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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동초등학교19,20회
 
 
 
카페 게시글
휴게실(詩,음악,그림 등) 스크랩 로미나 - 신사동 그사람 外
하늘나라(홍순창20) 추천 0 조회 119 14.06.08 20: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20701133623.MTS/ 로미나/신사동 그사람 (인기상)~전국노래자랑

2012/07/01/로미나/신사동 그사람(인기상)~전국노래자랑~상반기결선~

RoMiNa(Sinsa him/Popularity Award)~Wiring the first half of singing the national

 

 

 

KBS 강연 100℃<95회> 로미나/ 조삼암/ 백남옥  2014/06/08

 

<95회>
로미나

로미나 (29세, 여, 외국인 1호 트로트 가수)
“전생(前生)”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4년 전 한국에 온 로미나씨. 어린 시절부터 외국 문화, 특히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2주간 떠난 중국여행에서 과감하게 중국 유학을 결정했다. 그렇게 2년간 중국에 머물며 만났던 한국 친구들을 통해 차츰 한국이라는 나라에 더 큰 관심이 생겼다. 결국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간 지 1년 만에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온 그녀. 독일과 다르게 24시간 활기 넘치는 한국이 신기하기만 했다. 한국 생활에 익숙해져 가던 중 그녀를 강하게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택시를 탈 때마다 들려오던 노래, 바로 트로트였다. 마음을 울리는 트로트음악을 좋아해 친구들에게 가사의 뜻까지 물어보며 각종 트로트를 찾아 듣기 시작했다. 트로트의 매력에 빠져 따라 부르기에도 도전한 그녀는 2012년 KBS<전국노래자랑>에서 ‘신사동 아가씨’를 불러 인기상도 받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트로트 가수를 꿈꾸며 연습에 매진했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올해 KBS<가요무대>에도 출연했다. ‘k-pop’보다 ‘트로트’가 좋다 말하는 금발의 독일 미녀 로미나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삼암

 

조삼암 (80세, 남, 폐지 수거하며 지적장애 아들 돌보는 80세 아버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20대 부터 강냉이 행상을 했던 조삼암 할아버지. 늦게 얻은 큰아들 조기영씨는 3살 무렵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렸고 병원에 갈 돈이 없어 약국에서 해열제만 사다 먹여야 했다. 뒤늦게 찾은 병원에서 뇌막염을 진단 받았지만 결국 치료시기를 놓쳐 지적장애 2급의 장애인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1년 반의 투병 끝에 5남매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막막한 현실에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자식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주위의 소개로 재혼한 그는 아내가 데려온 두 아이까지 총 7남매의 가장이 되어 냄비장사를 하며 더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지적 장애를 가진 큰아들은 15살 무렵 아버지를 찾겠다며 집을 나가 길을 잃었고 전 목포시내를 헤맨 지 일주일 만에 겨우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잠시만 눈을 돌려도 사라지는 아들을 또다시 잃을까 염려한 그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의 허리를 손수레에 노끈으로 묶은 채 일을 다녀야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키운 자식들은 모두 장성해 집을 나섰지만 여전히 큰아들은 실과 바늘처럼 그와 같이 다니며 장사를 하고 있다. 다른 자식들이 ‘아버지와 형이 함께 벌어 우리를 키워줬다’며 앞 다퉈 형을 모시겠다 말하는 덕분에 오랜 시름도 덜었다. 그는 오늘도 아들과 함께 눈뜨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말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백남옥

백남옥 (64세, 남, 경력 37년의 세탁의 달인 )
천직(天職)

37년째 세탁업에 종사하고 있는 백남옥씨. 가난한 형편 탓에 일찍이 사촌이 운영하는 양복집에서 일을 배워 양장점을 차렸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지인의 소개로 세탁소를 운영하게 됐다. 그러다 1983년, 인생의 첫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휘발성이 강한 약품을 다루다 순식간에 불이 났고 세탁소는 물론 가게에 딸려있던 살림집까지 모두 불에 타버렸다. 모든 것을 잃고 귀향을 고민하던 그에게 건물 주인이 앞장서 도움을 줬고, 동네주민들도 십시일반 돈을 모아준 덕에 다시 세탁소를 열 수 있었다. 화재 이후 오히려 장사가 더 잘 됐고 17년간 세탁 일을 하며 내 집 마련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러다 고된 세탁 일에 지쳐 좀 더 편한 일을 찾고자 시작한 옷장사가 망해 1억 여 원의 빚만 지게 됐다. 인생의 두 번째 고비였다. 당시 대학생이던 두 아들이 나서서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보태고 장학금을 받아오는 등 온 가족이 힘을 모아 1년 만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위기를 딛고 다시 세탁소를 차렸지만 얼마 뒤 맞은편 건물에도 세탁소가 들어섰고 차츰 손님이 줄어 매출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세 번째 고비를 맞은 그는 자신만의 차별화된 기술이 필요하다 생각해 세탁 기술 관련 세미나를 찾아다니며 공부를 시작했다. 세탁의 1인자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틈만 나면 배운 것을 응용해 또 다른 세탁 방법을 찾는 등 연구에 매진했고, 그렇게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자 남들이 하지 못하는 고가품 세탁도 자신 있게 맡게 됐다. 독한 약품을 다루다 보니 위험한 순간도 많았지만 이제 그는 월 매출 4천만 원의 어엿한 세탁 전문가로 자리 잡았다. 세탁업을 가업으로 잇겠다 말하는 아들까지 있어 일하는 것이 더욱 즐겁다는 백남옥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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