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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7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6년 7월 15일(금)
장소 : 원주 흥법사지. 비두리 귀부 및 이수. 법천사지. 거돈사지. 충주박물관 및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반월당(08:00 출발) - (238.8km. 2시간40분) - 흥법사지(10:40 도착. 관람 1시간. 11:40 출발) - (12.6km. 27분) - 비두리 귀부 및 이수(12.07 도착. 관람15분. 12:22) - (16.4km. 24분) - 부론면소재지(12:46 도착. 점심 1시간. 1:46 출발) - (2.0km. 6분) - 법천사지(1:52 도착. 관람 1시간.2:52 출발) - (9.1km. 16분) - 거돈사지(3:08 도착. 관람 50분. 3:58 출발) - (31.5km. 43분) - 충주박물관.중앙칠층탑(4:41도착. 관람1시간.5:41 출발) - (18.0km. 2시간) - 반월당(7:41 도착)
* 7월에는 중원 지방의 3대 폐사지(흥법사지.법천사지.거돈사지)를 답사합니다. 대구에서는 잘 답사하지않는 곳을 선택하였습니다.
* 현지 사정에 따라 현동 될 수 있습니다.*
* 신청 : 남무열문화유적답사팀장 010-3510-4950(선착순 40분 모십니다) *
흥법사지(興法寺址.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호.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번지 외 7필지)
흥법사는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신라 때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진공대사탑 및 석관(보물 제365호)이 있었는데,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현재는 흥법사지삼층석탑(보물 제464호), 진공대사탑비(보물 제463호)만이 남아있다.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原州 興法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464호.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번지)
흥법사터라고 전하는 밭 가운데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흥법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던 거대한 사찰로, 원래 탑 외에도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보물 제365호) 등이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두고, 그 위로 기와집 모습을 본뜬 듯한 탑신(塔身)을 3층으로 쌓아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3개씩 새겨져 있는데,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층 기단의 윗면은 경사져 있고, 보기 드물게 중앙에는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받침을 3단으로 조각하였다.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시고 있는 탑신은 기단에 비해 너무 작은 모습이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으며, 1층 몸돌에는 네모난 문비가 새겨져 있고 문비 안에는 마멸이 심한 문고리 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은 두꺼워 보이고 경사가 가파르며, 아래받침은 얇게 4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가에서 살짝 위로 들려있어 고려시대 석탑임을 잘 드러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머리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露盤)만 남아 있으나 그 마저도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이다.
기단과 탑신의 불균형이 눈에 띄며, 돌의 구성이나 조각수법이 소박한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傳) 原州 興法寺址 廉居和尙塔. 국보 제104호.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용산동6가))
◇시대 : 통일신라 말기 승려 염거화상의 사리탑.
◇내력 : 염거화상(?∼844)은 도의선사의 제자로, 염거화상은 가지산문의 제2조로서 선(禪)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던 당시 주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며 선을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체징에게 그 맥을 전하여 터전을 마련한 뒤 문성왕 6년(844)에 입적하였다. 이 부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남아 있는데, 원소재지나 연대 등은 아직도 불확실한 점들이 있다. 원주 흥법사지에서 1914년경 서울의 파고다공원으로 옮겨졌다고 하며, 해방 뒤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경복궁 중건 공사로 1990년대에 국립고궁박물관(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뒷뜰로 옮겨졌다가, 2004년 현재의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앞뜰로 옮겨졌다. 이 부도 안에서 나왔다고 하는 염거화상명탑지(廉巨和尙銘塔誌) 동판(銅板)에 근거하여 844년 입적한 염거화상의 부도로 생각하고 있다.
◇양식적 특징 : 신라 부도 전형 양식의 기원이 되는 것은 도의선사의 제자인 염거화상의 부도이다. 이 부도는 마치 장고의 몸체를 연상케 하는 형태[고복형(鼓腹形)]의 연꽃 받침대에 8각당을 얹은 모습[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을 하고 있다. 염거화상의 부도는 이후 하대 신라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모든 부도의 기본 형태가 되고 있으므로 중요하다.
이 부도의 옥개석 지붕모양은 기왓골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고, 막새기와 모양, 밑면의 서까래 표현 등은 거의 실제 건물의 기와지붕을 조각되어 있다. 처마 밑에는 비천, 탑신에는 사천왕, 탑신받침 안상(眼象) 안의 천인(天人), 상대석의 연꽃잎, 중대석의 여러 무늬, 하대석의 사자 등이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8각형 건물 모양을 모사한 부도이다. 탑은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륜부에 머리장식이 탑을 옮기기 전까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탑을 옮겨 세울 때 그 안에서 금동탑지(金銅塔誌)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통일신라 문성왕 6년(844)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사리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단아한 기품과 깨끗한 솜씨가 잘 어우러져 있다. 이후 대부분의 사리탑이 이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최초의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염거화상의 제자인 보조선사의 부도(880)에 이르면 9세기 하대 신라의 석조물에서 부도가 지닌 위치를 확연히 확인하게 된다. 9세기 경주의 중앙 귀족 문화를 본뜬 석탑은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졌다 할지라도 새로운 양식인 부도의 건조에는 온갖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 및 石棺.보물 제365호.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용산동6가))
진공대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과, 그 옆에 놓여있는 돌로 만든 함이다.
본래는 강원도 원주의 흥법사터에 있었으나 1931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진공대사는 통일신라말 ·고려초에 활약한 승려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 신덕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특히 고려 태조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형태로, 기단(基壇)의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 표면에는 웅장한 구름과 함께 뒤엉켜 있는 용의 몸체를 생동감있게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독특하고, 앞뒤 양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이 각각 새겨져 있다. 그 위로 얹혀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과 2중으로 된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다. 경사가 완만한 낙수면은 8각의 모서리선이 굵게 새겨져 그 끝에는 높이 솟아있는 꽃조각이 달려있다. 특히 낙수면에는 기와를 입힌 모양의 기왓골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처마 끝에 이르러서는 암막새, 수막새까지도 자세히 조각됨으로써 밑면의 서까래와 함께 당시 목조건축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8각의 작은 지붕모양의 머리장식인 보개(寶蓋)가 있다.
한편 탑의 왼쪽에 따로 놓여 있는 돌로 만든 함에는 불교경전과 함께 관련된 유물을 담아두었는데, 뚜껑까지 완전하게 남아있어 그 가치를 지닌다. 지붕의 윗부분을 수평으로 자른 듯한 뚜껑돌과 긴 상자 모양의 몸통으로 이루어진 이 함은 거의 완전하며 온화한 품위를 보여주고 있다. 두 유물의 조성연대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고려사』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태조 23년(940)으로 추측된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碑. 보물 제463호.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번지)
흥법사터에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깨어진 채 경복궁으로 옮겨놓아 이곳에는 비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진공대사는 장순선사(長純禪師)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공양왕 때 귀국한 후 왕의 스승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에도 태조가 그의 설법에 감화하여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비를 이고 있었던 돌거북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만(卍)자 무늬와 연꽃이 새겨져 있다.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다른 두 마리는 양 귀퉁이에서 옆을 쳐다보고 있다. 뒷면에도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경복궁에 있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나, 대체로 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원주 비두리귀부 및 이수(原州碑頭里龜趺및螭首.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0호.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비두리 959-2번지)
◇용도 : 비석의 받침인 귀부(龜趺)와 비석 덮개인 이수(螭首)
내력 및 유물현황 : 이 유물은 원래 문막읍 후용리 용바위골에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왔다고 전해지며, 비석은 남아 있지 않다. 귀부와 이수는 같은 화감암의 석재로 조성하여 돌 색깔도 회백색이다. 귀부는 거북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용의 모습을 새긴 편에 가깝고, 머리를 왼쪽으로 돌려 뒤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등은 6각의 거북등무늬를 하고 있으며, 아무런 글자나 무늬도 넣지 않았다. 밑으로 내려온 등 껍질은 끝 부분이 위로 말려져 있다. 등 위의 비몸 받침은 네모꼴로 높이 올리고 무늬를 넣지 않았다. 비석이 없어 언제, 누구의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조각의 솜씨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양식적 특징 : 이수의 아랫부분은 연꽃을 새기고, 그 위에는 구름 속에서 온몸을 비늘로 덮고 있는 두 마리 용이 이를 드러내고 눈을 부릅뜨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뒤엉켜 있는 네 개의 다리와 날카로운 발톱은 여의주를 움켜쥐고, 금방이라도 싸울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긴장감이 넘친다. 옆면과 뒷면의 조각도 앞면과 같이 조각되어 있다. 이수의 윗면에는 4개의 구멍을 뚫어 물이 빠지게 하였고, 뒷면은 일부가 파손되었다. (귀부의 크기 1.9×1.53×0.78m, 이수의 크기 1.46×0.74×0.7m)
원주 법천사지(原州 法泉寺址. 사적 제466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629번지)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 문헌에서 전하는 법천사(法泉寺)는 신라말에 산지 가람으로 세워져 고려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중창된 사찰이다. 특히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의 고승 정현이 주지로 있어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으며,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 해린이 왕실의 비호하에 법천사로 은퇴하면서 크게 융성하였다가 조선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법천사에는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과 탑비(塔碑, 국보 제59호)가 문종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 중 탑은 일제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져 있으며, 법천사지에는 탑비를 비롯하여 지광국사현묘탑지와 부도전지,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2001년부터 2004년에 걸쳐 실시한 4차례의 시·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지 19동과 우물지 3개소, 석축 및 담장유구, 계단지를 비롯하여 금동불입상, 연화대석, 각종 기와류 및 자기류 등의 유물이 확인되어 우리나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碑. 국보 제59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산74번지)
◇시대 : 11세기(1085년, 고려 선종 2), 고려시대 지광국사의 행적이 기록된 탑비
◇내력 : 이 탑비는 지광국사(智光國師)의 행적을 기록되어 있으며, 지광국사의 사리를 모신 현묘탑(국보 101호)은 우리나라 부도 중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것으로, 원래 이 절에 있었으나, 지금은 경복궁에 옮겨져 있다. 비문은 11세기 석비를 대표하는 걸작품으로서 비석의 재질은 연한 청색의 점판암이다. 글은 고려 초의 문장가인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구양순체로 썼다. 비의 앞면은 지광국사가 수도한 내력을 적고 있다.
지광국사 해린(海鱗, 984~1070)의 속성이 원씨(元氏)로 원주의 토착세력 출신이었다. 법고사 관웅대사밑에서 수학하고 관웅대사를 따라 개경에 들어가 준광에게 출가하였으며 16세때 용흥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004년(목종 7) 21세에 승과에 합격한 이후 법상종 승려로서 대덕(大德)이 되었다. 고려 초 현종은 현황사를 창건하고 대대적으로 법상종 교단을 지원하였는데, 혜린은 71세인 1054년(문종 8) 개경에 있는 현화사 주지를 맡아 경전을 판각하였다. 그는 삼중대사․승통․왕사의 칭호를 받았고, 74세때인 1057년(문종 11) 봉은사에서 국사(國師)로 추대되었으며, 1070년(고려 문종 24) 이 절에서 돌아가셨다. 뒷면에는 1370여 명에 이르는 국사의 제자 이름 및 인원수를 적었다. 비석을 세운 연대는 1085년(고려 선종 2)으로 기록되어 있다.
◇양식적 특징 : 인근에 지광국사 현묘탑이 있었으나 이탑은 현재 경복궁내에 있다. 기단 사방에 각형 초석이 배열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탑비는 보호전각 속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신은 귀부위에 방형 비좌를 조성하고 홈을 판 다음 비신 하단에 장부를 내여 맞추어 세운 석비이다. 비석의 윗 부분인 이수(螭首)는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 중심부는 탑의 상륜부와 같이 하늘을 나는 천녀(天女)․해․달 등과 함께 불교의 이상 세계인 수미산(須彌山)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복발위에 연꽃이 조각된 세 개의 보륜이 올려져 있다. 이수(螭首) 하단부는 탑의 탑신석을 전사한 것으로 건물 추녀가 하늘로 활짝 벌려 있는 모습처럼 네 귀퉁이와 그 사이에 꽃을 조각하여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중간 중간 보이는 두 개의 연꽃잎과 구름 속의 용(龍)을 환상적인 조각은 암막새 기와를 불교적 맥락으로 조형화 한 창의적인 도상으로 평가된다. 기단부가 2단의 장대석으로 되어 있는 점은 외벌대 장대석으로 기단이 조선된 영월 흥녕사 대사탑비와 다른 점이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 국보 제101호.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로 132 (문지동, 국립문화재연구소))
이 탑은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67)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원래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일제시대에 일본의 오사카로 몰래 빼돌려졌다가 반환되었으며, 경복궁 경내에 있다가 보존처리를 위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으며, 기단 네 귀퉁이에 있던 사자상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해오다 탑과 함께 옮겨졌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탑이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탑은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며,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탑신에는 앞뒤로 문짝을 본떠 새겼는데,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법천사터에는 지광국사의 탑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탑비를 세운 때가 고려 선종 2년(1085)이므로 묘탑의 조성 시기는 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탑 전체에 여러가지 꾸밈을 두고,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등 자유로운 양식에 따라 만들어졌는데도,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다. 화려하게 꾸민 장식으로 인해 엄숙한 멋을 줄어들게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
국보「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전면 해체 ‧ 보수한다
- 2019년까지 과학적 보존처리 시행 / 3.22. 해체 보고식 개최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최맹식)는 경복궁 경내에 위치한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을 전면 해체‧보존처리한다.
지광국사탑은 고려 시대에 국가에서 최고의 승려에게 내리는 ‘왕사(王師)’와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았던 지광국사(984~1067)의 사리탑이다. 화강암으로 제작된 높이 6.1m의 이 탑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유행했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 양식에서 벗어나 평면 4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며, 정교하고 화려한 이국풍의 조각이 돋보이는 고려 시대 사리탑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 기단, 탑신 등이 팔각형으로 된 형식
애초 지광국사탑은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국보 제59호)와 함께 법천사터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에 의해 옮겨져 1912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등 1990년 현 위치로 오기까지 최소 9차례 이전되었다.
특히, 6.25 한국전쟁 시 폭탄 피해로 옥개석을 비롯한 상부 부재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는 큰 손상을 입었고, 1957년 시멘트 등 다양한 재료로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광국사탑은 그간 시행된 정기조사(‘05년, ’10년), 문화재 특별 종합점검(‘14~’15년), 정밀안전진단(‘15년) 등의 결과, 다수의 균열과 시멘트 복원 부위 탈락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기단부와 시멘트로 복원된 옥개석, 상륜부의 구조적 불안정까지 더해져 석탑의 추가적인 훼손이 우려되어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전면 해체‧보존처리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오는 14일부터 석탑 주변에 가설 시설물을 설치하는 준비과정을 거쳐 오는 22일 오후 2시에 그 시작을 알리는 해체공사 보고식을 개최한다. 이후 오는 4월 2일까지 전체 부재를 해체하게 되며, 해체된 부재는 4월 6일 경복궁을 떠나 대전에 위치한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운송될 예정이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2019년까지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과학적 보존처리를 시행할 계획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생산한 유리건판 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글.사진 출처:문화재청>
법천사지 당간지주(法泉寺幢竿支柱.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0호.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620번지)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깃발을 달게 되는데, 이 깃발을 거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있는 예가 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이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는 법천사 절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와 함께 터를 지키고 있다. 기둥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며,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다. 기둥사이에는 당간을 꽂아두기 위한 받침돌을 둥글게 다듬어 마련해 놓았다. 두 기둥의 윗부분은 모서리를 깍아 둥글게 다듬어 놓았고,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파놓았다.
당간의 받침돌이 본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작품으로, 기둥 형태가 안정감이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원주 거돈사지(原州 居頓寺址. 사적 제168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3리 189번지)
◇시대 : 신라 말기~ 고려 초기 거돈사의 옛 터
◇유구현황 : 법천리에서 황학산 오른편 산길로 잠자울 고개를 너고 학고개를 너머서면 작은 골짜기너머로 정산면 담안리가 있는데 그 윗터에 한계산 기슭을 안고 펼쳐진 절터이다. 이 절터 남쪽사면으로 흐르는 한줄기가 남한강으로 이어진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다. 중문지 북쪽에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3층석탑(보물 제750호)이 있고 탑의 동쪽에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고 부도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 있었는데 현재 경복궁 뜰 안에 옮겨져 있다.
◇내력 : 거돈사는 신라말 안락사로 신라 왕실의 후원으로 도헌이 활동하던 곳이었다.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으나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된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중심인물인 원공국사(圓空國師, 930~1018)는 속성은 이씨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법호가 지종(智宗)인 그는 여덟살 나이에 개경 사나사(邪那寺)에서 출가 광화사의 경천화상으로부터 공부를 했고 17세에 송악산 영통사에서 주족계를 받았다. 955년 중국 오월에 유학하여 법안종(法眼宗)의 법맥을 전수받았다. 그 후 중국 천태종 근본도량인 천태산 국청사에서‘대정혜론(大定慧論)을 배우고 천태종지를 가르치는 교수사가 되어 970년 고려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후 왕권 강화를 위해 개혁정치를 표방하던 광종의 비호를 받으며 법안종 세력을 고려 불교계에 크게 떨쳤다. 그러나 광종이 사망하고 그의 급진적 개혁정치가 중도에 그치면서 법안종 세력도 급속도로 위축되고 원공국사도 89세인 1018년 병든 몸을 이끌고 거돈사에 이르러 임종을 맞았다. 입멸 후 현종으로부터 국사 원공으로 추증된 그는 탑비와 함께 비의 서쪽 기슭에 부도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지금 거돈사 터에는 현종16년(1025) 조성된 부도비(보물제78호)만 남아 있고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은 짝을 이루지 못하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와다(和田)가 서울의 자기 집으로 옮겨간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긴 이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절터 아래 옛 정산분교 자리에 있지만, 완성되지 않은 거대한 당간지주를 보면 이 절의 규모가 짐작된다.
◇양식적 특성 : 이 절터는 현재 남아 있는 3층석탑(보물 제759호)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경사가 좀 센 까닭에 석축을 높이 쌓아 조성한 평지에 중문지를 만들고 이러 일탑 일금당식 가람 배치를 중심으로 동남축으로 가람을 전개하여 금당 후면 강당지 까지 회랑으로 둘러싸인 거돈사지는 삼국시대 고식의 가람배치형식을 지닌 절터이다. 현재 남아 있는 중문지를 지나면 세운 3층 석탑이 있고 바로 뒤에 기단위에 초석이 있고 정면5칸 측면 3칸의 금당터가 있고, 강당지는 초석은 없고 터만 남아 있다. 이 금당은 거돈사의 중심 건물로, 초석의 배열간격으로 보아 중심에 있는 어칸의 길이가 협칸보다 길게 되어 있고 평면 중앙부에 2m 정도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시던 불상 대좌가 있다. 대좌에 초석이 있고 그 밑에 적심석이 있다. 그리고 사방에 지대석을 돌린 것으로 보아 불상은 이미 금당이 짓기 전에 먼저 불상을 조성한 후 금당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불상의 크기가 일반 단층목조 건축으로는 불상 높이를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므로 2층 내지는 3층 구조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금당의 뒤로 낮은 석축이 쌓아 있고 건물을 지었던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강당지로 추정된다. 금당을 중심으로 하는 남북축 오른편으로 많은 건물지가 있고 절 뒤편 약한 언덕 위에 지금은 경복궁에 옮겨져 있는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서로 근접해 있어야 할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는 절의 오른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다. 왼쪽 회랑지 끝에 이 절터 발굴에서 나온 각종 석재들이 모여져 있다. 거돈사지는 1968년 2만4천7백 86㎡의 터가 문화재보호구역(사적 제168호)으로 지정되어 1982년부터 토지매입을 시작했다. 91년까지 10여년에 걸쳐 한림대박물관이 4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벌인 후, 1차로 7천5백평의 사역을 정비하였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原州 居頓寺址 圓空國師塔碑. 보물 제78호. 강원 원주시 부론면 정산
리 144번지)
거돈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의 스님인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세속에서 쓰던 성은 이씨인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적이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는 해서체인데,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중국에 비교해서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편 이 비에는 머릿돌을 옮기려 할 때 수십 명의 장정들이 매달려도 끄떡않던 돌을 농가에서 빌려온 소 한 마리가 옮겼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原州 居頓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750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3리 188번지)
시대 :1025년(현종 16), 통일신라시대 후기 석탑
양식적 특성 :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석탑이 탑신(塔身)으로 올린 형태를 보면 형식적으로는 신라 양식을 보이나, 세부적인 수법과 모습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따랐다. 초층 기단은 두단의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네모진 면석을 탱주석 없이 한줄로 세워 벽을 만들었다. 그속에 흙과 잡석을 체워 판축으로 지반을 다진 다음 면석위에 외벌대 지대석으로 마감하여 기단을 조성했다. 그 위에 석탑과 직접 연결된 기단을 세웠는데 2벌의 지대석을 쌓은 다음 긴 장방형의 면석을 4개 세우고 4조각의 기단 받침석을 포개올려 탑신 자체의 기단을 조성했다. 그런 다음 남·북쪽에 무늬없는 면석을 세우고 동·서면에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탱주석을 조각한 면석을 끼워 맞추고 사춤한 방식으로 석탑 자체 기단을 조성했다. 이탑은 탑신과 각층의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은 탱주가 조각되어 있을분이며 옥개석 하부는 방형의 밑받침이 점차 커지면서 5단의 밑받침으로 옥개석 하부의 경사면의 곡선을 이루고 있다. 옥개석이 만드는 처마곡은 거의 직선으로 보이나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있는 통일신라 양식이다.
탑의 상륜부는 사각형 노반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를 얹어 놓았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면석에 탱주의 새김, 2단의 갑석과 3단의 옥개석등으로 미루어볼 때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절 터에 있는 민가 우물가에는 탑 옆에서 옮겨왔다는 배례석(拜禮石:탑 앞에 놓여 예불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곳)이 놓여 있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原州 居頓寺址 圓空國師塔. 보물 제190호.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거돈사터에 남아 있던 고려 전기의 승려 원공국사의 사리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사람의 집에 소장되고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현재 탑은 바닥돌이 없이 바로 기단(基壇)이 시작되고 있다. 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부분이 8각으로,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긴 후, 그 안에 꽃 모양의 무늬를 두었다.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안상 안에 8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윗받침돌에는 활짝 핀 연꽃잎을 2중으로 돌려 새겼다. 8각을 이루고 있는 탑신(塔身)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여덟 곳의 기둥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앞뒤 양면에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좌우 양 면에는 창문 모양을, 그리고 남은 네 면에는 4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새겼다. 지붕돌 역시 8각으로 몸돌과 닿는 곳에 4단의 받침을 표현하고, 그 위에 서까래를 모방하여 새겼다. 처마는 얇고, 여덟 귀퉁이에는 치켜올림이 뚜렷하며, 낙수면에 새겨진 기와골 조각은 처마에 이르러 막새기와의 모양까지 표현해 놓아 목조 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다. 꼭대기에는 8각형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다.
탑비의 건립은 ‘태평을축추칠월(太平乙丑秋七月)’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 현종 16년(1025)에 해당하므로 이 사리탑도 그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8각 사리탑으로, 모양이 단정하고 아담한 통일신라 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조형의 비례가 좋고 중후한 품격을 풍기며, 전체에 흐르는 조각이 장엄하여 한층 화려하게 보인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 塔坪里 七層石塔.국보 제6호.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있어, 일제당시 보수하면서 일부 변형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사진.글 출처 : 문화재청 자료. 원주시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