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과 교회사적 반성
차 종 순 (호남신학대학교)
I 1984년 개신교가 한국에 공식적으로 전래된 이래 100여년이 지난 이즈음, 한국은 조용한 은둔의 나라에서 전세계를 품에 안은 한 낮의 태양과 같은 나라로 떠 올랐다. 대살로니가 사람들을 바울(Paul)과 실라(Sillas)를 가리켜서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행17:6)이라고 했다면 한국은 천하를 놀라게 하는 나라로 발전하였다. 개신교의 전래를 전후해서 구미 선진열강들의 이권쟁탈장이 된 한국에는 서구문명이 전달되기 시작했으며 일본의 통치를 거치는 동안에 어쩔 수 없는 문명화(서구화)의 길에 섰었다. 이 기간동안에 한국의 역사와 정신은 일본인들의 왜곡된 일방적인 지시에 따라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어릴때부터 세뇌당하곤 하였다. 더우기 6.25를 거치는 과정에서 한국은 서구화(미국화)가 비뚤어지게 유행하게 됨으로써 서구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먼저 따르는 비정상적인 흐름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이후로 한국에는 각 분야에서 한국의 재래적인, 토속적인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해서, 한국학에 대한 연구활동이 일어 났으며, 1980년대 부터는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때에 장호뢰 신학교 동문회가 “개혁신앙과 민족사”라는 대주제를 중심으로 우리의 뿌리와 현재적 위치를 반성해 보는 것은 한국교회사의 한 장을 차지할 만큼의 의의가 있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본 패널토의에서는 종교개혁 신앙의 원리와 요소들을 대표적인 개혁자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종합하면서, 이러한 전통에서 한국에 전래된 개신교가 참으로 개혁적 원리에 충실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충실하고 있는지 민족사적 한국교회사 맥락에서 반성함으로써 앞으로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설정해 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한가지 덧붙여서 말씀드릴 것은, 여기에서 밝히는 선교사들의 이야기에는 지금까지 말하기를 꺼려하던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때로는 비난도 하고 공격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에 대해서 오해를 갖고 있거나, 선교사들의 공로를 평가절하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밝히면서 독자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II 종교개혁은 한 젊은 청년, 루터(당시 22세)의 위대한 추구,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고심하는 한 청년의 고뇌로부터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가난을 이기고 법과대학에 입학하게 된 영예스러운 기회도 애타는 심정에 만족을 주지 못하자 루터는 에르푸르트(Erfurt)의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서 후기 유명론적 구원제도에 따라 경건과 고행으로 평안을 찾으려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 내가 누구건대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만큼 거룩해 질 수 있겠는가?”(Oh! whom thou wilt become holy and fit to obtain the grace of God)라는 확신이, 즉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루터도 말하기를, “수도승이 수도원의 생활로 하늘에 갈 수 있다고 보장한다면 나 자신은 분명히 하늘에 있을 것이고 동료 수도승들이 나를 보장해 줄 것이다”고 했다. 루터는 자신의 고행과 경건생활을 보면서 수도원의 선배, 스승들이 객관적으로 보장해 주는 구원의 확신보다는 본인이 스스로 말씀을 읽으며-주로시편, 로마서, 사도신경-하나님의 의(롬1:17)는 죄인을 처벌하시는데 있지 않고, 신앙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아는 주관적 확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후기 중세교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이나, 지적인 비평에서 보다는 개인의 구원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죄의 용서의 체험 등에서 시작되었다. 즉 객관적인 구원의 확인보다는 주관적인 구원의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지적인 동의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투신(Throw oneself upon God)이다. 교리적이거나 신조적인 지식의 습득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이며 통전적인 만남을 의미했다.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최소한 루터와 칼빈- 이러한 신앙(믿음), 말씀을 근거로 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흐름이 밑바닥에 있었다. 틸리히(Paul tillich)는 이것을 종교개혁의 실질원리 [은혜에 대한 믿음을 통한 의인(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와 형식 원리(성서)라고 구별해 말했다. 그러나 루터, 칼빈 등 종교개혁 제 1 대 개혁자들의 사후로 이어지는 “정통주의”시대는 이들이 원하지 않았던 이론화, 신조화, 체계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도입해서 제 1 대 개혁자들의 신앙과 이론을 체계화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본래적인 의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신앙과 신학이 경직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개혁자들의 본래적인 정신을 되살리려는 경건주의 운동이 조용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개혁자들의 지적인 면보다는 정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신비주의적인 경향에 치우치게 되었다. 결국에는 개혁자들의 주장인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만남보다는 내적인, 정적인 만남을 고집한 나머지 비성서적인 경향에 빠져서 성서보다는 체험을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이처럼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만연해지자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과 성서의 내용을 쉽게 이해하고 알 수 있도록 성서의 내용과 신앙을 간략하면서도 체계적인 형식으로 정리하려고 하는 합리주의가 대두하였다. 합리주의는 신앙을 단순하게 요약하기 위해서 체계화를 서둘렀으며, 그렇기 위해서는 합리적 즉 이성적으로 이해되어야 했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이성주의는 곧바로 계몽주의로 발전해서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종교, 진리, 성서를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금 정통주의의 오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순환을 막아 보려고 로망주의가 대두하여 신앙의 지적인 면과 정적인 면을 동시에 하나로 합쳐서 충족시키려 했으나, 이들의 시도도 삶의 정황적인 현실차원을 강조하는 실존주의 대두와 성서에 대한 비평주의적 태도, 자유주의적인 신학에 밀려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성서에 대한 주지주의적인 비판에 맞서서 신앙과 신학을 지켜 보겠다는 신학운동이 미국의 보수 주의자 가운데서 근본주의 신학운동이란 이름으로 전개됐으며, 이들의 운동은 당시 미국을 휩쓸었던 무디(D. L. Moody)적인 신앙부흥운동과 결합함으로써 다분히 탈속적이면서도 종말적인 현실관에서 선교에 대한 정열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같은 시대적 신앙적 분위기에서 한국에 건너올 미국선교사들은 보수주의적 신앙에서 선교에 임했다.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적 신앙에서 있었는가”라는 주제는 많은 논란을 거쳐야 할 사항이다. 선교사들은 자신이 근본주의자라고 불리기 보다는 “보수적 복음주의자”로 불리기를 더 좋아하지만, 이들의 신앙관과 가르침에는 근본주의적 면모가 분명하게 들어 있었다. 그래서 소위 “보수적 복음주의”라는 용어 속에는 광의적으로 근본주의적 신학사상과 칼빈주의적 청교도 사상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고 말하겠다. 이러한 양면성에 대한 좋은 증거로는 당시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회의 총무로 있었던 브라운(A. J. Brown)의 논평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나라를 개방한 이래 처음 25년간 전형적 선교사의 모습을 퓨리턴 형의 사람들이었다. 이 퓨리턴 형의 선교사는 안식일을 지키되 우리 뉴 잉글랜드 조상들이 한 세기 전에 행했던 것과 같이 지켰다. 춤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등은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 이나 성경을 비판할 때 이러한 선교사들은 강력하게 보수주의적이였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 한 전천년의 견해는 없어서는 안될 진리라고 주장했다. 고등 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 한 이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서는 현대적 견해를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특별히 장로교 선교단에서 그 앞길이 험준하다.
북장로교는 최소한 이러한 기준에서 선교사를 선발했을 것이며, 한국에 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의 선교사들은 이러한 기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829년에 개교해서 한 때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 됐었고 많은 신학자를 배출했던 맥코믹(McComick) 신학교에서 공부한 마펫(Samuel A Moffett: 마포삼열)은 신학생 때에 무디의 강력한 감화와 영향력을 받은 “학생자원 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참가해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한국에 처음 왔을 때(1890)를 상기하면서,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복음전도를 개시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가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 이외에는 전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든지 죽든지 구원의 복음만을 전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고 1934년 선교 50주년 기념예배에서 회상하였다. 블레어(Blair:방의량)는 마펫을 회상하면서,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소망은 그의 매우 소중하고, 그의 사상과 가르침에 특징을 주었다.”고 하였다. 덧붙여서, 그는 마펫은 “정당한 의미의 근본주의자”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신앙관에 있었던 마펫은, “조선 모든 선교사가 다 죽고, 다 가고, 모든 것을 축소한다 할찌라도 형제여! 40년 전에 전한 그 복음 그대로 전파하자..... 변경치 말고 그대로 전파하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라고 한국교회에게 당부하였다. 보수적 근본주의 특성가운데는, 그들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보지 않는 편협성이 있었는데, 이러한 편협성을 마펫을 위시한 상당수의 재한 미국선교사들에게서 발견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신학의 갈 길이다고 쳔명한 박형룡 박사의 말은, 결국 한국신학의 편협성을 드러낸 표현이다. 이러한 편협성에서 오는 신학활동의 제한, 보수적 교리주의 팽배 등은 결국 교파의 분열이란 아픔을 낳게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국교회는 우리 교단만 하더라도 1960년대부터, 합동과 분리된 뒤로부터, 신학활동의 자유가 점진적으로 보장되면서 목회자 상호간의 신학적 연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됨으로서, 칼빈(John Calvin)이 목표로 세웠던 신학적-목회자(Theological minister)의 상을 구현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좀 더 밝은 미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앞으로를 제시해야 한다. 첫째, 한국의 신앙과 신학은 2,000년 기독교 역사의 정통적, 전통적맥락과 전승에 바르게 서서 한국적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형성했는가? 이종성 박사는 한국의 신학을 수입신학이라고 단정하면서 서구의 신학을 너무나도 쉽게 유행시키는 잘못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였다. 한국의 신학은 신학교육의 짧은 역사와(장로회 신학교가 1901년에 세워졌다고 하나, 정상적인 신학활동은 1955-1960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인한 신학적 축적의 빈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신학적 준비가 있었는가? 신학적 준비란 신학을 할 수 있는 어학적 준비를 우선적으로 들 수 있다. 서구 신학은 고전어에 대한 습득과 각종 자료정리, 번역, 출판 등으로 자국어로 신학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길을 마련해 놓았다. 또한 신학의 각 분야에 걸친 교수진의 부족에서 오는 교육의 결핍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와 신학간의 끊임없는 대화로 원만한 상호보완적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학의 준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입신학의 단계에서 벗어나 한국의 신학을 정립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1960-70년대에 시도된 한국적 토착화의 신학은 이종성 박사의 지적대로 어설픈 한국적 신비주의의 무당종교, 혹은 혼합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국의 신학은 “신라의 원효로부터 시작해서, 고려말의 3은의 충절과 조선조 사육신의 절개, 영남의 퇴계 이황, 호남의 고봉 기대승, 경기의 율곡 이이 등의 3대 학풍과, 정약용의 실사구시의 실학사상과, 매천 황현, 민영환 등의 민족주의적 정신, 서재필, 안창호 등의 민족주의적 기독교의 꿈을 이어 받아서, ‘한국적 선비 정신을 살리는 신학’의 정립”을 앞으로는 한국적 신학으로 세워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 각 신학교마다 한국학을 가르쳐서 기독교 정통, 전통 신학과 결합한 한국적 정통신학을 수립해야 한다. 지금부터 준비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20-30년 후에 그 결과가 나타나겠지만, 현재적으로 많은 신학자, 목회자 들이 한국적 정통신학의 수립에 관심을 보임으로써 밝은 앞날을 기대해 본다. 개신교의 전통은 항상 개혁하는 교회, 항상 개혁하는 신앙, 항상 개혁하는 신학일찐데, 우리는 선교사들의 전래 신학을, 그것도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일부 지지자들이 이룩한 신학을, 지상의 목표로 보수하던 우둔함에서 벗어나서 한국적인 기독교 신학의 정립을 세울 시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한국적(민족주의적) 기독교 신학, 신앙의 수립은 종교 개혁적 전통에 입각한 것이므로, 지금부터는 종교개혁의 민족주의적 원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Ⅲ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루터(Martin Luther)가 1517년 만성절을 기해서 95개 신조를 위텐베르그 대학의 성당대문에 게시한 이래, 카톨릭측의 반발과 국민들 사이의 이해와 호응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종교개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결정적인 3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독인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Address to the Chritian Nobility of German Nation)은 독일국민에게 민족주의적인 정신을 갖게 했으며, 이로 인해서 루터의 개혁운동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논문이 유럽전역에 확산되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강력한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원동력을 얻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독일이 로마의 재정적 공급처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외치면서 독일인의 독립적인 교회건설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로마에게 지금까지 바쳐오던 첫 수입세(Annates)를 폐지하고, 독일내의 교구에 독일인이 선출한 독일인 주교의 임명, 개교회의 권리회복 등을 피력하면서 돈만 낭비하는 로마 순례를 중단하자는 등..... 민족주의적, 민족자강적 의지를 역설하였다. 쯔윙글리(Huldreich Zwingli) 당시, 스위스의 주요한 수입원은 로마나, 프랑스 등 유럽각지의 용병으로 팔려감으로써 얻어내는 자금이었다. 쯔윙글리는 스위스의 젊은이들이 무의미한 타국의 전투에서 피를 흘리는 인명살상을 막고, 자국인의 생명을 보호하자는 의미에서 ”용병제도를 반대하는 설교”를 쓰다가 부호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목회지를 옮기기까지 하였다. 쯔윙글리는 자신이 고국을 지키기 위한 샤펠(Chappel) 전투에 참가하여서 전사하기까지 스위스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민족주의자였다. 칼빈(John Calvin)도 <기독교 강요>의 서문에서 프랑스의 왕 프란시스 1세(Francis 1)의 통치아래서 억압당하고 고난받는 ”거룩한 순교자”들을 위해서 개신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는 동포애에서 이 책을 쓴다고 저술 목적을 밝혔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에게는 민족적 차원의 교회건설에 대한 염원, 동포애, 국가에 대한 사랑이 넘쳐 흘렀다. 루터가 “복음에는 국경이 없으나 나는 독일인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라고 한 것처럼, 복음의 보편성과 더불어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의식이 개혁자들의 개혁의지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에 한국을 이해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는가? 더 나아가서 한국인들이 민족주의적 사고를 갖기를 원했는가? 질문해 본다. 한국에 들어 온 초기 선교사들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보수적 정통주의.”,“보수적 복음주의(근본주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불간섭과 중립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마펫과 그외 여러 사람들의 증언처럼 복음만(Only gospel)을 전했다고 한다. 물론 이론적인 면에서 바울의 선교정책을 따라서 외지에 들어간 신흥종교가 발붙일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정착기간동안이라도, 정치와 종교를 이원적으로 보는 정교분리를 내세울 수 있었으리라고 보며, 또한 현실적인 면에서 20여년전 (1860년)의 카톨릭 대박해(병인교난)를 생각하면서 복음만이라는 미명아래 선교에 임했다 하더라도 한국의 입장은 아주 달랐다. 식민지 확보운동의 후발대로 출발한 미국은 (남북전쟁과 기타 여러 조건으로) 카리브 해안의 몇나라와 아시아의 약소국가들을 식민지로 삼으려 했다. 결국 아시아에서는 필리핀과 한국이 아직까지 비식민지이어서, 아시아의 샛별로 등장한 일본과 마찰을 피해야 한다는 역학관계에서, 선교사들은 자국정부의 지시(?)에 따라서 조선정부와 마찰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의심은 알렌(Horace N. Allen)이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헤론(John W. Heron)에게 광혜원과 인근에서 환자전도 및 노방전도를 금지시킨 점, 이로 인해서 본국 선교회 총무의 긴장관계를 빚은 점과, 1888년 4월 당시 주한 미국 공사 딘스모어(Dinsmore)가 평안도 지방을 순회하던 언더우드를 불러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타이른 점에서 더욱 짙어진다. 당시 독립협회는 의회의 설립을 요구하면서 일본의 앞잡이인 황국협회와 대결했는데, 1898. 10. 29 종로거리에서 관민공동회를 열고 윤치호, 박정양의 인사말에 이어서 백정에서 자유몸이 된 박성춘의 애국적 연설 등, 기독교의 인물들이 반일적인 정치적 움직임을 계속 보이자, 1901년에 결성된 선교사 공의회(조선 야소교 선교 공의회)는 회보인 <그리스도인의 회보> 10.3 자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우리 목사들은 대한나라 일과, 정부 일과, 관헌일에 대해서 도무지 그 일에 간섭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것이요, 대한국과 우리 나라들과 서로 약조가 있는데... 우리가 교우에게 가르치기를 교회가 나라 일보는 회가 아니요, 또한 나라 일은 간섭할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 거스림이 없이 황제를 충성으로 섬기며, 관헌을 복종하며, 나라 법을 다 순종할 것이요... 교회가 사사로이 나라 일 편당에 참여할 것이 아니요...
이상의 인용문에서 “서로 약조가 있다”고 한 내용은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노력으로 한국의 선교활동의 거점을 확보한” 미국측 선교사들은 교인들의 정치적 현실참여로 선교의 문이 막힐까 매우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05. 9. 9 대한매일신보에서 “시야에 하등인민이 관리의 침어를 불감하야 교회를 의뢰하다가, 금야에는 왜인의 학대가 비상하므로 교회를 의지한다”고 분석한 대로 기독교의 개종이 정치적 피신 목적에서 비롯됨과 이로 인해서 결국 교인들의 교회를 통해서 반일반정부 행동을 취할 것을 매우 우려하였다. 이렇게 을사보호조약 이후 교인들 사이에 반일감정이 높아지자 하디(R. A. Hardie)는, “이러한 정치적 교회적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성령의 세례를 받는 길 밖에는 이 난경을 돌파할 길이 었다.”고 하였다. 하디는 1903. 8월 한국의 성령부흥 운동은 1907년 절정에 이르렀고 1910년 100만명 구령운동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현실을 도외시한 내세적 신앙으로 몰고 가는 결과를 낳았다. 서광선 박사와 김용복 박사는 1907년 대부흥회는 민족 감정의 비정치화 의도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비판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선교사들의 비정치, 중립정책은 1907년 초대총감인 이또오가 주한 선교사 회의에 참석해서, “나는 한국내 일본인들의 부정을 막는데 힘쓰겠지만 한국인의 교사이며 지도자인 여러분들은 전력으로 한국인들의 부당한 행동을 방지하도록 협조해 줄 것을 믿고 있다.” 고 연설함과 동시에 1905년 이후 계속되는 반일운동, 의병운동을 막아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때로부터 선교사들은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강조하게 된다. 물론 일본제국의 3등훈장까지 받았던 감리교의 감독 해리스(M. C. Harris)에 대해서는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일본정부의 요원이다.” 라는 비난이 쏟아졌으나, 그렇게 비난하던 장로교의 스미스(W. Smith)까지도 1908년 보고서에 “...그러나 우리의 생각에는 한국의 현재적 상태보다는 (일본에의) 합병이 더 나을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장로교 선교사 쿤스(W. Koons)도 1908년의 보고서에
우리는 한국인에게 일본에 복종하는 것이 당신들의 의무라고 밝히고... 독립을 위하여 일하지 말 라고 권고하였다... 나는 여러 시간에 걸쳐서 교회 임원들,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일본의 통치가 당신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병운동에 말려들지 말라... 방방곡곡에서 일본인들에 대하여 유격전이 감행되고 있었다. 만약 관서지방의 기독교인, 특히 평양의 길장로(길선주 목사) 의 감화가 없었다면, 이 용감한 투사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모든 지역에서 폭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현명한 기독교인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 정하신 바라고 깨우쳐 주었다. 교 회의 영향력으로 관서지방 전역이 유혈과 병화를 입지 않게 되었다.
라고 교회의 정치적 중립으로 선교의 위기를 모면했다고 보고했다.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반대하던 참정대신 한규설은 면직과 3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유배형은 감형됐으며, 황성신문의 사장인 장지연은 <시일야 방성대곡>에서 <이등방문이 평소 동양 3국의 정립을 외치던 자가... 어찌 5조약을 제출했는고... 대신들이 영리에 눈이 어두워... 이천만 생령으로 노예가 되게 하는구나... 그렇고도 어떻게 황제를 대하며 2천만 국민을 대하려는가?... 단기이래 4천년 민족정신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망하는구나... 아, 슬프도다. 슬프도다.>라고 애통해 했으며, 민영환은 전국민에게 <나라의 수치요 국민의 수욕이다. 산자는 죽을 것이요 죽는 자는 살리니, 죽음으로 황제의 은총을 갚으며 2천만 동포에게 감사하느니... 동포형제여, 천만배가에 힘써 굳굳한 기상을 보전하고, 학문에 부지런하여 우리의 독립을 다시 찾으면, 죽어서도 기쁘겠노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그 이에도 조병세는 전국민에게 유서를, 이건섭은 아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한편으로는 의병운동이 창궐해서 참판을 지낸 민종식은 충남 홍주에서 500여 부대를 편성하여 대항하다가, 3일간의 홍주성 격전에서 순사했으며, 참찬을 지낸 최익현은 전주를 중심으로 궐기해서 태인 군수를 지낸 임병찬과 함께 순창에서 항거하다가 일본 대마도에 끌려가서 굶주림에 죽었다. 그외 경복 평해의 신돌석의 항거와 전라도 장성의 기삼연의 항거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렇듯이 비 기독교계열의 민족적인 인물들은 자결로써, 항쟁으로써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으려고 했는데, 교회는 선교사의 가르침에 따라서 묵묵히 지내야 옳았을 것인가? 알렌은 을사보호조약으로 미국이 철수한 사실을 미국의 과오라고 하면서, 미국은 해군 교역 기타의 문체에서 어떠한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을 기회를 상실했다고 아쉬워 했다. 자신이 21년간 조선에 거주하면서 신교선교단, 서양의학, 최신식 광산업, 증기기관, 철도, 전차, 상수도 등 새로운 기업체를 한국에 끌어 들여서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것을 자랑과 동시에 보람으로 여겼다. 그러면서 선교사는 어쩔 수 없이 정치와 상업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다고 피력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 했다. 우리는 세브란스병원을 세워 준 세브란스 씨(Mr. Severance)에게 감사하지만 그가 경영하는 스탠다드 석유회사(Standard Oil Company)의 저유 탱크가 인천항에 있었던 사실을 서글퍼 한다. 알렌의 소개로 평안도 운산 광산에서 막대한 돈을 벌던 미국인이 저임금을 지불하자(하루 10퍼센트:약 33전) 한국 노무자들의 반발로 40퍼센트까지 인상된 사실과 한국인 노무자들을 노예처럼 부리기 때문에 스트라이크가 일어났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비록 일부 몇 사람이었지만, 자국의 기업가들을 끌어들여서 막대한 이권을 갖도록 알선하면서, 정작 한국인에게는 독립운동도 하지 말고 경제적 수탈에 대해서도 아무말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복종하듯이 당하기만 하라고 했는지....? 이들의 가르침에 반대해서 민족주의적 신앙을 외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면 비신앙, 비복음, 자유주의자라고 한다면 루터, 쯔윙글리, 칼빈 등... 수많은 민족주의적 종교개혁자 신앙의 지도자들은 다 비신앙이고 비복음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라고 해야 옳단 말인가? 우리는 오늘날에도 외국의 경제적 침략을 교회에서 묵인하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한국의 농촌이 갈수록 피해를 입지 않도록 교회가 앞장서서 보호해야 하며, 한국인의 건강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교회가 보호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자각을 갖고서 사회를 이끌어 갈 때, 한국교회는 오늘날의 한국 역사적 현실에서 도외시 당하지 않을 것이며, 삼일운동을 이끌어갔던 선배교인들의 정신이 우리에게서 부활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과제를 이루기 위해서 교회는 먼저 단결하고 내적으로 새로와져야 하겠으므로, 종교개혁자들의 평등원리와 훈련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IV 중세는 사제의 중재(Mediation of Priest)를 교권확립의 수단으로 악용했으며 로마교황의 명령에 불응하는 사람, 지역에 대한 수찬정지의 발동으로 신자들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이를 수 있는 길을 봉쇄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위대한 발견은 신자는 혼자서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투신할 수 있다고 보는데 있었다. 누구든지 겸손하게 참으로 회개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아들안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사제의 중재없이 접근할 수 있다. 어떠한 외적수단(먹고, 마시는 것)등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즉 성육신하셔서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신 아들에 관한 소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직접 이를 수 있을 뿐, 사제의 중재적 역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만인제사장 설의 첫번째 의미이다. 그렇다면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은 어디에 있는가? 사제, 성직자, 교직자, 영적인 사람 등의 칭호는 교권자에 의한 지배적 칭호로 악용됐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봉사자, 섬기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즉 직분의 구별, 기능의 구별만 있을 뿐이다. 직분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 그 자체는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도 영적인 면과 특권에 있어서 성직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평신도도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동료 신자들 사이에서 다른 사람의 영적 진작을 위해서 기도하며 권면할 수 있다. 이것이 만인제사장 설의 두번째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구별된 특정한 의무를 수행하도록 선택됐을 뿐이며 그러한 기능을 지닌다고 해서 본래적으로 평신도보다도 더 거룩하게 구별되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성직자는 말씀선포와 성례전의 집행을 맡았다고 하지만, 다같이 성직자로 모인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대변자(Mouthpiece)로 있을 뿐이다. 이상이 루터가 말한 만인 제사장설의 의미이다. 그렇지만 만인제사장 설을 경솔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교회의 질서와 훈련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함에 따라서 칼빈은 교회의 훈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훈련의 실시자로서의 직제를 말하였다. 교회는 특별직에 속하는 사도, 성직자, 전도사를 갖는데, 이상 3가지 직은 영속적인 것은 아니나, 특별한 때에 필요에 따라서, 제정했다가 불필요 시에 없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교회의 필수직으로서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열거하였다. 이중에서도 목사와 교사는 없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목사는 공적인 말씀강화와 개별적이면서도 사적인 권고를 통한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을 집행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참된 선함을 가르치고, 거룩한 비밀을 간직하고, 온전한 훈련을 지키며 행한다. 교사는 교회의 설교가 성서적 바탕위에 바르게 서 있는가 해석하며, 장차 설교자가 될 사람의 양성의 과업을 맡는다. 장로는 목사와 더불어서 규율을 시행하고 개인적인 권고로 신자를 교회안에 머물게 하고, 무법자를 방지해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한다. 집사는 구제와 가난한 자와 병든자를 돌본다. 이렇게 직분을 구별했으면서도 칼빈은 <강요>의 최종판에서 목사는 장로와 교사의 직분까지 겸하여 맡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직임을 구별했다고 하지만, 직임 사이의 차등은 있는 것은 아니고, 신자들의 어미니이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봉사직의 구별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직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소명감이 있어야 하며, 각자 받은 은혜에 따라서 다른 지체에 봉사할 때에 올바른 수행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목사는 지배자로서의 권한을 갖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구”로서 봉사, 섬기는 직책일 뿐이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장로교회의 교회관 교직제도가 한국교회에 소개되어서 별문제 없이 유지되다가 근래에 들어서 특히 1970년대 이후로 교회의 권위, 목사의 권위, 목사와 장로간의 갈등이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감리교 신학대학의 박대인(Edward E. Poitras)교수는 “기독교인 사이에 권위가 없다” (Among Christians there can be no authority)란 글에서 한국교회의 권위의 상실은 카리스마운동의 도입과 더불어서 심각하게 됐다고 지적했는데, 참으로 정곡을 찌른 표현이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로 목회자는 카리스마적인 권위의 인물로 부각되었고 자신을 통해서 세상적인 성공, 건강, 부귀와 행복을 약속받는다고 설교하는 둥, 사람에 대한 권위 부여, 상업성, 주술성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이러한 요소를 갖추어야만, 소위 말하는 목회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카리스마 운동은 교회성장학과 손을 잡고 한국의 토속적인 주술적 요소까지 끌어 들임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의 섬김과 봉사의 정신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화란의 선교신학자 버카일(J. Verkuyl)은 이러한 교회성장적 선교의 목적은 미국의 상업주의, 기업 팽창주의가 교회에 파고든 것이라고 실랄하게 지적하였다. 요즈음 시행되고 있는 비 종교개혁적 전통의 권위물로는, 목사의 직을 성직이라고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자기가 설교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처럼 과장하는 태도, 목사에 대한 호칭(종님, 사자님...), 거대한 호화교회단, 내부치장물 등등을 열거할 수 있다. 루터, 쯔윙글리는 교회내에서 오르간까지 금지하면서 오로지 말씀 선포를 통한 은혜의 전달을 강조했으며, 교회당의 화려한 건축, 눈부신 치장 등은 가장 혐오하던 중세의 유산으로 거부하였다. 개혁자들은 심지어 예배와 성례전의 무절제한 집행이 오히려 권위를 상실시킨다고 해서 회수를 제한시키기까지 했음을 알아야 한다. 중세 15세기 말 독일 ?른시에서는 11대-교회당, 19교구 교회당, 22 수도원, 12병원, 76수녀원 등에서 하루 1,000여회 이상의 미사를 집전했으며, 교회의 성물로는 70금컵, 50은컵, 2개의 은쟁반, 450벌의 예복(귀금속 단장)등 호화판이였으며, 각종 종교행사, 축제, 행렬 등으로 점철됐었다고 한다. 이러한 시설의 유지를 위해서는 자연히 금전의 요구가 뒤따랐으며, 자금조달의 명목으로 각종 예배, 헌금이 제정되었다. 교회의 권위, 목회자의 권위, 교직자 상호간의 갈등의 해소는 수직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수평적 사고를 갖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과는 수직적 관계이지만 인간들 상호간에는 수평적관계만 있을 뿐이다. 더우기 종교적 권위는 대변적 권위로서 그 권위를 인정하는 신자들의 개인적인 동의에서 나오는 것이지, 강요에 의해서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박대인 교수는 어거스틴, 루터, 웨슬리, 심이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권위론까지 인용하면서, “설교자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변적 권위를 넘어 설 수 없다. 그리고 도덕적 표준이라고 공동체 내에서 인정되는 도덕적 대표권위만 있을 뿐이다.”고 결론을 말했다. 오늘날 교회는 실추되어가는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말씀의 전달자라는 겸손한 자세와 도덕적 표준으로서 정결한 삶을 살아 감으로써 신자들과 지역사회를 참된 봉사자로 섬기는데서 회복될 것이다. 이상 말씀드린 권위의 문제와 연결해서 한가지 더 생각할 주제는 훈련이다. 초대교회는 훈련을 교회의 중추적인 모습으로 생각했으며, 훈련의 중추는 출교(ex-communication)라고 여겼다. 칼빈도 이러한 초대교회의 예를 그대로 실시하면서 중세의 각 도시에서 일반적으로 실시하던 훈련규정들을, 즉 사생활 규제 규율들을 그대로 묵인하였다. 따라서 칼빈은 제네바 시에서 하녀가 비단 앞치마를 둘렀다고 해서, 아버지가 호화한 결혼 축하연을 베풀었다고 해서, 어머니가 딸의 결혼식에 너무 호사스럽게 치장시켰다고 해서 시의회에 소환시키곤했다. 쯔윙글리, 불링거 등은 이렇게 엄격한 칼빈의 규율에 반대했으나, 칼빈의 엄격주의는 영국의 청교도 정신에 반영되어서 오락금지, 영화관람 금지, 노름 금지, 흥행, 춤 금지등의 검소, 절약, 금욕적 자세로 이어져서 선교사들을 통해서 한국교회에 전래되었다. 1897년 선교사들은 한국 장로교회 신자들의 규율을 선포했는데,
1. 조상의 영들을 숭배하는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 한분만 섬길 것. 2. 주일날 휴식, 필수품 구매금지, 노동금지 3. 부모효도 4. 축첩 반대(일부일처제도) 5. 찬양 및 기도에 전념하고 주님만 신뢰하고 순종하라. 6.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라. 욕심내지 말고, 도적질 말고, 정당하게 살며 자신과 가족을 부지하라. 7. 술, 노동, 마약 금지
등 이었다. 이러한 규율에서 선교사들은 술, 담배 상습자, 축첩자에게는 세례는 베풀지 않았으며 검소, 절약 부지런함 등을 가르치며 정직을 강조했다. 조상숭배에 관해서 1926년 변영태 씨는 “조상숭재에 관한 나의 태도”라는 글에서 조상숭배를 무조건 반대시킨 선교사들의 결정은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착상이라고 비난하면서 조상에 대한 추모기념의 뜻으로 간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따라서 교회는 조상숭배를 금했으며, 이로써 기독교의 혼합화를 방지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번영태씨의 주장처럼 조상숭배의 의미를 추도, 추모, 기념으로 보전하는 놀라운 유연성을 찾았다. 술, 노름, 마약 등의 금지는 경제적, 보건적 차원에서 기여했으며 부지런함과 정직의 강조는 경제적 자립과 신뢰의 측면에서, 그리고 축첩제도의 금지는 인권적, 윤리적 차원에서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전통은 앞으로도 계속지켜 나가야 할 좋은 것이지만 지나친 율법주의적 엄격주의에 빠져서 더 중요한 사랑을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예로써 1925년 여름. 평남 평원군 순만면 남창리에서 발생한 헤시머(Hasymer:허시모)사건을 들 수 있다. 민경배 교수는 이 사건을 민족적 차별대우의 차원으로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허시모 선교사(안식교)는 자기 집 사과밭에서 사과를 몰래 따 먹은 김명섭(당시 12세)의 얼굴에 염산으로 ‘됴적’이라고 써서 한시간 동안 햇볕에 말린 후에 풀어 놓음으로써, 됴적이라는 글자가 그의 얼굴에 지워지지 않았다.
훈련과 규율을 강조하되, 규율을 문자적으로 고수해서 율법과 행위가 있으므로 신앙이 있다고 하는 율법주의는 배격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초기교회들이 행했던 권징조례는 지금도 유효한가? 오늘날은 교회의 권징이 지켜지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상실, 교회의 수적 팽창과 연결해서 반성해 본다.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상호존중과 신뢰가 회복된다면, 옳바른 권징조례의 발동으로 질서회복을 가져 올 것으로 본다. 결국 교회의 권위회복, 정당한 권징의 실시 등은 교인들에 대한 충분한 교육, 기독교인의 전체의 자질향상을 통해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교육적 전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V
종교개혁의 교육적 전통은 무엇보다도 루터가 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로 평생동안 재직했다는 사실과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Geneva Academy)를 설립했다는 사실부터 언급해야 할 것이다. 루터는 “독일의 모든 도시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해서 보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시 의원들에게 보내는 글”(To the Councilman of all cities in Germany that they establish and maintain Christian School)을 써서 각 도시의 의회로 하여금 학교를 세워서 자녀교육에 힘쓸 것을 종용했으며, “어린이를 학교에서 보호해야 함을 강조하는 설교”(A Sermon on Keeping Children in School)에서는 자녀교육은 하나님 앞에 사제와 백성의 종을 양육시키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칼빈도 그의 <강요>의 서문에서 강요를 저술한 목적 가운데 성서를 연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성서에 대한 안내서, 교과서를 마련해 주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였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피신해 있는 기간에 교구목사와 신학교수로 지냈으며 제네바에 다시 돌아온 이후에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워서 Schola privata에서는 16세까지의 아동교육, Schola publica에서는 대학교육을 시켰다. 칼빈은 이곳에서 신학과 성서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희랍어, 교양과목까지 가르쳤다. 이들 종교개혁자들의 교육적 전통을 이어 받아서 영국의 청교도들과 회중교도들은 미국에 이주해서 하바드(Havard), 코넬(Cornell)등 대학을 세웠으며 이러한 바탕에서 부슈넬(Horace Bushnell)의 “기독교 양육”(Christian Nurture)의 사상이 생겨났다. 대륙의 경건주의도 할레(Halle)대학을 세워서 자녀 교육에 힘썼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교육적 전통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에 온 초기 개신고 선교사들은 곧바로 교육사업에 착수하여 1886년의 배제, 이화, 경신, 1887년의 정신여학교, 1897 숭실, 등의 학교의 건립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한국의 신식 서구 학문은 선교사들의 손에 의해서 시작되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들의 교육사상은 극히 보수적이었으며, 선교적 차원의 교육이었으며, 그래서 예수를 믿게 하는 수단으로서의 교육이었다. 해외 선교부 총무였던 스피어(R. E. Speer)는 이러한 교육적 선교의 목적을 밝히면서
비교독교인들에 대한 교육은 우리의 사명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전할 뿐이다. 신자 들과 그들의 자녀는 봉사로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당연한 가장 큰 교육의 문제는 교육이 세속화 되어 가는데 있다.
고 했다. 이러한 교육을 통한 선교의 의지는 1910년 한.일 합병 후 종교 교육을 실시할 수 없게 되자 “선천 여학교”를 폐쇄시킨 조치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선교회는 한국 내의 선교 교육을 초, 중등으로 대부분 국한 시키면서, 대학교육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이였다. 연세 대학교의 설립문제로 평양 선교부와 서울 선교부 사이에 알력이 생기는 등 대학 교육은 처음부터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일반 학문 분야가 아닌 신학교육은 어떠한 목표 아래 진행 되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레이놀드(W. D. Reynold:이눌서)의 한국 교회 교역자 양성론을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네비우스 선교 방법론에 충실하면서, ”자기 희생 정신과 자신력과 자존심”을 가진 인물을 목회자로 선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896년에 한국 교회 목회자 양성론을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으로 구별해서 제안하였다.
<적극적인 면> 1. 그로 하여금 높은 경지의 영적 체험을 가지는 사람이 되게 할 것.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추구할 것 2.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와 사실을 철저히 통달하게 할 것. 3. 청년 목사 지원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정병으로서 곤란을 참을 수 있도록 훈련시킬 것. 4. 한국 기독교인의 교양과 현대문명이 향상됨에 따라서 한국인 목회자의 교육 정도를 높일 것. 그의 교육은 일반에게 존경을 받고 권위가 설 수 있도록 한국인의 평균 교육수준보다 약간 높으리만큼 하고 너무 지나쳐서 일반이 경원심이나 이탈감을 가지지 않도록 할 것.
이러한 교육 목표는 네비우스(J. Nevius)의 3자 원칙(자립전도, 자립자조, 자립자치)을 실현키 위함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레이놀드 목사는 1892년 한국에 와서 어학훈련을 쌓다가 1893년 5월 어학 선생과 함께 강화도에 가서 어학 실습을 하였고, 1894. 4월 전라도 여행을 하였으며, 1895년 성서 번역 위원으로 선정되어서 1897년까지 서울에 머물렀는데, 이 사이인 1896년에 목회자 양성지침을 발표한 것이다. 한국에 온지 불과 4년만에 이와같은 목회자 양성지침을 발표한 것은 아무래도 시기적으로 빠른 듯 하며, 자신이 목회자 양성에 직접 관여치다 않은 상태에서 (평양 신학교는 1901년 시작했고, 레이놀드 목사는 1917년에 신학교 교수가 되었음)이러한 지침을 발표한 것은, 홍치모가 지적한대로 평양신학교의 3대 인물은 마펫, 레이놀드, 클라크라고 생각할 때에, 그는 선교 초기에 생각했던 목회자 양성 지침을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실천에 옮겼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복음주의적이고, 체험적이면서도 순수한(?) 목회자 양성지침을 주장하게 된 데는, 당시 서구 신학이 자유주의적으로 흐르고 있었다는 점과 한국교회 교인들이 서구 선진문화를 접촉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에서 신학수업을 받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인 것으로 판단했었으리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래서 소극적인 면 제3항에서 언급한대로 “선교사업의 초창기에 있어서만은”이란 조건적인 시간을 이해할 수 있으나, 이 선교사업의 초창기를 언제까지로 계산할 것인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1896년 레이놀드 목사가 목회자 양성지침을 발표한 이래, 최소한 남장로교 선교구역에서는 1903년 오긍선씨를 선교사 알렉산더(Alexander)가 자비로 유학시켜서 한국인 최초의 피부와 전문의로 육성하여 1934-1940년 까지 세브란스 병원의 최초 한국인 병원장을 역임하게 했으며, 또한 1922년 광주 양림교회 장로와 담임목사로 시무하던 남궁혁씨를 미국에서 신학박사(신약학)학위를 취득케 해서 1927년에 최초의 평양신학교 한국인 교수가 되게 한 사례가 있을 뿐이었다. 북장로교 선교 구역에서도 한국인에게 신학교육을 시킨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이렇게 볼 때, 장로교 선교사들은 한국인 교역자들이 수준높은 신학교육과 일반 학문에 대한 교육을 받는데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반면에 교회의 건립, 확장 쪽에 더 전념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한국 교회 목회자의 수준을 적극적인 면 제4항에서 언급한대로 “한국인의 평균 교육 수준보다 약간 높으리 만큼”억제시켰다. 그래서 신학교는 1개 뿐이었고, 학생수는 1901년 2명으로 시작해서, 1907년에는 82명, 1914년에 230명으로 가장 많다가 점점 줄어서 1919년에 20명, 1920년에는 다시 150명이었으며, 그 후로도 계속 줄어서 1934년에는 108명이었다. 반면에 성서학원은 1907년 평양에서 시작해서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이었으나 (1년에 1-2달씩 5-6년 코스로 운영됨), 성경뿐만 아니라 성서지리, 요리문답, 설교학, 교회사, 선교학, 주교 방법론, 음악, 수학, 위생 등 교역자 양성과목까지 가르쳐서 성서학원 졸업자를 목회자로 배출시켰다. 이렇게 성서 학원은 권장 기관으로 성장했으며 1912년에 7개(502명), 1914년에 11개(1,011명), 1919년에 15개(777명), 1920년에 14개(1,239명), 1934년에 16개(1,694명)등으로 신학생들 보다는 성서학원 출신 교역자가 숫적으로 단연 우세하였다. 기독교는 일반학문과 신학을 멀리 했다. 다른 분야로 많은 젊은이들은 외국에 가서 서구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워오는 등 인재 양성에 힘을 썼는데, 기독교는 선교사들의 신앙과 교육지침을 고수하는데 만족하였다. 마펫은 “조선의 모든 선교사가 다 죽고, 다 가고, 모든 것을 축소한다 할찌라도 형제여! 40년 전에 전한 그 복음 그대로 전파하자..... 변경치 말고 그대로 전파하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은찌어다.”고 하였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에게서 40년 전에 받은 신앙과 학문을 고수하고, 거기에 머무르는데 만족하고 있을 때, 한국 사회는 발전하였다. 그 결과 적극적인 면 제 4항에서 지적한대로 목회자가 한국인의 평균교육수준보다 높아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평균 교육수준에 미치지 못해서 경원시 되고 이탈감이 생겼다고 본다. 이광수씨는 1917년 “금일 조선 야소교회의 결점”(Defects of the Korean Church Today)이란 글에서
종교 지상주의의 제2의 나쁜 결과는 학문을 천히 여김이외다. 교회에서 교육기관을 설비하면서 도 학문을 천히 여긴다 하면 모순된 듯하나, 소위 진실한 예수교인은 학식 ’세상지식‘이라 하여 극히 천대하며..... 악마의 유혹같이 원수같이 여기지요.....외국에 유학하러 가는 자는 이미 지옥 문에 발을 넣은듯이 생각하오... 지금 조선인들은 학문을 구하기를 갈한 자가 마실 것을 찾는 것같이 하여야 할 터인데요, 더욱이 놀라운 일은 목사, 장로 같은 교역자들이 ’세상지식‘을 반 대함이외다. 여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첫째를 자기네는 문명이라든지 과학에 대한 이 해가 전혀 없음으로... 둘째는 세상지식을 많이 배운자는 자기네의 소위 ‘하나님 지식’에 순종하지 아니함과 세째는 조금 ‘세상지식’을 가진 청년은 사실상 개화가 되어 신앙에 박약하여지고 어른을 경멸히 여기지요. 아무려나 지식을 천히 여김은 멸망의 본이라. 실로 가석한 일이라 하오.
라고 지적하였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에 대한 이해, 높은 경지의 체험, 성령의 충만함, 자력심 등은 모든 신앙인의 필수적인 구비조건에 속한다. 목회자는 여기에 덧붙여서 신학적인 전문지식, 일반학문에 대한 폭넓은 배움, 고귀한 인품을 지님으로써 시대적인 선구자로 앞을 내다보는 예언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놀드 목사의 목회자 양성론에 따른 한국 교회는 이광수선생이 지적한대로 일반 사회로부터 소외시되었고, 경원시되었음은 물론이려니와 한국 교회가 신학을 보는 견해도 일방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레이놀드 목사의 목회자 양성론을 빨리 벗어나고, 마펫이 호소했던 40년전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만 고수할 시기가 아니다. 한국적 신학을 정립해서, 칼빈이 말한대로 한손에는 성경과 다른 한손에는 신문을 들고서 한국사회와 교회를 이끌어 가는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대한 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써서 황제와 국민에게 헌정했던 헐버트(Homer B. Hulbert)는 한국인이 잠을 깨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맨 마지막 ‘한국의 장래’란 장의 맨 끝에서 “...교육에 투자된 자본이 더 크고, 더 확실하고, 더 유익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곳으로서 이 세상에서 한국 밖에 없다는 말은 한국인의 마음씨를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제시할 수 없는 의견인 것이다.”고 호소했다. 한국교회는 한국의 선비들의 후학양성 정신을 이어받아서 안창호, 이승훈 등의 교육 구국이념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것이 선교 2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의 최대의 과제라고 제시해 본다.
VI 종교개혁이 성공하기까지는 루터 한사람의 위대한 발견과 부르짖음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중세로붙너 이어져 오는 개혁의 의지들, 경건에 대한 각성, 사회적 정치적 변혁, 위클리프(Wickliff)와 후스(Huss)의 개혁운동과 순교, 휴머니즘의 충격, 십자군 전쟁 이후로 발전하는 시민사회의 대두와 자본주의 정신 등 모든 요소들이 면면히 흐르다가 루터라는 한 사람에게서 집약되어 분출한 것이다. 이렇듯이 교회 개혁은 오늘날에도 한 두 사람의 위대한 사상가가 외친다고 해서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의 모든 교회가 제 맡을 자리에서 성서적 원리와 개혁자들의 정신에 충실하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한국의 역사를 바르게 바라볼 때에, 그리고 그러한 교회가 전국적으로 편만하게 됐을 때, 교회의 개혁은 소리없이 이루어질 것이고, 계속적인 작업으로 이어질것이다. 그러한 미래가 멀지 않았다. 교회는 그날이 내일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그날이 왔을 때 일꾼이 부족하지 않도록 인재양성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바꿔 놓교야 말겠다는 소수들이 미래를 바라보는 눈망울에 기대와 확신으로 가득 채우고서 빛도 없이 알아주는 이 없이 제 맡은 자리에서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이러한 주의 백성들이 이 땅에 가득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이 땅에 하늘나라를 이루어 주실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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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경복의 희망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최경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