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은 불교의 가장 중국적인 성립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이후 28대인 보리(菩提) 달마(達磨)를 개조로 하여 6조인 혜능(慧能)대사로 이어지는 선종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직접 대면하려는 직관직각(直觀直覺)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선은 불교의 정신을 깨달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고 인격화하는 구체적인 실천이자 수행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선종은 당대의 교학이 문자에 얽매여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참선 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바로 나아가는 접근법을 제시하였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자각을 일깨워준 선종은, 복잡한 교학 연구와 현학(衒學)의 풍토를 일거에 혁신하는 역동적인 가르침이었으며 중국불교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중국의 선불교는 인도에서 형성된 요가 명상이나 불교의 선정법이 아니라, 당대의 조사들에 의해 새롭게 완성된 선사상이었다.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선불교를 완성시킨 사람이 남종선의 조사인 혜능대사이며, 특히 마조 도일선사는 이러한 생활종교로서의 선불교의 입장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유명한 말로 조사선의 새로운 경지를 제시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조사(祖師)는 선의 실천 수행으로 불교의 참된 정신을 깨닫고 체득한 사람이며, 또한 석존의 정법(正法)을 계승하여 지혜와 인격으로 불법을 펼치는 당대 선불교의 새로운 인격을 말한다.
1994년 호북성 황매현에서 열린 '선종과 중국문화' 국제학술회의에서 중국 선종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있었다. 즉, 선종의 초기교단 창립은 4조 도신, 교단 형성은 5조 홍인, 본격적인 발전은 6조 혜능의 업적으로 정립된 것이다.
※ 초조 달마 (達磨, ? ∼ 528)
남천축 향지국 셋째 왕자, 본명 보라다라. 동인도 승려 반야다라에게 법을 이어받고 보리달마로 이름을 바꾸고 40년 동안 스승을 섬김. 스승 열반 후, 중국으로 건너와 520년 10월에 양(梁)나라 무제(武帝)를 만났다. 양무제가 자신의 불사에 대한 공덕을 묻자,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대답함. 또한 '진리는 성스러울 것이 없다, 달마 자신도 누구인지 모른다'라는 대답에 양무제는 달마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달마는 자신의 심법(心法)을 펼칠 인연이 닿지 않았음을 느끼고 양자강을 건너, 숭산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수도 하였다.
벽은 번뇌망상의 차단을 의미한다. 달마의 벽관(壁觀)은 묵조선(默照禪)으로서 성(聖)과 속(俗) 그리고 주체와 대상이라는 일체의 상대적 분별과 대립이 없어진 본래심(本來心)의 세계이다. 모든 인연의 고리를 끊고 본래 그대로의 평온한 안심(安心) 상태가 바로 벽관이 지향하는 목표이며, 벽관은 안심 상태에 들어가는 실천법이다.
달마는 다시 천축으로 돌아갈 즈음에 제자들에게 각자 마음으로 얻은 바를 말하게 했다. 도부(道副)가 말했다. "문자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문자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서 도를 삼습니다." "너는 내 가죽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悤持)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보았을 때, 한 번 보고는 다시 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너는 내 살을 얻었다." 또 도육(道育)이 답했다. "지수화풍의 사대가 모두 공하여 안이비설신의 오온(五蘊)이 모두 있지 않습니다. 대천세계 또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너는 내 뼈를 얻었다." 끝으로 혜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사에게 예배하고 원래 자리로 가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너는 내 골수를 얻었다." 하고는 법을 혜가에게 전했다.
달마의 죽음과 관련된 설화(달마의 신성화) - 사후 3년에 북위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을 다녀오던 도중에, 죽었던 달마가 부활하여 신발 한짝을 지팡이에 매달고 서역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송운이 낙양에 돌아와 이를 알리자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무덤을 파헤쳤다. 관을 열어보니 달마의 머리와 신발 한짝이 없었다고 한다.
달마의 종지(宗旨)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 문자를 세우지 않고, 가르침 밖에 전하니, 바로 사람의 마음을 직관하여,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이었다.
달마조사가 중국에 전수한 법은《능가경( 伽經)》을 근거로 한 선법이었다. 도(道)로 들어가는 방법은 이치로 들어가는 이입(理入)과 행동으로 들어가는 행입(行入)의 두 가지로 귀결되는데, 전자는 종교의 이론에 속하며 후자는 종교의 실천에 속한다. 즉 선법의 이론과 실천이 서로 결합된 교의가 바로 달마대사의 간명한 선법이다. 뒤에 6조 혜능에 의해 형성된 남종선에서는 《금강경》(도신부터 홍인을 거치며 흡수됨)을 소의 경전으로 삼게 된다. 현재 조계종의 소의경전이다.
※ 2조 혜가 (慧可, 487 ∼ 593)
제(齊)나라 고제(高帝) 연간의 사람, 속성은 희(姬)씨, 이름은 광광(光光). 15세에 경전에 통달하고 30세에 향산사(香山寺)에 들어가 보정선사에게 출가하였다. 노장학(老莊學)을 익히던 40세 어느 날, 꿈에 신인을 만나 '남쪽으로 도를 깨우치러 가라'는 계시를 받고 이름을 신광(神光)으로 바꾸고, 달마대사를 만났다. 매일 찾았으나 달마는 만나주지 않았다. 하루는 방문 앞에서 밤새 눈을 맞으며 날을 새웠다. 아침에 달마를 만나 '감로의 문을 열어 중생제도의 원'을 밝히며, 자신의 왼팔을 자른 뒤 제자가 되었다. [설중단비(雪中斷臂)]
하루는 혜가가 "저의 마음이 아직 불안하니 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달마는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가 편안하게 해줄 테니." 혜가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제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달마는 "너의 마음을 이미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하였다. [안심법문(安心法門)]
이 순간 혜가는 활연대오(豁然大悟) 하여, "오늘에야 모든 법이 공적(空寂)하고, 그 지혜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보살은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지혜의 바다에 이르며,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열반의 언덕에 오르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법을 문자로 기록할 수 있을까'를 묻자, 달마는 앞의 종지(宗旨)를 남겼던 것이다.
혜가는 일생동안 걸림 없는 중생제도의 행화를 펼쳤으며, 70이 넘어서는 환속의 차림으로 절대자유인의 경지에서 무애행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즉, 혜가는 세속을 통해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생활불교와 실천불교를 온몸으로 전개하였던 것이다. 혜가가 광구사(匡救寺) 앞에서 법문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절 안에서 《열반경》을 설법하다가 이에 앙심을 품은 변화(辯和) 법사가 고을 재상에게 무고를 하여 처형을 당했으니, 107세 노승의 입적이었다.
달마로부터 4권의 《능가경》을 전수받아 능가의 심법에 따라 두타선(頭陀禪-고행의 좌선)을 실천했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을 본래의 청정성과 도덕성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명심견성(明心見性)'이 바로 혜가의 선풍이었다. 그는 세속의 민중과 휩쓸리면서도 승가 본연의 모습을 보였으며, 아집과 단견에서 벗어나서 살아있는 선의 생명을 열어 실천적 교단 풍토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었다.
※ 3조 승찬 (僧璨, ? ∼ 606)
가계가 분명치 않다. 한 거사가 혜가 대사를 찾아왔다. "제가 풍병(나병)을 앓고 있으니 죄를 사하여 낫게 해주소서."라 하자, 혜가는 "그대의 죄를 가져 오너라, 그러면 낫게 해주리라." 거사는 한참만에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의 죄는 끝났다. 불법승 삼보를 믿기만 하라." 이에 거사가 "대사가 승보임을 알겠으나, 무엇이 불보이며 법보입니까?"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니,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니라." 이에 거사는 문득 깨달아,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이 안과 밖과 중간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혜가는 머리를 깎이고 승찬이라는 법명을 주었으며, 여래께서 가섭에게 전하고, 달마를 이어 자신에게 전해진 법과 가사를 남기게 되었다. 이어서 혜가는 대국난을 예언하며 승찬에게 은거를 일러주었다. 이에 승찬대사는 안휘성의 환공산( 公山)에 은거하였다. (불교 탄압 : 3武 1宗 - 북위 무제, 북주 무제, 당 무종, 후주 세종)
23년 뒤인 574년에 북주(北周)의 무제가 불교를 탄압할 때에, 일정한 주거지 없이 환공산과 사공산(司空山)을 왕래하며 30년 가까이 은둔 전법활동을 하였다. 그 뒤 수나라 문제 개황 10년(590)에 다시 공개활동을 시작하였다. 승찬 대사는 수양제(隋煬帝) 대업(大業) 2년(606)에 입적했다. 뒤에 당나라 현종이 감지(鑑智)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를 각적(覺寂)이라 하였다.
승찬대사가 남긴《신심명(信心銘)》에는 그의 선사상이 단적으로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4언절구 146구 584자로, '사량분별심의 타파를 통해 선악의 어느 쪽도 취하지 않는 중도의 무심'의 경지가 설파되어 있다. 이는 이분법적인 사유체계에 의한 대립과 분별심을 타파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다. 서두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은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시비를 가리는 것을 싫어한다."의 뜻이다. 즉, 도란 가리고 따지는 분별심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이상적인 세계가 아니라, 평범하게 삶 속에 있는 것이다. 단지 어리석은 중생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따름이다.
승찬 대사는 절대 영원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근본 그 하나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였다. 시비 분별과 집착에 의한 단견과 독선주의를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불이법문(不二法門)'과 '만물일체사상'을 주제로 하는《신심명》은 오늘날 선승들에게 대표적인 귀감이다.
※ 4조 도신 (道信, 580 ∼ 651)
속성은 사마(司馬)씨로, 본래 하내(河內)에 살다가 기주( 州)의 광제(廣濟)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매우 영리했다고 한다.
승찬 대사가 많은 대중을 모아놓고 설법할 때, 14세의 사미 도신이 절을 하고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의 마음입니까?"라 하니, 승찬이 "그대의 지금 마음은 어떠한가?"라 되물었다. "저는 지금 무심입니다." "그대가 무심이라면 부처님께 무슨 마음이 있겠는가?" 도신은 이어 "저에게 해탈의 법을 일러주십시오." 그러자 승찬이 "그대를 속박하는 이가 있는가?" 물으니, 도신이 "아무도 속박하는 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아무도 속박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대는 해탈한 사람인데, 어째서 해탈을 구하는가?"
이에 도신이 크게 깨닫고, 9년 수학 후 23세에 후계자로 인가를 받는다. 이때 승찬이 도신에게 전법을 선언한 후에 다음의 게송을 남겼다. <화종수인지(化種隨因地) 종지종화생(從地種化生) 약무인하종(若無人下種) 화종진무생(花種盡無生) - 꽃은 땅을 인연으로 피어난다, 땅에서 꽃이 피기는 하지만, 씨를 뿌리는 이가 없으면, 꽃이 피어날 수가 없다. >
위진남북조시대부터 3조 승찬대사에 이르기까지 선종은 유리걸식하며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는 참선수행의 경향이었다. 도신대사는 이러한 선풍을 바꾸어 선종의 초기교단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중요한 업적은 《능가경》중심의 심종(心宗)에 《반야경》과《금강경》중심의 공종(空宗)을 결합시킨 것이었다.(선종사에서 이것을 1차 혁명이라 부르고, 마조∼임제에 이르러 본격화된 '평상심시도'를 천명한 '조사선'을 2차 혁명이라 하기도 한다) 그리고 '개산주사(開山住寺)·농선쌍수(農禪雙修)·염불도입·실천불교의 모범'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개산주사는 집단 선수행의 상주처를 마련하여 선종이 승단을 구성하는 주춧돌이 되었으며, 농선병행은 자급자족의 경제적 기반을 만들었다(후일 '백장청규'로 정립됨) 또한 도신은 의약연구에도 크게 공헌하여 약서《초목집성(草木集成)》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이시진의《본초강목(本草綱目)》에 밝혀져 있다.
도신대사는 황실의 4번 부름을 끝내 물리치고 민중불교의 전통을 확립하는 모범을 보였다. 목숨을 위협한 네 번째의 부름을 거절하자, 당 태종 이세민은 크게 느끼고 조사전 건립의 공양을 하였다. 도신대사의 황실·귀족불교화의 거부 정신은 6조 혜능대사에게로 이어져, 남종 선문의 전통적인 불문율로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 5조 홍인 (弘忍, 602 ∼ 675)
속성은 주(周)씨, 본래 여남(汝南)에 살다가 기주( 州)의 황매(黃梅)로 옮겼다. 4조 도신대사가 파두산(쌍봉산)에 있을 때, 늙은 도인이 도신에게 불법을 청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도인이 산에서 내려와 마을의 어느 처녀에게 임신을 시켰다. [동자출가를 하면 받아주겠다는 도신대사의 말에 따라, 처녀의 몸 속에 들어갔다고도 함 → 투태환생(投胎幻生)설화 - 본체와 작용의 신비한 일체성과 동시성을 상징한다. 현재 오조사에 성모전(聖母殿)이 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성이 없는 아이[無姓兒]라 불리며 어머니와 방직공장과 노동판을 다니면서 자랐다. 어린 시절 관상가가 보고. '부처님의 32상보다 단지 일곱 가지가 부족할 뿐이다.'고 하였다. 7세에 출가하여 4조 도신의 제자가 되었는데, 매우 총명하여 두 번 묻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는 신장이 8척, 용모는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며 성품은 질박하고 말이 없었다고 한다.
도신대사와 7세 어린이(홍인)와의 만남이다. "너의 성이 무엇이냐?" "성은 있으나 보통 성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성인데?" "불성(佛性)이 성입니다." "너는 성이 없다는 말이냐?" "예, 불성은 공(空)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도신이 좌우를 둘러보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예사롭지 않다. 내가 입적한 후 20년 뒤에는 크게 일을 하리라." 다시 어린이가 물었다. "여러 성인들은 무엇으로 증득합니까?" "넓고 텅비었느니라." "그렇다면 성인은 없겠습니다." "아직도 어린 티가 남았구나." 나중에 법을 이어 받으니, 바로 후일의 5조 홍인대사이다.
651년 법맥을 승계 받고 3년 뒤에 황매현 동쪽 동산(백련봉)으로 옮겨 오조사(五祖寺, 禪定寺, 東禪寺)에서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열었다. 선종은 이 때에 이르러 교단 형태를 완전히 갖추고 총림제도가 확립되었다. 오조사는 선종 사상 최초의 종단 본찰이며, 6조 혜능의 득법 도량이며, 사실상 중국 선종의 발원지라 할 수 있다.
홍인대사의 뛰어난 제자 중 혜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숭산을 중심하여 북쪽에서 활동을 했다. 특히 신수는 측천무후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선종의 전국 전파의 계기를 만들었고, 중종과 예종황제를 거치며 삼제국사(三帝國師)로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5조가 선종사에 남긴 2대 업적은 첫째, 인도의 선을 현학(玄學 - 중국의 老莊學)과 접목시켜 독자적인 '중국선'으로 변용시킨 것이다. 여기서 5조가 지향한 '선문의 산거수행'은 단순한 은거가 아니라 훗날 청량법음의 유용을 가진다. 이는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 논리와 상통한다.
둘째, 자신은 돈오와 점수를 병행했지만 후계자를 점수의 신수가 아닌 돈오의 혜능으로 결정하였다. 이는 돈오의 선법을 정맥으로 전하여 남종선의 선풍을 확립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이 때에 인도불교의 새로운 토착화가 이루어진 것이며, 오늘날 동북아시아 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선불교가 실질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홍인대사의 선사상은 마음이 곧 부처이고 자성(自性)을 철견(徹見)해 성불을 이루는 '즉심즉불 견성성불'로 요약된다. 이러한 학풍과 더불어 '돈오·농선병행·금강경의 소의경전화·장원 사원경제 체제 확립' 등을 내용으로 하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선법을 '동산법문'이라 한다.
※ 6조 혜능 (慧能, 638 ∼ 713)
혜능조사는 돈오 남종선을 개창하여 동아시아 선불교사에 큰 획을 그었으며, 사실상의 중국불교 선종의 종조다. 그리고 선종사에서 한 사람의 선사가 '출가·득법도량(오조사), 수계도량(법성사, 광효사), 개당설법도량(대범사, 대감사), 행화도량(보림사, 남화선사), 원적도량(국은사)'을 각각 가진 예는 6조 혜능(괄호 속의 사찰로, 뒤는 현재 명칭)과 마조대사 뿐이다. 이 두 사람과 관련된 도량은 현재까지 모두 잘 보존되어 있다.
6조 혜능의 속성은 노(盧)씨로서 광동성(廣東省)의 소주(韶州) 곡강현(曲江縣) 사람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땔나무를 해다 팔아서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지나던 수행자가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열려, 어머니의 허락을 어렵게 받아 황매 동산선사의 홍인대사를 찾아갔다.
이 때 홍인대사는 날로 명성이 높아져 당대의 호족과 수행자들이 사방에서 운집하였고,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그의 교화를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20대 초반의 노행자가 홍인을 만났다. "그대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예, 신주(新州 - 영남지방)에서 왔으며 부처가 되기를 원합니다." "영남 사람은 불성이 없느니라." "사람은 남쪽과 북쪽의 차이가 있겠지만, 어찌 불성이 남쪽과 북쪽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홍인대사는 이 청년이 그릇임을 깨달았으나 시치미를 떼고 다시 물었다. "그대는 무슨 공덕을 짓겠는가?" "힘껏 방아를 찧어 스승과 스님들께 공양할까 합니다."
이리하여 매일 방아를 찧은 지 8개월이 흐른 어느 날, 노행자가 물었다. "어떤 것이 대도(大道)의 근원입니까?" "그대는 속인인데 나에게 그런 것을 물어서 무엇하겠는가?" "세상 일에는 승속(僧俗)이 있지만 도에는 승속이 없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다면 왜 남에게서 찾으려 하는가?" "그렇다면 밖에서 찾으면 안 되겠습니다." "안에서 찾아도 옳지 않느니라."
하루는 연로한 홍인대사가 대중을 모아놓고 "스스로 깨우친 법이 있으면 나에게 보여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전법 제자를 찾는다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대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수(神秀 - 뒤에 측천무후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북종선의 선구가 됨)가 게송을 올렸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막사야진애(莫使惹塵埃) -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이다, 부지런히 털고 닦아, 띠끌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
이에 홍인은 아직 본성에 이르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수행의 지침으로 대중에게 암송하게 했다.
대중이 모두 이 게송을 외우는 것을 들은 노행자가 까닭을 물어보고는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노행자가 장일용이란 사람에게 부탁했다. "나는 문자를 모르니 나의 게송을 받아써 주시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유진애(何處有塵埃) -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없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티끌 먼지 일어나리요>
[ 이 게송은 《六祖壇經》의 내용이고, 돈황본 《法寶壇經》에는 제3구가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으로 되어 있다. 801년에 만들어진《曹溪寶林傳》에서부터 '본래무일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
여기서 신수와 혜능의 게송은 점수(漸修)와 돈오(頓悟)라고 하는 북종선과 남종선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남·북종의 대립은 신수와 혜능 당시의 일은 아니었다. 732년 낙양 근처 개운사(開雲寺)에서 열린 무차대회(無遮大會)에서 혜능의 제자 신회(神會)가 북종선을 비판하면서 본격화 되었고, 이후 선의 역사는 남종이 주도해 나가게 되었다.
[ 뒤에 마조(馬祖)는 돈오를 앞세우되 점수의 방법적 균형을 잘 잡아 주었다. → 점수는 돈오와 더불어 동시적 구조를 지니는 상호보완적인 방편, 돈오의 과잉을 경계하는 점수의 균형 ]
노행자의 이 게송을 뒤늦게 본 홍인대사는 꾸짖고는 찢어버렸다. 대사는 묵묵히 방아 찧는 행자의 곁으로 가서 물었다. "쌀은 다 찧었느냐?" "쌀을 찧은 지는 오래 되었지만, 아직 키질을 못 했습니다." 대사는 주장자를 세 번 치고는 방앗간에서 나가버렸다.
한밤 삼경이 되어 노행자가 대사를 찾아 뵈었다. 이름을 '혜능'이라 지어주고 달마대사가 남긴 의발을 법의 신표로 전하며, 다음 게송을 읊었다. <유정래하종(有情來下種) 인지과환생(因地果還生) 무정기무종(無情旣無種) 무성역무생(無性亦無生) - 유정이 와서 씨를 뿌리니, 원인의 땅에 결과가 다시 생긴다, 무정은 이미 씨앗이 없으므로, 성품도 없고 태어남도 없다>
홍인대사가 조용히 말하였다. "내가 3년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다. 그대를 시기하여 해치려는 자들이 있을 것이니, 당분간 법을 펴지 말라." "이 가사는 계속 전해야 합니까?" "후에 도를 얻는 자들은 항하의 모래 같으리라. 이 신표는 그대에게서 멈춰야 한다. 달마대사께서 이 가사를 전한 뜻은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한 표적일 따름이지 어찌 전법이 이 가사에 달렸겠는가. 더구나 달마대사께서 '한 꽃에 다섯 잎이 퍼져 열매가 저절로 맺으리라(一花開五葉 結果自然成)'라 했으니 그대까지 다섯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인가하신 것이니라." 그리고는 가사로 불빛이 새지 않게 창문을 막고는 밤새워 《금강경》의 진수를 강론하여 혜능을 깨우쳐 주었다.
새벽에 두 사람은 몰래 빠져나와 강가의 나룻배에 올랐다. 홍인대사가 손수 노를 저으려 하자, 혜능이 막고는 "스승께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제부터는 자신의 본성으로 스스로 건너야 합니다(自性自度)"고 하였다. 혜능과 이별하고 홍인은 절에 돌아와 사흘 동안 설법을 하지 않았다. 대중들이 일제히 물었다."스님의 법은 누가 전해 받습니까?" "나의 법은 이미 영남으로 갔느니라." 신수가 다시 물었다. "누가 스님의 법을 받았습니까?" "능한 이가 얻었느니라." 이에 7백여 명의 대중들이 방앗간의 행자가 받아간 줄을 알고, 가사를 뺏기 위해서 뒤를 쫓아 나섰다.
두 달 뒤에, 대유령(大庾嶺)에서 혜명(惠明)이 유일하게 혜능을 찾았다. 바위 위에 놓인 의발이 꼼짝도 하지 않아, 놀란 혜명이 가르침을 청했다. "일체의 인연을 모두 끊어 한 생각도 내지 않고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무엇이냐?" 혜명이 크게 깨닫고 뒤쳐진 무리를 데리고 돌아갔다. 이후 혜능은 종적을 감추고 15년간 도피생활을 하였다.
혜능조사는 676년 남해현(南海縣)의 법성사(法性寺, 현 光孝寺)에서 당시 대강사인 인종(印宗)법사를 만나게 된다. 어느 날 인종법사가《열반겅》을 강의하고 있을 때,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본 두 스님이 다투기 시작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두 스님이 인종법사에게 해답을 바랐으나, 인종 역시 판단이 쉽지 않았다. 혜능이 옆에 있다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법사가 물었다. "그럼 무엇이 움직인다는 말인가?" "두 사람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에 놀란 인종법사는 그가 5조로부터 의발을 전수 받은 6조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6조는 정식으로 머리를 깎고 인종법사로부터 비구계를 받았으며, 수계의식 후 인종은 바로 혜능의 제자가 되었다.
이듬해 조계 보림사(寶林寺, 현 南華禪寺)에 주석하며 선종의 심법을 설하다가, 소주자사 위거(衛据)의 요청으로 대범사(大梵寺, 현 大鑑寺)에서 설법을 펼친다. 여기서 6조는 대내외적으로 법력을 인정 받았는데, 《육조단경》은 원래 이 대범사 설법을 중심으로 편찬된 것이다. 이후 36년간의 본격적인 행화가 조계 보림사에서 펼쳐졌다.
713년 자신의 임종을 예감하고는 '엽락귀근(葉落歸根-생명의 순환원리)' 법문을 남기고 신주 국은사(國恩寺 - 측천무후와 중종황제가 입궁을 청하였으나 사양하니 황제가 하사한 도량)로 갔다.
713년 8월 3일 세수 75세, 여기서 마지막으로 "자성이 진짜 부처이며, 법신·보신·화신은 본래 한 몸이라는 삼위일체론"을 사별 법문으로 남기고 입적하였다.
혜능조사의 남종선은 달마 이후의 선종을 바탕하여 불교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출세간주의에서 입세간주의로, 관념불교를 생활속 실천불교로 바꾼 일종의 불교사상의 대전환이었다. 특히 6조의 설법 어록인《육조단경》은 석가모니 이후 유일하게 '경'의 명칭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선종의 석가모니'라는 상징성을 지니는 의미이다.
※ 여래선과 조사선
◈ 여래선 (如來禪)
달마로부터 마조 이전까지의 선. 형이상학적인 무심(無心)을 매개로 이 현실 위에 작용해 나타나는 일상심의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본래심'으로 긍정한다. 달마가 제창한 무심론은 무심이라 해도 자연스럽게 갖가지 묘법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한다. 마치 여의주와 같아서 아무리 무심이라 해도 갖가지 무심의 작용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 조사선 (祖師禪, 馬祖禪 : 馬祖 道一, 709 ∼ 788)
마조가 선종사에 차지하는 비중은 6조 혜능 못지 않다. 그는 오늘날 통상 말하는 마조선의 개창자다. 마조선(조사선)의 핵심은 흔히 '즉심즉불(卽心卽佛)'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로 요약된다. 마조선은 무심을 말하지 않으면서 움직여 작용하는 일상심이 견문각지하는 그대로를 본래심의 작용으로 긍정해버린다. 우리의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고, 평상심이 곧 도라는 주장이 여기서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마조가 말하는 견성(見性)은 더 이상 내면적인 근본 지혜나 본각(本覺)으로 머무르지 않고 일상적 구체적으로 행동화 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일상생활 모두에 진리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다. 불교는 마조의 조사선에 이르러 생동하는 종교의 인간화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당시 안록산의 난을 거치는 과정에서 당나라 중기의 시대정신을 모태로 한 민권사상이며 새로운 인간상의 제시이기도 했다.
< 마조의 조사선에 대한 비판과 극복 >
1) 규봉 종밀(비판)
현실 인간의 행동을 곧바로 인정하는 무조건적 평등주의 무책임한 방종.
2) 임제 의현(극복)
'전체작용설' - 현실 인간의 철저한 자기비판을 통해 전체적인 인간의 책임을 그 극한까지 하나도 남김 없이 완수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냉혹한 성찰 뒤의 마음의 작용 그대로를 진리로 수용. 즉,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한 인간책임의 완수를 전제하는 이론의 정립.
마조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는 조사선이 목표로 하는 '부처와 조사'란 한마디로 '주체적 인간, 역사적 인간'이다. 인간은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다. 구체적으로는 깊은 자기 내면성찰 후의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마음 그대로가 참된 조사이고 부처이며, 가장 구체적인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수행과 견성은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한다. 도덕이란 진리를 우리 몸에 얻는[불성의 육화(肉化)] 일이며, 모든 일에 노력을 지극히 하고, 끝내는 그 노력마저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조가 설파한 '평상심시도' 속에 내재하는 도덕성이다.
※ 오늘날 한중일 3국에서 임제종이라 부르는 것은 엄밀하게 임제종파의 양기종(양기파)이다.
< 선종사의 5가 7종 >
① 위앙종 (위산 영우, 앙산 혜적) ② 조동종 (동산 양개, 조산 본적) ③ 임제종(임제 의현) → 황룡종(황룡 혜남) / 양기종(양기 방회) ④ 운문종(운문 문언) ⑤ 법안종(법안 문익)
선불교는 진리에 대한 단순한 관념론이나 인식론에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수행과 실천을 통한 체험으로 자각하여 생활 속의 지혜로 되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고도의 물질 문명 속에서 도덕과 인간성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현대 사회에서, 전세계적으로 종교를 떠나 생활 속의 참선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_()_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감사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