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거필택린(居必擇隣)
있을 거(居), 반드시 필(必), ‘거필’ 이라함은 ‘거주할 곳은 반드시~’라는 뜻이고, 가릴 택(擇), 이웃 린(隣), ‘택린’ 이라함은 ‘이웃을 가린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거필택린’이라함은 “주거지를 정할 때에는 반드시 이웃을 가려서 정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어디에 사느냐는 모든 사람들의 고민이며 걱정거리이다. 여기저기 아파트의 분양광고가 나오고 평당 수천만원하는 집들이 즐비하다. 고가의 아파트를 보면, 주로 좋은 풍치, 좋은 교통, 좋은 학군 등을 가지고 있다.
요즘은 집을 고를 때, 이웃에 누가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쾌적한 주거환경을 우선적으로 선호한다. 교통이 편리하고 조망(眺望)이 좋는 아파트가 분양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물론 돈을 좋아하는 인간의 심리에 따라 앞으로 값도 상당히 오를 전망이 있는 곳을 선호한다. 조망권이 좋은 집을 영어 쓰기 좋아하는 세태에 따라 “뷰(view)"가 좋은 집이라고도 한다. 아파트 이름이 온통 외래어 투성이라 노인들은 쉽사리 발음하기도 힘들고 기억하기도 어렵다.
옛날에 가장 좋은 터는 남쪽을 향하고, 뒤에 울창한 숲이 병풍처럼 둘러싸여서 모진 바람과 찬 서리를 막아주고, 앞으로는 넓은 들이 활짝 트여서 멀리를 내다볼 수 있는 있으며, 저멀리 강물이 유유하게 흐르는 그런 곳을 선호했다. 그런 곳에서 살면 마음이 맑아지고 정신이 상쾌해 지며 자연이 주는 모든 기(氣)를 받아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마음씨 넉넉한 이웃들과 더불어 산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좋은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은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좋은 이웃은 천만금을 주더라도 사야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 천만금이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실천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의 기록이 중국 남북조시대의 남조(南朝))의 역사서인 남사(南史)에 나온다.
송계아(宋季雅)라는 사람이 퇴직을 대비하여 자신이 살 집을 보러 다녔다. 여러 곳을 돌아보다가, 천백만금을 주고 여승진(呂僧珍)이라는 사람의 이웃집을 사서 이사했다. 백만금 밖에 안되는 집 값을 어떻게 천백만원이나 주고 샀느냐고 여승진이 그 이유를 물었다. 송계아의 대답은 간단했다. “백만금은 집 값으로 지불했고, 천만원은 당신과 이웃이 되기 위한 값으로 지불한 것이다. (百萬買宅 千萬買隣:백만매택 천만매린)”
대가족제가 붕괴되고, 부부중심의 핵가족시대로 접어든지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각자 살기에 바빠서 이웃에 누가 사는 지 잘 모른다. 또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 시대로 되었다. 서로 모르고 지내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 만큼 메마르고 각박한 세상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같은 동(棟)의 아파트에 살아도 서로 간에 얼굴 모르고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필자는 단독주택에 오래도록 살다가 20년 전에 아파트로 이사갔다. 이사가서 고사떡을 같은 동에 사는 아파트 주민들에게 돌린 적이 있었다. 문을 열어주기는 해도 별로 달가워하지를 않았다. 더러는 받은 시루떡을 먹지 않고, 음식물 버리는 통에 갔다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아파트 경비원이 귀띔해 주기도 했다. 그 뒤로는 고사떡 돌리는 것은 중단했다. 지금 세상에 고사를 지내는 것도 세상살이에 뒤진 것인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시골마을에 ‘상두계(喪頭契)’라는 계(契)모임이 있었다.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끼리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함께 힘을 모아 초상에 따르는 모든 일을 내 일 처럼 치러주는 친목단체이다. 제수의 준비와 시신의 입관, 장지까지의 운구, 분묘를 받드는 일까지 일체를 상주를 도와서 행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매달 적립한 계금(契金) 중에서 일부를 부조로 마련해 주어 장례비용에 보태도록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시골 향리에 사는 서람들은 관혼상제 때 아웃들이 한 가족처럼 힘을 모았다. 돈만 내면 장레회사가 모든 일을 처리해주는 요즘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소학에 인보상조((隣保相助)라는 말이 나온다. 이웃끼리는 서로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있다. “가까운 이웃이 멀리 떨어져 사는 친척보다 낫다”는 말도 한다.
좋은 친구와 함께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면, 좋은 이웃이 있는 것은 생활의 즐거움이다. 굳게 닫힌 아파트의 문을 열고, 같은 동의 이웃끼리라도 친하게 지낸다면 시멘트 숲속에서도 따뜻한 인정의 꽃을 피울 수가 있게 될 것이다. (2023.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