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도(王可道)의 초명(初名)은 자림(子琳, 李子琳)이고, 청주(淸州) 사람으로 본래 성(姓)은 이씨(李氏)이다. 성종(成宗)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로 임명되었다.
현종(顯宗) 5년(1014)에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최질(崔質) 등이 난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였고, 사납고 흉악한 무리들이 문관직을 겸직하였다.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자들이[羊頭狗尾] 대각(臺閣)에 포열(布列)하고 있어 정치가 중구난방으로 되니,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였다.
왕가도는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와 자택에 있었다. 격분한 마음을 품고, 비밀리에 일직(日直) 김맹(金猛)에게 일러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어찌 한(漢) 고조(高租)의 운몽지유(雲夢之遊) 〈고사〉를 본받지 않으시는가?”라고 하였다. 김맹이 그 뜻을 깨닫고 왕에게 은밀히 아뢰니,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왕가도가 일찍이 서기(書記)로 있을 때 크게 인심을 얻었으므로, 그를 권서경유수판관(權西京留守判官)으로 임명하고 재촉하여 먼저 가서 모든 준비를 갖추도록 하게 하였다.
이듬해 현종은 서경(西京)으로 행차하여 여러 신하들을 위해 장락궁(長樂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김훈 등이 취한 틈을 타서 군사를 동원해 급습하였고, 마침내 김훈·최질 및 이협(李協)·최가정(崔可貞)·석방현(石邦賢)·이섬(李暹)·김정열(金貞悅)·효암(孝嵒)·임맹(林猛)·최구(崔龜) 등 19명을 제거하였다. 최구는 유사(儒士)로서 병부낭중(兵部郞中) 직임에 있으면서 왕을 호종하였으나, 성품이 거칠고 천박하여 최질 같은 자와 교류하였으므로 〈화를〉 당하였다. 곧이어 김훈 등의 아들 및 친형제들을 본향에 돌려보낸 후에 통상적인 사면에서 제외시켰으며, 그 부모·처·누이·조부·손자·삼촌으로서 연좌된 사람들은 모두 방면하였다.
그 뒤 〈왕가도는〉 여러 번 올라 상서우승 동지중추사 호부상서(尙書右丞 同知中樞事 戶部尙書)의 직을 역임하였고, 치성공신(致盛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현종〉 18년(1027)에는 참지정사(叅知政事)가 되었다. 〈현종〉 20년(1029)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이응보(異膺甫)·어사대부(御史大夫) 황보유의(皇甫兪義)·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周亮) 등과 함께 개경의 나성(羅城)을 쌓았다. 왕가도는 사람들에게 일산(日傘)을 들고 둘러서게 한 후에 높은 곳에 올라가 나아가고 물러나게 하면서 그 넓고 좁은 곳을 평평하게 하여 성터를 결정하였다.
그 공으로 검교태위 행이부상서 겸태자소사 참지정사 상주국 개성현개국백(檢敎太尉 行吏部尙書 兼太子少師 叅知政事 上柱國 開城縣開國伯) 식읍(食邑) 7,000호로 승진시키고 수충창궐공신(輸忠創闕功臣)의 칭호를 더하였다. 왕씨(王氏) 성을 하사하고 개성현(開城縣)의 장전(庄田)을 지급하였으며, 그의 처 김씨(金氏)를 책봉하여 개성군부인(開城郡夫人)으로 삼았다.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왕가도가 왕비를 맞아들이라고 요청하니, 이에 〈덕종이〉 그의 딸을 맞아들여 비로 삼고 〈왕가도를〉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로 고쳐 임명하였다. 병이 들자 조회 참석을 면제해 주었다.
당시 공부낭중(工部郞中) 유교(柳喬)·낭중(郞中) 김행공(金行恭)을 거란(契丹)에 보내어 임금의 장례에 참석하였고, 또한 새 임금의 즉위를 축하하게 하였는데, 왕가도가 아뢰기를, “거란은 우리와 우호를 맺고 예물도 교환하지만 매번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임금이 죽고 부마(駙馬) 필제(匹梯)가 동경(東京)을 근거지로 반역하였으니, 마땅히 이 틈을 타서 압록강(압록강(鴨綠江)의 성과 다리를 허물고 억류한 우리 사신[行人]들을 돌려달라고 요청하십시오. 만약 〈거란이〉 듣지 않으면 마땅히 그들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표문을 첨부해 그 일을 요청하였으나, 거란은 들어주지 않았다.
왕이 명령을 내려 신하들에게 대책을 의논하게 하니, 서눌(徐訥) 등 29명이 말하기를, “저들이 우리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니, 마땅히 우호관계를 끊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황보유의(皇補兪義) 등 39명이 논박하여 말하기를, “지금 우호관계를 끊는다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니, 우호관계를 지속하면서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왕가도와 서눌 등의 의견에 따라 하정사(賀正使) 파견을 중지하였으나, 거란 성종(聖宗)의 태평(太平)이란 연호는 그대로 사용하였다.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가 거란의 성을 공격하여 파괴하자고 청하니, 왕은 재상들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서눌 및 황보유의·황주량(黃周亮)·최제안(崔齊顔)·최충(崔冲)·김충찬(金忠贊) 등은 모두 불가하다고 말하였으나, 왕가도와 이단(李端)이 아뢰기를 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하며 강경하게 출병을 요청하였다. 왕이 유사(有司)에 명령하여 태묘(太廟)에서 점치게 하였는데, 결국 출병하지 않았다. 왕가도는 얼마 뒤 사직을 청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하다가, 덕종 3년(1034)에 죽었다. 관에서 장례를 주관하게 하고, 시호를 영숙(英肅)이라 하였으며, 후에 태사 중서령(太師 中書令)을 추증하고 현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