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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문예회관이라면 아직도 공연을 하러 내려갔을 때 담당 공무원 한사람이 나와서 문 따주고 불만 켜주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불행히도 그런 곳이 아직 적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문예회관에도 가끔은, 좀 과장하여, 신화를 이룬 인물들이 있다. 오늘 등장하는 공주문예회관의 이한수도 그런 사람이다. 천안의 백화점 두어 곳에서 일을 하던 그는 1991년 스물일곱의 나이에 공무원 시험을 거쳐 마침 그해 개관한 공주문예회관에서 무대기계직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당시는 공연기획이나 공연장 운영이라는 개념도, 담당자도 없을 때라 그야말로 ‘문 따주고 불만 켜주던’ 딱 그 직책이 무대기계직이었다. 당시 공주문예회관 건축비가 33억 원이었으니 공연장이라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시설은 열악했다. 무대 깊이가 10미터에 불과했고, 무대장치를 걸 수 있는 바튼도 몇 개 안됐다. 게다가 빛까지 새들어 오는 등 공연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오죽했으면 당시 공주대 무용과 졸업생들이 졸업공연을 하다 말고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하소연 했을까. “교육 중에 대학로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공연도 보고 무대시설도 돌아보면서 비로소 우리가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겠더라고요.” 공주로 돌아온 그가 곧장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 무대 리노베이션이었다. 문예회관 직원들과 뜻을 모으고, ‘윗분들’도 설득했다. 마침 당시의 지역구 국회의원이 문화관광위원회 소속이어서 무려 총 공사비 20억 원(건립비가 33억원임을 상기하자) 중 국고 10억 원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 덕분에 무대 깊이를 두 배로 늘리고 천정 그리드조명, 음향, 무대장치를 걸 수 있는 시설을 대대적으로 보완하고 바닥과 벽체의 디자인도 다시 하여 비로소 어느 정도 공연장의 모양을 갖출 수 있었다. “그 직후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처음으로 우리 문예회관에서 전국연극제를 개최하게 되었어요. 뭔가 해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2003년에는 다시 벽제연수원에서 조명디자인 교육을 자청하여 받게 되었는데, 이때 피교육생 평가에서 1등을 차지하여 부상으로 유럽 연수라는 또 한번의 벤치마킹 기회가 주어진다. 당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의 공연장 운영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이번에는 시설만이 아니라 운영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된다. 또 하나 그를 격동시킨 계기가 있다. 같은 해 식구(그는 부인을 그렇게 불렀다)와 함께 서울에서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게 되었다. 공주에서 올라와 공연을 보고 식사를 하고 돌아가는 데만 40만원을 썼다. 그런데 비싸다는 생각보다도 ‘이런 공연을 공주 시민들이 값싸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더 강하게 파고 들었다. 동시에 ‘성질’이 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주문예회관은 이런 공연을 초청할 만한 예산이 한 푼도 없었다. 그런데 어쩌랴. 뭔가 새로운 시도를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 해 인사에서 다시 민원부서로 발령이 났다. 예의 또 순환인사였다. 민원과에서 일하면서 생각을 많이 했다. “내 손으로 힘들여 바꿔 놓은 공연장에서 멀어지니까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공연장에 ‘맛’을 들여가던 때이기도 했고. 그래서 다시 문예회관으로 보내달라고 과장님께 조르고 국장님께 하소연 했죠.”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조른다고 바로 되돌릴 수 있는 게 인사가 아니다. 결국 그의 진정이 받아들여져 다시 문예회관으로 돌아 온 것은 일년 반이나 지난 2004년 9월이었다. 때마침 그해 문화관광부는 전국문예회관연합회(현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를 통해 지역문예회관에 우수공연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2005년 1월 고양어울림누리에서 우수공연 프로그램과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아트마켓이 열렸다. 그런데 이 지원은 예술교육 프로그램은 무료였지만 공연은 매칭방식이어서 총 공연료의 60%는 정부가 지원하지만 나머지 40%는 문예회관측이 부담해야 했다. 한 푼의 공연예산도 없던 공주문예회관의 이 ‘무대기계’ 담당직원은 떼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김영산 과장(당시 문화관광부 공연예술과장)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고 문예회관이 부담하는 40%는 열심히 티켓을 팔아서 그 수입금으로 지불하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처음엔 난감해 하더군요. 공연단체 대표들도 만나 설득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 열성적인 ‘무대기계직’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해 오태석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과 <라이어 1탄>으로 공주문예회관에서 첫 ‘기획공연’이 올라갔다.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에는 공주시장과 시청의 실·국장들을 일부러 초청했다. 그리고 정성을 들여 관객들에게 보내는 안내방송 문안을 만들어 손에 들고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시민여러분, 오늘 이 뜻 깊은 공주문예회관 기획공연에 시장님께서도 참석하셨습니다. 이런 좋은 공연을 여러분들이 계속 보실 수 있도록 내년부터는 예산을 책정해 주십사는 부탁으로 시장님께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고 시장님은 일어나서 답례를 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2006년, 공주문예회관은 개관 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많지는 않지만 6천만 원이라는 기획공연 예산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사천리로 된 것은 아니었다. 예산을 책정하여 올리면 그것을 심의하는 단계가 한둘이 아니어서 그 때마다 설명을 해야 했다. 다른 시설과 함께 문예회관을 운영하는 공주시시설사업소에서 시작하여 시청 문화예술과, 예산과, 시장, 군의회까지. 처음엔 1억5천만 원을 올렸으나 깎이고 깎여 의회에서 최종 결정된 금액이 6천만 원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이 들었던 말은 “안 하던 것을 왜 하려고 하느냐”였다. 그렇게 확보한 예산으로 2006년에 바라던 <명성황후>를 역시 전문연의 우수프로그램 공연 지원을 받아 총 공연료의 20%만을 부담하고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물론 주변에서는 이런 공연을 하기에는 공연장 환경이 아직 충분치 않고 또 4회 공연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느냐며 반대했다. 그러나 어렵게 공연은 이루어졌다. 인터넷 예매가 안 되던 때라 수작업으로 티켓을 팔았고 4회 공연 전석을 매진시켰다. 같은 해에 총 6개의 공연을 올렸고, 7~8개의 예술교육 프로그램도 지속되었다. 예산과 공연이 해마다 늘어나면서 2008년에는 그에 맞는 조직 개편이 있었다. 2년 동안 끈질기게 조른 끝에 드디어 공연기획팀(계)이 신설되었고,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는 무대기계직에서 공연기획 담당이 되었다. 공연기획팀 신설을 조건으로 시립예술단체인 연정국악원과 충남교향악단이 문예회관 관할로 넘어오게 되어 그만큼 일도 늘어났다. 그래서 공연기획계의 직원도 계장을 포함하여 여덟 명이나 된다. 공연기획 담당은 두 명이지만 공연기획과 예술교육, 하우스매니저, 홍보 등을 두루 맡고 있으므로 일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2010년 현재 공연사업비(예술아카데미 포함)는 3억3천만 원쯤 된다. 시설운영비나 인건비도 모두 이와 비슷하다. 예산의 규모는 다른 곳에 비해 많은 편이 아니지만 그 구성 비율은 흔히 이야기하는 '3자 균형'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인구 규모(12만 4천명)나 문예회관 규모(750석), 유사 규모의 타 지역문예회관과 비교를 해 봤을 때도 빈약하지 않다. 더욱이 불과 4년 전만 해도 사업비가 6천만 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4년 만에 6.6배나 커진 셈이기도 하다. 2010년 6월 현재도 12억 원을 들여 객석을 리모델링하고 있는데, 이 공사가 끝나면 좌석이 660석으로 90석쯤 줄어든다. 2007년도에는 인터넷 예매와 회원 정보를 축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고, 축적된 회원수도 4천명 가까이 된다. 참고로 공주시 중심지역 인구는 5만 8천명이다. 이제 연간 열 편 이상의 굵직한 시즌공연과 지역 예술동아리 중심의 소극장 축제, 그리고 다양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아카데미)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어 그런대로 프로그램의 포트폴리오도 자리 잡아가고 있다. 충남교향악단의 수석급들로 이루어진 ‘프리마 앙상블’을 조직하여 2년째 해설이 있는 공연을 해오고 있는데, 매회 매진이다. 국립창극단과 여름방학 캠프도 해마다 진행하고 있어 학생들의 반응도 좋다. 주부나 어린이가 만드는 역사탐방 영상제작 등도 있다. 공공문화공간 프로그래밍의 완성도랄까, 이런 것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벤치마킹을 하지만 누구나 배우고 느낀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 일부가 혁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지만 누구나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그 일부가 지속적인 혁신을 할 수 있어도 모두 성과를 올리지는 못한다. 또다시 극히 일부가 성과를 올릴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무언가 할일을 찾아내려 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이한수, 그는 이 네 가지를 다 하고 있는 사람이다. 더구나 그는 굳이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정년까지 보장되어 있는 공무원이다. 모든 것이 성격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시민들을 위해 격동할 줄 아는 그가 있는 한 공주문예회관은 비록 작게 보일지라도 계속해서 신화를 써 갈 것이다. 그가 부럽기도 하고 또 그 앞에서 부끄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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