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溪 박희용의 麗陽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8월 17일 토요일]
이재유의 경성트로이카 시기 : 제1기 (2)
경성트로이카 시기 제1기는 이재유가 3년 6개월의 형기를 다 채우고 경성형무소에서 출옥한 1932년 12월 23일부터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된 1934년 1월까지 약 1년 동안에 활동한 공산주의 운동이다.
김경일 저 『이재유 연구』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출옥과 운동방침의 수립
1932년 12월 23일에 3년 6개월의 형기를 다 채우고 경성형무소에서 이재유가 출옥하였다. 곧 이인행의 방에 기숙하면서 이성출, 변홍대, 이종호, 김삼룡, 안병춘, 이순금, 서창, 유진희, 남만희, 정백, 정의식, 이동천, 김칠성, 이송규, 양하석, 황태성, 정칠성, 유순희 등을 만나며 정세 판단과 운동 방침의 수립에 몰두하였다.
공산주의 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면서 운동은 지하의 비합법 운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시한 대안은, 조직은 파업이나 맹휴 등의 혁명적 투쟁을 통해 결성되어야 한다는 것과 아울러 이는 어디까지나 한 지방의 단일한 조직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전제로서 서울지역의 당재건을 위하여 1933년 늦봄에 다음과 같은 5대 슬로건을 수립하였다.
1. 모든 대중투쟁은 반전, 반파쇼, 반제 투쟁으로 전화하자!
2. 섹트와 파벌 청산은 대중의 실천 투쟁의 가운데에서!
3. 당의 저수지인 혁명적 노동조합은 산업별 원칙으로!
4. 당재건은 대경영 세포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재건에서!
5. 선전, 선동, 조직, 지도자인 전국적인 정치신문을 창간하자!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1) 자신의 활동을 바탕으로 한 공장이나 경영 내에서의 기초 공작운동, (2) 다른 독자적인 볼셰비끼적 활동선과의 결합, (3) 국제선과의 연락의 정립, 즉 국제선의 올바른 지도와의 결합이라는 3대 운동 방침을 세웠다. 이 방침에 따라 안병춘, 최소복, 정태식, 이현상, 안삼원, 김형선, 변홍대, 서창, 미야께 교수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2. 트로이카 조직의 실체와 특성
후일에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진술한 조서에 담긴 트로이카 조직론은 다음과 같다.
과거의 운동 경험과 같이 쓸데없이 조직을 남발할 것이 아니라 우선 노동대중의 불평불만이 있는 곳에서 공산사상의 선전선동을 하여 대중을 획득하고 상당한 그룹이 결성된 때에 비로소 조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종래와 같이 사람을 지도한다거나 지도를 받는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함과 동시에 자신도 지도되는 것에서 공산주의자로서의 제1보를 내딛어 스스로 최하층의 노동자들과 교유하면서 대중층에서 동지를 획득하여 서서히 상부조직으로 전개하려고 한 것이 나의 근본방침이었다.
1933년 5월 이재유와 안병춘 두 사람이 최초의 최초의 트로이카 성원으로 된 것을 시작으로 9월에 이재유, 안병춘, 변홍대, 이현상, 최소복 다섯 사람에 의해 상부 트로이카가 형성되었다.
이 상부 트로이카 결성을 기점으로 하여 179명에 달하는 많은 하부 트로이카가 형성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이들에 의해 전개된 파업투쟁 노동운동의 현장은 다음과 같다.
편창제사, 중앙상공회사, 소화제사, 고려고무 및 동명고무회사, 조선견직주식회사, 서울고무회사, 종연방적회사 경성제사공장,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
트로이카가 조직된 각급학교는 다음과 같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경성제국대학, 셩성전기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배재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 경신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경성농업학교,」
또한 이재유 그룹은 운동방침서, 조사서, 선전물 등의 각종 출판물들을 작성, 발간하였다.
3. 혁명의 이론과 방침
당면 혁명의 성질과 전망에 관하여 일제 경찰에 진술한 조서에서, 이재유는 코민테른의 12월테제를 인용하면서 전형적인 러시아혁명 방식의 2단계 혁명이론을 주장한다. 전자본주의적 잔재와 유물의 파괴, 농업 제관계의 근본적 변혁 및 자본주의적 예속으로부터의 토지해방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을 당면한 혁명의 성격으로 제시하였다. 이것은 쏘비에트 형태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및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를 전제로 하여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하에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한다. 즉 자본성 민주주의 혁명과 농업혁명 및 노농정부의 수립이 조선 혁명의 과정 및 원칙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혁명의 주요 임무로서는 다음의 네 가지 사항을 들고 있다.
1. 일본제국주의의 타도
2. 대토지 소유의 해소
3. 7시간 노동제의 확립
4. 혁명 정세의 여하에 따른 모든 은행의 단일 국민은행으로의 합동
이 단일 국민은행 및 자본주의의 경영, 생산은 노동자, 농민 조합의 통제로 이행할 것.
또한 현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현실적 행동 슬로건은 다음의 5개 항목이다.
1. 제국주의 전쟁 반대,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
2. 일본제국주의 타도, 노동자-농민의 정부 수립
3. 모든 기생적 지주, 사사(寺社), 교회의 토지 몰수 및 농민에의 (무상 분배). 지주, 은행, 고리대에 대한 농민의 채무 (탕감)
4. 7시간 노동제의 확립 및 노동자 상태의 근본적 개선
계급적 (혁명적) 노동조합의 조직 및 활동의 자유
5. 쏘비에뜨동맹, 중국 및 만주 빨치산 운동의 옹호
이와 아울러 이를 위한 구체적 선동 슬로건으로 제국주의 전쟁 및 일본제국주의의 국민혁명을 대립시킬 것, 임금 인상 및 노동 시간 단축, 조선과 일본 및 중국 노동자의 단결, 일과 먹을 것을 다오, 토지를 달라,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 획득, 야만적인 학살 반대, 노동자-농민의 정부 수립 등을 제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혁명의 동력과 대상을 들고 있는데 전자는 노동자, 농민 및 도시 빈민을 주요한 요소로 하는 모든 민주주의적 세력을, 후자는 일본제국주의 및 이에 종속하는 바의 토착 부르조아지 및 기생적 토착 지주를 포함한다.
이재유는 특히 민족개량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민족해방운동과 민족혁명에서 가장 위험한 경향으로 지적하며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구체적으로 천도교도의 탈락자, 흥사단, 기독교와 불교 등의 모든 종교단체,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유진희와 김약수가 발간하는 잡지 등이 비난의 대상이었다.」
이재유는 발군의 실력과 끈질긴 노력으로 1년 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을 포섭하여 공장과 학교에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활동은 1934년 1월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중단되었다.
트로이카 조직 원리를 현장에 적용한 것은 이재유가 한국인의 독불장군 근성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은 저마다 똑똑하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남의 밑에 들어가기를 극도로 싫어하고, 들어갔다 해도 틈만 나면 수장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고, 여의치 않으면 조직에서 나와 다른 조직을 만들어 수장 노릇을 한다. 조선시대에는 당파가 여러 가지였고, 같은 당파 안에서도 앙앙불락하며 다투다가 분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근성이 일제시대에도 이어져서 저마다 독립운동 조직과 단체를 만들었다. 크게 좌익과 우익, 중도 세 갈래로 갈라지고, 각 갈래에서도 수많은 파로 갈라졌다. 해방되고서도 그 근성이 이어져서 해방 직후 정당과 사회단체가 수백 개가 되었다.
그러나 트로이카 조직은 여러 명의 공동대표이기 때문에 각자가 명예를 지키고 자존심을 유지하면서 활동하기에 유리하다. 이재유가 트로이카 조직론을 생각한 것을 보면 조직의 수장 자리보다 공산주의 운동에 전념하고자 하는 진정성을 볼 수 있다.
이재유가 주장하는 <혁명의 이론과 방침>을 보면 전형적인 공산주의 이론에 충실하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은 1917년의 러시아와는 정세와 상황이 다르다. 러시아는 독립국으로 초기 산업발달로 도시가 팽창하며 공장노동자가 많았지만 소자작농이 80%인 식민지 조선은 일제의 탄압이 매우 과격했으며 공장노동자는 극소수였다. 극우노선을 지향하는 식민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노동운동조차 과격하게 탄압했다. 하물며 공산주의 운동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상태의 식민지 조선에 러시아혁명의 공식을 대입해선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의 최대 목표는 노동 해방이 아니라 민족해방 조국독립이었다. 그럼 공산주의 운동이 민족해방과 조국독립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그런데도 대토지 소유자와 자본가뿐만 아니라 소부르조아지와 소시민, 종교인들까지 모두 적으로 삼아서는 해방과 독립이 아니라 공산주의 운동부터 성공할 수가 없다.
노동자-농민을 동력으로 삼되 소부르조아지와 소시민, 자작농과 중농까지 아군으로 삼고, 온건하고 양심적인 대지주와 종교인들도 우군으로 삼는 전략이 필요했다. 민족개량주의와 사회민주주의까지도 포함해야 했다. 그리하여 해방과 독립을 이루고 난 다음에 공산주의 운동과 전략을 본격적으로 전개해도 됐다. 그런데 애초부터 프롤레타리아계급투쟁론을 무오류의 강령으로 삼아, 아군과 우군이 될 수 있는 중간계급을 배척해버리니까 일이 성공될 수가 없었다.
이재유가 수입 공산주의 운동에 무조건 추종하지 않고 토종 공산주의 운동을 생각하고, 오르그 조직론보다 트로이카 조직론을 활용할 만큼 전략적인 사고를 했는데, 공산주의 이론을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는 전략에는 소홀했다.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이론을 1930년대 중국의 현실에 맞게 수정, 변화시켜 마침내 중국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이재유만이 아니라 조선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1910년대에 수입된 공산주의 이론을 현실에 맞게 한 자 한 치도 수정하지 않고, 변화시키지 않고 100% 순수하게 고집했다. 고려 말에 수입된 주자학이 한 자 한 치도 수정, 변화하지 않고 조선 5백 년 동안 강고한 벽이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