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먹는 열매 중에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 ?
한 개의 무게가 무려 1톤이 넘게 키울 수도 있다. 실제 벨기에에서는 1,190kg짜리를 키워낸 농부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 30여종의 원종이 존재하고 있고 해마다 세계 각국에서 새로운 품종이 개발되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품종이 재배되고 있는 작물 바로 호박이다.
꽃은 순박한 누님의 미소를 닮았고 넓은 잎은 넉넉한 이웃의 마음과 같고 호박이 익어 누런색을 띠면 수확을 앞둔 우리 농촌의 들녘을 생각나게 하며 모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양은 우리의 인생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늙은 호박 한 개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면 여유 그 자체이다.
시골 어머니가 가꾼 풋호박은 된장찌개는 물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춘 나물과 짝을 맞추고 비오는 날에는 부침개, 칼국수, 수제비의 단골 원료였으며 연한 잎은 쌈의 재료로 사랑받았다. 늙은 호박은 아기를 낳고 기력을 다한 산모의 붓기를 빼는 약으로 쓰였고 농부가 가을걷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드리는 떡의 재료로 이용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호박은 원주민들에게 중요한 식량으로 약 9000년 전부터 재배된 것으로 추정한다. 중남미 문명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안데스문명에서는 옥수수나 감자보다 훨씬 먼저 재배가 된 작물이다.
멕시코에서는 BC 5000년, 페루에서는 BC 3000년경의 유적에서 종자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인류의 역사 이전에 자리를 잡고 살았던 식물이다.
호박이 전 세계로 퍼진 것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더불어 이루어 졌으며 식물분류학적으로 동양종, 서양종, 페포종이 존재한다.
호박의 학명 중 속명인 쿠쿠비타(Cucurbita)는 라틴어의 오이(cucumis)와 둥글다(orbis)는 말에서 유래하였으며 동양종의 종명인 moschata는 ‘사향과 같은 향기가 난다’는 의미이고 서양종의 종명인 maxima는 ‘크기가 가장 크다’는 의미이다. 페포종의 pepo는 박과작물을 의미한다.
영명의 Pumpkin은 그리스어 페폰(pepon)에서 유래되었고 커다란 멜론이라는 의미이다.
동양종 호박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 동남아시아와 같은 열대 아시아로 전파되었고 서양종 호박은 포르투갈의 무역 경로를 따라 북유럽까지 도달하였다. 16C 중반 포르투갈의 무역선이 일본과 중국으로 전파하였다.
동양종 호박의 우리나라 도입 설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일본에서 도입되었다는 것과 중국을 통해서 도입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1600년대 중국 도입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재래종 호박이 일본의 종과는 모양이 다르고 중국에서 도입된 작물들에 붙여진 ‘호(胡)’라는 명칭 그리고 중국의 전통호박과 모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다.
이처럼 호박의 도입 역사는 비교적 짧다고 할 수 있으며 서양종 호박은 20C에 이르러 일본에서 페포종 호박은 미국에서 도입되었다.
이익은《성호사설》에서 ‘열매가 풍성하여 예전에는 절이나 텃밭에 심다가 요즘에는 사대부도 심는다.’고 하였고 《한정록》에서는 ‘3월 하순에 둑을 치고 호미로 구멍을 파고 심되 서로의 거리는 1척 2촌의 간격으로 하고 한 구멍마다 반드시 짙은 거름물을 준다. 덩굴이 길게 뻗으면 시렁을 매어 끌어 올린다’고 하였다.
이규경은《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처음에는 승려들이나 평민이 먹었는데 점점 호박을 먹는 것이 유행이 되면서 정착하였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채소라고 하여 ‘승소’라고 하였지만 1700년대 이후부터는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먹는 채소가 되었다.
과거에는 호박하면 ‘늙은 호박’을 떠올렸지만 현재는 풋호박, 애호박, 주키니호박, 단호박과 같이 소비자들의 입맛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고 판매시장도 구분되어 있다.
소화가 잘 되는 탄수화물이 많고 항산화물질인 카로티노이드 성분이 매우 많은 채소이다. 카로티노이드는 베타카로틴, 루테인, 크산토필의 성분으로 항암, 피부미용과 몸 속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기능이 있고 눈을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이밖에도 부드러운 식감의 식이섬유와 당질은 소화흡수가 뛰어나 위가 약한 사람이나 노약자들에게 권장하여도 무방하다.
《본초강목》에서는 ‘속을 보하고 기를 북돋아준다.’고 하였다. 예전에는 피부가 가려우면 호박 줄기를 달인 물로 씻었고 종기에는 호박꽃을 찧어서 붙였다. 서양에서는 호박하면 ‘핼러원데이’를 꼽지만 동양에서는 ‘가을보약’으로 여겼다. 늙은 호박의 당도는 14∼16 Brix로 어지간한 과일 보다도 높다. 설탕이 많이 들어간 에이드나 탄산음료 보다는 호박식혜와 같은 음료 한잔이 좋을 듯싶다. 속담에 ‘동짓달 늙은 호박을 삶아 먹으면 일 년 내내 병이 없다.’고 하였다. 호박은 꽃, 열매, 줄기까지 아낌없이 내어주는 그야 말로 넝쿨째 굴어온 호박이다.
과거 일본에서는 쌀밥 위주의 식생활로 야맹증과 각기병 환자가 많이 발생하자 호박의 재배를 적극 권장하기도 하였다.
잘 익은 호박을 따다가 마루 한쪽에 보관하면서 겨울 내내 호박죽을 만들어 먹던 기억과 처마 밑에서 정월 대보름 시루떡의 재료로 쓰기 위해 호박고지를 말리던 풍경은 이제 아련한 추억으로 넘어가고 있다.
미국은 23개주 83개 도시에서 매년 호박축제를 하고 있고 대형호박 콘테스트는 150년 이상을 이어오는 행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역축제나 행사에서 다양한 종류의 호박을 쉽게 볼 수 있고 반찬으로 이용되던 것을 벗어나 가공식품은 물론 도시농업과 체험농장의 소재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고령농가와 귀농인의 소득작물이기도 하다.
호박의 다양한 변신을 기대해 본다.
그나저나 지난 제사 때 큰집에 가보니 형수님이 호박고지를 말리고 있던데 대보름에 호박고지 떡을 맛 볼 수 있으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