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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기독교의 수용
1. 중국을 통한 한국선교 시도
강희제부터 건륭제에 이르는 3대 치세가 끝나고 대내적으로는 부정부패와 대외적으로는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중국(청)은 크게 흔들린다. 중국 내부의 부정부패로 인해 발생한 대표적인 사건은 홍수전이 주도한 태평천국운동이다. 홍수전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의 동생임을 자처하고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태평천국왕조를 세우고는 난을 일으킨다. 중국 외적으로는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의 팽창이다. 서구 열강들은 서로 자신의 상품을 팔 식민지 개척에 경쟁적으로 참여한다. 중국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이미 1715년 상관 설치를 영국에 허락하여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무역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국의 많은 은이 중국에 유출되어 경제에 파급을 미치게 되자 인도에서 재배한 양귀비를 중국에 밀반입을 시도한다. 이른바 밀무역을 통한 마약판매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의 은이 품귀현상을 빚게 되고, 많은 대중들은 마약에 취해 사회문제를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아편전쟁의 시작이다. 당시 황제였던 건륭제의 손자인 도광제는 임칙서로 하여금 영국의 마약 밀무역을 척결하려 했으나, 오히려 영국의 현대식 무기(군함) 앞에 무기력하게 항복을 하게 된다. 이에 홍콩, 마카오 등을 개항함은 물론이고, 텐진조약에 이르러 서구 9개국에 25개 조계지를 허락해 치외법권지역으로 서구의 경제, 문화적으로 쇄도해 오는 것을 무기력하게 개방하고 만다. 이 조계지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입국을 하고, 그곳을 기반으로 중국선교의 발판을 마련하려 한다.
내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을 일환으로 기독교 선교를 앞세웠지만, 기독교는 선교에 대한 사명으로 무장한 채 지속적이고도 집요한 활동을 전개한다. 이런 중국의 상황과 맞물려 조선의 기독교 전파도 이루어진다. 가장 먼저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는 귀츨라프이다. 그는 런던에서 모리슨의 중국선교담을 듣고는 동양선교에 관심을 가진다. 이후 귀츨라프는 동인도회사로부터 영국과의 통상에 적당한 항구를 조사하는 것과 통상가능성을 살피는 순방에 동승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로드 암허스트호에 동승해 1832년 2월 광동을 출발 타이완·복주·영파·상해 및 산동반도의 위해위를 거쳐 7월 17일 한국해안에 나타난다. 이렇게 출몰(?)한 귀츨라프 일행에게 조선정부는 중국황제의 허락이 없었다는 이유로 통상을 거절하고, 식량을 공급하는 것으로 그들을 떠나게 한다. 이렇게 조선 앞 해안에 당도한 귀츨라프는 근처 불교 사찰을 방문하고 주민들에게 감자 심는 법과 약을 나누어 주고는 떠난다.
한편 런던선교사인 윌리암슨은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중국주재 책임자가 되어 두 번째로 중국을 찾았고, 1865년 황해를 건너온 한국인 천주교 신자를 토마스 목사에게 소개해주었다. 이런 만남으로 토마스는 한국선교의 열망을 품게 되고, 그 후 토마스는 윌리암슨의 후원으로 다량의 한문성경을 받아 제1차 한국방문에 나선다. 1865년 9월 지푸를 출발, 같은 달 13일 한국 서해안에 도착한다. 이곳에 2개월 반을 머물며 한국어를 배우고 윌리암슨에게 받은 성경을 한국인들에게 반포한다. 그 후 토마스는 1866년 새 임지를 부여받은 북경으로 갔고, 그곳에서 한국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자신이 반포한 성경이 평양에까지 유포되었음에 감동, 프랑스함대의 원정이 논의될 때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제의받지만 계획은 무산된다. 그런데 제너럴 셔먼호(미국 상선)가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통역으로 승선, 평양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양식과 땔감을 요구하던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던 한국 측은 중군 이현익이 이들에게 억류당하고 일부 백성이 약탈과 살해를 당하자 분노에 휩싸여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다. 그 후 1866년 9월 2일 대동강 수위가 낮아지면서 양각도 모래톱에 제너럴 셔먼호는 좌초되고, 화공을 받아 불길에 휩싸여 선원들 모두 물로 뛰어들어 뭍으로 올라왔지만, 격분한 군민들은 그들을 모두 “결박·타살”하였다. 여기에 토마스도 함께 타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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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주에서의 성경 번역·출판과 선교
한국선교에서 성경 번역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출신 선교사 존 로스이다. 로스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사역을 하여 심양의 동관교회를 설립하였고, 최초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다. 1872년 8월 중국에 도착한 로스는 우선 중국어 습득을 위해 노력한다. 만주어와 중국어를 배운지 채 1년도 되기 전에 그는 중국어로 설교가 가능할 정도에 이른다. 그는 한국의 선교에도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토마스 1주기를 맞이해 고려문에 방문을 한다. 그곳에서 한국 상인들을 만난다. 처음에는 영국산 ‘양모’에만 관심을 기울이던 한국 상인들에게 실망하지만, 나중에 그의 수제자가 된 백홍준의 부친을 만나 백홍준의 부친에게 한문 신약성경과 [훈아진언]을 건네준다. 이러한 통로로 백홍준은 신약성경을 서책으로 접하게 되고, 이에 감동해 중국 만주로 넘어가 로스를 만나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기에 이른다. 백홍준을 비롯해 당시 로스와 한국어 성경번역 작업에 참여한 이응찬, 서상륜 등은 모두 평북 의주 출신이다. 개신교의 한국 선교 역사에서 이곳 의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곳은 청국과의 무역을 통한 ‘자립적 중산층’이 출현한 곳이다. 이들은 국경무역을 통해 성장했고, 대개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한 학인으로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의식을 소유하였다. 바로 그들이 로스·매킨타이어를 만났고,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한국에 복음을 수용하는 통로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과 로스는 함께 성경을 번역하여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완성한다. 그리고 1887년 신약전서의 번역을 완료한다. 또한 1879년 로스가 안식년을 맞아 영국으로 돌아간 사이 한국 개신교 사상 처음으로 매킨타이어의 주례로 백홍준과 이응찬을 비롯한 4명이 세례를 받는다. 이 사건은 한국인이 공적인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교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에서 이 소식을 접한 로스는 감격하여, 선교본부에 전도자 1명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의 보고서 일부에 한국인에 대한 평은 재미나다.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더욱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로스는 이러한 희망과 기대를 품고 한국어 성경번역의 의지를 불태운다.
한국어 성경 번역은 총 4시기로 구분하는데, 1기는 이응찬을 만나 한국어는 물론 한국의 소설·역사·문화를 익히는데 힘쓴 시기이다. 2기는 초역기로 이응찬과 요한복음 번역을 착수, 안식년을 떠나기 전까지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 번역을 완료한 시기이다. 3기는 매킨타이어 주도로 번역이 진척·수정되는 시기이다. 1879년 신약번역이 일단 완성되었고, 그리스어 성경을 참고로 한국정부에서 발행한 언해본을 통해 번역을 검토하는 번역방법상 일대진전을 가져온 시기이다. 4기는 [예수셩교젼셔]가 완역되는 시기이다. 물론 번역과 동시에 출판이 이루어진다. 이때 로스가 채택한 원칙은 두 가지이다. 첫째, 본문의 뜻과 일치하면서 한국어 어법에 맞는 절대직역을 한다. 둘째, 영어본보다는 [개정 그리스어성경]을 기준으로 한다.
성경번역의 의미는 로스가 “한국인 학자가 1명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고 한 고백처럼 번역이 로스에 의해 계획·추진되었지만 그 실제 번역은 한국인 개종자들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처음에는 이응찬, 백홍준 등 의주출신이 참여했지만, 의주 방언의 한계로 인해 1881년부터 서울 출신의 학자가 동참한다. 이런 작업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복음의 전도자가 되기를 희망한 열렬한 신앙의 인물들이었고, 행적이 불확실한 많은 한국인들이 이 번역에 참여, 이들의 노력이 한국교회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
예수성교본의 출판은 로스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1881년 6월부터 시작된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주조한 한글 연활자와 상해에서 구입한 인쇄기로 1881년 9월 시험인쇄에 들어간다. 그때 간행된 책이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이었다. 또한,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인 누가복음을 처음으로 채택, 인쇄한다. 이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누가복음·요한복음 각 1천부와 다량의 소책자를 일본의 톰슨 총무에게 보내 부산에서 반포한다. 특기할 것은 1882년 판에서 ‘하느님’으로 표기되던 신명(神名)이 1883년부터 ‘하나님’으로 바뀌었으며, 서울말의 채택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후 [예수셩교셩셔 맛대복음] [예수셩교셩셔 말코복음]등이 출간되었고, 1887년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로 합본·출간되었다. 예수성교본 발행은 1891년 [예수셩교셩셔 맛대복음] 5천부를 마지막으로 일단락되는데, 이는 국내 선교사들에 의해 성서위원회가 조직되고 성경번역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제작된 성경을 배포하는 일을 맡은 이들은 성경을 짊어지고 마을마다 방문해 복음을 전달하는 ‘권서(勸書)’‘매서인(賣書人)’이었다. 요즘의 ‘여호와의 증인’등의 모습을 연상하면 되겠다. 한글성경이 만들어지기 전에 한문성경을 몰래 들여와 배포하다 체포·투옥·재산몰수를 겪은 이가 백홍준이다. 백홍준 역시 투옥 등의 핍박조차 기뻐한다고 선교사 앞에서 고백하는 정도의 깊은 신앙을 체득한 이였다.
한글성경이 제작되면서 우선 ‘한인촌’을 중심으로 배포하였다. 이곳은 임오군란 이후 평안도로 좌천된 보수파 군인들로, 정세변동에 따른 생명의 위협 때문에 한인촌으로 망명한 이들이다. 식자공인 김청송을 최초 전도자로 파견했고, 많은 개종희망자들이 나왔다. 이 소식에 고무된 로스는 웹스터와 함께 한인촌을 방문, 4개 마을에서 75명의 남자에게 세례를 베푼다.
이들의 활동을 반란음모로 오해한 중국인 지주가 일단의 무리를 동원하여 구타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고, 이를 피해 다시 재입국해서 신앙을 지킨 마을도 있었다. 백홍준과 서상륜 등의 활동으로 제작된 한글성경이 국내로 유입되었고, 이들이 가는 곳마다 불교보다 더 훌륭한 종교라며 미리 알지 못함을 탄식할 정도로 급속히 기독교가 전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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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에서 성경 번역·출판과 선교
만주를 중심으로 한 성경출판과 개종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일본에서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가 있다. 그가 바로 이수정이다. 이수정은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다. 이미 성경을 접한 이수정은 일본에서 쓰다센을 방문, 그와 산상수훈과 기독교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가졌고, 쓰다센에게 건네받은 한문성경을 탐독, 개종하기에 이른다.
세례를 받은 이수정은 그 해 5월, 제3회 전국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하였고, 이튿날에는 요한복음 15장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요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유교의 ‘감응(感應)’의 논리를 빌어 설명하였고, ‘신인상감(神人相感)’의 원리를 “등잔의 심지가 타는 것”과 “종이 울리는 것”과 같은 한국적인 비유로 표현하였으며, 은혜와 믿음에 의한 속죄와 구원의 도리를 허망한 불교의 자력 구원관과 비교하는 것 등이었다.
이후 이수정은 손붕구 등 한인유학생을 전도한다. 그들을 중심으로 주일학교를 개설, 여러 청년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1883년 말 도쿄에는 김익승·박명화 등 7~8명의 한국인 수세자를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도쿄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였다. 한편 이수정은 선교사 초치(招致)를 위한 활동에 적극 나선다. 그는 일본을 통한 기독교 전파 보다는 미국으로부터 직접 수용을 바라고 추진하였다. 그의 노력은 뒷날 미국 각 교단의 선교사 파송으로 결실을 맺는다.
성경을 자기 민족에게 주는 것이 소망이었던 이수정에게 루미스가 찾아와 성경번역을 제안했다. 이후 현토성경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유는 당시 일본에서 전도의 주류를 이루던 이가 유학생들이었던 때문이다. (한문성경 虛心者福矣, 以天國乃其國也, 哀慟者福矣, 以其將受慰也, 溫柔者福矣, 以其將得土也, 饑渴慕義者福矣, 以其將得飽也, 矜恤者福矣, 以其將見矜恤也, 淸心者福矣, 以其將見上帝也, 和平者福矣, 以其將稱爲上帝子也, 爲義而見窘逐者福矣, 以天國乃其國也,) 이후 한글성경이 제작됨으로 해서 현토성경 번역 작업은 이것으로 끝나게 되지만, 이후 한글성경 번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당시 도쿄의 유학생은 물론 국내 지식층에도 환영받았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또한 이수정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미국에 요청한 한국 선교사의 도착 시간에 맞추어 한글 성경을 편찬하기 위해 일본어역[마가전]과 만주에서 간행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 등과 1881년 발간된 [한불ᄌᆞ젼]등을 참조해 1884년 4월 완역한다. 이렇게 완성된 마가복음을 들고 아펠젤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한다. 마가복음의 문체는 정확한 의미전달과 전도대상인 지식층을 고려해 국한문 혼용체로 출간한 책이다. 이수정은 이후에도 계속적인 성경번역 및 출판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갑신정변의 여파로 인해 자객에게 상처를 입고 1886년 5월 귀국하여 은거하다 병사한다.
일본에서의 한국선교 모색은 먼저 문서사업방면에서 시작된다. 거기에 이수정의 역할은 지대했다. 또한 만주에서 발간한 [예수셩교본]을 일본인 권서를 통해 한국의 개항장을 중심으로 반포한다. 일본에 온 선교사 중 장로교의 녹스와 감리교의 매클레이를 중심으로 한국 선교사업을 전개하는데 매클레이는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1884년 6월 한국을 방문하여 2주간 머물며 미감리회 한국진출 터전을 닦았다.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람은 김옥균인데, 김옥균은 기독교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으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개화의 방편으로 기독교를 이용하려 했다. 그럼에도 그의 주선으로 매클레이의 방한이 이루어졌고, 이후 장로교·감리교의 한국선교가 시작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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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국 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
18세기 말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미국 내에 해외선교에 대한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부흥사 무디가 이끈 부흥운동이 그런 붐에 열기를 더한다. 그런 열기 속에서 성장한 선교사들이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에 사명을 띠고 파견되었다.
한편 한국에서는 ‘신미양요’가 일어나는데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미국동양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미국정부의 훈령에 따라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나타나 전투를 벌였다. 미국은 이 같은 무력시위를 통해 한국정부에 항의하는 한편, 문호 개방의 기회로 삼으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진출을 견제하려는 청국의 중재로 마침내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서구열강 중 최초로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한다. 이듬해 푸트가 초대 주한미국공사로 한국에 부임하였고, 고종을 알현하는 중 친선사절 파견을 건의한다. 이에 ‘견미사절단’ 혹은 ‘보빙사’로 불리는 일행이 1883년 7월 제물포를 출발, 요코하마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환영을 받는다. 이들은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시카고·뉴욕 등을 거쳐 워싱턴에 도착, 미국대통령을 접견한 후 귀국길에 오른다. 이때 시카고로 이동하던 중 열차에서 가우처를 만나게 되는데 이후 가우처는 ‘은둔의 나라’ 한국선교를 열망하게 되고, 많은 기여를 한다.
이런 분위기와 맞물려 한국에 제일 먼저 발을 디딘 매클레이를 비롯한 재일선교사들의 요청도 크게 한몫을 한다. 재일선교사들은 한국에 ‘의료’와 ‘교육’을 통한 선교전망이 밝다는 보고서를 본국에 보낸다. 이에 발맞춰 1884년 말 감리교회 소속 스크랜턴박사와 부인, 아펜젤러를 한국선교사로 임명한다. 장로교 역시 1884년 의사 헤론을 한국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신학공부와 의학공부를 마친 언더우드에게도 1884년 7월 한국 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임명한다. 그렇지만 한국에 가장 먼저 상륙한 선교사는 중국에서 의료선교교사로 활동하던 알렌이었다. 알렌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수술하게 된 의사이고, 이일을 계기로 하여 광혜원을 세운 사람이다. 알렌은 중국의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었으나, 자리를 잡지 못하고 동료들이 권하던 한국행을 원한다. 그리고는 본국 선교부에 승인을 요청해 승인을 받은 후 상해에서 제물포로 입국, 서울에 입성한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미국공사관 내에 외국인들의 환영을 받은 알렌은 공사관 공의로 임명되었다. 알렌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한국의 의학에 많은 기여를 한 선구자라는 긍정적 평가와 신민주의적 한국의 이권침탈에 안내역할을 한 정치적 인물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그것이다. 1885년 4월 제중원(광혜원)이 만들어진 이후 동료 선교사들과의 불화를 겪으며 선교활동에 환멸을 느끼고 미국의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결과, 1895년 운산금광채굴권,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을 직접 획득해 미국인 사업가에게 넘겼다. 금에 대해 ‘노다지(no-touch)'라는 말이 이때 나오게 된다. 실제 알렌은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한 초기부터 조선 광산의 매장량, 위치 등을 조사했다고 전한다.
아무튼 이와는 별개로 매클레이는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교육과 의료 사업을 통한 입국이 가능하도록 허가를 받아낸다. 이에 따라 이듬해 미감리회 아펜젤러가 교육사업, 스크랜턴이 의료사업을 통한 선교를 목표로 각각 내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