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집총간 > 동춘당집 > 同春堂先生文集卷之十六 > 雜著 > 宋浚吉
淸州書院泉谷宋公追享通文 代牧伯作
右通文爲。故東萊府伯宋公精忠大節。赫赫在人耳目。今將以斯文公議。醊享於本州。有定院祠者。蓋壬辰之難。實是氣數之大變。國家昇平百年。文武恬嬉。民無死長之志。士昧授命之義。國之不亡。僅一髮耳。公以眇然一个守臣。當賊初衝。首先抗義。視死如歸。自是厥後首尾數十年。成仁取義。以表正人紀。扶樹國脈者。固不可一二數。而實公爲之倡也。然則國家得有今日。繄誰之賴歟。公少卓犖有氣誼。風流標致。儀範一時。當其赴東萊也。朝暮難且作。公有老父在堂。人或勸之勿赴。公毅然曰。不辭難。臣職也。則其定蓋已久矣。城且陷。取朝衣穿甲上。北向拜訖。致書于其父曰。孤城月暈。列鎭高枕。君臣義重。父子恩輕。誦其言千載之下。亦必有感奮流涕而不能自已者。且其僕妾之賤。皆知取捨之分。不汚於讎虜而俱全其節。公之所以有於己而及於人者如此。亡論華夷婦孺。罔不稱誦而嘖嘖焉。尤豈非古今之所罕聞耶。朝家崇報之典。萊城享祀之擧。亦可以少慰瞻聆。而惟此本州。卽公故鄕。墳廬在焉。子姓居焉。州人之所以想慕而興起者。宜有倍於他邦。而尸祝之禮尙闕焉。甚可惜也。州古有院。醊祀慶徵君,朴江叟,金沖庵,宋圭庵四先生。旣又追享韓松齋。夫五賢者。道德學問。固非後生所敢窺測。然槩以論之。雖所造不能無不同。而亦不害其爲同也。今以公之所就儗之。又未知其如何。而古人之言曰。凡學者。所以學爲忠與孝也。學求如是而已。則又何歉於殊途而同歸也。朱夫子嘗記漳州州學東溪高公之祠而曰。孟子論夷惠。以其道不同於孔子而不願學。一朝慨然以百世之師歸之。蓋以二子志潔行高而迹著。故慕之者一日感慨而有餘也。二子之功。誠不爲小。而孟子之意。亦可知也。噫。朱夫子之意。其亦可知也已。雖未知公之風節視高公又如何。而高公旣祠於州學。則以公而合食於五賢者。庶不爲無稽矣。不佞適忝州符。訪公遺蹟。俛仰之間。竊不勝感慨之懷。間嘗竊聽搢紳公議。士林緖論。咸以爲公之所樹立。旣軒天地耀日月。自足以輝映千秋。師表百世。則合享之擧。質諸今昔。庶幾無疑。茲於某月某日。將與州之學子。
妥侑如禮。此實斯文盛擧。肅此通告。惟諸君子惠臨以敎之。不勝幸甚。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3
청주서원(淸州書院)에 천곡(泉谷) 송공(宋公)을 추향(追享)하는 일에 관한 통문 목백(牧伯)을 대신해 지음
이 통문은 고(故)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공(宋公 송상현(宋象賢))의 순결한 충성과 위대한 절개가 빛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 사문(斯文)의 공의(公議)에 따라 본주(本州)에 있는 서원(書院)의 사당에 배향(配享)하기 위한 것이다.
대체로 임진년의 난리는 실로 국운(國運)의 큰 변고였다. 국가가 100년 동안 태평을 누린 나머지 문무관(文武官)들은 모두 안일에 빠져 국사를 생각지 않았고, 백성들은 윗사람을 위해 죽을 뜻이 없었고, 선비들은 국난(國難)을 보고도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몰랐다. 그러므로 국가의 명맥(命脈)이 겨우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송공은 한낱 지방관(地方官)으로서 처음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만나 의병(義兵)을 일으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 뒤 전후 수십 년 동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의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인륜(人倫)을 바로잡고 국맥(國脈)을 부식(扶植)한 사람이 진실로 한둘이 아니었으나, 실은 송공이 맨 처음 목숨을 바쳐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국가가 보존된 것이 누구의 공이라 하겠는가.
공은 젊어서부터 탁월한 기개(氣槪)가 있었으며, 뛰어난 인품과 아름다운 풍채가 당시의 모범이 되었다. 그분이 동래 부사로 떠날 때는 곧 난리가 일어날 상황이었고, 또 공에게는 늙은 아버지가 계셨으므로 사람들 중에 가지 말라고 권하는 이도 있었으나, 공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씩씩하게 말하기를,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다.” 하였으니,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다짐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동래성(東萊城)이 함락되려 할 때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북쪽을 향해 절하고 나서, 그 아버지에게 “외로운 성이 적에게 포위되었는데도 여러 진영(鎭營)에서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으니,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니, 천년 뒤의 사람이 그 편지를 읽더라도 반드시 몹시 비분 강개(悲憤慷慨)하여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의 천한 복첩(僕妾)들까지 모두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분수를 알아서 원수놈들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고 함께 절개를 온전히 하였으니, 공의 절개가 남에게 감화를 끼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화이(華夷)와 부녀자나 아이를 막론하고 칭송하며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 어찌 고금에 더욱 드문 일이 아닌가.
조정에서 보답하는 은전을 융숭히 내렸고 동래에서 향사(享祀)를 거행하고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조금은 위로할 수 있다. 그러나 본주(本州 청주)는 바로 공의 고향으로 조상의 분묘(墳墓)가 있고 자손이 살고 있는 곳이므로 고을 사람들의 상상해 흠모하고 감동해 분발하는 마음이 다른 고장에 비해 몇 곱절인데도 아직까지 신주를 모셔 제향하는 예를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매우 애석한 일이다.
본주에서는 이전부터 있던 서원(書院)에 경징군(慶徵君 경연(慶延)), 박강수(朴江叟 박훈(朴薰)), 김충암(金沖庵 김정(金淨)), 송규암(宋圭庵 송인수(宋麟壽)) 등 네 선생을 배향(配享)하고, 이미 또 한송재(韓松齋 한충(韓忠))를 추향(追享)하였다. 저 오현(五賢)의 도덕과 학문을 후생이 감히 추측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논하면 비록 조예(造詣)는 같지 않았지만 함께 배향하는 데는 하등의 손색이 없다. 지금 송공이 성취한 바를 저 오현에 비겨 보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옛사람의 말에 “학자(學者)가 배우는 까닭은 충(忠)과 효(孝)를 하기 위함이니, 학문이란 결국 이와 같이 되기를 구하는 것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길은 다르지만 한곳에 모시는 것에 대해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주 부자(朱夫子)가 일찍이 ①〈장주주학동계고공사당기(漳州州學東溪高公祠堂記)〉에서 “맹자(孟子)가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를 논하면서, ‘그 도가 공자(孔子)와 다르므르 배우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하면서도 하루아침에 개탄하며 그들을 백세(百世)의 스승으로 돌렸으니, 이는 대체로 두 사람은 뜻과 행실이 고결(高潔)하여 업적(業績)이 드러났으므로 그들을 존모(尊慕)하는 자들이 하루아침의 감개(感慨)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공이 진실로 적지 않거니와, 맹자의 뜻 또한 이에서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아, 이 기문(記文)에서 주 부자의 뜻 또한 알 수 있다. 송공의 풍도(風度)와 절개가 고공(高公)에 비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주학(州學)에 이미 고공의 사당을 세웠고 보면 송공을 오현(五賢)과 함께 배향(配享)하는 것이 전거(典據)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못난 내가 마침 이 고을 목사(牧使)가 되어 공의 유적(遺蹟)을 탐방(探訪)하였더니, 우러러보는 사이에 감개(感慨)의 회포를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가에 진신(搢紳)의 공론과 사림(士林)의 여론을 들었더니, 모두 “공의 수립한 바가 천지처럼 높고 일월처럼 밝아서 천추에 빛나고 백세(百世)에 사표(師表)가 되기에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송공을 오현과 함께 배향하는 일은 고금에 물어보아도 거의 의심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모월(某月) 모일에 본주의 학생들과 더불어 봉안(奉安)의 예를 거행하려 한다. 이 일은 실로 사문(斯文)의 성대한 일이므로 삼가 이렇게 통고(通告)하는 바이니, 모든 군자들은 왕림(枉臨)하여 부족한 점을 가르쳐 주면 매우 고맙겠다.
① 장주주학동계고공사당기(漳州州學東溪高公祠堂記) :
《주자대전(朱子大全)》 권79에 보인다. 고공은 남송(南宋) 고종(高宗) 때의 충신 고등(高登)을 지칭하고, 동계는 그의 호(號)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