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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자신의 변론을 “아, 누군가 내 말을 들을 사람이 있다면! 전능자께서 내 말을 판단해 주신다면. 아, 내 원수가 나를 기소한 기소장이 있어서, 그분이 판단하실 수 있다면.”(욥31:35)이라는 말로 끝냈습니다. 자신의 무죄와 순전과 의와 결백을 제시하는 공개적인 탄원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비난이나 정죄도 받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마침내 그렇게 간절하게 사모하며 구했던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두 차례(38:1-40:2, 40:6-41:34)에 걸쳐서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대답이라기보다는 질문이었습니다.
질문에는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와 의지와 거룩함이라는 속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습니다. 자신을 당대의 지성이라는 명예로운 자리에 앉혀놓았던 지식과 신학과 지혜가 무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는 당신과 당신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누군가를 이해시키거나, 납득시켜야 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자신이 저질렀던 행위들에 대해서 돌아보았습니다. 믿음과 불신앙 사이를 오락가락했습니다. 친구들에게는 자신의 순전과 무죄와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허물과 죄를 찾을 수 없는 자신이 왜, 무엇 때문에 혹독한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스러웠습니다. 열변을 토했던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간신히 입을 열었습니다.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아, 제 입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습니까?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밖에 없습니다. 한 번 말씀드린 것도 무엄한 일이었는데 또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두 번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욥40:4-5)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시는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지 않겠다고 고백했습니다. 함께 읽은 본문은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 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 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1-3)라고 시작됩니다. 그는 여전히 견디기 힘든 극한 고난 속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주어진 상황은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의 공의까지도 의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두 번째 대답을 들은 다음부터는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자칫 교만하게 보일 수 있었던 당당한 자세들까지 모두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질문 같은 대답을, 자신의 질문에 대한 충분한 대답으로 받았습니다. 백 번이라도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와 의지와 거룩하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고자 하신다면 누구도 감히 막을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식한 말로 나의 뜻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38:2)라는 하나님의 책망을 떠올렸습니다.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성급하게 판단했던, 하나님의 이치를 거역했던, 절대 주권과 탁월한 섭리로 지으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행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던 자신이 바로 그 무식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시면 닫을 수 없습니다. 닫으시면 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완벽합니다. 작정하시면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계획하시면 완전하게 실행하십니다. 하나님에게 한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도 이루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습니다. 중간에 끊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불순종도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도록 만들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당신의 뜻을 멈추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서 변론을 벌인다는 자체가 어리석습니다. 무식의 극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가 자신의 지식과 신학과 지혜를 넘어서는 내용을 겁 없이 확신하고 선언했다고 고백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고백은 하나같이 신비에 싸여 있는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의 탁월한 섭리에 의한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첩경이라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여호와께서 주셨던 것, 여호와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1:21), “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다니!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욥2:10a)라는 그의 고백으로 연결됩니다. 곧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주기도 하시고 다시 가져가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탁월한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는 그의 고백으로 연결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반드시 도출해 내야하는 결론입니다. 결국 친구들과의 변론, 하나님과의 만남은 욥이 처음 했던 고백으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탁월한 섭리에 의한 통치에 순종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42:4)라고 이어집니다. 그는 한때 “...어서 말씀하십시오. 서슴없이 대답하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말씀드리겠사오니 대답하여 주십시오.”(욥13:22)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자신에게는 고난을 당할 만한 어떤 죄도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의롭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께 물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동기가 전혀 다릅니다. 변명이 아닙니다. 도전도, 반항도 아닙니다. 자기 확신을 단언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친구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더욱더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훈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입니다. 겸손한 부탁입니다. 신비에 싸여 있는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했던 자신에 대한 솔직한 고백입니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뵙기를 사모했던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 드디어 성취되었다는 의미와 함께 설레고 들뜬 마음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모든 경우 어떤 가르침을 주시든 달게 받겠다는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어야합니다. 본문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라고 이어집니다.
“내가...듣기만 하였삽더니”는 “내 귀에 들린 소식(평판)에 의하여”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종교적 전통과 조상들의 지혜와 가르침 등 주로 외적 요인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상적 또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불의한 면이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설명과 이해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계시해 보여주셨습니다. 그와 대면해 주셨습니다. 대화까지 나눠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영안이 열렸습니다. 이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표현입니다. 자신과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와 판단과 결정 등에 남다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탁월한 섭리에 대해서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하나님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의 다양한 차원들을 이전보다 훨씬 더 폭넓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이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6)라고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한하고”는 “경멸하다, 싫어하다, 멸시하다, 뉘우치다, 업신여기다.” 등의 뜻입니다. “티끌”은 먼지나 흙을, “재”는 타고 남은 찌꺼기를 가리킵니다.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는 일은 극한 슬픔과 자기 비하의 표현입니다.
“회개하다.”는 “한숨 쉬다, 뉘우치다, 후회하다, 미안하다.” 등의 뜻입니다. 얼마나 미안한 지 도무지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뉘우친다는 의미입니다. 탄식입니다. 절망에 가까운 비탄입니다.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던 전격적인 변화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도 자신의 순전과 무죄와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너무나 당당했던 그의 말과 행동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탁월한 섭리에 의한 통치가 불의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법정에 피고로 세웠습니다.
소송까지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전격적으로 변했습니다. 돌변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급격한 마음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은혜였습니다. 자신의 무지를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받아들였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급하게 판단하고 함부로 지껄였던 자신의 말들과 무모한 행동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보일 수밖에 없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리 역시 간절하게 사모해야할 은혜입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42:7-8)라고 이어집니다. “정당하다.”는 “세워지다, 고정하다, 확실하게 하다, 견고하다.” 등의 뜻입니다.
주로, “바르다, 옳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동시에 “성실, 확실한 지식”이라는 뜻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절에서는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진실이 혼합되어 있었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세 친구들의 변론이 그랬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지식과 신학과 지혜는 스스로가 경험하고 터득한 결과였습니다. 주관적이었습니다. 동시에 종교적인 전통과 조상들의 지혜와 가르침의 결과였습니다. 객관적이었습니다.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거기다 인과론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던 그들은, 하나님의 차원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방어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뭉쳤습니다. 아니 편협하고 왜곡된 자신들의 지식과 신학과 지혜를 변호하기 위해서 고난 받는 자의 처지를 비난하는 경건한 위선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주관적인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을 오로지 보상 신학의 틀 안에서만 활동하실 수 있는 분으로 제한했습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인위적 틀 안에 가둬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이고도 무한한 지혜와 주권적 통치를 크게 희생시켰습니다. 욥을 판단했습니다. 정죄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서 견뎌내고 있던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는커녕 더 깊은 절망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혈기를 내면서까지 욥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웠던 이유는,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을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자초했습니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에는 친구들의 인과응보 사상을 부인하고, 자신의 무죄를 끝까지 고수한 욥이 옳았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렇다고 욥의 옳음이 하나님의 의義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완벽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인과론만으로는 신비와 비밀에 속한 하나님과 하나님 행사의 다른 차원까지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구들에게 번제 곧 회개와 희생의 제사를 요구하셨습니다. 욥으로 하여금 그들의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욥이 당하고 있던 혹독한 고난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던 파렴치한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 묶은 것은, 하늘에서도 묶여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너희가 푼 것은,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18:18b)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종” 곧 당신의 종으로 인정하신 욥에게 매고 푸는 권세를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본문은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욥42:9)라고 이어집니다. 친구들은 자신들의 변론이 편협하고 왜곡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욥 역시 순종했습니다. 친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로우실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던 궁극적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유일하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신다 할지라도 기꺼이 믿음으로 받을 수 있어야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 곧 전인격을 다하여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울지라도 끝까지 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본문은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42:10)라고 이어집니다.
욥은 자신을 절망의 끝자락까지 몰아붙였던 친구들의 용서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비난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되를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재어서 너희의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줄 때에 잰 분량만큼 너희가 도로 받을 것이다.”(눅6:37-38)라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친구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빠져나올 수 없었던 극한 절망으로부터 건져주셨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 누렸던 부와 명예와 권세를 원래 상태로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아니 이전보다 갑절이나 허락해 주셨습니다. 욥이 애매하게 주어진 고난을 믿음으로 잘 참고, 견디고, 끝까지 살아냈기 때문에 주어진 은혜가 아닙니다. 그가 인내한 결과도 아닙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욥1:21b)라는 욥의 고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어가기도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본문은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 고리 하나씩 주었더라.”(욥42:11)라고 이어집니다. 욥이 잃어버렸던 예전의 영광을 회복하자, 냉정하게 외면하고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뒤늦게나마 욥이 당했던 슬픔을 함께 나눴습니다.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축하했습니다.
금으로 장식된 선물까지 주었습니다. 한 상에 둘러앉아서 함께 음식을 나눴습니다. 사실 그들의 행위가 진심이었는지, 위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기심에서 비롯된 아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그들을 물리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기꺼이 용납해 주었습니다. 사랑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됨과 동시에 깨졌던 인간관계까지도 자연스럽게 회복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욥의 말년에 처음보다 두 배나 되는 축복과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실제로 본문은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 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 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 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욥42:12-15)라고 이어집니다.
“그는 양 칠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겨릿소 오백 쌍, 암나귀 오백 마리를 가졌고, 수많은 종들을 거느렸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습니다.”(욥1:3)라는 말씀에 따르면, 욥은 양 칠천 마리와 낙타 삼천 마리와 겨릿소 오백 쌍 곧 천 마리와 암나귀 오백 마리를 가진 동방의 최고 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정확하게 두 배가 더 많은 집짐승 곧 양 만 사천 마리와 약대 육천 마리와 소 일천 겨리 곧 이천 마리와 암나귀 일천 마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부와 명예와 권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손들의 번성까지 허락해 주셨습니다.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주셨습니다. 자녀들을 갑절로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지만 이제는 아기가 죽었으니 음식을 먹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런다고 아기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언젠가 나도 아기에게 가겠지만, 아기가 나에게로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다.”(삼하12:23)라는 말씀에 따르면, 히브리인들은 죽은 자녀들도 자신의 소유로 여겼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한편, “여미마”는 반구班鳩Turtledove를 가리킵니다. 비둘기 과의 일종으로 사랑, 순결, 헌신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새입니다.
다른 성경들(LXX, Vulgate)은 “낮”이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M. Henry은 이를 고통으로 가득 찬 캄캄한 밤이 지나고 형통의 빛이 비취게 된 욥의 삶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름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히브리인들의 특성을 고려해 볼 때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긋시아”는 주로 종교 의식에 사용되었던 계피 나무의 향을 가리킵니다. 아름다운 향기로 유명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상태에서, 얼굴마저 흘러내리고, 역겨운 냄새까지 풍기던 삶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게렌합북”은 물감의 뿔a horn of paint이라는 뜻입니다. “물감”은 여성들이 눈썹이나 눈꺼풀을 꾸밀 때 사용하는 분扮을 가리킵니다. “뿔”은 분가루를 담는 통을 가리킵니다. 셋째 딸이 눈이 매력적인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욥의 삶이 누구나 흠모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 딸의 아름다움은 온 땅 위의 백성들에게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대낮과 같은 밝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두에게 매력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야말로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욥의 인내에 대한 상급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작정의 성취에 따른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용납해 주셨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제 욥기는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42:16-17)라고 마무리됩니다. 다른 성경LXX은 “그의 시련이 있은 후에 170년을 살았다. 따라서 그는 모두 240(또는 248)년을 향유하였다.”라고 번역합니다.
욥이 고난당할 때의 나이가 칠십 전후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고난과 회복 이후 140년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최소 210년에서 최대 248년까지 사는 장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자식과 후손 사대가 번성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한편, “차서”는 “너무 많이 먹어서 물린, 가득한, 만족한, 꽉 찬” 등의 뜻입니다. 후회할 일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충분히 만족한,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 삶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오히려 뿌듯한 마음이 들 정도로 자랑스러운 비문碑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한 번 이상씩 꿈꾸고 있는 해피엔딩Happy Ending입니다. 절대주권과 탁월한 섭리를 통해서 당신이 지으신 피조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온전히 굴복한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서 예비 된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잊지 말아야할 세 가지 나침반이 있습니다. ① 먼저,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극한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던 욥을, 순식간에 회복시키셨습니다. 갑절이나 되는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버렸던 사람들로부터 위로와 선물을 받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인생이라면 누구나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죽음까지도 이기셨습니다. 이 부활을 가슴에 새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에 대한 믿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②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욥은 재산뿐 아니라 잃었던 자식들까지 돌려받았습니다. 딸들은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딸이면서도 아들에게만 주어지던 유산까지 물려받았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역시 자격 없는 사람들을 아무 조건 없이, 어떤 대가도 없이 섬길 수 있어야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섬길 수 있어야합니다. 절대주권과 탁월한 섭리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원리인 동시에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③ 마지막 하나는, 영생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의 욥은 이미 노년이었습니다. 고난으로부터 벗어났을 때는 더 노년이었습니다. 이후로도 14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복된 삶을 살기에 140년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다행히 후손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 영원히 이어지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에게 이미 영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영생의 일부분을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회복시키실 때, 어떤 상황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가장 큰 절망인 죽음에서 회복시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할 나위없는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은 영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합니다. 세상 부와 명예와 권세와 자랑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부활과 하나님 나라와 영생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부활과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사모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도 더할 나위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상황, 환경, 조건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탁월한 섭리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아무리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가신다 할지라도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 하나님 나라, 영생을 사모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당신의 절대 주권과 탁월한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물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지는 복된 삶, 예비 된 복을 그대로 다 받아 누리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복된 삶, 무엇보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해피엔딩Happy Ending으로 마무리 할 수 있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