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80년대 탁류 거슬러 움튼 '순정의 시'
시인 안도현의 '군산항과 금강 하구'
전주에서 군산으로 가는 전군가도(全群街道)에는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그 길이로는 전국에서 가장 길다는 40여㎞의 벚꽃길.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 길을 ‘벚꽃 백리길’이라 부른다.
지금이야 ‘꽃놀이’ 길이다. 총선은 끝났고, 봄은 왔고, 벚꽃은 흐드러졌다. 벚꽃 마라톤이 벌어지고, 어김없이 자리잡은 팔도풍물시장에는 21세기풍 금속성 의상을 입은 DDR 걸들이 길가에 늘어서 춤추며
운전자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경북의 오지 예천에서 태어나 안동, 대구에서 이십 년을 살다가 전주로 와서 다시 이십 년을 살고 있는, 올해로 등단한 지 꼭 20년이 되는
시인 안도현씨에게 그러나 이 길은 한때 ‘게다짝’의 길이었다. 1980년대였다.
‘벚꽃이 진다니/바람도 사무치며 떠는 날/번영로라 전군가도 연분홍,
벚나무들/비 젖어 허둥대는 꼴 좀 보러 가야겠다/날씨 때문이 아니다
제국주의 물러갈 때/40년 전 챙기지 못해 남긴 게다짝/게다짝 같은 꽃
벚꽃 구경 가야겠다/벚꽃이 진다니 군산으로 가야겠다’(‘군산행2’부분).
만경강을 건너 만경평야를 좌우에 두고 벚꽃 백리길을 지나면 군산에
이른다. 경상도 내륙 지역에서 20년을 살다가 내로라하는 문인선배들을 배출했던 전주의 원광대로 진학했던 청년 안도현에게 군산 앞바다는 별세계였다.
그는 “삶이 지글지글 끓고 있는 바다였다”고 이 바다를 처음 보았던
때를 되새김했다. “낡은 배 한 척만 봐도 시가 될 것 같았다. 그 진득한 삶의 냄새가 배어있는 갯비린내, 군산 바다를 통해서 역사를 보고
현실을 보았다.”
이 군산 앞바다가 바로 ‘탁류(濁流)’이다. 1930년대 ‘초봉이’라는
여인의 삶을 통해 거친 탁류 같은 속악한 식민지 사회현실을 비판했던
채만식의 소설 ‘탁류’. 역시 벚꽃과 진달래가 함께 만개한 군산시내
월명공원에는 채만식 문학비가 서 있다. 문자 그대로 탁류이다. 금강의 물줄기가 서해 바다로 발목을 집어넣는 군산항 내항은 마치 내륙의
오물과 역사의 오점들을 한꺼번에 토해내겠다는듯 시커먼 물길이다.
이십대 초반의 새파랗던 문학청년 안도현은 이곳에서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과 두번째 시집 ‘모닥불’에 실린 많은 시편들을 썼다. ‘시커먼 물이 돌이킬 수 없도록/금강 하구 쪽에서 오면/꾸역꾸역, 수면에 배를 깔고/수만 마리 죽은 갈매기 떼도 온다/사랑도
역사도 흉터투성이다/그것을 아둥바둥, 지우려고 하지 않는 바다는/늘
자기반성하는 것 같다’(‘군산 앞바다’ 부분).
다른 여느 386청년들처럼 그도 ‘이 엉망진창 속에 닻을 내리고 물결에 몸을 뜯어먹히는 게 즐거운 낡은 선박 몇척’으로 ‘검은 멍이 드는 서해’를 보며 숭어회 한 접시에 소주가 쓰라렸다. “술 먹다가 계엄군한테 실컷 두드려 맞은 적도 있지요. 나의 역사인식이란 것이 보통의 젊은이들 수준이었지만 ‘가려지고 뒤틀린 역사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어야겠다’는 심정은 절박했습니다.”
‘게다짝 벚꽃’과 군산항에서의 ‘송어회 한 접시’를 통과한 그는
전교조 해직교사가 된다. 1985년 이리중학교 교사로 임용된 처음에는
“학생들 두들겨 패기도 하는” 자칭 엉터리 선생이었다.
2년 여 교사생활을 거치자 그는 “내 현장이 바로 학교”라는 것을 깨닫고 교사운동에 투신한다. 전교조가 설립되던 1989년에 이른바 ‘해직교사’가 됐다. 이후 1994년 복직하기까지의 심정들이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 투영돼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시집의 첫머리를 여는 시 ‘너에게 묻는다’는 단 세 줄로 읽는 이의 가슴을 차고 들어온다. 역사에서도 생활에서도 밥값을 한다는 것이
절실한 질문이었을 시기에 그는 스스로에게, 또 우리 모두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물었다.
만경평야의 볏단들을 보면서도 안씨는 ‘밥값’을 되뇌었다. ‘들녘
끝으로 불빛들이/일렬횡대로 줄지어 서 있는 만경평야/이 세상 개울물을 잠방잠방 맨처음 건너는/아이들 같구나/너희들 저녁밥 먹으러 가느냐/날 추운데 쉬운 일이 아니다 결코/저 스스로 몸에다 불을 켠다는 것/그리하여 남에게 먼 불빛이 된다는 것은/나는 오늘 하루 밥값을 했는가/못했는가 생각할 수록 어두워지는구나’(‘먼 불빛’전문).
복직한 1994년 이후 그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연이었다. 물론 그의 시는 이전까지 역사와 사회를 담았더라도 순정한
서정시였다. 전북 장수군의 전교생 수 120여명에 불과한 산서중학교에 복직한 그는 여기서 온전한 그 자체로서의 자연을 발견했다. 이때는 한국문학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문학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던 정치·사회적 억압, 거기에 대항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또 정치사회 그 차제의 변혁을 위해 스스로 혁명아가 되기를 꿈꾸었던 1980년대의 문학이 기대고 있던 기반이 무너졌던
시기였다. 문학이 도대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후일담 문학’의 시기였다.
이때 안씨는 이른바 ‘신서정(新抒情)’이라는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연
선두주자가 된다. ‘시에 투쟁성이나 선전성이 강요되기보다는 서정시 본래의 순도가 그리워지던 시점에, 그에 부응하는 시세계를 선보여
환영을 받은’(문학평론가 남진우) 안씨였다.
“나 스스로는 운이 좋았다고 느낍니다. 사실 80년대 시에 물려 있었지요. 그 형식이나 내용이 모두 시를 옥죄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시란
말 앞에 노동, 해방, 해체 등등 붙이기만 하면 시로 분류가 되는 것에
내심 반발할 무렵 운좋게 자연을 공부할 기회가 산서중학교에 복직하면서 주어진 거지요.”
그곳은 학생들이 봄에는 두릅 따 오고 가을이면 밤 삶아서 등교하는
곳이었다. 복직 후 학교의 현실이 전교조의 투쟁과는 상관없이 여전한
것을 느끼고 절망해있던 그는 여기서 자연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고,
시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북극성은 사라졌는데 땅바닥의 들꽃들에서 길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시가 나를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굳이 참견하지 않았다. 팔목에 힘을 빼고 목소리를 낮추고 발자국 소리를 줄이고 발 닿는대로 걸었다. 시의 길이도 자연스럽게 짧아졌다”. 이 시기에 절창이 탄생한다. ‘겨울 강가에서’는 자연현상을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를 담아내는 우리 시의 궁극적 호소력이 빼어나게 형상화된 명편으로 읽힌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 강가에서’의 강은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강이기도 하겠지만 금강은 그에게 다시 문학현장이 된다. 그 물줄기가 군산항으로 흘러드는
금강 하구. 1990년 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갈대밭으로 뒤덮여 있었던 금강 하구에 지금은 하구둑 위쪽으로 서해안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스스로 “시를 지나치게 다듬는다”고 느껴 오히려 “이제는 거칠게 쓰고 싶다”는 안씨는 요즘도 틈나면 이곳을 찾는다.
“인간이 좀 더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한, 시인은 시가 가진 창조적인
기능, 즉 시라는 형식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 밤을 새울 때”이다.
‘시도 사랑도 안되는 날에는/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강물이 어떻게 모여 꿈틀대며 흘러왔는지를/푸른 멍이 다 들도록/제 몸에다 채찍 휘둘러/얼마나 힘겨운 노동과 학습 끝에/스스로 깊어졌는지를/내
쓸쓸한 친구야/금강 하구둑 저녁에 알게 되리’(‘금강 하구에서’ 부분).
■ "동화작가로 유명하지만 본업은 시인입니다"
“선생님이 시인인 줄 몰랐어요.”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1995)를 읽은 청소년 독자들이 편지를 보내오면서 이렇게 묻는 경우가 많다며 안도현씨는 웃었다. 지금까지 40여만부가 팔린 ‘연어’로 그는 본업이 시인인데도 동화작가로 일부 독자들에게는 더 잘 알려져 있다.
최근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짜장면’과 ‘관계’
등 그는 우화 집필을 계속하고 있다.
1997년 교직을 떠나 전업시인으로 살게 된 탓도 있지만 그는 이 장르에 진작부터 힘을 쏟았다. ‘연어’는 사실 국내에 어른을 위한 동화의 붐을 일으킨 작품이다. 이후 각종 물고기 이야기를 쓴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강태형 시인(출판사 문학동네 대표)과 오래 전부터 ‘어린 왕자’같은 작품을 써보자고 했었지요.” 안씨는 연어의 모천 회귀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자료도 드물고 연어를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그는 집에서 연어와 같이 군서생활을 하는 피라미를 키우며
물고기의 생태를 관찰했다.
이번 기행에서도 안씨는 굳이 금강하구둑의 어도(魚道·고깃길)를 보러 가자고 고집했다. 금강하구둑에는 국내 댐 사상 처음으로 만든 고깃길이 있다. 짠 바닷물을 거슬러 민물에 잠시나마 몸을 담그려 하는
송어떼들이 장관이었다.
“어른동화를 행복하게 첩으로 두기는 했지만, 어떻게 조강지처인 시를 홀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동화 쓰기에 재미 붙인 게 아니냐고 미심쩍게 여기기도 하지만 나는 소설가도 동화작가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시인이지요.”
■ 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 출생·원광대 국문과 졸업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낙동강’ 당선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등.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관계’ 등.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1996) 소월시문학상(1998) 수상
첫댓글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