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월간 <공동선>에 실렸던 글입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열흘 이상 열대야가 계속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5년째 앓고 있는 베체트(희귀난치) 증상으로 온 몸 곳곳에 혈관염이 생겨 죽을 맛이다. 말초 혈관에서 실핏줄에 염증이 생기는 바람에 극심한 통증과 함께 고열을 수반한다. 손가락이나 발가락 마디의 관절, 복숭아 뼈나 팔꿈치 관절, 무릎관절 등 뼈 속에 있는 혈관에 염증이 생기면 관절염 증상을 동반하고, 자가 면역질환이어서 때때로 일시적인 루프스 증상까지 수반되는 그야말로 ‘수륙양용 차’의 공격이거나 ‘육해공 동시공격’을 받는 셈이다. 스테로이드 계통의 약을 쓰면 한순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몸이 망가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45년 째 한 번도 안 쓰고 버텼다. 작년에 만난 어떤 고명한 의사께서 ‘이런 상태로 45년간 스테로이드를 한 번도 안 썼는데도 버텨낼 수 있었다면 완치 상태나 다름없다’고 했다. 날마다 혼절할 만큼 고통스러운 상태가 완치상태라니... 정말 독특한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더니 올 여름은 왜 또 이렇게 더운가?
미지근한 물을 끼얹어 한 순간이나마 열을 떨어뜨린 다음, 세탁을 기다리고 있는 빨랫감을 뒤적였다. 가족들이 샤워를 하고서 한 번 썼던 수건을 찾아 거듭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때는 많이 젖지 않은 수건들을 꺼내어 말려두었다가 한두 번 더 쓰기도 한다. 오늘은 횡재를 만났다. 수건을 뒤적이다 멀쩡한 티셔츠를 발견한 것이다. 아들이 어제 입고 벗어둔 것인데, 땀을 흘리지 않았는지 전혀 냄새도 없다. 더구나 오늘 같은 오후 외출에 딱 좋은 색감이다.
한 여름만 비켜나면 샤워할 때 찬물이 아니라 더운 물이거나 미지근한 물이 소용된다. 그러나 온수를 틀었다고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데워지는 동안은 찬물이 나오게 되고, 대부분 이 물들은 샤워기를 통해 고스란히 하수도로 가게 된다. 유럽이나 일본 혹은 OECD 국가들 대부분은 중수 시설이 되어있다. 하수도를 통해 내려간 물이 간단한 처리를 통해 변기로 다시 들어오게 되어, 한 번 정수하여 가정으로 배달된 물을 최소한 두 번 이상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수 시설이 전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변기에서도 상수도와 똑 같은 음용수가 나오게 되어있다. 중수시설도 없는 나라에서 사용하지 않은 수돗물이 바로 하수처리 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환경부에 따르면 머지않아 물 부족국가가 될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1인당 하루 수돗물 소비량이 2~6배에 이른다고 한다. 그래서 수도꼭지나 샤워기가 있는 곳마다 통을 하나씩 놓았고, 번거롭지만 미리 나온 물들을 받아두도록 가족들에게 부탁해 두었다. 그러니 내가 물을 쓸 때는 조금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통 안에 받아진 물과 온수를 적당히 섞어 사용하려면 매번 조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샤워기를 사용할 일은 거의 없고, 대야 위에 서서 바가지로 물을 끼얹은 다음, 대야에 담긴 물로 비누칠한 몸을 닦는데 한 번 더 사용한다. ‘그렇게 복잡하게 살 필요가 있느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는데, 날마다 그리 하다보면 익숙하게 요령이 생겨서 하나도 안 복잡하다. 마치 흐르는 물처럼 단순한 동작의 반복일 뿐이다.
‘한 번 입었던 옷을 어떻게 빨지 않고 다시 입을 수 있느냐?’고 경악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나의 Sense & Sensability를 믿는다. 이를테면 땀 냄새가 배었거나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만한 정도면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건 또한 마찬가지다. 깨끗하게 씻은 몸의 물기만을 단 한 차례 닦았을 뿐인 것을 다시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는 것은, 매일 빨래를 빨고 널고 개는 사람과 세탁기에게 예의가 아니다. 사용되는 물과 세제를 생각한다면 예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파괴범으로 몰릴 수도 있다. 이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제법 큰 회사를 두 개나 경영하는 친구인 오영록씨(창인건설 대표)가 이렇게 말했다.
“집에서나 사우나에서나 혹은 호텔 세면실에서 한 장 이상의 타올을 사용해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온 몸을 감쌀 정도의 큰 타올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 한 몸을 잠깐 닦기 위해 그렇게 큰 세탁물을 남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을 보면 이를 닦거나 샤워를 하는 중에 수도꼭지를 계속 틀어놓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욕먹을 각오하고 주의를 준 적이 많습니다.”
그의 아내 이경순여사가 거들었다.
“찜질방이나 대중목욕탕에 가면 준비된 수건 여러 장을 아무렇게나 사용하고, 어떤 이는 몇 장을 깔고 앉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 내고 제공받는 것이라지만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할 세상을 생각한다면 가슴이 아파서, 민망스럽지만 그리 하지 말도록 참견을 하기도 합니다. 설거지할 때도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수돗물을 잠그지 않기에 물 낭비가 엄청납니다. 씻는 데보다 흘러넘치는데 더 많은 물이 소용될 지경이라니까요. 그래서 조금 귀찮더라도 매번 수도꼭지를 올리고 내려서 꼭 필요할 때만 물이 나오게 하면 삼분의 일 이하로 물 소비를 줄일 수 있는데, 오래 하다보면 익숙하게 요령이 생겨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예요.”
감동이 밀려왔다. 이분들이 돈 많은 사업가 부부 맞나?(경상도 사투리 버전 - 답은 '그렇다고 맞지는 않아' 라고 함) 살아오면서 남에게 강요하거나 티내지 않고, 혼자 그리 살아도 기쁘고 행복했다. 그런데 이런 강적(?)들이 가까운 곳에 있다니...
세 아이를 키우면서 이런 일로 단 한 차례도 교훈을 앞세워 설교를 하거나 인성을 앞세워 훈육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때로 귀찮고 힘들더라도 기쁘게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다였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감동을 받아 잘 따라 했는가? 대부분 그러지 못했다. 내 아이들은 아빠와 단 둘이 외딴 섬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생각해 본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기쁘고 행복할 뿐만 아니라 짓궂은 사람들에게 취조에 가까운 핀잔을 들어도 응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거나 여린 심성을 지닌 사람의 경우 비난과 따돌림 까지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면 내 아이들은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면서 그냥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기도 한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삶은 예수를 따라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나 ‘기쁜 소식(복음)’이 되어줄 뿐, 보편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먼 나라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매번 미안한 마음으로 부탁을 하게 된다.
“얘들아! 물이 데워지기 전에 미리 나온 물을 그 통에 받아만 두어라. 처리는 아빠가 할께. 너희들은 다른 일도 많아 바쁠 텐데 거기까지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아이들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통에 물을 받아놓았고, 나는 그 물을 요령껏 잘 사용하거나, 용변 후 미리 양변기 물통 뚜껑을 열고 물을 내린 다음 거기에 부었다. 이런 일은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과정들의 한 부분이다. 음식을 먹은 후 기름기가 묻지 않은 그릇이나 컵은 바로 씻고, 그 물을 받아서 기름기 때문에 세제를 사용해야 할 그릇들을 씻는다거나, 마지막으로 헹군 물을 받아 두었다가 다음에 씻을 그릇들을 담가놓는데 사용한다. 가족들끼리 오손 도손 먹는 식탁에서라면 접시나 음식 그릇에 묻은 음식 부스러기 혹은 양념까지 다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어쩌다 접시에 묻은 양념들을 핥아먹다가 딸애들에게 핀잔을 들은 적이 있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아이들 또한 그렇게까지 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비가 적당히 오면 우산을 쓰고 나가 자동차를 닦아 줌으로써 세차에 사용되는 물을 줄여본다. 내 한 몸 시원하자고 세상으로 실외기를 통해 더운 바람을 내뿜고, 프레온가스라는 냉매 때문에 오존층을 파괴하여 지구온난화를 가속하는 에어컨 없이 살기. 이 밖에도 전기사용관리, 겨울철 실내온도관리, 휴대폰 교체 자제, 다수 카드 사용자제, 꼭 필요할 때를 빼고는 대중 교통수단 이용, 외식과 쇼핑 자제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에서 ‘자발적 선택의 가난’이라는 ‘기쁜 소식(복음)’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가슴에 꼭 새기는 일은 이 ‘가난의 아스케제(ASKESE)’가 ‘자기수행’이라는 점이다. 이런 삶을 통해 타인을 수행시키는 일은 결코 안 된다. 수행이란 ‘자기수행’일 때만 참된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다만 이런 아스케제에 가능하면 많은 이웃들이 동참하면 좋겠고, 나날이 세속화되어 돈과 권력에만 눈길을 주는 종교단체들이 이 아스케제에 눈을 떴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을 지니고 살 뿐이다.
멀리 필리핀에 교환학생으로 가있는 딸에게 보냈던 편지가 생각난다.
“그곳 한인성당 아줌마가 네가 삼주 째 성당에 안 나왔다고 꼬질렀다. 아줌마는 네가 매주 한인성당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러나 아빠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택시 타고 멀리 가는 한인성당보다 가까운 현지 성당에 가는 것도 괜찮고, 성당에 가는 것보다 더 기쁘고 행복한 일이 있다면 그걸 먼저 하길 바란다. 성당에 가는 일보다 더 기쁜 일이 없을 때 성당에 가도 늦지 않고, 하느님은 항상 네가 기쁘고 행복하기를 바라시며, 언제 어디서나 너를 기다려주신다. 그것이 맞고 틀리거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참된 기쁨이 되는 일을 하면서 지내기를 아빠는 진심으로 바란다. 성당에 가거나 안 가거나 보다 더 중요한 일은, 네가 성당에 있든 다른 곳에 있든 하느님은 여전히 네 곁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또한 부모를 떠나 멀리 있으니 태어난 후 처음으로 네 스스로 살아보는 셈이다. 검소한 삶과 절약을 통해 무엇을 아끼고 어떻게 절약할 수 있는지를 잘 가늠해 보거라. 그러나 그것은 네 자신에 관한 것일 뿐, 함께 간 친구들이나 현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자리라면 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우선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네 생각을 말할 기회가 있다면 의견을 내놓을 뿐 주장이나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되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의견이라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 생각하고 수용해야 한다. 음식이나 술값을 지불해야 할 때, 미리 정하지 않았거나 누군가 한 사람이 내야한다면 항상 네가 먼저 계산하여라. 아끼는 것은 너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그렇게 지불된 것은 결국은 아빠가 부담하는 것이니 너는 친구들을 위해 기쁘게 내주는 행복을 누리면 된다. 누구나 외지에서는 쓸쓸하기 쉬운데 너그럽고 후한 대접을 받으면 오래 가슴에 남기 때문이다. 아빠가 오랜 동안 외지에서 자주 경험한 것이다.”
필자가 요즘 열과 성을 다해 수행하는 아스케제가 있는데, ‘일반고속과 무궁화열차 타기’이다. 구미-서울과 울산-대전(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구간 부지기수일 것임) 구간에는 오래 전부터 일반고속이 사라지고 우등만이 존재한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타는 사람이 없어서라고 한다. 남아있다해도 모든 구간에서 일반고속은 가뭄에 콩 나듯 몇 대 안되고, 그것도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시간대에만 있다. 그러다 그것이 불편해서 모두가 안타게 된다면, 이제 대한민국에서 일반고속과 무궁화열차는 조만간(쥐와 새는 몰라도 되지만 꼭 알아야 할 사람들이 모른 채)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런다고 세상이 뒤집어 지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우등보다 더 비싼 등급의 교통편이 새로 생겨날 것이고 자연스럽게 요금인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돈 쓸 곳이 없어 고민인 부자들에게는 차별화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 되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직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일반고속과 무궁화 열차가 계속 있어 주어야 한다고 동의한다면, 그것을 말로 할 것이 아니라 직접 타주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철도회원에 가입해서 무궁화열차를 예매하거나, 고속버스 예약 사이트를 이용하여 조금 불편하더라도 일반고속으로 예매하면 된다. 원하는 시간대가 없다면 환승을 하면 되는데 경부선은 선산휴게소와 인삼랜드 휴게소, 호남선은 정안휴게소, 영동선은 횡성휴게소를 이용하면 된다. 인터넷을 통해 환승하는 곳까지 일반고속을 예매하여 도착한 다음, 환승센터에서 전국에서 모인 버스를 대상으로 내가 가야할 목적지까지 다시 표를 사면되니 상당히 편리하다. ‘뭣 땜에 한 번 갈아타는 수고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모든 고속버스는 어차피 한 번은 휴게소에서 쉬게 되어 있다. 그 시간을 활용해 갈아타면 되고, 환승센터에 가면 얼마나 친절하게 잘 안내해 주는지 모른다. 그러다 심심찮게 행운도 만난다. 갈아탔는데도 전체 운행시간을 따져보면 10~20분쯤 덜 걸릴 수도 있고, 요금도 비록 적은 액수지만 줄어들 수도 있다. 노선에 따른 도로사용규정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예를 들어 부산이나 대구를 환승 없이 바로 가자면 경부선 고속도로만을 이용하게 허가되어있다. 그러나 환승의 경우 선산휴게소로 가야하니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거리가 단축되니 시간과 요금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운 좋게 환승하는 곳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떠나는 차를 만난다면 대~박이다.
또 하나의 보너스가 기다리고 있다. 어쩌다 배차가 꼬이면 일반고속으로 예매를 했는데도 우등이 배차될 때가 있다. 차량에 문제가 생기거나 기사에게 사정이 생기거나 했겠지만, 어쨌거나 일반요금으로 우등을 타고가면 무지 고소하다. 놀라지 마시라. 아니 놀라시라! 올해 상반기에 내가 탔던 열 대의 일반고속중 네 대가 우등이었다. 언젠가 성남터미널에 나를 내려주면서 ‘이제 나이도 있으니 불편하게 기다리지 말고 바로 탈 수 있는 우등으로 가라’고 뚝뚝 정이 묻어나는 말로 조언해준 친구에게, ‘일반고속 표를 샀는데 40분밖에 안 기다렸고, 또 우등이 배차되었다’고 문자를 넣었다. ‘왜 자네에게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가? 하느님이 뒤에서 돕고 계신가?’라는 답 문자를 받고 한참 생각을 해 봤다. ‘하느님은 고속버스 배차에까지 관여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내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는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무작정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일반고속이 있었고, 요금도 저렴해 그냥 탔다’거나 ‘일반고속을 타고 싶지만 그걸 타기위해 부러 기다리지는 않는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고, 나처럼 대놓고 일반고속만을 고집하다가 시간이 안 맞으면 환승까지 불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본다. 그러니 일반고속 표를 샀을 때에만 만날 수 있는 행운이라면 확률이 단연 높을 수밖에 없다.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우등을 샀는데 사정상 일반고속이 배차되는 경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없으니 말이다. ‘모든 이가 모든 죄를 한꺼번에 다 용서받게 된다면,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용서받게 되어 더 많이 감사하게 된다’는 성경말씀이 이 경우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일에서도 ‘자기수행이라는 아스케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 혼자 가는 것이 아닐 경우 자칫하면 동행인의 마음을 상하게 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내게 묻는다면 의견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주장이어서는 안 되고, 대다수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바로 광 팔고 죽어야(혹시 광을 들었다면~/가뜩이나 불교계 사태로 민감한데 전문용어를 사용하게 되어 지송) 한다. 거기서 ‘가난’을 얘기하고 ‘수행’을 얘기하여 다른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면 아스케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대다수가 우등고속이나 KTX 를 타자고 한다면 행운으로 여기면서 기쁘게 동승하면 된다. 이 정도의 융통성과 유연성(신축성인가?)을 지녀야만 진정한 아스케제를 이룰 수 있다. 이제 내가 만났던 아스케제에 관한 세 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싶다.
에피소드 하나.
최근에 행복한 모습으로 암투병을 잘 해내고 있어 많은 이들에게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해준 시인 이해인 수녀에 관한 것이다. 수도자이기에 청빈과 절제는 기본이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연인으로 자리매김한 국민시인 이해인 수녀께서 내게 보여준 아스케제는 그야말로 산골 옹달샘의 물 한 모금 같은 것이었다. 친구의 사촌 누나이기에 33년 동안 친남매처럼 잘 지내고 있고, 그분의 시로 필자가 만든 노래들이 종파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종종 함께 초청되어 <구름새 공연>이라는 문화영성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수도명인 클라우디아(Claudia/구름)와 노래하는 로제 새(Roger/세례명)라는 뜻이 담겨있다. 시 작업과 수도생활에서 얻은 영성, 그리고 그것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일상의 영성을 함께 나누는 그야말로 행복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5년 전 뉴질랜드에 초대되었을 때, 북 섬 오클랜드에서 강의를 앞두고 내게 부탁을 하셨다.
“로제가 바느질 잘한다고 명성이 자자하니 누나 옷 좀 꿰매줄래요? 수도복 안에 받쳐 입는 윗도리인데 내가 해보니 눈이 침침해서인지 잘 안되네요.”
“아이고! 수녀님. 이건 바늘이 들어가자마자 바로 천이 처져 수선이 어렵겠어요. 원단이 너무 낡아서 다른 천을 대는 것도 불가능하구요. 더구나 목 뒷부분이라 눈에 띄는 곳이어서 아무렇게나 꿰맬 수도 없네요. 우선 급하게 천이 처지지 않게만 해 놓을 테니 수도원에 가시면 새 것을 한 벌 청하셔요.”
“그래야겠네. 꼭 필요한 것은 청하면 얼마든지 받아 입을 수 있는데 내가 미처 그러지 못했네. 새 옷을 받을 수도 있지만 먼저 세상을 떠나신 선배들의 옷이나 몸에 맞지 않아 내놓은 동료의 옷 중에서 맞는 것을 받기도 해요.”
수십 년 동안의 노하우로 어렵사리 얼기설기 꿰매어 드린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시는 것을 보고 진한 감동을 느꼈다. “누나! 그렇게 살아주셔서 고마워요.”
에피소드 두울
남 섬의 수도 크라이스트 처치에 있는 한인성당은 지구촌 한인성당 중에서 가장 멋지고 훌륭하다. 오래된 수도원 건물을 매입하여 수도자들의 침소를 손님방으로 쓰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손님방에 머물렀던 마산교구 어느 본당 보좌신부에 관한 에피소드이다. 군 입대를 앞두고 선배 신부에게 인사차 다니러 왔다는 젊은 신부는 외모도 훤칠하고 성격도 서글서글하여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호감을 주었다. 일정이 맞을 때면 함께 가벼운 시내관광도 하고 번지점프도 하다가 우리보다 하루 일찍 귀국하게 되었다. 손님방 복도를 지나다가 열려있는 빈방의 쓰레기통을 그야말로 우연하게 보게 되었다. 어쩌다 그걸 보게 되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속옷이 뭉쳐져서 버려져 있었다. 순간 혀를 끌끌 차며 이런 생각을 했다.
‘하여간에 성직자나 일반인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니까. 속옷을 갈아입었으면 잘 빨아서 가지고 가든지 아니면 잘 가지고 가서 빨든지 할 것이지, 귀찮다고 이렇게 버리고 새로 사 입으면 다야? 자기가 벌어서 쓰는 돈도 아니면서 정말 한심하다 한심해. 너나 할 것 없이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의 생활태도는 정말 맘에 안 든다니까.’
이렇게 속으로 독백을 하면서 속옷 꾸러미를 풀어냈다. 혹시라도 입을만하면 빨아서 입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기에 아내가 내게 한 부탁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당신이 검소하다는 거 세상이 다 알고 있고, 청빈의 정도로 따지자면 수도자보다 더 엄격해. 내가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지내보았기에 내 판단이 틀리지 않을 거야. 그래서 부탁하는 건데, 제발 속옷만큼은 남이 입었던 것을 입지 마. 생각하면 너무 비참하잖아. 긴 말 하지 않을께.”
그 심정 다 알지만 그래도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옷 버려진 곳에 입을만한 내복이나 속옷이 있다면 깨끗이 빨아서 입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땅에 떨어진 손수건도 주워서 깨끗이 빨아 사용하거나 아니면 꼭 필요한 곳에 요긴하게 썼다. 대부분 질 좋은 면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뭉쳐진 속옷을 풀어내다가 하마터면 울 뻔 했다.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에. 속옷 하의의 뒷부분이 세로로 쫙 찢어졌는데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닳을 대로 닳아 있었다. 더 이상 묘사하지 않겠지만 그 순간 많은 것이 내 안에서 교차되었다. 사물이나 사람이나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있는 그대로 보았다고 해도 그것을 걸러내는 장치인 내 마음은 또 어떤지. 만약에 내가 그 속옷을 펼쳐보지 않았더라면 나머지 삶 동안 내 안에 어떤 생각이 간직되었을지...
에피소드 세엣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비하구나.’
점입가경이라고나 할까? 이럴 때 이런 노래가 떠오른다. 나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인 대주교를 지낸 ‘친구’가 한 분 계신다. 내가 친구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그렇게 말했다. 명동에 계실 때, 차 한 잔 마시러 오라고 청하셔서 집무실에 갔다가 돌아오려 하자 경비실에 전화하셔서 ‘내 친구가 나를 보러왔다 돌아가니 잘 배려해 달라’고 하셨다. 또 한 번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기 위한 거리공연’을 하고 있는데 가볍게 술 한 잔 하고 오셔서 내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계셨다. 마침 동경에서 서울까지 내 노래를 들으러 온 일본인 팬들이 인사를 건네자, ‘He is my old friend.’라고 소개하여 수도자와 가톨릭 신자들이었던 그들에게 노래보다 더한 감동을 주었다. 은퇴를 앞두고 발병한 암 투병중이셨을 때, 병상에서 긴 시간 항암주사를 맞으시면서 오히려 내 건강을 염려하여 날려주신(고령에도 불구하고) 장문의 문자대화 예닐곱 개를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퇴원 하신 후에 위로 차 서울 숙소로 찾아뵈었을 때, 신변잡기를 나누다가 또 하나의 감동을 만났다. 여행 중 양말관리에 관한 것이다. 자기 전에 세면을 한 후, 양말을 빨아 수건에 말아서 쥐어짜듯 뒤틀어주거나 책을 보는 동안 깔고 앉은 다음에 널면 빨리 마른다고 자랑을 하셨다. 몸과 손동작을 곁들여 설명하시는데, 해 본 사람만 소통할 수 있는 생활예술이다. 여행 중에 스스로 양말을 빨아 신는 대주교를 상상해 보셨는가? 그분이 모든 면에서 다 훌륭하고 좋은 분인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겪은 일이거나 내게 베풀고 나누었던 일들을 종종 얘기했을 때 '그분께 그런 면이 있느냐?'고 놀라워하는 분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한쪽 면만이 아니라 여러 면이 있는데 어떤 면을 보는가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보여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이제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노래 한 곡을 소개하고 싶다. 좋은 세상에 태어난 보람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어디서나 들을 수 있고 악보도 찾을 수 있기에 노랫말만 적어본다.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둥지를 틀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새처럼 당신의 하늘을 날게 해 주십시오.
가진 것 없어도 맑고 밝은 웃음으로
기쁨의 깃을 치며 오늘을 살도록 해 주십시오.
가난을 위한 가난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선택한 가난이기에
모든 것 버리고도 가진 것 나누어도 넉넉할 수 있음이니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떠나는 철새의 당당함으로
텅 빈 하늘을 나는 고독과 자유를 맛보게 해 주십시오.
오직 사랑 하나로 눈물 속에서도
기쁨이 넘쳐날 약속의 삶에 햇살로 넘치는 축복
내 삶의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의 평화여
날마다 새가되어 새로이 떠나려는 나에게
더 이상 무게가 주는 슬픔은 없습니다.
(이해인 시/김정식 곡 ‘가난한 새의 기도’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