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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십자군 3 : 십자군 해안을 따라 남진해 성도 예루살렘성을 수복하다!
돌궐이 서쪽으로 이동해 이슬람교로 개종한후 1071년 소아시아 동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의 알프 아르슬란은 동로마 비잔틴 황제 로마누스 4세를 격파해
아나톨리아와 시리아를 차지하자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로마교황청에 원군을 요청
하니.... 교황에게 호응한 1차 십자군은 기병 8천명에 보병 4만 2천등 5만명에 달했습니다.
아마데우스주교 외에 툴루즈 백작 레몽 4세와 하로렌(벨기에 동남부) 공작 고드프루아 부용에 이탈리아
남부 노르만족 풀리아 공작 보에몽(보에몬드)등인데 1097년 6월 니케아를 항복받고 아나톨리아를
종단해 10월 하순에 안티오키아에 도착해 성을 포위했지만 수비가 완강한지라 6개월 동안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면서 1098년 6월 안티오키아를 함락하고 원군인 모술의 카르부카 대군까지 쳐부숩니다.
수비군을 매수해 성문을 열게한 보에몽과 주장이라고 생각했던 툴루즈의 레몽이 안티오키아를 서로 차지
할려고 싸우는데 몰두하자 병사들이 항의하니... 제후들은 400년 전에 이슬람 아랍인에게 뺏긴 성도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해 남진해 트리폴리 북쪽 아르카(Arqa) 라는 도시 공성전은 3개월을 넘게 끌게
되지만 1098년 10월 레몽 백작은 남루한 옷에 맨발, 손에는 십자 모양이의 지팡이를 짚고 앞장을 섭니다.
팔레스티나 지방은 동쪽은 다마스쿠스의 태수인 수니파 투르크인이 지배하고 서쪽 해안지대와 예루살렘
은 시아파인 이집트 파티마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다마스커스의 이슬람 영주들은 기병 2천등
1만 5천 십자군이 시아파인 파티마조 영토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는데... 파티마(이집트) 는
십자군에게 자신들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동맹을 맺어 튀르크에 공동전선을 펼 것을 제안합니다.
파티마조(이집트)는 십자군의 목적이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종교 때문에 전쟁을 다 하다니??? 그때 샤이자르의 태수는 사절을 보내
평화롭게 통과만 하면 싼 가격으로 식량과 군수품을 팔겠다고 제의하니 십자군은
교외를 행군할 때 들의 양을 포획해서는 성에 들어가서 판매를 하고 말과 식량을 구합니다.
레몽 백작과 탄크레디는 마샤프나 라파니야등 도시에서는 평화협상으로 도시에 들어가
휴식하면서 히슨 알 아크라드에서는 저항을 받았지만 빈 성에 들어가 재정비
하는데, 훗날 이 성은 십자군의 요새 로 크락 데 슈발리에로 불리게 됩니다.
이때 트리폴리 태수가 사절을 보내 파티마조에 대항해 동맹을 맺자고 제안해 옵니다.
도시가 엄청 부유한지라 레몽은 마음을 바꾸어 트리폴리를 점령하러 가다가 아르카라는 도시가 결사항전
하는 바람에 안티오키아에서 예수를 찌른 성스러운 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바르톨로메오가 신에게서
증명받겠다며 불의 시련에 임했다가 심한 화상을 입고 죽는데, 이 창은 이후 4개로 둔갑해 아르메니아
교회, 7차 십자군 프랑스왕 루이9세, 오스만투르크 술탄이 교황에 보낸 것 그리고 빈에 보관된 것입니다?
해안으로 진군한 후발대인 고드프루아와 플랑드르 백작의 군대가 도착하니 십자군은 성을 공격
하지 않는 조건으로 1만 5천 금화를 받고 트리폴리에 무혈 입성해 휴식한후 5월 16일
행군을 시작해 남하하니 베이루트 태수는 스스로 돈과 군량을 바쳤으며 시돈도 마찬가지
였고 티루스는 성문을 잠갔는데........ 성벽 밖에는 식량과 재물을 놓아둔지라 받고는 지나갑니다.
아코, 하이파, 카이사레아, 아르수프 및 야파를 전투 없이 평화롭게 통과하는데 중무장한 십자군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는 탱크 부대로 보였던 모양 입니다. 야파를 지나 내륙으로 들어가서
빈 도시인 라말라를 점령하니, 현지에 살던 가톨릭교도들이 베들레헴을 탈환해 달라고 호소
하는지라 1099년 6월 6일 탄크레디는 3백명으로 도시를 점령하고는 자기 영지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가톨릭성당 사제가 신의 도시를 인간이 영유할수 없다며 거부하니 십자군들은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출발하는데.... 이때 탄크레디는 베들레헴으로 되돌아가서는 식량과 양떼를
징발해 군량으로 삼으며, 6월 7일 십자군은 몽조이 언덕에 올라 에루살렘이 보이는 곳에
도달하니 예루살렘에는 파티마(이집트)에서 파견한 총독 이흐티카르가 농성 준비를 합니다.
그는 일찍이 로마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강화했던 900년 전이나 거의 다를바 없는 4km
성벽을 보수하는데 올리브산을 등진 동쪽은 깊은 계곡 위에 높은 성벽이고 시온산을 등진
남쪽은 사막에 가까운 땅으로 평지이니 높은 성벽에서 잘보이는지라 공격은 서쪽과 북쪽
굳은 땅인 평지에서 이루어지는데 이집트 파티마왕조에서 구원군이 온다면 서쪽일 것입니다.
총독 이흐티카르는 성벽을 보수하고 식량을 저장하며 빗물이 저장된 저수조를 보강하는데 하수도
가 있는지라 역병은 걱정할 필요 없으니 성 주변을 소개하고 안티오키아 처럼 내통할 기독교도
들을 추방하며 성밖 우물에는 독을 풀고 양떼는 성안으로 들이는데, 십자군은 30% 에 불과한
기병 2천에 보병 1만 3천등 1만 5천으로 줄어 있었으니 6월 13일에 공격했지만 쉽게 격퇴됩니다.
이때 비둘기를 통한 구원요청으로 야파 남쪽 아스칼론에 기지를 두고 있는 이집트의 파티마왕조
의 이슬람 대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니 서쪽 다윗탑이 세워진 야파문을 공격하던 십자군은
배후를 걱정하는데, 여긴 십자군 중에서도 정예군인 고드프루아가 담당했으며 사흘 후
에는 베들레헴에서 약탈한 밀가루 포대에 양떼를 몰고 노르만족 탄크레디가 나타나 합류합니다.
소수의 병력을 가진 노르망디공작 로베르는 북쪽 성문인 헤롯문을 담당했고.... 역시 북쪽
다마스커스문에는 소수정예인 플랑드르백작이 진을 쳤으며 툴루즈 백작 레몽의 대군은
시온산을 등진 남쪽 시온문 앞에 포진하는데 여긴 그리스도가 최후의만찬을 벌였다는
“체나콜로” 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이집트 병사들의 화살세례로 진지를 뒤로 물립니다.
예루살렘성 공격은 기독교도로서는 “해방전쟁” 이니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나라를 건설하던 노르만족
보에몽은 조카 탄크레디를 대신 보냈으며, 역시 배신으로 에데사를 탈취한 보두앵은 이름이 같은
사촌동생 보두앵을 파견했으니 형 고드프루아 및 외스티슈 3형제가 다 참전한 셈이라고 할 것입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죽은 아마데르 주교 대리역은 레몽 진영에 있던 동생 위그 드 몽테유가 맡았으며
안티오키아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도망치다가 잡힌 은자 피에로도 살아남은 순례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공성전에 참가했으니 안티오키아 공방전때 도망친 블루아백작과 사절로
파견된 것을 기화로 유럽으로 돌아가버린 프랑스왕의 동생 위그를 빼고는 모두 참전한 것입니다.
배후에 다가온다는 원군 소식에 다급해진 십자군은 절망하는데 식량은 탄크레디가 베들레헴
에서 약탈해 온지라 당분간은 버틸수 있지만 독에 오염되지 않은 물을 구하자면 남동쪽
성벽 밖 우물은 화살세례를 받으니 예루살렘에서 무려 10KM 나 외곽으로 가서 길어와야
하는게 문제인데다가... 사막의 무더위가 강철 갑옷을 입은 십자군을 더욱 고통스럽게 합니다.
1099년 6월 12일 십자군은 올리브산에 틀어박혀서 수행중인 피에트로 라는 은자를 찾아 가니
은자는 신을 믿고 당장 공격하라고 말하기에 다음날 총공격 하니 신니 도운 것인지 북쪽
성벽을 넘을수 있었지만.... 세상에나!!! 거기에 또 한겹의 성벽이 더 있는게 아닌가요?
미처 사다리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으니 철수하는데 공성용 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예루살렘에는 돌은 천지이지만 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6월 17일 제노바와 영국 배로 구성된 선단이 야파항에 입항했다는 소식에
보급물자를 뺏기지 않으려고 레몽 드 필레가 부대를 이끌고 야파로 달려가니 마침 이집트
선단의 공격을 받는 중이라 격퇴하니 이집트는 야파항 봉쇄를 풀고 아스칼론으로 퇴각합니다.
제노바의 갤리선 2척과 영국의 범선 4척은 갖가지 다양한 보급품을 싣고왔지만 나무야 쉽게 구할수 있다
보아 가져오지 못했으니.... 이에 탄크레디와 플랑드르 백작은 사마리아지방 까지 가서 목재를 구해
와서는 공성용 탑 제작을 하는데 겨우 2개를 완성해 고드프루아군과 레몽군에 하나씩 배치하게 됩니다.
레몽의 수행원인 사제 페트루스 데시데리우스가 죽은 아데마르의 영혼을 보았다고 주장
하면서 예루살렘의 성벽을 한바퀴 돌면 (여호수아 시대 처럼?) 9일 후에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이라고 주장하자 십자군들은 사흘동안 단식하며 순례자 복식으로 예루살렘
성벽 주위를 돌기 시작하였고 예루살렘 수비대는 그 꼴에 황당해 하며 화살을 쏘아댑니다.
황당한 짓이지만 속죄를 통한 집단세뇌로 사기도 회복하고 공성탑도 하나 더 만들어 노르망디
공작과 플랑드르 백작이 있는 북쪽에도 배치한 십자군은 7월 13일 해자를 메우고는.....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자 이집트군은 “그리스의 불” 로 불리던 단지에 석유와 유황을 넣고
불을 붙여 던지는 “그리스 화염기” 수류탄으로 반격하니..... 불이 붙자 이동시키지만 불탑니다.
하지만 고드프루아 형제들과 탄크레디는 북쪽에 배치된 공성탑으로 이동해서는 7월 15일
공작 탑을 헤롯문 성벽에 밀착시킨후 사다리를 탑 옆에 세우고는 공성탑이 열리니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가 성벽위로 내려서고 탄크레디와 플랑드르백작 및 노르만공작도 뒤를
따르니 병사들로 성벽 위로 쏟아지고 이어 성문을 열게 되니 성스러운 도시는 함락되었습니다.
총독 이흐티카르는 수하들을 데리고 다윗탑으로 도망쳤는데 여긴 탑이라기 보다 독립된
성채이니 당분간 저항할수 있었는데, 안전한 철수를 조건으로 야파문으로 들어온
레몽에게 항복하니 레몽은 병사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귀금속과 다윗탑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수락하는지라....... 이들은 성밖으로 나가 아스칼론으로 도주합니다.
1099년 7월 15일 성에서는 환희에 찬 광신도 십자군은 당연히 사흘간 약탈을 벌였으니....
말 고삐까지 피가 닿도록 사람을 죽였느니 예루살렘이 피바다가 되어 무릎까지 피가
차올랐다느니 하지만 재물에 더 욕심이 많았던 십자군이 그 정도로 광기에 빠졌을
것이라 믿기는 어려운데.... 그래도 성 내의 무슬림과 유대교도들은 처참한 죽임을 당합니다.
죽은 무슬림과 유대인이 엄청나게 많았고 학살이 일어났던 것 역시 사실이었으니 최대한
적게 잡아도 1만, 많게는 4만에서 7만까지 라고 이야기하니... 중세 도시의 인구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학살” 이었습니다. 사흘간의 광기를 생각해 보면 농성
준비 기간 동안 성에서 쫓겨난 현지 기독교도들은 오히려 목숨을 건진 셈이었습니다.
고드프루아는 성묘교회로 직행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동굴 무덤위에 세워졌다는 교회에서 무릎
을 꿇고 기도를 올렸는데.... 하지만 그도 병사들이 저지르는 살육을 멈추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으니 성 안에 생존자는 없었다는데, 탄크레디는 이슬람 성소 “알 아크사“ 로 들어가 성소
지붕 위에 자신과 보에몽이 속한 알타빌라 가문의 깃발을 걸고는 성소의 보물을 독차지 합니다.
이 때 알 아크사 사원에 피신해 있던 두려움에 찬 3백명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24살 젊은이
탄크레디가 살려준다고 약속을 했지만.... 탄크레디가 보물을 숨길 장소를 찾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십자군들이 들이닥쳐 불을 지르니...... 알 아크사
사원은 300명 여자와 어린아이들과 하께 불타오르니... 그들은 모두 화형을 당한 것입니다!
다음날인 1099년 7월 16일 십자군 제후들은 성묘교회에 모여 감사기도를 드리고는 다음날 다시
모여 예루살렘 대주교를 정하는데 교황 대리인 아데마르 주교는 이미 죽었고 이슬람지배하
예루살렘 주교이던 시메온은 키프로스로 추방돼 죽었으며 교황은 해방 소식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니 노르망디 공작의 고해신부 드 로를 추천하자 남부파인 레몽이 반대하니 뽑지를 못합니다.
허영심이 많은 툴루즈 백작 레몽은 자신이 성스러운 땅 예루살렘 왕이 되고 싶었으나 제후들이 호감을
가지지 않는 것을 아는지라 가장 연장자인 나도 성스러운 도시의 왕이 된다고 생각하면 부담
스러워진다고 선수를 치니 다른 제후들도 사양할줄 알았는데 레몽을 싫어하던 제후들은 얼른
로렌공작 고대프루아를 추대하니 그는 한번 사양하는 흉내를 내고 승락하니 예루살렘 왕국을 세웁니다.
기분이 상한 쉰일곱살의 레몽은 부하를 이끌고 여리고로 가서는 구약성서 시대부터 존재했던 도시와 주민
들에게 화풀이를 하니 다윗탑은 자연스레 고드프루아가 차지하며 레몽이 없어졌으니 예루살렘 대주교는
드 로가 차지해서 그리스도교는 가톨릭만 인정하고 동로마 비잔틴의 그리스정교회와 아르메니아파는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무려 1,060년 전에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를 만들어내는 재주(!)를 부립니다.
고드프루아는 대주교와 충돌하는 것은 피하면서 자신은 왕(Rex)이 아니라 단지 “성묘의 수호자
(AdvocatusSancti Sepulchri)" 라고 불리기를 원했는데.... 노르망디공작과 플랑드르 백작이
귀국하자 하로렌 영지의 소유자인 그는 동생 외스티슈도 귀국을 시킵니다. 이때 이집트
대군이 진격해 오자 야파항에서 배를 기다리던 노르망디와 플랑드르에 레몽 까지 합류합니다.
고드프루아는 나블루스에 나가있는 탄크레디에게 이집트군의 동향을 정탐시키니 이집트군은 3만으로 재상
알 아흐달이 이끄는데 아스킬론 교외에 도착해 해로로 운송되는 군량을 기다리는 중이라.... 먼저 적을
공격야 한다는 탄크레디의 주장을 받아 들인 고드프루아는 1만 2천여명의 십자군을 이끌고 출진 합니다.
아스칼론 교외에 접근해 이집트 방향인 우익은 툴루즈 백작 레몽, 플랑드르백작과 노르망디
공작 및 탄크레디는 중앙에 그리고 좌익은 고드프루아가 맡았는데 가벼운 차림으로
기습에 나서는데 1099년 8월 11일 새벽에 한창 잠에 곯아떨어진 이집트 진영을 공격하니
불의에 기습을 당한 이집트군은 아스칼론으로 도주하다가 모두 바다에 빠져 익사를 합니다.
진중에서 엄청난 재물까지 챙긴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데 낙담한 아스칼론과 아르수푸 주민
들은 레몽에게 항복하지만 무혈점령할 기회를 수호자 고드프루아는 궂이 거절하니 지휘계통을
생각했던 모양인데, 이 일로 틀어진 레몽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갔으며 플랑드르 백작과
노르망디 공작도 마음이 상해서는 따라가니 예루살렘에는.... 고드프루아와 탄크레디만 남게 됩니다.
레몽은 교황의 새 대리인으로 이탈리아 4대 무역항이자 이슬람과 교역도 하고 싸우기도 한 아라비아
숫자를 최초로 받아들인 피사 출신 다임베르트를 라타키아에서 만나니 대리인은 안티오키아로
향했는데 안티오키아 공작령을 만든 보에몽은 2년전 비잔틴의 공주를 매료시켰던 매력으로
대리인을 맞아 위험한 예루살렘까지 수행을 자처하니 그와 에데사의 보두앵도 성지순례를 합니다.
죽은 교황도 대리인인 다임베르트를 통해 사후나마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하는 셈인데 예루살렘
이 해방되엇다는 소식에 유럽에서 순례자들이 대거 몰려왔으므로 보두앵의 일행은
무려 2만 5천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라타키아에 도착하니 기분이 상한 레몽이 협조하지
않는지라 피사의 배에서 식량을 구한 다음 바니야스를 지나 타르투스에서 저항을 받습니다.
이어 트리폴리는 설탕의 산지이니 고대 로마시대의 벌꿀에서 십자군 이후로는 트리폴리의 설탕으로 대체
되게 됩니다만 비잔틴 황제가 거부하는지라 굶으면서 남하해 베이루트, 시돈, 티루스, 아코, 하이파
를 지나 12월 중순 카이사레아에 도착해 식량을 구한 다음 1099년 12월 21일 예루살렘성에 도착합니다.
이때 예루살렘성에는 기병 3백명에 보병 2천명등 소수의 고드프루아군 병사들만 있을뿐 주민은
전혀 없던 상황이라 고드프루아는 이들 2만 5천명을 환영했는데.... 병사들에게는 성도를
방어할 군대로 남아달라고 하고 신도들에게는 주변 경작지를 무료로 줄테니 여기 예루살렘
백성이 되어 달라고 사정하는데 탄크레디는 기병 24명으로 갈릴리를 정복하는 중이었습니다.
예루살렘왕에 있어서 갈리리는 다마스커스의 이슬람 셀주크 영주 두카크를 방어하는 방벽으로
24살의 노르만족 젊은이는 이슬람 마을을 점령해서는 도망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고
이들이 예루살렘왕국에 속하기만 한다면..... 연공만 내면 안전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
하면서 그 넓은 갈릴리 땅을 손에 넣었는데 그리스정교도도 자기 신앙을 지키는 걸 허락합니다.
탄크레디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낙는 어부가 되라고 가르친
갈릴리 호수 티베리아스를 수도로 정하고는 견고한 성채도시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으니
티베리아스에서 서쪽으로 가면 바로 아코나 하이파로 도착할수 있는 전략 요충지를 불과
24명의 기병으로 점령한 것인데 고모부 보에몽의 병사를 받아 곧 갈릴리 전체로 영토를 넓힙니다.
교황의 대리인인 다임베르트는 파트리아르카인 자신이 맡아야 한다며 예루살렘 대주교 드 로를 쫓아
내고는 그 자리를 차지한후 신의 이름으로 군주에게 통치권을 부여하니 무릎을 꿇은 고드프루아
와 보에몽에게 예루살렘왕국과 안티오키아공국의 관을 수여했으며 탄크레디도 갈릴리 공작이
되었지만 에데사를 탈취한후 아르메니아 여인과 결혼한 보두앵은 의식을 갖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1100년 1월 7일 북쪽으로 돌아가는 보에몽과 보두앵은 내륙으로 택했으니 여리고로 나가서는
티베리아스를 거쳐 고대 신전터가 남아있는 바알베크를 지나 아르카에서 해안길로
빠지는데 산 하나 너머에는 두카크의 다마스크스이니 이슬람 연대기 작가들은 분기로 가득
차 있으니 이를 저지하지 못한건 이슬람측이 통일되지 못하고 서로 분열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1100년 7월 18일 고드프루아가 마흔으로 죽자 대주교 다임베르트는 종부성사를 하면서 예루살렘
을 로마 교회에 바치는 유언을 하라고 끈질기게 종용했지만... 고드프루아는 숨이 넘어가면서도
단 한마디 말을 안했으니, 부르고뉴의 기사는 그 뜻을 알아듣고는 장례식후 부하들을 데리고
다윗탑을 수중에 넣고는....... 고드프루아의 동생인 에데사 백작에게 빨리 오라는 급보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