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1. 신화
2. 역사.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의 어머니.,웅녀.
환웅이 잠깐 몸을 변신하여 웅녀와 결혼
아이를 낳았는데 이가 단군왕검(檀君王儉)
<단군신화>는 청동기문화 집단의 이동과 정복시대.
고대 국가 성립의 단계를 간접적으로 반영하는 것.
웅녀와 환웅의 결합도 그러한 맥락으로서 이해된다.
신화를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서는 환웅을 천신(天神),
웅녀는 지모신(地母神)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
1. 신화
.........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중국의 〈위서 魏書〉와
〈古記〉를 인용한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그밖에 고려 후기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
이조 초기 권람(權擥)의 〈응제시주 應製詩註〉와 〈세종실록〉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고기〉
그 밖의 단군신화들은 이와 비슷하다.
.......古記의 단군신화..............
"오랜 옛날에 환인의 서자(庶子)
(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 아들을 칭함)
환웅이 항상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자
아버지 환인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보내 인간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환웅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
이때 곰과 호랑이가 같은 굴속에 살며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다.
곰은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여 3·7일(21일) 만에 여자의 몸
호랑이는 이것을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원.
환웅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
왕검이 당고(唐高:중국 3황 5제 중 堯) 당시
(고려의 제3대 왕인 정조의 이름이 요인 까닭에
이를 피하여 뜻이 같은 高자를 대신해 쓴 것임)
즉위 50년 뒤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일컬었다(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
(그곳을 궁홀산(弓忽山:弓자 대신 方자를 쓰기도 함)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고,
자신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
[해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에 관한 국조 신화
역사발전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신화도 변천을 거듭
내용의 일부가 소멸하기도 하고 첨가되기도 하였다.
이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신화의 내용을 허구로 인식
<단군신화〉와 관련된 고조선 존재조차 부정하는 견해
〈단군신화〉의 생성 과정과 주인공에 관한 5가지 학설
첫째, 중앙아시아 한반도 일본 등을 포함한 지역의 사상중심
이 문화가 역사 속에 나타난 실체가 바로 단군과 부루(夫婁).
둘째, 태양 신화와 토테미즘 두 계통이 섞인 삼신(三神)사상
두 종족이 정치적으로 통합되면서 두 종족의 시조신화가 융합
셋째, 천신족(天神族) 환웅이 지신족(地神族) 고마족 여성과 혼인
단군이 출생했다는 것을 설화로서 단군이라는 호칭은 무군(巫君),
즉 제주(祭主)의 의미가 많고, 왕검이라는 호칭은 정치적 군장(君長)
넷째, 환웅과 웅녀를 쌍분체제(雙分體制)로 간주하여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는 내용이 신화로 발전한듯
다섯째, 동북아시아에 분포되어 살던 고아시아족 시조설화
자신들은 곰의 자손이라고 믿는 곰 숭배사상에서 유래된듯.
원래 고조선의 종족신화였던 〈단군신화〉
대몽항쟁(對蒙抗爭) 당시 민족신화로 인식
〈삼국유사〉편찬 시기가 대몽항쟁기였던 점,
〈제왕운기〉에서는 구월산을 아사달산으로 보고
거기에 사당이 존재한다는 기록이 최초의 단군신화
이조시대 세종 때 평양에 사당을 지어 단군을 모신 뒤
명실상부한 국조(國祖)로 추앙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즉 고조선은 이미 BC 12세기 이전에
북경 근처의 롼허 강[河]서쪽 경계로
동북부는 헤이룽 강[黑龍江] 밖까지
만주일대와 한반도 전지역을 영토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실재하고 있던 국가이므로
〈단군신화〉는 줄곧 개국시조로 인식되어 왔다.
신화에 담겨진 역사적 현실과 그 시기 및
사실성 여부에 관해 다양한 논의가 있다.
첫째, 1단계에서는 씨족사회에서의 단순한 씨족토템이 생겼고,
2단계에서는 군사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 수장
3단계에서는 계급국가 형성 뒤 고조선 국왕으로서 단군이 등장.
둘째,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고대국가의 성립을 반영.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풍백 우사 운사 선 악 곡 형 등
360 가지를 보면 청동기시대 최초의 부권(父權)사회 신화인듯.
곰과 호랑이, 환웅과 웅녀의 결혼 등의 내용을 통해
토템을 믿는 몇 개의 종족이 결합하여 부족국가를 형성
셋째, 신석기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시베리아 지역과 관련된 고아시아족 신석기문화의〈단군신화〉
넷째, 〈단군신화〉는 4단계의 역사적 발전단계가 압축된 것
무리사회 무렵이 환인시대, 부족사회들 집단 체제가 환웅시대,
부락연맹체 단계인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 국가사회 단군시대
각 시대를 고고학 자료와 연결시켜 환인시대는 1만 년전
환웅시대는 1만년전부터 6,000년 전까지 전기 신석기시대,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는 6,300~4,300여 년 전(BC 2300경)
고조선시대는 BC 2300년경부터 BC 2세기말까지로 보는 신화
다섯째,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
석실 내의 화상석(畵像石)의 그림은 〈단군신화〉와 일치
그밖에 단군과 관련된 문헌 중 도가(道家) 계통의 역사서
〈규원사화 揆園史話〉·〈환단고기 桓檀古記〉 등을 제시
단군조선 역사가 47대 마지막 왕까지 실사(實史)였다는 견해
그러나 이 역사서가 한말과 일제하 위서(僞書)라는 비판들
단군의 개국신화를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
어쨌든 〈단군신화〉는 민족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 역할
한편 일제강점기의 민족의식의 고양과 관련하여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대종교(大倧敎).
1909년(융희 3) 나철(羅喆)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단군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이던 개천절(開天節)
8·15 해방 후 정부가 정식으로 국경일로 지정했다.
1945년 정부 수립때 법령으로 공포되어 사용한 단기
요즘의 단기는 이조시대 사서 〈동국통감 東國通鑑〉에 근거.
5·16 군사 정변 이후인 1962년 1월 1일부터 단기 사용을 중지
...........
2. 역사.
...........
한수 이남 지리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
고조선 민족의 이동 경로를 알 수 있는 유물이다.
고조선을 창건한 단군은 우리나라 최초의 지도자.
지리산을 이해하려면 단군 역사를 알아야 할듯.
한수이남 지리산 일대는 옛 삼한시대 영역이다.
삼한은 패망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고대국가
지금부터 단군 역사를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하자.
...........................................................
............................................................
단군의 수명에 관해 전해오는 문헌은 크게 두 가지.
1048년설 문헌은 이조 초기의 '응제시주, 역대세년가'.
동사강목, 동국통감, 등의 여러 문헌에 적혀있는 기록.
'1908년설 문헌들은 삼국유사 동사보유 춘관통고 등.'
그러나, 단군이 천 년 이상 살았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
단군의 수명은 조선의 건국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단군은 고조선을 다스리던 역대 통치자들을 뜻하는 칭호
동국통감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당나라(요임금의 나라)와 우(虞)나라(순임금의 나라)로부터 하나라와 은나라에 이르기까지 세상이 점점 야박해져, 한 임금이 5~60년 밖에 자리를 누리지 못하였는데, 어찌 단군 혼자서 1048년 동안 살면서 한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 1048년은 단씨(檀氏)가 세대(世代)를 전해 내려온 햇수요, 결코 단군의 수는 아니다라 하였는데, 이 말이 이치에 맞다"
이는 단군이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인 사실을 의미한다.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 건 도당씨 25년 무진년부터 순임금,
하나라를 지나 상 무정8년까지 이르렀는데, 1048년이다" 기록
즉, 단군조선은 중국 요임금 25년 무진년에 건국된 실존 국가
그렇다면, 단군수명 1048년과 1908년은 어떤 뜻일까?
그 해답은 한단고기 단군세기 21세 단군 소태조에 있다.
당시 단군조선에 우현왕 색불루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사건.
기원전 1285에 병권을 쥔 색불루가 소태 단군(52년)을 폐위.
자신이 직접 단군에 즉위한 해가 단군조선 개국 후 1048 년
즉 시조 단군부터 21대 단군 소태 52년 을미년까지가 1048년
그로 인해 이 해에 단군왕조가 멸망한 것으로서 본 것이다.
그렇다면 단군 수명 1908세의 비밀에 대해 알아보자.
43대 물리 단군은 사냥꾼 우화충 반란으로 해성으로 피난
붕어하자 상장 구물이 우화충을 평정하고, 단군으로 추대된다.
44대 단군 구물은 즉위 원년(기원전 425)에 국호를 대부여
도읍지를 아사달에서 장당경으로 옮겼기에 조선은 사라졌다.
그런데 단군 구물 즉위원년은 조선 건국으로부터 1908년 역사.
이를 통해 단군의 수명이 1908 세란 산출된 수치가 나오게 된다.
단군조선 단군 계보 (47대, 재위년수 : 2,096년)
가. 송화강
아사달(하얼빈)시대: 초대 단군임검∼21세
소태(蘇台) (B.C.2333∼1286 : 1048년간)
1대 단군 임검(王儉, 93, B.C.2333)
2대 부루 단군(扶婁, 58,
B.C.2240, 태자)
3대 가륵 단군(嘉勒, 45, B.C.2182, 태자)
4대 오사구 단군(烏斯丘, 38,
B.C.2137, 태자)
5대 구을 단군(丘乙, 16, B.C.2099, 羊加)
6대 달문 단군(達門, 36, B.C.2083, 牛加)
7대 한율 단군(翰栗, 54, B.C.2047, 羊加)
8대 우서한 단군(于西翰, 8, B.C.1993, ? )
9대 아술 단군(阿述, 35, B.C.1985, 태자)
10대 노을 단군(魯乙, 59, B.C.1950, 牛加)
11대 도해 단군(道奚, 57, B.C.1891, 태자)
12대 아한 단군(阿漢, 52, .C.1834, 牛加)
13대 흘달 단군(屹達, 61, B.C.1782, 牛加)
14대 고불 단군(古弗, 60, B.C.1721, 牛加)
15대 대음 단군(代音, 51, B.C.1661, ? )
16대 위나 단군(尉那, 58, B.C.1610, 牛加)
17대 여을 단군(余乙, 68, B.C.1552, 태자)
18대 동엄 단군(冬奄, 49, B.C.1484, 태자)
19대 구모소 단군( 牟蘇, 55,B.C.1435, 태자)
20대 고홀 단군(固忽, 43, B.C.1380, 牛加)
21대 소태 단군(蘇台, 52, B.C.1337, 태자)
나. 백악산 아사달시대
22세 색불루(索弗婁)∼43세 물리(勿理) (B.C.1285∼426 : 860년간)
22대 색불루 단군(48, B.C.1285, 욕살 고등의 아들로 우현왕을 거쳐 단군으로 즉위)
23대 아홀 단군(阿忽, 76, B.C.1237, 태자)
24대 연나 단군(延那, 11, B.C.1161, 태자)
25대 솔나 단군(率那,88, B.C.1150, 태자)
26대 추로 단군(鄒魯, 65, B.C.1062, 태자)
27대 두밀 단군(豆密, 26,B.C.997, 태자)
28대 해모 단군(奚牟, 28, B.C.971, ? )
29대 마휴 단군(摩休, 34, B.C.943, ?)
30대 내휴 단군(奈休, 35, B.C.909, 태자)
31대 등올 단군(登 , 25, B.C.874, 태자)
32대 추밀 단군(鄒密, 30, B.C.849, 아들)
33대 감물 단군(甘物, 24, B.C.819, 태자)
34대 오루문 단군(奧婁門, 23, B.C.795, 태자)
35대 사벌 단군(沙伐, 68, B.C.772, 태자)
36대 매륵 단군(買勒,58, B.C.704, 태자)
37대 마물 단군(麻勿, 56, B.C.646, 태자)
38대 다물 단군(多勿, 45,B.C.590, 태자)
39대 두홀 단군(豆忽, 36, B.C.545, 태자)
40대 달음 단군(達音, 18, B.C.509,태자)
41대 음차 단군(音次, 20, B.C.491, 태자)
42대 을우지 단군(乙于支, 10, B.C.471, 태자)
43대 물리 단군(勿理, 36, B.C.461, 태자)
다. 장당경(開原) 시대
44세 구물(丘勿)∼47세 고열가(古列加) (B.C.425∼B.C.238 : 188년간)
44대 구물 단군(丘勿, 20, .C.425, 욕살)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 고치고 三韓을 三朝鮮으로 개정
45대 여루 단군(余婁, 55, B.C.396, 태자)
46대 보을 단군(普乙, 46, B.C.341, 태자)
47대 고열가 단군(高列加, 58, B.C.295, 대장군) R>
계해 58년(B.C.238) 단군조선을 폐관하고,
이후 6년간 오가(五加)들이 함께 다스린다.
지금까지 묻혀져왔던 단군역사가 드러나고 있다.
중국 황하 문명보다 앞선 배달문명으로도 보인다.
황하 문명은 배달민족의 일부가 건너가 일으킨 문명.
환웅 배달국 문명 당시에 중국은 원시 석기시대 였다.
이러한 사실을 수십년전부터 안 일부 중국의 지식인들.
중국 사학자들에겐 고조선과 고구려 역사는 중국의 역사.
중국인들은 고조선 사람들을 동이(東夷)민족이라 했다.
중국 동쪽에 사는 사람들 민족 이름이 '이(夷)'란 의미.
지금도 우리말에 지은 이 가는 이 오는 이가 바로 그것.
고대 중국인들은 한(배달)민족 및 배달문명을 동경했다.
그 한 예로 옥편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설문해자(說文解字)
배달민족(동이東夷)에 대해서 해설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이(夷)" 는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
"이(夷)" 는 "大(대- 위대함)"에서 유래
또 다른 해석을 보면 "弓(궁-활)"에서 유래.
동이(東夷) = 대인(大人 - 위대한 사람).
동이인(東夷人)의 풍속은 어질고, 어질면 장수하므로
동이(東夷)에는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君子不死之國)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도 역시 큰 나라가 동이.
'황하문명'보다 천년이 빠른 '배달문명' 유물(만주 발굴)
현재 중국 역사학계가 커다란 충격을 일으키고 있다 한다.
사실, 황하(黃河)는 "누런 강" 즉 진흙탕물이라는 뜻이다.
물이 맑지 않아서 최초의 문명 발생지로 보기에는 어렵다.
6천년 전 배달문명 유물들이 수십년 전부터 만주에서 발굴.
황하문명은 불과 약 4천 몇백년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만주는 중국 한족들의 영역이 아니라 배달민족의 역사무대.
예맥문명은 한웅(환웅)께서 오시기 전에 있던 문명이다.
실제로 만주에서 배달민족의 고대 문명 유물이 발굴된다.
투구 쓴 환웅과 웅녀 할머니, 그리고 웅족의 상징 곰 조각.
홍산문화의 '홍산'은 '밝 = 붉' 즉, '붉은(밝은) 산'이란 뜻.
'밝은 산'을 한문으로 쓰면, 백산(白山)= 백두산 = (태백산)
태백산은 '큰백산'이란 뜻이고 백산이 바로 홍산이란 뜻이다.
즉, '배달민족의 중심 산' 홍산(백산)문화는 약 6천년전 문화
따라서, 홍산문화는 약 6천년전에서 약 4200년전까지 문화.
한웅시대는 약 6천년전에서 4333년 전까지 단군조선과 일치.
홍산문화 특징은 정교한 옥기(玉器)의 사용, 돌을 사용한 무덤,
진흙 여신상(女神像 = 웅녀 할머니)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
돌로 쌓은 무덤과 제단(하늘에 제사 지낸 곳)은 배달민족 문화.
그 전통은 고구려에서 이어져 장군총 등 많은 돌 피라미드 유적지.
중국은 예로부터 돌로 무덤을 쌓지 않고 흙으로 무덤을 쌓았다.
그런데, 쇠를 뜻하는 철(鐵)의 옛 글자는 金(금) + 夷(이)이다.
즉, 금이(金夷)이고 동이(東夷)민족 만이 쓰던 글자인 것이 특징.
구리(九黎)는 고대 동이족(배달민족)을 부르는 말이다.
(구리(九黎) = 구이(九夷) = 구한(九韓) = 배달 한국)
즉, 옛날에는 배달나라 즉 배달 한국의 임금이 천자(황제)
그 중에 한 분이 '치우 임금'이었다는 것이다.
치우는 형제가 81명인데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
구리 머리에 쇠이마(동두철액-銅頭鐵額)를 하였고
모래와 돌을 먹고 칼,창, 활 등의 무기를 만들었다.
동이(東夷)의 치우임금과 그 형제들이 입은 철갑옷
철광석을 퍼가자 모래와 돌을 먹는다고 생각했으며
구리와 쇠 투구를 쓰자 구리머리에 쇠이마'로 착각
구리(九黎) = 구이(九夷) = 구한(九韓) = 배달 한국
만주 지역에 널리 퍼진 한반도의 피라미드 중의 일부.
중국에서 연대를 측정한 결과 5,6천년 이상 전 에 만듦.
중국 신화통신은 2001년도 7월에 피라미드 뉴스를 발표.
황하문명보다 훨씬 오래된 배달민족의 유물이 쏟아져 나옴.
중국은 1970년대에 발굴하다가 배달민족의 유물 발굴 중단.
쌀 미(米)의 원시 한자로 보이는 글자를 찾아내었다는 내용.
한자도 만주(고조선)에서 먼저 썼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고조선 민족이 가장 먼저 농사를 지었다는 증거도 발견.
1만 5천년전 쌀농사 증거(재배 볍씨)는 국제학계의 공인.
중국 후난성 출토 볍씨보다 3천년이나 오래된 볍씨.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가 한국에서 발견되었다는
영국 BBC 인터넷 판이 2003년 10월 22일 보도했다.
홍산문화(배달문명)는 황하문명보다 천년 빠르다.
갑골문자(고대 한자)도 황하 갑골문보다 더 빠르다.
즉 한자도 만주(고조선)에서 더 먼저 썼다는 이야기.
즉 한자(한문)도 원래 한민족이 쓰던 것이었다는 사실.
이는 이미 중국 고대 역사학계의 '상식'처럼 되어 있다.
하여, 중국은 고조선 고구려를 중국역사라 우기게 된 것.
군자국(君子國)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키우고, 두 마리 무늬 있는 범(호랑이)을 부린다
이상 중국 정사(공식 역사책)인 후한서 동이전 서문 내용.
약 2000년 전, 공자의 7대 손 공빈이 쓴 고대 한국기록.
동이열전(東夷列傳)을 보면 동이(東夷)는 한(韓)민족이다.
단군이 계셨는데 구이(九夷)의 아홉 나라를 합쳐서 고조선.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으니 요 임금 때의 일이라는 기록.
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 중국천자가 되어 훌륭한 정치
동이(東夷)에는 자부선인(紫府仙人) 이라 하는 도통한 분
<황제헌원씨>가 그 문하에서 내황문(內皇文)을 배워와서
<염제 신농씨>의 뒤를 이어 중국의 임금이 되셨다.
동이(東夷)는 그 나라가 비록 크지만 남을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훌륭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길을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양보하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함부로 섞이지 않으니,
가히 동방예의 군자국(東方禮儀君子之國)이라 할 수 있다.
하여, 기자가 주나라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로 갔고
나의 할아버지 공자께서 동이에서 살고 싶어 하셨고
나의 벗 노중련(魯仲連) 역시 동이로 가고 싶어한다.
동이는 대략 천년 이상 전부터 중국과 우방국가였다.
사람들이 서로 왕래했다. -위나라 安釐왕 10년 공빈 씀.
고대 중국인 중 지혜있고 솔직한 인물들은
<배달 문명>을 존경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군자국이 한반도 북쪽에 있는데
옷을 단정히 입고 관쓰고 칼 찬다.
무궁화가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진다.
맹자도 "순임금은 동이사람(한민족)" 이라 했고
황제헌원씨 후손 요임금, 순임금 황하문명 주역들
모두 동이족 즉 한민족이고 황제헌원씨 성은 웅씨.
단군의 '단'자는 밝달(나무)이라는 음을 뜻하는 것이고
밝달은 "밝은 땅" 이란 뜻이므로 단군은 '밝은 땅의 왕'
중국 역대 왕조는 대부분 배달민족인 '황제헌원씨'의 후손.
황제헌원씨는 중국에 문명을 전한 '훌륭한 배달민족'이다.
중국에서 황제를 칭한 것은 2천 몇백년 후인 진시황 때 부터.
진시황 때 고조선이 힘이 약해지자 중국 최초로 황제칭호 사용.
진시황 이전까지는 중국의 나라들은 작았고 큰 나라가 없었다.
배달민족의 대부분은 (고)조선을 이루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조선
고구려의 정식 국호는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
고구려는 별칭일 뿐이고 정식 국호는 '고려'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의 정식국호도 '고려'.
배달민족 일부는 메소포타미아에 가서 수메르 문명
그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검은 동아시아인들이었다"
수메르 인의 말(우랄어)는 우리 말(알타이어)과 유사.
하여, 같은 언어라는 뜻으로 "우랄-알타이어"라고 한다.
한국어와 만주어와 인디언 말과 수메르어는 한 뿌리.
동이족이 중국에 가서 피라미트를 쌓고 이집트로 전수.
수메르 문명이 이집트로 건너가서 이집트문명이 일어나고
그리스로 건너가서 그리스 문명이 일어나 유럽 문명의 뿌리.
덧 말.
단군신화는 한강 이북에 중점을 둔 역사인듯.
한강 이남 한반도 역사는 단군 역사와 다르다.
우리나라 역사는 한강을 경계로 차이점이 많다.
특히, 지리산 일대는 한강 이북과 큰 문화 차이.
풍습 전통 역사적인 면에서는 산동반도에 가깝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황하강 양자강 하류의 문화.
'고대사회에는 동일 문화 권역이었던듯.'
현재, 중국과 일본은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상태.
역대왕조 간에 역사적 견해 차이점까지 정돈된 상태이다.
하여, 그 정돈된 역사는 국제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현실.
우리나라는 역대 왕조마다 왜곡된 역사로 맥이 끈긴 상태.
그로 인해, 우리나라 역사는 안타깝게 표류하고 있는 현실.
현재, 우리나라 역사는 젊은이들 관심에서 소외당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특징., 세 가지.
음력, 소를 키우고 활을 잘 쏘는 민족
음력.
입춘이 두 번이나 든 '쌍춘년' 예식장 특수
쌍춘년에 결혼하면 잘산다하여 전세금 급등
보통 음력으로 1년은 354일 정도
2006년은는 음력 7월 윤달이 껴
1년이 385일이나 되는 해이다.
중국어 사용국들은 우리나라처럼 음력을 사용한다.
한국과 중국에서 쓰는 음력은 태양 태음력이라 한다.
달이 공전하는 주기는 두 가지.
달 모양이 변하는 삭망월 주기,
달이 뜨는 시간을 정하는 항성월.
지구의 공전 주기는 365.2422일이고
달이 지구를 도는 공전 주기는 29.53일.
양력은 달보다 해를 중시해 1년은 365.2422일
양력을 월로 환산을 하면 약 12.38월이 된다.
하여, 양력은 365.2422일을 12개월로 나눈다.
4년에 하루씩 윤년은 12.38월을 12월로 맞추다 보니
한달의 길이인 29.53일을 30일 또는 31일로 맞춘 것.
하여, 양력은 달의 모양과는 전혀 관련이 없게 되었다.
한편, 태양 태음력은 해보다 달을 중심으로 한 것.
한 달 길이가 29.53일이니까 한 달은 29일 또는 30일.
1년 12.38월을 12개월, 19년에 7번은 13개월로 맞춘다.
그리고, 태양-달-지구가 일직선이 되는 날을 음력 1일.
그러다 보면, 음력은 한달이 29일 또는 30일
정확히 일직선이 되는 때는 눈으로 알 수 없다.
그리고, 1년이 13개월일 때에는 윤달이 들어간다.
음력은 달과 계절이 어느 정도 맞지만
양력처럼 맞지 않기에 24 절기로 구분.
24절기는 지구가 태양을 기준으로 해서
특정한 위치에 있는 때로 정한 것이다.
하여, 음력은 양력 날짜와 거의 일치.
이슬람 음력은 태양태음력과 달리 윤달이 없다.
12개월이 1년이라 월과 계절이 전혀 맞지 않는다.
홀수달은 30일까지, 짝수달은 29일까지 있고
12월은 달의 운동에 따라 3년에 한 번씩 30일
현대 달력은 순수 양력이고,
이슬람 달력은 순수 음력이다.
동아시아의 음력은 태음태양력.
..............................
..............................
우리나라 풍습은 아직도 음력 기준.
음력은 <태음력> <태음 태양력> 준말.
음력은 고대부터 중국과 한반도에서 사용.
우리나라의 단기 역사는 음력을 사용.
유목사회에서 농본 사회로 바뀐 흔적.
양력은 태양이 중심, 음력은 달이 중심.
......중국 음력...........
1. 阴历 [yīn lì]
2. 农历 [nóng lì]
3. 夏历 [xià lì]
4. 太阴历 [tài yīn lì]
음력 섣달은 추워 무 중심까지 어는 계절.
마음 속에 소원이 생기는 계절이기도 하다.
음력 정월 초하루엔 사람마다 세배 다닌다
맹춘(음력 정월)은 일년의 시작.
...................................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유목사회에서 농본사회로 변화.
초원지대에서 농사짓기 좋은 따듯한 남쪽으로 대이동.
황하강 하류는 농사짓기에 적당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
2모작과 3모작도 가능한 곡창 지대
물고기를 많이 잡을수 있는 강 하류.
바다와 강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정착.
여성이 이끌어가는 모계사회.
농사 및 식량저장 보관 조리법
밭가는 남성보다 여성 능력이 탁월.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지혜.
남성보다는 여성이 지혜롭다.
자녀들을 탈없이 키우는 모성애.
강력한 모계사회 통치자 무당.
구석기 시대에 이어 신석기 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농기구 발달.
제방 관계시설을 하며 공동체가 형성.
제방 관계시설 책임자가 최초 지배층
공동사업에 참여한 일반인은 피지배층.
전쟁에 진 패전국 주민들은 노예로 전락.
고대국가에 들어와 치열하고 참혹한 전쟁.
여성 중심의 모계사회가 무너지고 부권사회.
'쌍도끼를 뜻하는 아비 부'는 가부장의 상징.
단군 역사는 곧 부권사회 개막의 시발점.
단기는 부권 사회의 출발점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한반도 삼남지방은 옛부터 곡창지대.
한강 이북과 달리 모계사회와 부계사회 공존.
특히 농본 중심의 신라는 모권이 강했던 나라.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삼국 중에서 가장 높았다.
특히, 지리산 일대는 모계사회의 중심.
천왕봉의 천왕성모,
노고단의 마고할미.
노고단의 선도성모.
중봉골의 마야부인.
불교가 정착하며 여성의 지위가 하락.
통치자 무당은 천민으로까지 전락한다.
농사법과 음식 저장법이 대중화된 때문.
원시시대 동굴에서 불씨를 지키던 여성.
신석기시대에 농본사회를 통치했던 무당.
철기 시대에 접어들며 기생으로 전락한다.
음력은 '여성의 달거리(생리)'와도 일치.
여성은 옛날부터 음력을 피부로 느껴왔다.
농사짓는 감각, 음력의 기일들과 각종 풍습.
아직까지도 음력 각종 풍습은 여성의 몫.
옷짓고 밥짓고 농사짓는 일은 여성의 책임.
지리산은 유독 무당과 여성 신들 전설의 고향.
음력의 전통적인 풍습도 유난히 많은 곳.
아직도 음력에 의존하는 지리산의 주민들.
음력은 곧 백두대간 단군 역사의 상징이다.
바이칼 호수에서 도래했다는 단군의 옛 조상.
바이칼 호수와 티벹 고원을 품고있는 히말라야,
히말라야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사상이자 종교.
소
히말라야에서 백두대간까지 흘러온 옛 조상.
우리나라 옛 조상의 이동 경로를 알려주는 소.
히말라야에 가까울수록 소처럼 덩치가 큰 동물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사라져 사막화된 티벳고원.
그곳 인류는 식수마저 구하기 어려워 차츰 남하.
야생동물 수렵만으로는 살기 어려워 가축을 사육.
농사짓기 좋은 옥토를 찾아, 황하강 하류로 이동.
황하강 하류의 잦은 범람을 피해 한반도까지 이동.
지리산 일대는 어업 수렵 농사가 동시에 가능한 지역.
황하강 하류보다 살기 좋은 '지상낙원' 지리산 일대.
삼한시대 소를 이용한 써래 또는 철제 농기구를 사용.
김해 패총에서 발굴된 소의 두개골이 이를 뒷받침한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가축 명을 딴 관직 명
한반도에서는 수천년 전부터 소를 사육했던 흔적.
신라 지증왕 당시에는 소로 논을 가는 우경을 장려
고구려 정벌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2천 우차를 사용
고구려 시대에는 소 도살을 금지하는 보호령이 제정
고구려 무왕 시대 불교의 살생금지로 소가 많이 증식
백제 시대에는 육부를 설치 해 소를 적극적으로 보호
고려조에는 둔전우를 설치해 진보적인 축우사양법 제시
이조시대에는 농업 가우를 설치해 소의 질병을 예방했다.
이조 태조는 가축서 설치, 세조는 결혼비용 충당을 장려
세조는 양우법을 편찬해 소의 개량과 증식을 권장.
아들을 낳으면 송아지를 사다 길러 혼인비용으로 충당
1945년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서 60만두의 한우가 사육
1950년 6.25사변으로 인해 39만두로 급속히 감소했다.
한우증식을 위한 도살 및 보호 등 각종 법이 제정
1959년말 1백2만두로 늘어난후 현재까지 축산정책.
예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은 소를 중요하게 여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어떤 일이든지 하려고 생각했으면
한창 열이 올랐을 때 망설이지 말고
곧 행동으로 옮겨야 함을 이르는 말”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는 말은
소의 뿔을 뽑을 때 열을 가해
잘 달군 다음에 흐물흐물할 때
뽑아야 한다는 데서 유래된 말.
소뿔은 가구의 중요한 재료로 쓰인다.
목기세공품을 곱게 만드는 각질(角質)
그 '공예기법' 화각에 소뿔이 중요 구실
화각은 고급 목공예에 반드시 쓰는 것
목공예 나무에 먼저 채화(彩畵)를 그리고
그 위에 소뿔을 아주 얇게 오려 덧붙이는 것
'신라 때부터 쓰였던 기술'
화각은 젊은 황소뿔 중 맑고 투명한 좋은 것
소머리를 2시간 가열해 찌면 부드러워지는 뿔.
이 때 소머리에 있던 힘줄인 뼈가 빠져 나온다.
이것은 1mm에서 0.3mm 정도 두께로 깎아 사용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소뿔은 섬세한 무늬를 내거나 가구를 곱게 할 때,
또한 목가구 이음새 용도로 한중일 삼국에서 사용.
우리나라 소뿔을 이용한 공예가 가장 좋다고 한다.
'소뿔은 활의 재료.'
활은 전쟁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무기 중의 하나.
우리나라 활은 멀리 나가고 정확도가 매우 높다.
하여, 중국 사람들이 늘 그 기술을 배우려고 시도
안시성의 양만춘이 당태종 눈을 뚫었다는 고구려 활.
우리나라 활이 옛날부터 얼마나 우수했는지 말해준다.
하여, 신분높은 사람은 항상 좋은 활을 지니고 있었다.
하여, 그 수요가 엄청났을 것으로 보이는데,
좋은 활의 원재료가 바로 소뿔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 활' 국궁은
고구려 산상왕 때인 2세기경
소의 뿔을 재료로 사용한 것.
그중 소뿔을 재료로 만든 활이 각궁(角弓)
소뿔과 물소 뿔이 사용해 만든 활이라 한다.
소뿔은 시치미, 노리개, 술잔, 부채, 각퇴 등에 사용.
시치미는 매의 주인을 표시하기 위해 몸에 붙이는 명패
'시치미를 뗀다.'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귀면(鬼面) 범발톱 노리개.'
소뿔로 범 발톱 형을 만들고
은으로 도깨비 얼굴을 조각하여
그 입에 물린, 노리개를 말한다.
소뿔은 술잔으로도 많이 사용되었고,
전통악기 편종·편경 등을 치는 뿔 망치
소뿔은 부채의 재료로도 쓰이는데,
고급부채의 살대에 소뿔을 펴서 채색
소뿔은 머리를 빗는 빗에서부터 시작하여
숟가락 젓가락 뿐만 아니라 장식품과 도장
얼마 전까지 도장의 대명사가 바로 뿔도장
암소뿔은 천지각(天地角)과 수각(垂角)으로 세분
하나는 위를, 다른 하나는 땅을 향한 뿔이 천지각.
한 쌍의 뿔이 모두 밑으로 향해 구부러진 뿔인 수각.
화각이나 공예품에 사용하는 뿔은 2-3년 된 숫소 뿔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은 고추뿔인 당신자각(唐辛子角)
소뿔 중 가장 귀한 뿔로 옛 선조들이 소중하게 다루었다.
특히, 숫소 뿔을 뽑을 때 쓰였던 말.
"쇠뿔도 단김에 빼라." 속담의 유래.
활.
각궁은 소뿔을 깎아 붙여 만든 우리나라 고유의 활.
활의 탄력성과 견인성을 좀 더 강력하게 만든 각궁.
우리나라 활 종류는 각궁, 전투 및 수렵용인 철태궁
전투용 쇠로 만든 철궁(鐵弓), 수렵용 나무로 만든 목궁
예식(禮式) 용도로 활을 쏠 때 쓰던 길이가 긴 예궁(禮弓),
작은 동개활(동개에 넣어 등에 지고 말달리며 쏘는 활),
무거운 화살을 쏠 때 쓰던 큰 활(正兩弓) 등 각궁이 있다.
고조선에서 생산된 단궁(檀弓)
고구려에서 생산된 맥궁(貊弓)
멀리 중국까지 그 이름을 떨쳤다.
단궁은 나무로 만든 활, 즉 목궁이었으나
맥궁은 3세기 초 고구려에서 중국에 수출
'뿔로 만든 활' 즉, 각궁이라고 짐작 된다.
각궁은 남쪽에도 일찍부터 있었다.
3세기 초 백제가 왜인 사절에게 선물.
우리나라는 양질의 목궁과 각궁을 일찍부터 창안
2가지를 무장 편제의 기본을 이루는 무기로 사용.
각궁은 후궁 또는 장궁이라고도 한다.
주로 물소뼈, 소뿔, 양의 뿔 등을 이용.
전투 및 수렵용, 연습 및 경기용의 두 종류.
전투용 활은 그 몸체를 산뽕나무·뿔·힘줄·
아교·참나무·붓나무껍질·화피(벚나무 껍질)
등 7가지 재료를 배합해 각궁을 만들었다고 한다.
각궁에는 굳세기에 따라 강궁(强弓)·실궁(實弓)·
실중력(實中力)·중력(中力)·연상연중(軟上軟中)·
연하로 구별해 사용자 힘에 맞게 쏠 수 있도록 제작.
러시아.
'우리나라 옛 조상의 고향' 바이칼 호수 일대.
시베리아 대평원을 품은.. 백색 설원의 러시아.
제 4 빙하기 인류의 생활환경을 엿볼 수 있는 곳.
공산주의 사상이란 무엇일까?
민주주의 사상이란 무엇일까?
반세기 전 사상전에 휘말린 우리나라.
공산주의 종주국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한반도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나라.
...........................................
...........................................
1240년에서 1480년까지 계속된 몽골의 지배 시기
그후 러시아 왕 이반 뇌제는 성 바실리 사원을 건설,
똑 같은 사원을 짓지 못하게 건축가 눈을 뽑아버린 왕.
그 혼란기를 거쳐 1612년 시작된 로마노프 왕조
1700년대 뾰뜨르 1세가 뻬쩨르부르그를 건설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뻬쩨르부르그로 옮긴다.
뾰뜨르 1세는 러시아를 유럽 강국으로 키운다.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로 군사강국
1825년 데카브리스트 반란으로 러시아는 혼란기.
서유럽 자유사상의 영향으로 귀족 청년들이 반란
그후 니꼴라이 1세, 알렉산드르 2세,
알렉산드르 3세, 니꼴라이 2세를 거쳐
러시아는 격동적인 혁명 속으로 빠진다.
19세기는 예술적으로 러시아가 성장한 시기
러시아의 문학과 음악, 기타 여러 분야의 예술
1917년 10월 레닌 혁명후 소비에트 공화국 탄생
20세기 제1차 세계대전,
레닌의 10월 사회주의 혁명
스탈린 때의 제2차 세계대전.
그 후 냉전, 그리고 소련의 해체.
스탈린을 거쳐 세계 초강대국으로 성장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많은 사람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수없이 죽어간 병사들
전쟁후 생계를 홀로 꾸려가야했던 전쟁 미망인
러시아 여인의 강인함이 이런 역사를 대변한다.
흐루시쵸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고르바쵸프 시대에 이르러 소련은 또 다시 개혁.
고르바쵸프 개혁은 성공하지 못하고 소련은 해체
러시아를 비롯한 15개의 공화국은 자본주의화.
엄청난 혼란을 극복하고 다시 강대국으로 부상.
...........................................
...........................................
1991년 12월 소련 해체로 독립국가가 된 러시아.
면적은 미국이나 중국 2배이고, 인구는 세계 6위.
중국 인도 미국 브라질 인도네시아에 이어 러시아.
대부분 러시아인 이외에 약 70 여 소수민족 집단
인구 대부분이 러시아 서부 유럽의 삼각지대에 집중
특히 20세기에 인구가 동쪽 아시아(시베리아)로 이동
국토 면적 17,075,400㎢, 인구 144,893,000 (2003 추계).
북쪽은 북극해, 동쪽은 태평양에 접해있고,
서쪽은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리투아니아 벨로루시 등과 경계선.
남쪽은 중국·몽골·북한 우크라이나·
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
북극권 따라 동서 길이가 최고 7,700km
남북으로 2,000~2,880km에 달하는 수준.
수도는 모스크바이며, 예전 소련의 수도.
13세기 몽골족 침입을 시작으로해서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의 침입
광활한 영토, 풍부한 천연자원 매장량.
사색하기에 적합한 자연환경, 문학과 음악
안톤 체호프, 알렉산드르 푸슈킨, 톨스토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같은 거장이 탄생
1917년의 10월 혁명과 광범위한 사회변혁
막심 고리키, 미하일 숄로호프, 솔제니친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예술가
볼가강 동쪽 카스피 해 연안 넓은 저지대
해수면보다 27m 이상 낮은 저지대도 있다.
러시아 평원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우랄산맥.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암석 지대.
서쪽 시베리아 평원은 단일한 지형적 특성.
러시아 면적의 1/7에 해당하는 대평원이다.
중앙 시베리아 고원은 북시베리아 평원
동부로는 북시베리아 저지대로 이어지며,
남쪽은 바이칼리아 산맥과 경계를 이룬다.
바이칼 호 서쪽에는 산맥이 비교적 적은 편이며,
해발 4,507m 알타이 산맥은 몽골과 경계선을 형성.
바이칼 호 주변은 거대한 단층지대,
주요단층으로 인해 고지의 고원이나
산맥이 깊은 계곡이나 분지와는 분리
이 지역은 다양한 지형적 특성을 지닌다.
바이칼 호에서 가장 깊은 수심은 1,158m
바이칼호 동쪽에는 부채꼴로 펼쳐진 산맥들
레나강과 태평양 연안 사이 대부분 지역을 차지
북극해로 가는 레나강과 태평양 아무르강 분수계
오호츠크해에서 베링해까지 이어진 저지 회랑지대
태평양 가에 위치한 캄차카 반도따라 산맥계를 형성
캄차카 반도에는 수많은 화산이 있으며 대부분 활화산
화산지대는 남동쪽 쿠릴 열도를 지나 일본까지 연결된다.
광활한 저지평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강들이 흐른다.
북극해 유역은 오브강 예니세이강 레나강 등 3개의 강
시베리아 나머지 지역 강들은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간다.
시베리아 남동부 넓은 지역에는 거대한 아무르 강
아무르 강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경계를 이룬다.
볼가강은 러시아 전체 수상 교통량의 2/3를 해결.
러시아는 사실상 겨울과 여름 두 계절만 있고,
봄 가을은 신속하게 바뀌는 겨울과 여름 사이
강우량이적은 대신 적설 기간은 120일~ 250일
북극 사막지대는 식생을 볼 수 없는 불모지대
국토의 10%를 차지한 툰드라 지대는 습지 평원.
북극해 툰드라, 관목 툰드라, 수목 툰드라 지대
북극해 툰드라 지대는 대부분 이끼와 지의류
관목성 툰드라 지대는 이끼, 지의류, 초본식물,
키작은 북극해안 자작나무, 관목성 버드나무 등
수목 툰드라 지대는 키작은 자작나무와 낙엽송,
가문비나무 원주민이 기르는 사슴 및 북극 여우
사향소·비버·레밍·흰올빼미·들꿩 등이 서식.
툰드라 남쪽 타이가 지역은 가문비나무와 전나무
소나무, 관목, 목초 등으로 식생의 종류가 바뀐다.
타이가는 세계 최대의 목재 보유지로 꼽히는 원시림.
흑담비 다람쥐 담비 여우 산족제비 같은 모피동물
말코 손바닥 사슴. 곰. 사향쥐. 늑대 등의 원산지.
노루 늑대 여우 다람쥐 등이 흔한 아무르강 유역.
참나무·서어나무·느릅나무·개암나무 등이 분포.
서부 스텝 지대는 곡물경작이 가능한 곳.
스컹크·여우·늑대 등 야생동물이 서식.
남부 지역에서는 영양, 능에, 독수리, 매,
종다리, 회색 자고 등의 조류를 볼수 있다.
우랄 산맥 동쪽 쿠즈네츠크 석탄분지에 도시인구 집중
주요도시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따라 서쪽에서 동쪽
옴스크·노보시비르스크·크라스노야르스크·이르쿠츠크·
울란우데·치타·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 등이 포함.
100만 명이 넘는 러시아 소수 민족
타타르족·우크라이나인·추바슈족·
바슈키르인·벨로루시인·모르도바인
러시아인은 전체인구의 4/5를 차지.
소수 민족 공화국들이 6개 지구와 49개 주
인도유럽어족(동슬라브어·이란어 포함)·
알타이어족(터키어·몽골어·만주퉁구스어)·
우랄어족(핀우고르어·사모예드어)·
카프카스어족(아브하즈아디기아어·나호다게스탄어)
가장 큰 종교집단은 그리스도교의 분파 러시아 정교.
10세기 말 슬라브 왕국 비잔티움에서 건너온 전도사
그리스도교로 개종후 천년간 러시아 민족의 주요종교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석유, 천연 가스 생산국가
생산량의 4/5 이상이 서시베리아 북부 지역에 위치
러시아에는 많은 양의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으며,
중요 매장지는 중앙 체르노젬 지역, 우랄 산맥,
콜라 반도, 시베리아 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코발트·크롬·구리·금·납·망간·니켈·
백금·텅스텐·바나듐·아연 등 주요 생산국
농지는 국토의 1/6이 안되고,
농지의 약 3/5이 경작지이며
그 나머지는 방목장과 목초지
남부에서는 옥수수를 재배하고 있다.
그 나머지 지역에서는 해바라기·사탕무·
아마 등 산업용 작물을 비롯해 감자 채소
세계 최대 삼림지대를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
제재·펄프·제지·목재 산업이 중요한 위치
바이칼-아무르 철도 등 주요한 공업지역을 연결
러시아의 철도는 세계 최대의 화물량을 수송한다.
쿠즈네츠크 분지에서 우랄 산맥까지 연결되는 철도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 일대를 획득,
이조와 국경을 접하며 본격적으로 외교 관계
러시아 주요 관심사는 부동항구 확보에 초점.
이조는 일본과 강화도조약(1876) 체결
열강들과 잇달아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지위가 강화되고
영국과 미국의 압력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이조는 견제세력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1884년 7월 한러 수호조약이 체결되고
갑신정변으로 수구파 청 압박이 가중
한러 밀약으로 이조는 영흥만을 개방.
밀약 전말을 탐지해낸 영국
1884년 4월에 거문도를 점령,
한러 밀약을 제재하고 나섰다.
영국의 거문도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은 수정
이후 시베리아 철도 계획을 채택
3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가 세력을 만회
1896년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
러시아 공사는 고종을 상대로 이권 활동 전개.
1896년 4월 경원 종성 광산 채굴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같은 해 8월 압록강·두만강 유역과 울릉도의 산림벌채권
러일전쟁 패배로 한일합방을 가능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
1905년 이후 광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
1945년 8월 38선 이북은 소련이 신탁통치,
그 이남은 미국이 점령 통치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 의정서의 원칙을 고수
1948년 9월 9일 김일성 공산정부가 탄생하고,
소련은 북한의 소비에트화 초기 목표를 달성.
정권수립후 소련이 제공한 막대한 군사 경제 원조
고스란히 북한에서는 남침준비를 위해 충당되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국제연합군 참전을 결정하는 조치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을 적극 권유했고,
중국군 참전으로 한국 전선이 교착상태
1951년 6월 소련측에 의해 휴전이 제안
1953년 7월 마침내 휴전협정이 조인된다.
....................................
.....................................
1950, 6.25 당시 러시아의 개입이 없었다면
한반도에서는 사상전쟁도 빨치산도 없었을듯.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1958년까지 북한주둔
소련과 북한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북한은 친중국, 친소련 노선으로 줄타기 외교
..........
알래스카.
...........
시베리아의 백색 설원에서 태어나
백색 설원으로 되돌아간다는 믿음.
제 4 빙하기를 극복했던 백의 민족.
'제 4 빙하기를 연상케하는 알래스카.'
옛 조상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알래스카.
알래스카 원주민은 아직까지도 독특한 문화.
그들 만의 언어와 전통을 고수하며 살고있다.
현재 미국의 영역인 알래스카 & 알류산 열도.
매년 허리케인과 해일이 몰아치고 화산이 요동
제 4 빙하기를 연상하게 하는 험한 기후로 유명
'알래스카에서 발견된 고대사회 미이라.'
1936년 알류산 열도를 방문한 인류학자 호들리츠크
그가 찾아낸 그 섬에 잘 보존된 고대 유물과 미이라.
1700년대까지 알류산 열도에 살았던 우낭간족
알래스커 기후와 지형과 어울리는 문명을 유지
특히 미이라 제작 기술은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놀라운 점은 미이라 제작 방식이 이집트와 흡사
복부를 절개해 내장을 먼저 꺼내고,
시신을 닦는 과정이 이집트와 공통점
다른 점은 시신을 밧줄로 묶어 웅크린 점.
풍부한 해부학 경험에 의한 지식과 문명
9천년을 이어온 우낭간족은 어이없는 종말.
18세기 바다사자 사냥을 하러 온 러시아인들
2만명에 가까운 우낭간족을 러시아인이 몰살
이백년 후에 서구인들에 의해 알려진 우낭간족.
............................................
............................................
알래스카는 북미 북서 끝 북태평양 화산대에 위치
미국에서 면적은 가장 크지만 인구는 가장 적은 주
베링 해와 해협의 사이에 시베리아와 마주보는 위치.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북극해,
남쪽으로 태평양과 알래스카 만,
동쪽으로는 캐나다의 유콘 준주와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 접해 있다.
주도는 주노.
알래스카 본토의 남북 1,450km, 동서 1,300km.
알류샨 열도와 남동쪽 팬핸들 지역을 포함하면
동서 4,800km, 알래스카 인디언 후손들이 원주민.
1만 5,000~4만 년전 베링 열도를 건너
최초로 북아메리카에 온 사람들의 후손
또는 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했던 원주민들.
에스키모(이누이트)족과 알류트족
3,000~8,000년 전 정착한 북극 민족
최초 유럽인 정착지는 1784년 코디액 섬.
러시아 모피사냥꾼이 스리세인츠베이 건설.
1799~1867년에는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관리
그후 미국이 알래스카를 사들이는 조약을 체결.
1880~90년대에 금이 발견되자 미국인들이 정착
1912년 의회 인준을 받아 알래스카 준주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적대적인 활동 때문에
알래스카 간선도로와 더불어 방어시설도 필요했다.
알래스카는 1959년 1월 3일 미국의 49번째 주.
연방정부는 광대한 지역을 보유하고 있지만
원주민들의 소유권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막대한 지역을 원주민들에게 내주었다.
알래스카는 크게 네 지역으로 나뉜다.
첫째, 섬과 산계로 이루어진 남부이고,
둘째, 내륙의 중부 평원과 대지이며,
셋째, 브룩스 산맥이고,
넷째, 브룩스 산맥의 북쪽
노스슬로프로 불리우는 해안.
북미 대륙 최고봉은 알래스카 매킨리 산(6,194m)
남서쪽 알류샨 산계와 남동쪽 세인트 일라이어스·
바운더리 산맥은 화산활동·지진·빙하로 알려진 곳.
알래스카 중부 내륙에는 유콘 강과 커스커큄 강이 흐른다.
지리적인 조건과 지형적인 기복에 따라 기후가 매우 다양.
내륙은 여름에 낮이, 겨울에 밤이 길고 북쪽은 북극사막기후
알래스카는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곳이지만
일자리 찾기 위해 이주해오는 젊은이가 많다.
주민 평균연령은 26세, 원주민은 인구의 1/7
에스키모족(3만 4,000명)이 가장 큰 인구 집단
아메리카 인디언(2만 2,000명), 알류트족(8,000명)
주민 절반 이상이 앵커리지 지역에 살고 있으며
페어뱅크스에 15%, 남동부 팬핸들 지역에 13%
알래스카는 석유, 천연 가스 산업 의존도가 높다.
1977년 송유관 개설후 석유생산은 텍사스 다음 2위
석탄·금·아연·은·구리·모래·자갈 등의 광산물
교통편은 주로 항공을 이용 그 다음은 여객선
그리고, 미국, 캐나다 서부와 연결된 고속도로
총 면적은 1,530,700㎢, 인구는 626,932(2000).
...............
에스키모인
................
'어제는 나무, 오늘은 불꽃, 내일은 잿더미.'
에스키모 인의 생활 풍습을 대변해주는 속담.
과거나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극지 생활.
당장 추위를 이겨내야 살아남는 현실이 최우선.
감기 바이러스조차 살수 없는 추운 극지.
하여, 감기를 모르고 살았던 에스키모인
북극은 그만큼 오염이 되지 않은 청적지역
3억 8천만년 전 '4발 달린 물고기' 화석
4발 달린 물고기는 육지 동물로 진화한듯.
진화론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민중보다는 영웅
또한 정복 당하는 민족보다는 정복한 민족.
알렉산더, 징기즈칸은 광활한 영토의 정복자.
콜럼버스, 마젤란,등 탐험가는 자연의 정복자.
현재, 지구상에서 마지막 처녀지는 남극과 북극
1911년 남극점에 첫발을 딛은 노르웨이 아문센.
1909년 로버트 피어리가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
동상으로 발가락 일곱 개를 자른 로버트 피어리.
북극점 도전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현재,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혀있는 피어리
'불굴의 의지' 대명사로 알려져왔던 탐험가.
1세기 세월이 흐르며 그에 관해 달라진 시각.
'과연, 그는 순수한 탐험가였을까?'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
(Give me my father’s body)라는 책의 제목.
피어리가 북극 탐험에 나선 시점은 1891년 그린란드.
그린란드 서해안 해군기지를 세울 무렵 빈번하게 왕래.
1897년 피어리는 그린란드에서 잡아 온 에스키모인 6명
뉴욕에 퍼진 털가죽옷 에스키모에 관한 소문
피어리는 1인당 25센트 관람 입장료를 받았다.
에스키모를 데려올 것을 요청한 자연사 박물관
에스키모인들은 박물관 지하실에서 살았다.
그러나 대도시의 질병들을 이겨내지 못했다.
네 명의 에스키모들이 사망한 후에
한 명은 그린란드로 되돌려 보내졌다.
뉴욕에 남은 에스키모인은 오직 한 사람.
끌려올 당시 예닐곱 살이던 소년 미닉 뿐.
미닉은 낯선 뉴욕 생활에 그럭 저럭 적응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 직원에게 입양되어
영어를 배우고 고등학교와 초급대학도 졸업.
1907년 미닉은 충격적인 신문기사를 접하게 된다.
아버지 시신이 자연사 박물관에 연구 목적으로 보존
자연사 박물관에서 치룬 아버지 장례식과 무덤은 가짜
비밀리에 에스키모들의 시체를 해부하고
그 뼈들을 보관해 두었던 자연사 박물관.
이 때부터 미닉은 박물관과 힘겨운 투쟁.
박물관은 시신을 돌려주지 않은 채 거짓말로 일관한다.
미국 사회에 환멸을 느낀 미닉은 그린란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뉴욕에서 성장한 그에게 그린란드는 낯선 타향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미닉은 뉴욕 사회, 백악관에 탄원
벌목꾼이 된 미닉이 독감에 걸려 피츠버그에서 끝내 사망.
박물관 측과 투쟁을 벌이던 미닉의 '더 월드' 잡지 인터뷰
.....................................................
“어머니가 죽고 난 뒤 아버지는 내게 유일한 혈육.
어느 날 이글루 주위에 나타난 산같이 큰배와 백인들
그렇게 끌려온 아버지 시신은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안
사람들이 그 광경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마구 쏟아집니다.
왜 나는 아버지를 땅에 묻어줄 수 없나요?”
....................................................
뉴욕으로 끌려간지 100년 만에 귀환한 시신.
북극 지역의 사학자 켄 하퍼가 쓴 책의 제목.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
1980년대 출판된 뒤 에스키모들은 시체 반환을 요구.
마침내 1993년 그린란드 교회 묘지에 묻힌 그 시신들.
피어리의 북극 탐험정신을 재평가하게 된 사건이었다.
..........
이글루.
..........
이글루는 눈과 얼음으로 만든 에스키모의 집이다.
목재 석재, 잔디, 짐승가죽으로 만든 천막도 있다.
이글루라는 말 자체는 이러한 집들 모두를 의미한다.
그러나 눈과 얼음으로 만든 집 만이
이방인의 시선을 끌어 널리 알려졌다.
에스키모들이 전통적으로 살았던 이글루
반은 땅속에 있고 반은 땅위에 둥근 형태.
현대문명의 발달로 요즘은 보기 어렵단다.
이글루는 짐승의 지방을 태워서 조명과 난방
공기를 머금은 두터운 얼음벽이 외부 공기 차단.
영하 40℃ 바깥 날씨에도 실내온도는 25℃를 유지.
........
인디언.
.........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은 아시아 몽골 수렵민족.
빙하기(약 2만~3만 5,천년전) 베링 해협 육교 건너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불을 사용하고 개를 기른 민족.
특수한 의식과 치료법 등은 당시 아시아 문화와 유사.
예를 들면 목축, 특정 식물 경작, 바퀴와 쟁기의 이용.
[북아메리카 인디언]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서로 약간의 문화적 차이
주요 식량원은 고기였으며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
도살장 유적지에서 수렵사회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가장 독특한 형태의 발굴물 가운데 하나
뉴멕시코 클로비스 도살장 유적지의 화살촉.
BC 9000년 경 세로 홈이 팬 클로비스 화살촉
작살 모양의 도구는 맘모스를 도살하는데 이용.
사막문화 부족들은 오리건에서 멕시코 북부지역,
태평양 연안에서 로키 산맥 동쪽 미국의 서부지역
이들은 대부분 유랑 수렵생활을 하며 동굴에 살았다.
씨앗을 가는 맷돌과 같은 유물을 통해
원시농업 기술의 발달 등을 알 수 있다.
BC 6000년 무렵 해안과 강가에서 살게 되었다.
주요 사냥감은 들소였기에 북극 툰드라로 이주.
BC 2000년 무렵 미국 남서부 부족들은 옥수수 농사
농업이 인디언 문화에 영향을 끼친 시기는 1세기 이후.
700~1200년 남서부, 애리조나에 관개시설을 이용한 농사
1100~1300년 건조기에 문화발전이 멈췄고 인구 격감
1000년 경 돌과 벽돌로 공동주택을 짓는 기술이 발달.
작물로는 섬유가 긴 목화와 여러 종류의 옥수수 농사.
[중앙 아메리카 인디언]
니카라과에서 멕시코에 이르는 중앙 아메리카
BC 4500년 무렵 인디언은 농사기술이 발전한다.
옥수수·콩과 같은 주요작물의 재배기술이 발전
BC 2000년 무렵 농경사회가 확립되었다.
1000년까지 고전기 동안 마야와 같은 문명.
마야족은 제의를 통해 사제계급의 지배를 받았다.
사제는 농사주기에 풍년이 들도록 하는 일을 한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일반적 종교의식이었다.
중앙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는 소규모 사회를 구성
개별 가족이 기본 사회단위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남성과 연장자가 사회를 지배하며, 상속은 부계
멕시코와 과테말라의 식민지 태생 스페인인들과 혼혈
1821년 혁명을 통해 유럽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선언.
[남아메리카 인디언]
BC 10000년 이후 북아메리카로부터의 이주민들
중앙 아메리카를 거쳐 수렵 채집민족들의 이동.
열대림 지대의 농경민과 마찬가지로
이들 수렵 채집민들은 친족관계 집단
집단마다 연령과 성을 기준으로 서열.
BC 2300년경 남아메리카 원주민 문화 가운데
가장 발전한 문화가 안데스 중부지역에 정착
1000년 무렵 (치무·티아우아노코·잉카 왕국)
16세기 초 스페인이 침략할 때까지 번영을 누렸다.
페루에서 칠레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잉카 왕국
국가에서 관리하는 식량생산·저장·배급 제도가 발달
'절정기에는 350만 인구를 살릴 규모의 왕국.'
세습 왕족, 귀족과 장인계층, 평민인 농민 계급사회
잉카 문명은 사회 법률제도와 수준높은 금속세공 예술
16세기 유럽의 정복으로 인해 주민들의 전통문화가 파괴
메소포타미아.
그리스어로 '두 강 사이에 있는 땅'이라는 뜻.
서아시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사이.
[개요]
터키 산악지대에서 페르시아 만에 걸친 지역.
터키 남동부 평원과 이라크 전역도 포함한다.
넓은 뜻 메소포타미아.
북쪽은 터키 산악지대,
남동쪽은 페르시아 만,
동쪽 티그리스강 건너
이란과 경계 자그로스 산맥,
서쪽은 유프라테스강 건너 시리아 사막.
좁은 뜻 메소포타미아
두 강의 유역 만을 뜻한다.
중세와 근대, 현대사 부분,
특히 오스만 제국 시대 말기
이라크로 된 지역은 넓은 뜻.
그러나 고대사 부분은 좁은 뜻.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결정한 큰 정치세력
남부의 바빌로니아, 북부에 있던 아시리아.
그러므로 메소포타미아 역사자료의 대부분은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중심부에서 발견된다.
선사시대
BC 3000년대 경 하수나 시대와 텔할라프 시대
메소포타미아 북부 전역에 퍼져있던 촌락문화.
바그다드 북쪽 티그리스강가 사마라(Samarra)
대표적인 유적으로 하므로 사마라 문화라 한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중류의 사마라 문화
텔할라프 문화와 함께 채색토기가 탁월하게 발달.
BC 3000년대 후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바빌로니아처럼 우바이드 문화가 꽃피고,
모술 부근의 테페 가우라에서는 신전이 발굴.
BC 3000년대말 슈메르인들이 문화를 더욱 발전
시리아 사막에 개방되어 있는 메소포타미아
초기 주민은 아라비아 반도 셈 언어권 유목민들.
마리(유프라테스강 중류에 있는 현재 텔엘하리리)
셈어 계통 아카드어로 쓴 가장 오래된 비문이 발견.
이 비문은 왕조 초기(BC 2000년대 중반)에 속한다.
BC 2350경 셈족은 바빌로니아에 아카드 왕조를 건설
BC 1000년대 초반 가나안인이 메소포타미아에 살았고
BC 12 ~ BC 9세기RUD 아랍인이 메소포타미아에 나타났다.
현재 모술지역 주변 아시리아인 방언은 아카드어
이들은 고도로 발전한 바빌로니아의 문명을 공유.
BC 2000년대 후반부터 BC 1000년대 중반까지
메소포타미아에 살았던 비(非)셈계 후르리족
BC 1500년경 아리아족 왕조를 이은 후르리족
북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여러 왕국을 건설했다.
BC 1200년 이후 후르리족은 아람인에게 흡수
또는 아르메니아 산지로 쫓겨들어 숨어살았다.
당시 아르메니아 산지에 우라르투왕국이 있었다.
수메르 왕 루갈자게시가 지중해까지 제국을 건설.
그러나, BC 2350년경 아카드 사르곤에게 정복된다.
우르 제3왕조(BC 2130~2030경)는 아시리아까지 차지
우르 제국이 붕괴할 즈음 아시리아는 독립한 듯하다.
아시리아 왕조 초기는 이신 라르사 왕조 중기(BC 1900년)
셈족의 활약
아시리아는 BC 1800년 이전에 쇠퇴했는데
그즈음 셈어족이 유프라테스강 중류에 정착.
이 민족에 관한 많은 사료가 마리에서 나왔다.
BC 1900경 바빌로니아로 들어가
이신 라르사 왕조를 타도하고
바빌론 제1왕조를 창건했다.
BC 1820년경 메소포타미아 왕국을 건설한 '샴시 아다드'
이어 북으로 향해 아슈르를 정복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마리에는 둘째 아들 야스마크 아다드이 부왕(副王).
샴시 아다드 만년 10년 = 바빌론 함무라비 최초 10년
함무라비는 샴시 아다드가 죽자 곧 북쪽영토를 확장,
BC 1770년경 마리를 정복하고 메소포타미아를 지배.
바빌로니아 전체, 유프라테스 강 중류, 아시리아.
카시트족·후르리족·아람족
함무라비 사후 바빌로니아의 권력과 영토은 축소.
아시리아는 독립, BC 1600경 카시트족이 권력 장악.
바빌론 함락(BC 1650경)전 60년 동안 후르리족
안티오키아 평원이나 북(北)시리아 각지에 살았다.
바빌론 함락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전역으로 분산.
이무렵(BC 1500경) 소수의 아리아족이 후르리족에게 협력.
아리아족은 고대 인도의 언어를 썼고 베다 신들을 숭배했다.
(인드라·바루나·미트라·나사티아 등)을 숭배한 아리아족
이동 도중 부족에서 떨어져나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
이들은 후르리족 지배 계급이 되어 여러 왕국을 건설
그 가운데 중요한 왕국이 미탄니(BC 1500~1360년 존속)
북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 중류 유역 왕국으로서,
서쪽으로 지중해부터 동쪽의 누지(현재 키루쿠크)까지.
미탄니 왕국은 봉건제이고 전차 모는 전사가 귀족 계급
미탄니 최고 지배자는 사우샤타르(BC 1480경)였다.
이집트 왕 투트모세 3세의 시리아 원정은 그 이후
그뒤 미탄니 왕녀들이 이집트 왕들과 결혼을 한다.
이크나톤 왕비 네페르티티도 미탄니 왕가 출신
그뒤 히타이트 왕 수필룰리우마스
후르리왕 아르타타마와 동맹하고
카불로 남하해 미탄니 수도 약탈.
미탄니 왕 투슈라타가 그의 아들에게 살해당하자
후르리와 미탄니의 싸움은 얼마 동안 계속되었다.
투슈라타 아들 마티와자는 수필룰리우마스 딸과 결혼
미탄니의 통치자가 되는 동시에 히타이트 봉신이 된다.
그후에 미탄니는 히타이트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그뒤 부상한 아시리아는 히타이트의 위험한 인접국
아시리아 왕 샬마네세르 1세(BC 1275경~1245 재위)
유프라테스강 동쪽을 정복후 아들이 대를 이어 통치
BC 1245~1208 메소포타미아는 아시리아 제국의 일부분.
투쿨티 니누르타 이후 아시리아는 쇠퇴했고
메소포타미아에는 아람인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BC 1116~1076 재위)는 세력을 만회
아람 부족 등을 격파하고 터키 남동부에서 지중해까지 확대.
그러나 티글라트가 통치한 뒤부터 아시리아는 다시 쇠퇴했다.
한편, 아람인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일부에서 세력을 확립
BC 10세기 시리아에 있던 과거의 많은 히타이트 도시들을 점거.
BC 900년경 아시리아의 여러 왕은 새로 영토 확장.
아시리아와 유프라테스 강에서 아람인을 몰아낸다.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시대>
메소포타미아는 아시리아의 영토였는데,
아시리아는 정복지역 주민을 강제로 이주
이러한 정책은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BC 626년 신바빌로니아 왕국 아람인이 융성
아시리아 몰락해 메디아와 바빌로니아로 분할
BC 539년 페르시아 왕이 바빌론을 정복
메소포타미아는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까지 존속.
셀레우코스 왕조
마케도니아가 식민화된 메소포타미아
알렉산드로스 통치 당시에 시작된 듯.
BC 140년경과 130년경 셀레우코스 왕조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와 바빌로니아를 잠시 탈환
그뒤 파르티아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약했다.
그리스 여러 도시들은 파르티아 여러 왕과 교섭하게 되었고
주변의 사막에서 정착지대로 이동하는 아랍인이 점점 많아져
그리스인과 원주민과 혼혈이 이루어져 그리스도교 시대 개막.
파르티아와 로마
BC 124경~87 때 메소포타미아는 확고한 파르티아 영토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의 죽음을 기회삼아 로마의 영토.
6세기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새로운 격전이 벌어졌다.
카바드 1세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군이 시리아로 침입.
그러나, 로마는 다시 과거의 국경을 회복했다(591).
아랍의 정복과 칼리프 국가
메소포타미아는 예언자 마호메트 시대 이전에도
아랍화 되었지만 634년 아랍 정복군에게 점령후
이슬람 제국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650~750년은 메소포타미아 문화 사회의 변혁기였다.
750년 아바스 왕조 창건은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개막.
아바스 왕조는 역대 칼리프 왕조의 전통을 지키고,
약 5세기 동안 독특한 반종교적 위엄을 유지했으며,
아랍 문명이라고 칭할 학술·문화·문학의 꽃피웠다.
메소포타미아 정치 군사력 행사는 칼리프의 이름
10세기 알레포와 모술을 중심으로 한 함단 왕조,
11세기 우카일 왕조, 12세기 이라크 마지아드 왕조
몽골의 침입
1258년 몽골 침략으로 바그다드와 메소포타미아 남부 파괴
도시가 붕괴했고 농업이 쇠퇴하자 사막 민족이 대규모 침입
1258~1534년 3세기 동안 메소포타미아 역사는 무기력한 모습
처음 80년은 몽골족이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렸으나,
이들 중 칸(1295~1304) 이외에는 모두 행정에 무능
1401년 몽골 티무르는 훌라구보다 심한 파괴를 자행.
몽골이 물러간 뒤 이란 북부에서 일어난 투르크멘족
카라 코윤루('검은 양') 왕조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
오스만 제국의 지배
1534년 메소포타미아는 오스만 제국에 귀속되어
이후 약 4세기에 걸쳐 투르크의 한 지방이 된다.
오스만 터키 제국은 고려와 가까운 '형제의 나라'.
덧 말.
터키는 서아시아로 이주한 옛 돌궐(투르크)족.
1950. 6.25 전란때 1만 5천 UN군을 파견한 우방.
"코레아"를 일방적으로 무조건 좋아하는 나라이다.
카페 게시글
알고갑시다
지리산 이야기 - 마흔 셋. ( 단군. 음력. 소. 활. 러시아. 메소포타미아. )
선경나라
추천 0
조회 79
06.05.05 21:33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