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解品(신해품) 第四
4 게송으로 다시 설하다
(1) 법(法)을 말하다 2
법화경 어제 이야기가 ‘게송으로 다시 설하다.’는 내용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었는데, 이 궁자의 비유 그러니까 저 앞에서 화택의 비유를
말씀드렸고 여기서는 궁자의 비유를 말씀 드리는 중인데,
이러한 것은 여러 번 우리가 반복하면서 학습을 하고
그리고 온전히 기억에 남도록 해야 할 그런 대목입니다.
말씀 드린 바대로 이 궁자의 어떤 삶의 과정들이
결국은 우리가 발심해서 그 성불에 이르기까지,
중생에서 성불에 이르기까지의 성불이라 일단 하구요,
중생에서 성불에 이르기까지 그런 그 과정일 수도 있고
또 부처님 일생동안 경전을 설하신 그런 전체적인 것을
아주 간단하게 총정리 하는 그런 비유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우리가 숙지해야 하는 그건 입장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비유를 게송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는데
한 번 다시 복습 하도록 하겠습니다.
‘궁자경악화엄시(窮子驚愕華嚴時)’
궁자가, 못난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깜짝 놀라서 경악해서 쓰러져 버리죠.
그걸 화엄경을 설하든 때다.
그 다음에 ‘제분전가아함시(除糞定價阿含時)’
거름을 쳐주고 품값을 받아서 연명해가는 그런 시기가 아함경을 설하든 때다.
그 다음 ‘출입자재방등시(出入自在方等時)’
그 집에 여기 저기 출입을 자유롭게 하던 때가 방등부 경전을 설하든 때다.
그 다음에 ‘영지보물반야시(令知寶物般若時)’라,
그 집안에 보물이 어디 있는지, 재산 상황이 어떤지,
창고는 무엇 무엇을 넣어놨는지 이런 것들을 아는 시기를
반야부 경전을 금강경 반야심경 그 외 대반야경이라든지
이런 것을 설하든 시기다 이렇게 표현을 했죠.
그 다음에 ‘전부가업법화시(傳付家業法華時)’.
가업을 전해 줘 버리죠.
가업을 아들에게 전해 줘 버리는 게 법화시다.
그 다음에 아함십이(阿含十二) 방등팔(方等八)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 최초 화엄삼칠. 그것도 이제 중요하죠.
아함 12, 아함경은 12년. 방등 8, 방등경은 8년.
21제담반야, 21년 동안 반야경을 설하고.
종담법화 우8년, 마지막으로 또 법화경을 설했다.
그리고 최초화엄 삼칠일, 그건 화엄경을 21일 동안, 삼칠일 21일 동안 설했다.
요것이 그 방대한 경전을 간략하게 간추린 방법이죠.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가 아니면 또 어떤 경전은 차원이 어디에 해당되고
또 어떤 경전은 어떤 차원에 해당되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옛날에 천태스님이 이렇게 법화경의 궁자의 비유에다 맞춰서
그렇게 배대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대성문이 방편품에서 법문을 듣고
그 다음에 비유품에서 사리불이 수기를 받고 이렇게 해오는 과정에
가섭을 위시해서 사대성문이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 대한 감회를 말하자면 궁자의 비유로써 표현하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요즘 불자들은 공부도 많이 하시고 실력도 상당하니까
이런 정도는 환하게 외워서 가지고 가족들에게나 아니면 친구들에게나 친척들에게나
이야기로써 불교를 좀 이해시킬 수 있는 좋은 길이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어제 읽어드린 대목을 다시한번 짚어 보겠습니다.
그 때 마하가섭이 거듭 펴려고 게송으로 설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오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기쁨이 넘치고 미증유(未曾有)를 얻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성문들도 성불(成佛)한다고 하시니
최상의 보배 무더기를 구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얻은 것과 같습니다.”
그랬습니다.
여기 중요한 말은 “성문들도 성불(成佛)한다고 하시니
최상의 보배무더기를 구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얻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법화경을 설한 그 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성불한다는 사상이
굉장히 일반화 되어있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지금 우리 불자님들, 특히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의 불자들은
본래 부처다, 사람이 본래 부처다, 마음이 부처다, 이런 말을
상당히 많이 익혀 가지고 그런 문제 대해서 크게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또 과분하다고 생각 하거나 그런 일이 사실 잘 없어요.
웬고하니 일찍이 선불교가 들어와서 선불교의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들의 위대성, 인간의 위대성 그것은 곧 부처라는 말로 표현된다는
가르침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기 일어날 이때는 이런 말이 대단한 거예요.
성불(成佛)한다고 하시니 최상의 보배무더기를 구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중국에 있었든 이야기인데
어떤 스님께서 열반경이 들어오기 전에 다른 어떤 경전에서
[천제(闡提)], 악한 사람은 무성천제(無性闡提)라고 불교에서 그런 말을 하는데,
성불 못한다. 그러니까 천제불성불(闡提不成佛)이라는 말이 있어요.
천제는 성불하지 못한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전해 졌는데
어떤 법사가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번역이 잘못 되었거나 아니면 번역이 덜 왔거나 착오가 있어서
이런 표현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해서 성불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건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했는데
그 당시는 경전의 권위에 눌려서 그렇게 경전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산문출송을 시킨다든지 또는 내쫓는다든지 옷을 벗긴다든지 하는
그런 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스님은 참으로 내 주장이 맞는지를 내가 한번 보여주겠다.
그래서 저기 저 호구산(虎丘山)이 있는 도시죠, 바위 같은 것 돌 같은 것이
많이 늘려있는 거기 가서 모든 사람들은 다 성불 할 수 있는데
천제불성불이라고 한 것 이것은 틀렸다.
만약에 내 말이 맞으면 표현을 좀 해주시요. 이렇게 했다구요.
그러니까 바위들이 끄덕끄덕 했다는 것입니다.
점두라고 해서 호구산에 가보니 점두석(點頭石)이 있어요.
그게 그런 전설이나 사실에 의해서 뒷사람들에게 교훈으로 남겨주기 위해서..
점두라는 말은 바위가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이 뜻인데
그때 그렇게 했던 그 바위에 점두석이라고 이렇게 글을 새겨 가지고
호구산에 가면 그렇게 모셔 놨습니다.
나도 직접 가서 봤어요.
그와 같이 사람이 부처가 된다, 보통 사람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 사실,
대단히 큰 문제였습니다.
지금으로써는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선불교 대승불교에서
다시 선불교로 불교가 아주 최첨단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부처다 이 문제에 대해서 너무 일반화 되어있죠.
그러나 옛날 그 당시에는 아주 혁명적인 소리고
정말 이건 상상도 못할 소리라고 여겼든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 법화경에서 성문들도 성불한다고 하시니
최상의 보물을 구하지도 않았는데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몇 번 말씀 드렸지만 지금 시대가 이렇게 발달한 이 시대에도
태국이라든지 버마 불교라든지 스리랑카라든지 이런 남방의 불교 상좌부 불교에서는
역시 사람이 성불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오직 한 분만이 부처로 인정하는 그런 사상을
지금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 대해서도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면서
또 우리의 내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라도
정확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하는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지난 시간 에도 비유를 이야기 했는데
이건 게송으로 비유를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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