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을 어떤 자질이나 신체적 혹은 도덕적 특성으로 이해하지 않고 관계적(relational)으로 파악한 대표적인 신학자는 칼 바르트(K. Barth)였다. 초기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후기 바르트는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하나님의 형상은 “존재의 유비”가 아니라 “관계의 유비”로 설명 가능하다.
바르트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특별한 속성이나 태도에서 찾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관계뿐 아니라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로도 이해된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동역자”(partner)로 만드셨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신적 존재의 “반복”(repetition) 혹은 “복제”(duplication)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성이 반영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인간과의 관계도 경험한다.” 그런데 인간은 완벽하게 그 관계를 파괴한 존재가 되었다. 더 이상 인간에게는 어떠한 구원가능성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뿐이다.
에밀 브루너(Emil Brunner)도 관계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점을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 형상”과 “내용적 형상”으로 구분했는데, 형식적 형상은 책임성으로, 내용적 형상은 구원 가능성으로 보았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파괴된 것은 구원 가능성이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 형상으로 볼 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다른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타락 이후에도 인간의 책임성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브루너는 바르트와 길을 달리한다. 브루너는 책임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이 책임성을 기초로 가능하다. 책임성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식을 갖게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와 모든 역사적인 삶보다 앞서 존재하는 일반 계시의 실재 위에 책임성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브루너는 이 책임성이 제한된 자유요 신적 자유로부터 구분되는 인간의 자유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오직 이 제한된 자유는 하나님에게 반응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자유인 것이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2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