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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서후면 天燈山(576m)을 가다.
글 쓴 이 旲 熀 高 達 五
1월 22일 추운 날씨에 고요의 정적(靜寂)으로 이어지는 새벽, 온 세상은 백설(白雪)로 뒤덮혀 있도다. 하늘에는 지다 남은 하현(下弦)달이 노란 쪽배로 빛나는데... 샛별은 한 뼘 옆에서 새벽하늘을 찬란히 수 놓고 있슴니다.
설날이 임박하여 정기산행은 하지 못하고 ‘번개산행(비정기산행)’으로 대체하여 평소보다 많이 늦은 8시에 반월당(현대백화점)을 출발하여 8시 40분에 칠곡IC를 최종 출발하니 참가인원이 25명이다. 날씨 탓인가? 접수했던 회원님들도 불참이 많으시단다.
차 내에서 간단한 진행을 마치고 서안동IC를 거쳐 다시 지방도를 따라 안동시 서후면, 북후면, 예천군에 걸쳐 위치한 “학가산(882m)”으로 진입을 시도하니 갈수록 눈길은 미끄러워서 진행이 어렵도다. 결국은 ‘광흥사(廣興寺)’ 주차장(출발기점)을 지척에 두고 차를 돌려 서후면 “천등산(574m)”으로 갑니다.
20여 분을 달려 봉정사(鳳停寺) 이정표를 따라드니 금계리 언덕아래 저만큼 ‘학봉(鶴奉 金誠一 1538~1593)종택’이 고즈넉한 동산아래 자리하고 있다. 그는 내앞 의성 김씨 종가에서 ‘청계공 김진(1500~1580)’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568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학문이 넓고 깊었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어전에서도 직언을 굽히지 않았고, 왜국에 사신으로 가서도 머리를 수그림이 없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에 왜국(일본)에 부사(副使)로 갔다 돌아온 후 정사인 황윤길과는 달리 왜적이 침범해올 기미가 없다고 조정에 보고하여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역사의 오점을 남겼으니... 당쟁과 나라의 혼란을 미리 염려한 탓이었던가?
이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지휘하여 승전하는데 큰 공을세웠으며, 1593년에 진주성에서 군사를 지휘하던 중에 병사하였다고 한다. 오래전에 답사했던 기억을 떠 올리면서... 봉정사 주차장에 당도하니 시계는 거의 11시가 다 되어간다.
경사진 언덕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마치고 ‘천등산 제3코스’로 열지어 오르니 온 산천(山川)은 백설로 뒤덮혀서 은빛으로 찬란하고, 몇 걸음을 나아가니 왼편 언덕아래는 “萬休찻집”이 육각정자모양으로 지어져서 홀로 고요하다.
그 뒤로는 맞배지붕의 전원주택이 한 채 보이는데... 인적은 없어 밤새나린 눈이 오롯이 마당에 쌓여있다. 잘 딲여진 등산로를 따라 오르니 발밑에 쌓인 눈이 뽀드득~ 뽀드득~ 사각~ 사각~ 정겨웁게 들려온다.
온 산천에 나무들은 백설로 덮여있어 알록달록 본래의 모습이 반~쯤 드러나서 한 폭의 수채화다. 날씨도 청명하고 비교적 고요하여 염려했던 것 보다 산행이 순조롭다. 얼마를 올랐을까? 온 몸에 땀이 배어나고 가쁜숨을 몰아쉬면서... 후미에 회원님들이 쉬어가자는 구호가 들려온다.
적당한 곳에서 선 채로 휴식을 취하니, 후미에 서부장님(81), 김해진님, 황까페지기님, 해바라기님, 금발례님, 박명옥님이 차례 차례로 도착하신다. 팔순의 노장님들께서 잘도 오르시니 육십대는 청춘이라!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려!
그럭 저럭 능선길에 올라서니 저만큼 왼쪽 방향으로 안동의 진산 “학가산(鶴駕山.882m)"이 백설로 찬란하고, 정상부근에는 통신철탑이 우주발사대모양으로 하늘을 떠 받치고 있다.
통신용으로, 군사목적으로 또 한전철탑으로 빼어난 경관들을 허물어 세운 “철탑”들이 얼마나 많은가? 일제(日帝)에 의해서 산천의 정기(精氣)를 끊었다고 말 하지만, 우리들 스스로 파괴한 산천이 얼마나 더 많던가?
아름다운 학가산을 가지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천등산을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하며 계속 전진하니 “정상과 관음굴”로 가는 이정표가 보이고, 10여 분을 더 오르니 ‘천등산(天燈山.576m)’의 안내문이 보인다.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있는 명산으로 바로 인근에 의상조사의 제자 ‘능인대사’가 수도 했다는 “천등굴(天燈窟)”이 있고, 그 동쪽에는 신라 고찰인 “개목사(開目寺)”가 있으며, 남쪽 중허리엔 홍건적 난리에 공민왕이 수축했다는 ‘개목산성(開目山城)’이 있고, 연하여 그 아래로 신라 고찰 “봉정사”가 있으며, 또 가뭄이 심할 때 안동부사가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었다는 “용샘”이 있다 하며, 조선초기에 지리에 밝았던 명재상 맹사성이 안동의 지세를 둘러보고 안동땅에 소경이 많이 나는 까닭은 천등산의 산기(山氣) 때문이라고 하여 “개목산(開目山)”이라 고쳐 부르니... 이 후 장님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옆으로 볼록한 공지(空地)에 모두들 모여 단체로 기념촬영을 마치고 10여 미터 정도의 지근한 거리에 조그마한 오석(烏石)의 정상표석이 있는데, 해발(574m)라 적혀 있어 좀 전의 안내판과는 그 높이가 다르게 새겨져 있어 당국의 시정이 요구됩니다.
정상표석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촬영을 마치고 또 개별적으로 아니면 벗님들끼리 차례 차례 기념촬영을 한 뒤 필자도 한 판 찍습니다. 30여 년을 작품활동을 해 오면서도 제 스스로 ‘모델’이 되는 것에는 왜 그리 어색한지...
시계는 벌써 12시 30분을 조금 지나고 있어 시장끼도 더 하여 20여 분을 걸어나려 개목사 옆 널찍한 풀밭에서 점심을 드심니다. 넓은 억새풀밭을 잘 다듬어 놓아서 모든 회원님들이 한자리에서 중식을 합니다. 게다가 이곳은 특별히 따스하여 눈도 깨끗이 녹아있고 바람도 고요하여 깊은 산중의 명당이로다.
점심후 우측 언덕을 넘어 개목사에 당도하니 넓은 터에 남향으로 진좌하고 있으며, 이 높은 산중에 이토록 아늑하고 평평한 지대가 있다는 것에 놀라고 정상 바로아래 청룡과 백호의 형세도 적당히 갖추고 있어 참으로 보기드문 길지입니다.
게다가 멀리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이 겹겹으로 펼쳐지는 광경은 말 그대로 산 겹겹 물 첩첩이다! 천왕문을 겸한 출입문 입구에는 “天燈山 開目寺”라는 현판이 고졸(古拙)하게 매달려있다.
맞은 편에 “원통전(圓通殿:보물 제242호)”은 조선 세조(世祖) 3년(1457)에 건립된 목조건물로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져 있고 그 밖에 산신각, 해우소, 요사채 등 가람(伽藍)이 비교적 단촐하다. 사(寺)라고 하기보단 암자(庵子)에 가깝고 인적이 드물고 속세와 멀어져 있어 수도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안내문에 본래 흥국사로 신라 신문왕(神文王:681~691) 때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절 뒤 “천동굴”에서 수도를 하던 중 천녀(天女)의 도움으로 도를 깨쳤다 하며, 그로 인하여 이 곳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간단히 참배를 마치고 도량을 한바퀴 휘~ 돌아 나오니, 요사채 처마에는 수정같은 고드름이 주렁 주렁 매달려있어 물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려! 몇 몇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종종 걸음으로 하산길로 접어듭니다.
송림(松林)사이로 난 등산로를 따라 사각~ 사각~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으며 걷는 재미가 쏠~ 쏠~ 합니다 그려! 남산님들은 대부분 먼저 나려 가시고 후미에 5~6명만 뒤따라 오시는데... 도란 도란 얘기소리만 들릴 뿐 보이지는 않습니다.
20여 분을 걸어서 봉정사 부근에 당도하니 영산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막아놓아 다시 올라 도착하니, 따스한 햇발아래 ‘영산암(靈山庵:경북 민속자료 제126호)’은 여느 가정집처럼 소담스럽게 다가온다.
영산암은 봉정사 동쪽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우화루(雨花樓), 응진전, 염화실, 삼성각, 송암당, 관심당 등 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건물이 ‘ㅁ’자로 구성되어 약간은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특히 삼성각과 송암당 앞에 심어 놓은 소나무가 많이도 자라 좁은 경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조금은 기(氣)가 넘침니다.
안내문에 “雨花樓” 현판은 원래 극락전 앞에 있던 것으로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하셨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하는데서 유래한다. 아울러 이 곳은 배용균 감독의 1989년 ‘작품(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영화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며, 이 밖에도 “동승(童僧)” 등의 작품이 촬영되었다고 한다.
선채로 간단한 예를 드리고 여러 돌계단을 내려서 봉정사 경내로 들어서니 남산님들이 사진촬영을 하시느라 모두들 분주하심니다. 대웅전(국보 제311호)은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단청(丹靑)이 퇴색되어 고풍어린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전에는 ‘보물 제55호’였는데, 근래에 ‘국보 제311호’로 승격되어 있다. 또 건물 앞쪽에는 난간을 둘러놓아서 여느 대웅전과는 다르게 느껴지며, 법당 내에는 3존불이 모셔져 있다.
뜰 아래 우측으로는 “화엄강당(華嚴講堂:보물 제448호)”이 정면3칸 측면2칸의 주심포양식의 맞배지붕이다. 그 왼쪽으로는 승방인 “무량해회(無量海會)”를 양쪽에 거느리고 앞으로는 2층의 “덕휘루(德輝樓)” 강당이 진좌하여, 대웅전의 영역과 그 우측으로 극락전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2개의 영역이 있다.
극락전(국보 제15호)은 배흘림기둥의 정면3칸 측면4칸의 맞배지붕양식으로 지어져 있으며,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뜰 아래는 고졸한 3층석탑이 천년의 침묵으로 만법(萬法)을 설하고 있으며, 그 우측으로는 고금당(古金堂)이 진좌하고 있으며, 왼쪽으로는 “華嚴講堂”이 자리하고 있다. 마당을 지나 축대 아래는 근래에 지어진 종각이 새롭게 단청되어 있어 산뜻하다.
주산인 천등산아래 고즈넉하고 따사로운 곳에 청룡과 백호도 잘 갖춰져 있으며, 게다가 지근한 거리에 안산(案山)은 겹겹으로 달마(達磨)가 미소(微笑)로 다가온다. 산중에 이만한 길지(吉地)가 또 있겠는가?
아울러 봉정사(鳳停寺)는 창건설화도 신비하여 삼국통일 직후인 682년에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한 후 종이학을 접어서 도력으로 날려보내니, 이 종이 봉황이 머무른 곳이 이곳이라 여기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2년에 극락전을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할 때 상량문에서 그의 제자인 ‘능인대덕’이 창건하고 고려 이후 여섯 차례나 중수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수 수 만년의 터에 천년이 넘는 목조건물을 간직 해 온 것도 우연이아니라 다 명당길지의 지덕(地德)이 아니겠는가! 모든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성성(盛盛)한 기운으로 일주문을 나서니, 김은철님이 단체촬영을 요구하신다.
김치~ 찰깍! 솔밭길을 몇걸음 나려오니 우측으로 개울 언덕에 정면2칸 측면2칸의 정자가 그림같다. 명옥대(鳴玉臺)다. 마침 박명옥님의 이름과 같아서 표석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비탈진 개울을 따라 정자에 이르니,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이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이라 적혀있다.
현판에 “명옥대(鳴玉臺)”와 “창암정사(蒼巖精舍)”라 걸려 있으며, 작지만 크게 느껴지고 풍광 또한 소담하지만 빼어납니다. 주차장에 당도하여 맞은편 식당에서 모두들 하산주를 드시는데... 오늘은 김은철님이 찬조하신 ‘과메
기’ 특식이라! 최영수 회장님의 건배에 이어 마침 필자에게도 윤갑용 총무님의 건배 제의가 있어, 금일 천등산 산행에 동참하신 모든님들의 건강과 남산산악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닭 대신 꿩이라드니...
학가산 대신에 천등산(天燈山)에서 불 밝혔네!
우리네 인생사가 그러하듯이...
예견치 못한 일에 신년(新年)의 홍재로다!
단기 4350년(서기2017년) 1월 22일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天燈山.576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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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산님들, 그리고 까페 모든회원님들 설은 편히 쇠셨는지요?
긴 설연휴가 끝나고 오늘은 첫 업무가 시작되는 날이자 1월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모든님들 다가오는 2월은 더욱 건강하시고 가내 만복이 깃드시길 기원합니다.
연하여, 설 전후로 바쁘다는 핑계로 늦게나마 "천등산" 산행기를 올려봅니다.
고 산대장님 후기를 집필하시느라 노고가 크십니다.오랫만에 접해보니 산대장님의 건강이 좋아지셨다는데 다행임을 감사드리며.천등산산행은 너무좋았습니다. 큰굴곡없이 펼쳐진 산길이 눈길에세도 편안하게 할수있어 좋았고 아늑한 엄마의 품같은 사찰들~너무 좋은 산행을 했습니다.즐감했습니다.늘~건강하세요^^.
해바라기님이 다녀 가셨군요.
졸문의 글을 늘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심에 감사 감사를 드림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가내 만복을 기원합니다.
다시 천등산을 알게 되고 역사를 배우고 참으로거운 산행 이였지요.
항상 수고 하시는 모습에 감사 함을 전 함니다.
황까페지기님 가내 두루 편안하신지요?
늘 관심과 애정어린 격려에 감사드리며~
좋은 자료들을 올려주셔서 적절히 잘 활용했습니다.
상봉의 그 날까지 늘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