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에 있어 가장 유명한 송씨가문 세자매는, 근현대 중국사의 중심에 있는 쑹아이링(宋霭龄 : 1889∼1973년, 송애령), 쑹칭링(宋庆龄 : 1893~1981년, 송경령), 쑹메이링(宋美龄, : 1898~2003년, 송미령)을 지칭하는 것으로 세 자매는 한 집안에서 같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각각 전혀 다른 방향으로 중국 근대사를 이끌어가고 영향을 미쳤다.
후대의 세인들은 세자매에 대해 평가 하기를 "첫째는 돈을 사랑했고, 둘째는 중국을 사랑했으며, 셋째는 권력을 사랑했다."라고 평가한다.
세 자매의 아버지는 쑹자수(宋嘉樹 : 1864~1918년)로 쑨원(孙文, : 1866~1925년, 손문)의 친구이자 혁명 동지이며, 교명 Charles Jones Soong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대사업가이자 목사이다.
그는 해남도 문창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한 후 은행업과 출판업 등으로 부를 축적하고, 상하이에서 쑨원을 만나 중국 혁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쑹자수는 딸셋, 아들셋 모두 여섯명의 자녀를 두었고, 쑨원의 중국 혁명에 영향을 받아 가정내 봉건 주의의 잔재를 없애고,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의 가정 환경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 하였으며, 세 딸을 어린 나이때부터 기숙학교에 입학시키며,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등 서구 교육에 유념했다.
첫째 쑹아이링의 남편은 공자의 75대손으로 알려진 쿵샹시(孔祥熙 : 1880~1976년)로, 중화민국 남경 국민정부 행정원장 겸 재정부장을 지낸, 은행가 대부호이다. 쑹아이링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미국 유학한 여성으로, 유학 후 귀국하여, 아버지의 추천으로 5개국어에 능통하였던 그녀는 쑨원의 비서가 되었다.
1914년 9월 쿵샹시와 일본 요코하마에서 결혼하게 되면서, 쑨원의 비서 업무를 동생 쑹칭링에게 넘겨주게 된다. 그녀의 결혼은 당시 중국 남북부 재벌간의 정략 결혼이라는 비난도 받았으나, 결혼 후 자신과 남편의 지위를 이용하여 적극적인 사업을 전개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고,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평생을 보내게 되었다.
둘째 쑹칭링은 중국 근대 혁명의 아버지인 중산 쑨원과 결혼을 했다. 쑨원이 혁명에 실패하고 위안스카이(원세개, 袁世凱 : 1859~1916년)에 밀려 일본에 망명하고 있을때, 쑹칭링은 언니 쑹아이링에 이어 쑨원의 비서로 일하게 되고, 중화혁명단에 가입하며, 둘의 사이가 가까워져, 둘은 결국 1915년 10월 아버지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게된다. 이때 쑨원의 나이는 49세, 쑹칭링의 나이가 22세였다.
더구나 쑨원은 본처가 있는 상태에서 결혼을 한 것이니, 이는 부친 쑹자수가 여식을 쑨원의 비서로 추천하여 초래한 자업자득일 수 있다. 그러나 쑹칭링은 결혼 후 남편의 가장 든든한 정치적 조력자이자 동반자의 역할을 했고, 1925년 쑨원이 사망한 후에는 쑨원 사상의 가장 확실한 계승자로서, 국민당 우파와 장제스(蔣介石, 1887~1975년)를 중국에서 축출하는데 역할을 한다.
셋째 쑹메이링은 쑨원의 유지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장제스와 결혼을 했다. 언니 쑹칭링이 장제스가 쑨원의 유지와 국민혁명을 거역하고 민족 분열을 조작한다고 하여 결혼을 반대하고, 당시 장개석은 아내를 세 명이나 둔 유부남이었슴에도, 그녀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장개석과의 결혼을 감행했다.
쑹메이링은 결혼이후 외교적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국민당 정부와 미국 사이의 고리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메이링은 국민당의 외교 고문으로서 구미 각국들과 외교 활동을 하고, 탁월한 언변으로 미국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원조 요청연설을 하여 기립 박수를 받는 등 열정적인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첫째 쑹아이링은 정치가의 부인이 된 두 동생처럼 공식적인 자리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뒤에서 조용히 가문을 이껄어 나가고 조종하는 지시자였다. 아이링은 자신의 남편인 콩샹시의 재력과, 두 여동생의 남편인 쑨원, 장제스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후에 재정부장, 중앙은행 총재, 공상 은행장 등을 거치며, 세계 최고 부자라고 알려졌던 남동생 쑹쯔원(宋子文 : 1894~1971년, 송자문)과 함께 중국 근대사 최고 가문을 형성하게 된다.
당시의 송씨 집안은 경제력과 정치력, 군사력 배경이 모두 더해지며 그야말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재물에 탐욕적이고 부패했다는 평을 받고있는 아이링이지만 집안을 중국 최고의 권력 가문으로 만든 능력과 영향력은 인정된다.
둘때 쑹칭링은 송씨 집안이 거대한 왕국과도 같은 권력을 거느리고 있을때, 가문의 반대편에 서서 오직 조국인 중국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쑨원 사후에도 칭링은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와 반 제국주의 노선을 지켜나가며, 혁명정치가로 활동하였고, 항일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에 반대하여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에 합류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그녀는 국가 부주석, 전국 부녀연합회 명예 주석직 등을 역임하며, 중국 여성활동, 사회복지 활동에 헌신하여, 칭링은 중국의 국모역으로 중국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다.
세째 쑹메이링은 권력 지향적이고 정치적인 사람이다. 메이링은 장제스와 함께 국민당 정부의 각종 외교역할을 수행하였고, 특히 1936년 12월 장쉐량(張學良 : 1898~2001년)과 양후청(楊虎城 : 1893~1949년) 등의 군벌이 일어킨 서안사변(西安事變)으로 장제스가 구금되자, 그녀는 타고난 재능과 배짱과 미모로 직접 담판에 뛰어들어 남편을 구해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메이링은 타임지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성"에 꼽히기도 했고, 2003년 무려 106살의 나이에 미국에서 타계하기 까지 국민당의 배후에서 수많은 서건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지나치게 권력을 탐했다는 평도 있지만, 중국 근현대사의 배후에서 중국, 대만, 미국의 관계를 가장 잘 조절한 인물로 대만인들의 국모로서 지금도 추앙 받고 있는 사람이다.
이처럼 중국 근대사에서 엄청난 핵심 역할을 한 송씨 집안의 세 자매는 자신의 이상향을 찾아서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걷게된다.
특히 쑹칭링과 쑹메이링은 서로의 정치적 견해 차이가 극명하여 1949년 중국의 공산화 이후 한 차례도 만나지 못하는 세기의 이산 자매가 되었다.
쑹아이링, 칭링, 메이링, 쑹씨 집안의 세 자매는 각각 사랑과 상처를 가슴에 묻은채 서로다른 길을 떠나게 되지만 중국 근현대사에 뿌려진 그들의 족적은 이제 중국의 역사속에 신화와 전설로 남게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자녀 교육에 있어 모든게 SKY(서고연)로 귀결 되는듯 합니다만, 송씨 집안 세 자매와 삼형제 육남매를 가르치고 교육하여, 중국 근현대사 최고의 정치가, 외교가, 사업가, 금융가 등으로 키워내고, 중국 최고의 가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부친 쑹자수(宋嘉樹)와 모친 니구이전(예계진=倪桂珍)이 참 존경스런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