼저 4월 4일에 복음의 교제를 갖기 위하여 실로암교회에 모여 가진 필자의 강의안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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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혁의 원리와 실천
복음의 정통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복음은 역사(歷史)와 전통(傳統)이 있습니다. 흔히 정통성(正統性)이 있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복음의 역사와 전통에 있어서는 정말 그렇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 복음의 정통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찾아집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의 출현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신앙하는 자들에게 두면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복음을 가지고서 시작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 신앙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일이 될 것이며 다른 복음에 의해서는 교회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근원을 창세 전으로부터 올라가서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3-6절에서 그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 신학적 용어로는 '신적작정'(神的作定 ; decree)이라 합니다. 영원 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작정하심에서부터 복음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시작되어 온 역사와 전통이 있는 정통적인 것으로서 곧 하나님의 구원사[또는 언약적 구속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볼 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나타났고 교회로 세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실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언약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는 예표적인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언약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먼저 성전을 허물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까닭은 자신의 몸으로 새롭게 지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요 2:19-22). 이러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에서 유대인의 예배를 개혁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를 말씀하십니다. 유대인의 예배는 유일하게 예루살렘에서만 드려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예배를 드려온 그리심산[*요단 강 서편 므낫세 반 지파의 땅 세겜 서편에 있어 복을 비는 산으로 지정됨. 반면에 세겜 동쪽에 있는 에발산은 저주하는 산으로 지정되어 있음. 신 11:29)을 예배의 장소로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예루살렘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심산에서도 드려질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이해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든, 또는 사마리아인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든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그 예배는 모세의 율법에 기초한 예배였습니다.
이에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님은 예배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가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기초한 예배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온다"는 것을 언급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자격으로 사마리아 여자 앞에 서 있는 까닭에 이를 염두에 두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에게서 오는 그 구원을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들도 함께 받을 수 있게 하여서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예배여야 참된 예배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령으로'란 '하나님의 영을 좇아서'란 말인데 이는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함께 하는 데 따라서 되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란 '진리를 좇아서'를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구속의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모세의 율법에 기초하여서 예배를 드렸고, 이 예배의 초점은 누가 율법에 충실하여서 예배를 드렸는가 하는데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무게를 '누가 율법에 충실하였는가?'하는, 곧 '누가 여호와의 말씀에 복종하여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에 무게의 중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렸는가?'에 무게의 중심을 두는 것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대인들에게서든 사마리아인에게서든 예배는 형식화되고 의식화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중요하게 여겼고 예배가 행해지는 성전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초한 예배란 마음에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성전을 파괴함과 함께 제사 예배를 종결시키고 새로운 성전을 세우시고 그 안에서 새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이 자기 백성들에게 심어지는 일을 하였으며 또한 진리에로 나아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 외의 한 의로 등장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세우시고는 이를 온 세상에 나타내시어 '교회'로 불려지게 하였습니다. 이는 일찍이 "내 교회를 세우리니"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교회를 이 세상에 등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주님께서는 이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모아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총회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는 주님에게 가지는 신앙고백을 가진 자들로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작정에 따른 것입니다. 그 실천이 어떻게 구체화적으로 진행될 것인가 하는 것을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을 세상에 복음으로 전하여 나가십니다. 온 세상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증인을 삼으신 것은 그 일을 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요 방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웠으며, 그들이 모인 자들은 그곳이 어디이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교회'로 불리웠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말씀합니다 (엡 1:22, 골 1:18)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알기 쉽게 상징적 기법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머리'란 '주권자', '왕'을 뜻하는 것으로서 바로 권위의 대명사로 이해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주권자요 왕이십니다. 이분이 "자기 피로 사신”(행 20:28) 백성들로 교회를 삼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요. 그래서 그만이 교회에서 당신의 백성들의 생명을 다스려 가시는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왕적 권위를 가집니다.
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엡 1:23)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백성들을 자신과 일체를 이루고서 생명의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게 한 것을 상징적 기법으로 표현한 것인데, 온 몸의 건전한 발육은 머리의 지시에 순종하는데 있는 것처럼 교회의 건전한 성장과 발전도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 보장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이 관계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세례인 성령 세례에 의한 '연합'에 의해서 되어졌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한 자가 됨으로 죄에 대하여 함께 죽은 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함께 산 자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하나된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전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데 아직 덜 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한 후 그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인 하와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실 때 아담이 여자를 보고 외친 것은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3-24)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여자는 남자의 몸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요 남자와 여자는 각각 별개의 존재가 아닌 둘이 연합하여 있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신비한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인 사람은 하나된 몸입니다. 그리고 그 몸은 완전합니다. 남자에게서 나온 여자라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곧 남자와 동일한 몸입니다. 그것처럼 말이죠. 그리스도와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의 관계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여기에 무슨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닌 완전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그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몸된 이 교회는 완전한 교회입니다. 한 사람으로 되어진 교회이든, 또는 두 사람으로 되어진 교회이든, 또는 그 이상의 다수로 되어진 교회이든 이 교회는 적거나 많은 것이 아닌, 작거나 큰 것이 아닌, 그래서 결국은 언제까지나 좀더 좋아져야 하고 좀더 나아져야 하는 그런 교회가 아닌, 단지 '그리스도의 한몸'의 '한 부분'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교회 개혁을 말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렇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의 본질적 면에서는 개혁해야 한다는 절대적 필연성이 전연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한몸이 될 수 없는 어떤 요인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와 연합하여 그와 한몸인 교회가 되어 있는 상태이며, 이때 이것은 불완전한 교회의 상태가 아니라 완전한 교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무슨 개혁할 것이 있는 교회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교회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개혁의 역사입니다. 개혁교회의 등장이 있었고 개혁된 교회는 또한 개혁되어가야 하는 교회의 모습을 띱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 그 자체가 불완전하거나 또는 칼을 대어서 수술을 할 수밖에 없는 어떤 문제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사실을 교회사에서 교훈 받으며 여기에서 후대가 갖는 교회 개혁의 원리를 대하게 되며 그에 따른 실천을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첫째는, 신조와 교리문답의 채택에 의한 신학 사상을 세워나가는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회의를 통해서 지금까지 여러 신경[신조]과 교리문답을 만들어왔습니다. 신경에는 보편신조로 불리우는 세 신경이 있었는데 400년경에 작성된 로마 신경에 근거한 사도신경,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Nicaea) 공회를 거쳐 381년에 채택된 니케아 신경(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 6세기초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입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교리적으로 간략히 요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니케아 신경은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정통 교회와 견해를 달리하는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며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심을, 그리고 성령의 폭넓은 고백을 채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아리우스의 주장과 싸운 아타나시우스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것이나 이것이 아타나시우스 본인에 의해서 작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신경은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진술하고 그리스도의 두 본성인 신인양성의 통일성을 다룬 교리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여러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이 만들어졌습니다. 1536년 제1스위스 신앙고백, 1537년 제네바 신조, 1541년 제네바 교리문답,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1561년 벨직 신앙고백, 1563년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그리고 영국교회 39개 신조, 1566년 제2스위스신앙고백, 1619년 돌트신경, 1649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그것입니다. 이 여러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은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모습을 갖게 된 개혁교회 신앙의 산물입니다. 개혁교회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앙고백과 교리로 견해를 밝히고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교회가 가진 신앙을 바탕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위하여 작성한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이 위에 열거한 것들인 것입니다.그리고 이것은 개혁교회의 개혁사(改革史)사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신앙에 신학을 세워나가는 것으로서의 교회 개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뒤집고 바꿔 나가고 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교회에 바른 사상을 갖게 하여 깨어있게 하는 것의 성격이었습니다. 가령 돌트신경이 채택된 배경을 보게 되면, 라이덴 대학의 교수였던 알미니우스(Arminius)가 예지에 근거한 조건적 선택, 무제한적 속죄, 부분적 타락, 저항할 수 있는 은혜 그리고 은혜로부터의 타락 가능성 등을 주장함으로써 개혁신앙으로부터 이탈하고 그 추종자들인 알미니안주의가 생겨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도르트레히트에서 개혁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알미니안주의에 반대하는 다섯 조항, 곧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전적 타락,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 등을 개혁교리로서 확증한 것이 돌트신경(Dort Creed)입니다.
둘째는, 교회가 가진 신앙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신조[신경] 및 교리문답에 담은 신학 사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이보다 더 중요히 다루어져야 하고 강조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인가 하는 것이요 구원의 원리를 충실히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항의문을 비텐베르그 대학 정문에 붙인 95개조의 항의문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항의문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교회가 복음에서 이탈하여 있는데 대한 항의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교황 레오 10세가 전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중수하기 시작한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계속하기 위해서 면죄부[속죄부] 판매를 계획했는데 이 면죄부는 11세기 십자군 전쟁 때 교황 우르반 2세가 십자군에게 교회법에 따라 규정된 모든 죄를 사면한다고 약속한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면죄부는 민중의 헌금을 긁어모으는 수단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고해성사에서 빠뜨린 죄나, 고해 때 사제가 고해자에게 신의 뜻에 미치지 못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미처 다 소멸되지 못한 죄에 대해서는 연옥에 가서 나머지 고통을 받은 다음 낙원으로 옮겨진다고 가르쳤습니다. 민중에게서 그 누구도 연옥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연옥은 지옥 다음으로 가기 싫은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자기 죄가 남아 있지 않다고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연옥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습니다. 교회는 이런 신자의 믿음을 악용하여 면죄부를 사는 즉시 구입한 사람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을 떠나서 연옥에 가 있는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도 연옥을 벗어나 낙원으로 간다고 설파하였습니다. 이러한 면죄부 판매의 전략은 특히 독일에서 성행했습니다. 그것은 독일이 강력한 왕권 중심의 국가가 아니라 황제가 7명의 선제후(選帝侯)들에 의해 선출될 뿐 아니라 크고 작은 300개 가량의 제후국으로 나뉘어 권력이 분산되어 뚜렷한 구심점이 없어 교황청의 좋은 착취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적극 동의하여 나갔는데 이는 면죄부 판매 수익의 절반은 교황청으로 들어가나 나머지 절반은 면죄부를 판매한 대주교에게 배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롭다함을 인정받는 것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며 구원은 은혜로 얻는 것임을 깨달은 루터에게 있어서 당시 교회적 상황은 개혁의 대상이었습니다. 인간의 믿음 자체도 죄의 용서를 받을 만한 아무런 공적[공로]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과 구원은 하나님이 은혜[선물]로 주시는 것임을 성경의 관점에서 깨달은 루터에게서 연옥을 내세워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회의 실상은 부패 그것이었습니다. 당시 루터는 교회가 가진 내세관에 있어서 연옥을 그대로 말하고 있지만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을 사면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살아 있는 자이든 또는 죽은 자이든 면죄부가 없어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보물(영적 은혜)를 받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루터에 이은 칼빈의 교회 개혁으로 이 땅에 개혁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제네바에서의 개혁교회를 따라 뜻 있는 개혁자들은 그와의 교제를 통해서 신학 사상을 성경적 관점에서 가져 나가고자 하였으며 이에 의한 개혁교회를 각지에 세워나갔습니다. 칼빈주의자로 불려지는 이들은 칼빈의 신학의 영향 속에서 카톨릭 교회와는 분명한 신학 차이를 갖는 교회로서 개혁교회를 세워나간 것입니다. 그런 개혁교회는 필연적으로 예배에서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먼저는 예배가 교회 제도에 의해서 의식화(儀式化)되어가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예배 의식을 공인하는 교회제도는 폭군적이고 무익하며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하고 예배에 있어서의 관습과 인간적인 창안물은 성경과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비난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교황의 미사를 다루면서 이를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것은 미사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용서 받기 위한 희생이며 제물이라고 믿게끔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사는 사제가 그리스도를 바치고 신자들은 그 봉헌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행위를 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 대하여 불경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예배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성례는 칼빈에게 있어서는 세례와 성찬 두 성례 뿐이었으며 이를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徵表)로 이해하였습니다. 당시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함으로써 속죄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시키신 분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중개자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사(聖事)에 의해 그 은혜를 사람들에게 베푸는데 은혜를 베푸는 의식으로서는 다음의 일곱 가지를 삼았습니다. '성세(聖洗)', '견진(堅振)', '성체(聖體)', '고백(告白)', '혼인(婚姻)', '병자(病者)', '신품(神品)' 성사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의 구호는 개혁교회가 어떤 신앙의 정신으로 있고자 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 Sola Gratia(오직 은혜로), Sola Christo(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Sola Deo Gloria(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Coram Deo(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신앙의 정신 속에 있는 개혁교회는 성경을 교회의 권위로 두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개혁교회는 참된 교회의 표식으로서 그 첫 번째를 순전한 복음의 설교에 두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네 교회가 하나님의 본의에서 이탈한 해석과 설명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교회사에서의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복음을 진실히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래서 복음을 변질시키면 그러한 자가 누구이든지간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영원히 저주를 바을 것이라는 것이, 그리고 누구든지 주께서 주시므로 이미 받아들인 복음과 다른 것을 전한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달콤하고 교묘한 말로 전하지 않았습니다(갈 1:7-10).
순전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중요성은 그 복음은 구원의 원리를 알게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얻는 구원이 어떻게 해서 되어지는 것인지를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순전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때로는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자로 그리고 때로는 복음의 진리에 대항하는 자들에 대하여 저항하는 자로 오늘날에까지 왔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이들의 무기가 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었으며 이 성경에 의한 관점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셋째는, 언제나 교회 속에서 만들어져 유전되어 오는 제도적 관습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개혁된 교회라 할지라도 언제나 끊임없이 개혁되는 교회의 모습 속에 있어야만 합니다. 가령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으로 폐지된 절기를 그리스도를 빙자하여서 새롭게 절기를 만들어 스스로 자신들을 그 속에 가두는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탄절,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등은 성경적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신약교회의 절기입니다. 이것의 비기독교적이며 비성경적인 사실의 여부를 떠나서 단지 교회의 전통이라는 것을 내세워 이러한 절기들을 지키도록 말하고 가르치며 이 속에서 신자들을 두고 신자들로 하여금 이 절기 속에 살게 하는 것은 교회의 잘못된 유전으로서 마땅히 이를 페지하는 교회 개혁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십일조와 주일의 성수 개념을 비롯하여 이런 저런 명목의 온갖 기도회와 전도, 봉사 모든 면에서 성경을 엉뚱하게 적용하고 왜곡시켜서 행하게 하는 잘못된 유전으로부터 이를 바로 잡아가는 교회 개혁을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교회 제도적에 관해서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국 교회 개혁이란 다름 아닌 자신의 개혁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그래서 교회 개혁의 실천의 핵심은 자신을 성령님의 소욕을 좇는데 두는데서 찾아져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임하여 구원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주도적으로 인도하여 가십니다. 성령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모세의 율법이 유대인들의 삶을 이끌고 갔으나 그 결과는 그 어떤 것에서도 인간의 육의 죄성에서 나오는 악한 죄만 드러내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그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과 함께 하신 때부터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주셔서 이 안에서 신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비록 신자의 육은 완전한 구속을 입지 못한 가운데 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게 해 주심으로 다시는 정죄와 심판을 받지 않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약속으로 주시고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연합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자신 안에 계신 성령님의 소욕을 좇아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나라적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로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의 모습을 띠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이 되지 않는 삶이란 그 무엇을 해도 결국은 육에서 나온 일이며 육이 하는 일이고 육은 다만 육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에 교회 개혁도 육의 열매 외에는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결과만 되고 맙니다.
맺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체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자들로 하나된 몸의 생명체입니다. 사람이 출생하여서는 어린 아기인 영아 때부터 '사람'으로서 완전체입니다. 이는 사실 복중에 있는 태아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아가 어머니의 복중에서 열 달을 있는 동안 이목구비가 점차 제대로 서 가는 모양으로의 변화를 갖지만 사람으로서의 생명체에 있어서 완전합니다. 출생 후 유아기와 소년기와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성인으로의 모습을 갖추어 가지만 이는 사람이 점차 온전해지고 완전해져 가는 차원에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어느 시기에 있든지 간에 사람으로서 완전한 것입니다. 다만 사람으로서 유아와 소년과 청소년과 청년과 성인의 모습을 갖추어 갈 뿐입니다.
나는 이 원리를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교회는 더 개혁되어가져야 할 것으로 처음부터 세상에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에 들어와 있는 것이요 이 총회는 교회로 불려집니다. 이러한 교회의 한 부분이 각 지역에서 교회를 이루고 있을지라도 이 교회는 교회로서 완전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임에 있어서 몸이 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교회사에서 보듯이 교회가 교회다워지며 그 정체성을 세상에 나타냄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교회가 지닌 신앙에 있어서 개혁성을 띠게 됩니다. 교회가 신경과 교리문답을 만들고 성경적 관점에서의 구원의 원리를 말하는 복음을 전하고 잘못된 유전으로부터 교회를 개혁해 나가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의 실천은 성령님에 속한 자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하여 친히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심어지는 일을 하여서 우리 심령을 개혁시켜 주신 그 개혁된 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것에서 비로소 다른 교회 개혁의 모두가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첫댓글 목사님! 강의안 준비와 운전 등 애많이 쓰셨습니다. 저는 오늘 하루종일 집에 쉬었습니다. 목은 좀 괜찮으시죠? 글 퍼갑니다. 샬롬....
글 스크랩해 갑니다.
좋은 글 잘 읽어보겠습니다.
퍼갈께요..
이 목사님, 멀리 대구까지 오셔서 귀한 교제를 나누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잘읽고갑니다.ㅎㅎ 좋은 감사합니다.ㅎㅎ 평안하세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글 퍼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