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 제기 | | | ▲ 고명길 목사 /고신대학, 고려신학대학원(졸업), (미)풀러신학대학원M.Div과정(수료), 울산대 경영대학원 최고위 과정(수료), 인제대사회복지대학원(졸업,사회복지석사),사)소망호스피스연합회(회장), 소망의집(원장), 천상소망요양병원(대표) 고신사회복지위원회 전문위원장 |
고신대학교 복음병원(고신의료원)은 고려신학대학원과 함께 우리 고신교단의 가장 중요한 의료기관이다. 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1961.8.7)의 전신은 복음의원(1951.12.23)이었고 그 복음의원의 전신은 복음진료소(1951.1.15)였다. 중요한 것은 이 복음병원, 복음의원, 복음진료소가 동일한 비영리단체인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에 의해 설립되었고, 이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는 1951. 1. 9일 미국에서 5,000불의 구호금을 가지고 귀국한 전영창 선생(전 거창고등학교 교장)에 의해서 1951. 1. 15일 설립되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복음병원 설립자도 당연히 전영창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설립일도 1951. 1. 15일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기록되어야 하지 않는가? 현재 복음병원 홈페이지에 기록된 설립초기 병원연혁을 보자 1951. 01.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조직 (대표 : 전영창) 1951. 06. 21. 복음진료소 개설(부산시 남항동 2가 46 제3영도교회 내, 직원 3명) 1951. 07. 02. 복음의원 초대원장 장기려 박사 취임 1951. 07. 13.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정관 제정 1951. 12. 20. 천막병원으로 이전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 2가 180번지) 1951. 12. 23. 복음의원 개설 허가 1957. 05. 28. 복음병원 신축 이전 (부산서 서구 암남동 34번지, 건평 240평) 1958. 03. 31. 본관에 간호원 기숙사, 식당 증축 1961. 08. 07. 비영리 의료기관 복음병원 개설 허가(개설자 :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대표 박손혁, 직원39명) 1965. 09. 06. 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유지재단에 병원재산 편입 - 복음병원 연혁에서 인용 - 그런데 지금 복음병원 연혁(2015. 5월 현재)에는 틀렸거나 불분명한 기록들이 여럿 있다. 1. 1951. 01.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조직(대표 : 전영창) 1) 누가 설립했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2) 설립일자가 누락되어 있다. 3) ‘경남구제회’와 복음병원이 어떤 관계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4) ‘경남구제회’ 대표 전영창과 복음병원과의 관련성도 언급이 전혀 없다. 2. 1951. 06. 21 ‘복음진료소’ 개설(부산시 남항동 2가46. 제3영도교회 내, 직원 3명) 1) ‘복음진료소’ 설립자가 빠져 있다. 설립자가 없는 병원은 없다. 2) 설립일자도 틀린다. 이날은 전영창과 장기려가 처음 만난 날 일뿐이다. 3. 1951. 07. 02. 복음의원 초대원장 장기려 박사 취임 1) 이때는 아직 ‘복음의원’ 이 아니라 ‘복음진료소’였다. 2) 초대원장도 장기려박사가 아니라 차봉덕 원장이었다. 이상의 오류들과 잘못된 내용들을 하나씩 살펴보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기려 박사를 복음병원 설립자로, 그리고 초대원장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발굴 확인된 자료들과 장기려 박사의 전기들을 살펴보면 장기려 박사는 설립자도 초대원장도 아니었다. 장기려 박사가 복음진료소의 원장으로 오기 전에 복음진료소는 전영창에 의해서 이미 설립이 되었고, 차봉덕 원장이 초대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1951. 1월 복음진료소를 개소하여 진료를 시작했던 전영창은 1953년 여름 불의의 탄핵을 받고 복음의원에서 떠나게 된다. 그 당시 전영창과 그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부산을 떠나야 했고, 그를 따르던 간호사들과 직원들도 함께 사직하고 병원을 떠났었다. 지금도 전영창 가족들과 그 당시 복음병원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은 가슴에 억울함과 한을 품고 60여년을 살아왔다. 전영창이 떠난 이후 복음병원의 역사에서 전영창의 업적을 축소하거나 또는 지우려다보니 장기려 박사중심으로 병원역사를 재편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복음병원의 설립자, 설립일, 초대원장관련 역사가 왜곡 변조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 소고는 복음병원 초창기에 도대체 전영창과 복음병원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전영창 한 사람의 업적을 축소, 또는 배제하기 위해서 꼭 복음병원의 역사를 애매하게 변조 또는 왜곡할 필요가 있었을까? 혹 그것이 과거에 잘못된 일이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지금이라도 바르게 밝히고 전영창과 차봉덕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와 복권을 해 드리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닐까? 그동안 왜곡되어 지금까지 내려 온 복음병원의 설립자, 초대원장, 설립일자 문제를 정확히 밝히기 위해 자료들을 찾고 관련 인사들을 만난 결과로 본 소고를 쓰게 되었다. 2. 복음병원이 설립될 당시의 시대적 상황 1) 국가적인 상황 복음병원이 설립될 당시인 1951년 1월은 한국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1950. 6.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한때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1950. 11월경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1. 4 후퇴라는 참담한 비극을 겪으면서 수백만 명의 피난민들이 남쪽을 향해 내려왔고 그 최종 집결지가 부산이었다. 부산은 마지막 보루였고 더 이상 갈 수 도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수백만에 이르는 피난민들은 길거리나 산언덕, 심지어는 남의 집 마당에까지 천막을 치기도 하고 또는 판자로 움막을 지어 생활을 했다. 비참한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형성된 부산의 초량과 좌천동, 감천동, 영도 산자락에는 대규모 판자촌, 천막촌이 형성되어 당시 부산 인구(30만 명)가 갑자기 100만 명이 넘었었다고 한다. 당시에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산이 6.25 전쟁 시 미군의 군수품들이 도착,분배되는 항구도시였고 각종 물자와 먹을거리, 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부산의 고지대인 초량과 좌천동, 감천동, 영도 등의 산자락에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얼기설기 판자와 천막으로 집을 지어 고단한 피난생활을 했다. “당시 부산의 거리는 피난민 무리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공포와 죽음과 혼란이 뒤섞여 춤추고… UN군들의 왕래와 전선으로 나아가는 힘찬 청년들의 모습! 피난 살림에 갈증을 만난 민간인! 총, 칼, 싸움,죽음, 상이군인, 학원, 친구, 도적, 살인, 강도…. 정말 혼란의 파도 그것뿐이었다. 정말 사망의 행렬이었다.”(‘하나님의 주건을 이 땅위에’, 학생신앙운동사, 2013) 전영창은 바로 이런 혼란의 시기인 1951. 1월에 부산 수영비행장을 통해서 귀국했다. | | | ▲ 6.25시;절의 부산 영도 전경(자료회면) | | | ▲ 부산 피난민들의 천막촌(자료화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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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신 교단적인 상황 1950년대 초반은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고신교단 태동기였다. 고신교단은 신사참배 반대와 출옥성도들 중심으로 1946. 6. 23일 진해 하기신학강좌 개최에 이어 1946. 9. 20일 부산(금성중학교)에서의 고려신학교 개교로 기틀을 잡고 1952. 9. 11. 진주 성남교회에서 총노회로 개최되면서 고신교단이 출범케 된다. 전영창이 미국서 귀국한 1951년 1월은 신사참배자와 출옥성도들 간의 신사참배 문제와 고려신학교 인가 문제로 첨예한 대립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6. 25피난시절인 1951. 5. 25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제36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도 계속 고려신학교가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고, 장로교 총회에서도, 그리고 각 노회에서도 출옥성도들은 배척을 당하고 있었다. 결국 1952. 9.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출옥성도들 중심으로 경남법통노회가 열려 총노회 조직을 결의하고 고신이 공식적인 출범을 하게 된 것이다. 전영창은 아직 고신이라는 교단이 형성되기도 전에 전란에 휩싸인 조국을 위해서 무엇이든 자신의 할 일을 찾기 위해서 유학을 서둘러 마치고 급거 귀국을 했던 것이다. 3. 전영창의 귀국과 복음진료소 설립 동기 전영창은 1947년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1년 수학 후 웨스튼 신학대학교에서 졸업)로 건국이후 유학생 1호로 출국하여 신학을 공부하다가 1950. 6. 25 전쟁소식을 듣고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려 귀국을 결심한다. 이에 교수들과 학우들이 전영창의 귀국을 극구 만류하다가 졸업이라도 하고 가라고 했다. 계속 귀국을 애원하는 전영창을 더 이상 막을 명분이 없자 학교는 졸업식을 2개월 앞당겨 1월 초에 전영창을 위한 졸업식을 거행해 주고 교수들과 지인들이 모금해 준 5,000불을 가지고 1951.1.9일 미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을 통해서 귀국을 하였다. 전영창이 병원을 설립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동기가 전해지고 있다. (1) 하나는 전영창이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목격한 후에 시작했다는 견해다. 전영창은 미국서 모금해 온 5,000불로 무엇을 할까 기도하던 중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피난민 여인을 목격하고 병원을 설립해서 피난민들을 치료해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박영훈 장로의 전영창 추모사(기독교보 2007. 6. 29)에서 “전영창은 귀국하자마자 부산 제일영도교회(실제는 제3영도교회임)를 본부로 삼아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하루는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피난민 여인을 목격하고 병원설립을 결심하고 복음구호의원(지금의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때가 전영창 선생님이 34살 때 일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 두 번째 동기는 전영창이 노르웨이 의사 넬슨의 권유로 병원을 설립했다는 견해다. 1951. 1. 9일 전영창이 귀국 시 가져온 구호기금 5,000불로 항생제를 구입하여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부산에 상주하고 있던 노르웨이 출신 의료지원단장인 넬슨을 만났다. 당시 노르웨이는 전투병 대신 의료지원단을 파견하였는데 이 부대에 전영창의 외삼촌이 통역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전영창이 쉽게 넬슨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넬슨이 “그 돈으로 약을 사서 피난민에게 나누어주면 얼마 안가서 재정이 바닥이 날 수밖에 없으니 차라리 그 돈으로 의원을 설립하면 매일 50인분의 약을 우리가 원조해 주겠다.”라고 제안하자 전영창은 즉시 병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며 의사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대로라면 의사가 아닌 전영창이 복음병원을 설립하게 된 동기는 부둣가에서 만난 환자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노르웨이 의사 넬슨의 조언을 듣고 결심한 시대적 요청이었다. 4. 전영창의 경남구제회 및 복음진료소 설립 전영창이 1951. 1. 9일 부산 수영 비행장에 내려 제일 먼저 한 일이 ‘경남구제회’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그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급거 미국에서 귀국할 때 게리드윗 목사 외 주변 지인들이 비행기 티켓 값은 물론 구호금 5천불을 모금해 주면서 서둘러 ‘기독교구제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는 전쟁 중인 한국에 필요한 구호물자를 지속적으로 모금하고 또 지원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미국 ‘기독교 구제위원회’의 한국 경남지역 총무로 전영창을 임명해서 보냈다. 말이 경남지역 총무이지 실질적인 한국 대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귀국하자마자 전쟁 중인 조국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하려했던 일은 5천불로 구호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미국 기독교구제위원회의 한국대표부를 조직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한상동 목사를 비롯하여 이약신, 박손혁, 오종덕, 안용준 목사 등과 함께 ‘경남구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전영창은 대표가 되었다. 이 점에서 볼 때에 ‘경남구제위원회’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독자적인 구호단체가 아니라 이미 미국에서 조직된 ‘기독교구제위원회’의 한국 지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이 경남구제위원회는 미국의 구호금을 받아 한국 내에서 적절하고 유효하게 배분 구호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동시에 전영창의 ‘복음진료소’ 설립은 경남구제위원회를 조직했던 그 시점에서 그가 노르웨이 구호지원단 의사 넬슨을 만나 병원설립 권유를 받고 거의 동시에 병원도 설립했다. 그만큼 당시 전란 중 구호단체와 의료기관 설립이 시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전영창이 조직한 ‘경남구제회’는 일종의 구호사업을 추진하는 주관단체(지금의 의료법인 또는 사회복지법인 격)였고 ‘복음진료소’는 법인의 구호사업을 수행하는 의료기관(병원)이었던 셈이다.당시의 복음진료소는 수익기관이 아니라 철저한 구호기관이었다. ‘경남구제회’를 세운 전영창은 그가 미국에서 가지고 온 5천불의 헌금으로 항생제를 사서 부상과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전쟁이재민 곧 피난민에게 나누어 주려했다. 그래서 항생제를 구하기 위해 당시 외삼촌이 통역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국제연합민사원조사령부(UNCAC)를 찾아갔다. 어떤 의도로 항생제를 구하고 있는 지 전영창의 이야기를 들은 노르웨이 출신의 구호담당 책임자 의사 넬슨은 “그러지 말고 그 돈으로 조그마한 의원이라도 설립하면 매일 50인분의 약을 우리가 원조’해 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며 대형 군용 천막도 3개나 지원해 주었다. 병원설립에 대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전영창은 넬슨의 제안을 듣고 이를 좋게 여겨 즉시 의사를 찾게 되었다. 마침 초량교회(한상동 목사 시무)에 출석하며 초량동에서 ‘차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해서 진료하던 여의사 차봉덕을 만나 복음진료소 설립의 긴급성을 설명하고 초빙하자 차봉덕 선생은 자신의 병원을 정리하고 제3영도교회 창고로 와서 1951. 1. 15일 진료를 시작한 것이 ‘복음진료소’였고 이것이 복음병원의 첫 출발이었던 것이다. 당시 전영창이 복음병원을 설립한 4대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① 복음 전하는 병원(동포에게) ② 무료 구호 진료하는 병원(극빈자에게) ③ 정직, 정확한 진료로 신용 얻는 병원(외국인에게) ④ 병 치료법을 가르치는 병원(영 육 간에)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를 설립할 때 제시한 설립 목적을 보면 그가 왜 병원의 이름을 ‘복음진료소, 복음의원’으로 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복음병원은 복음을 전하는 병원으로서 구제하고 신뢰를 얻고, 의술을 가르치는 병원으로서 먼 훗날 고신의대가 설립될 것을 마치 알기라도 한 것 같이 그의 병원설립은 복음적이고 무료진료라는 예수님 사랑을 실천하는 병원으로서, 더 나아가 연구하고 가르치는 원대한 꿈을 초기 설립목적에 담아내었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6.25 피난시절 헐벗고 병든 자들을 바라보며 그때 그 시대의 필요와 요청에 기꺼이 순종한 한 사람의 열정과 헌신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시고 오늘날 부산 굴지의 복음병원과 고신대 의과대학으로 세워 주셨던 것이다. | | | ▲ 초창기 복음진료소(천막병원) | | | ▲ 복음진료소 초기 전영창 | | | ▲ 초창기 복음의원(천막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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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복음진료소 초대원장 차봉덕 여의사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를 설립할 때 초빙했던 차봉덕 여의사는 어떤 분일까? 차봉덕은 1921. 7. 25일 평남 평원군 서갑면 상석리에서 일본 식민지배시대에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차봉덕은 선교사들을 통해 예수를 믿은 부모들의 도움으로 평양 정의여학교까지 기차로 통학하며 신앙과 학문을 공부했다. 평양 정의여학교는 1896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가 매티 노블(Mattie W. Noble)을 통해 설립한 기독교계 여자사립학교였다. 그 당시 함께 살았던 할머니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외동 손녀딸 차봉덕에게 “너는 예수를 믿고 결혼치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의사가 되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차봉덕은 할머니의 말씀을 따라 의사가 되고자 1943년 서울여자의과전문학교 입학, 1948년 서울여자의과대학을 졸업(6회)하고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인턴을 거친 후 1948년 부산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취업을 했다. 이때 차봉덕이 부산으로 내려 온 것은 그의 친구 이화주(박윤선 목사의 사모)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화주는 1920년 7월 20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17세 때 차봉덕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이름도 花珠에서 和主(주님과 화목함)로 바꾼, 차봉덕과는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이런 이화주가 6.25발발 직전 신사참배 반대신앙을 가진 한상동 목사 등이 계신 부산으로 내려와 있었고 친구 차봉덕에게 신사참배 반대신앙이 있는 부산으로 올 것을 권유하여 부산 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취업하여 오게 된 것이었다. 1948년 부산으로 온 차봉덕은 부산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잠깐 근무하다가 1950년 초에 초량동에서 ‘차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하여 운영하였다. 그런데 몇 달 안 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다음 해 1월이 되자 1. 4후퇴로 엄청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밀어 닥치고 있었다. 마침 1951. 1. 9일 미국 유학 중 신학교를 졸업한 전영창이 귀국하여 자신을 찾아와서 전재민을 위한 병원설립에 초대원장을 맡아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전영창이 미국서 구호금 5천 달러를 가져왔고 이것으로 약을 구입하여 병자들을 치료해 줄려면 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차봉덕은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의사가 되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생각하고 초량의 산부인과를 폐원하고 전영창을 따라 가서 진료를 시작했던 곳이 부산 제3영도교회 창고였고 이것이 복음병원의 첫 출발이 된 복음진료소였다. 이 날이 바로 1951. 1. 15일이었다. 차봉덕은 전영창과 함께 밀려드는 환자들 진료와 피난민들 구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섬겼다. 전영창은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유엔군과 미군을 찾아 의약품 조달과 각종 의료용품들과 기구를 구해왔다.그리고 옥수수와 밀가루, 우유 등의 구호품을 얻어 와서 텐트 밖에 솥을 걸고 끓여서 전재민들을 열심히 구호했다. 나누어 주는 구호음식을 받기 위해서 늘어선 줄이 200미터가 더 넘을 때도 있었다. UNCAC(유엔 민사원호처)에 노르웨이 의사 넬슨이 무료 지원해 주는 하루 50인분의 약도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밀려드는 환자들 진료에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산부인과 의사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1951년 6월경 전영창은 한상동 목사를 찾아가 의논을 했고 마침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로 함께 신앙생활 했던 장기려 박사를 소개해 주었다. 1951. 6. 21 전영창은 한상동, 김상도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 근무하던 장기려 박사를 만나 전재민을 위한 ‘복음진료소’ 원장을 청원했고, 장박사도 평소 불우한 자들을 위한 의사가 되려고 하나님께 서약한대로 흔쾌히 허락을 하고 1951. 7. 2일 복음진료소 제2대 원장으로 부임했던 것이다. | | | ▲ 차봉덕-황영갑결혼(주례 한상동) | | | ▲ 차봉덕(앞줄3번째),황영갑 | | | ▲ 3-3 차봉덕(좌측3번째), 이근삼박사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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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의료원 50년사에 보면 “장박사 일행이 물려받은 진료소는 당시 삼일교회에 출석하던 서울 의전 출신이며 미혼인 차봉덕 의사가 3개월간 환자들을 돌보던 장소로 제 3영도교회의 창고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수정해야할 내용들이 있다. (1) 장박사가 부임한 1951. 7. 2일은 아직 삼일교회가 설립(1951. 10월)되기 전임으로 차봉덕은 삼일교회가 아니라 초량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2) 이곳에서 차봉덕 의사가 3개월간 환자들을 돌본 것이 아니고 5개월간이었다. (3) “장박사 일행이 물려받은 진료소는” 이란 표현은 장기려 박사를 설립자로, 초대원장으로 만들기 위한 고육지책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장기려 박사가 설립자가 될 수는 없다. 혹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설립자와 초대 원장은 전영창과 차봉덕으로 수정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1951. 7. 2일에 장기려 박사가 부임한 때에는 이미 복음진료소가 전영창에 의해서 세워졌고 초대 원장인 차봉덕 의사와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복음병원 설립자를 전영창으로, 초대원장을 차봉덕 원장으로 인정해 버리면 복음병원 역사는 간단히 바로 세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한 구체적인 증거들을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6. 복음병원의 설립일, 설립자, 초대원장 문제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살펴 본 복음병원 설립자와 설립일자, 초대원장 문제들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객관적 자료들을 살펴 봄으로 현재의 복음병원 연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부터 밝히려고 한다. 그리고 말미에 가서 전영창의 탄핵사건을 밝힘으로 역사왜곡의 실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즉 전영창 탄핵사건 이후 복음병원 역사를 장기려 중심의 역사로 재편집하다 보니 병원설립일자가 뒤로 밀려나게 되고 설립자는 물론 초대원장까지 삭제 또는 왜곡된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진료소 설립일자를 정확히 밝히게 되면 설립자와 초대원장 문제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고 역사도 바로 잡을 수 있게 된다. 1) 우선 현 복음병원의 설립일이 1951. 6. 21일이 아니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1951. 6. 21일은 어떤 날인가? 이 날은 전영창이 한상동, 김상도(복음의원 원목, 경남구제회 회계)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장기려를 찾아가 병원장을 맡아 줄 것을 청원하고 장기려 박사가 이를 수락 한 날이다. 전영창과 함께 복음진료소를 1951. 1. 15일 개원했던 차봉덕 원장은 산부인과 의사였기 때문에 전쟁 후 외상환자의 수술 등 외과적 치료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외과의사인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복음병원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고 장기려 박사는 흔쾌히 이를 수락하고 그 달 6월 30일 제3육군병원을 사직 하고 1951. 7. 2일 복음진료소로 부임을 했다. 그러므로 1951. 6. 21일은 장기려 박사가 여전히 제3육군병원에 근무할 때임으로 당연히 복음진료소 설립일자가 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6월 21일은 장기려가 복음병원에 합류할 것을 수락한 날이다. 장기려도 1951. 7. 2일 제3영도교회 창고로 갔을 때 이미 그곳에는 복음진료소가 설립되어 있었고,차봉덕 원장이 진료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미 서울의전 출신의 여자 의사 차봉덕이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한상동,장기려, 전영창은 차봉덕 의사의 진료소를 이어받아 그곳에 ‘복음진료소’를 시작했다. 설립자 겸 운영자로는 한상동 목사가, 원장은 장기려 선생이, 그리고 병원 총무는 전영창이 맡았다“( 지강유철, ‘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2007. 269P) 즉 장기려박사가 제3영도교회에 왔을때는 이미 차봉덕이라는 의사가 복음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복음진료소는 당연히 전영창이 설립했던 그 병원이었다. 지강유철씨가 장기려 중심으로 당시 상황을 정리하다 보니 위와 같이 애매한 내용으로 기술하면서 장기려가 마치 복음진료소를 시작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게 된다. 그래도 차봉덕 의사가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남겨 주었기에 전영창을 설립자로, 차봉덕을 초대원장으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주요 근거를 제시해 준 셈이다. 2). 전영창 선생이 복음병원 설립일을 1951. 1. 15일로 밝히고 있다. 현재의 복음병원 연혁에서는 경남구제회의 설립일은 1951년 1월까지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전영창 선생은 평소 복음병원 설립일을 1951. 1. 15일로 말했고 그의 장례식 때 연혁보고에서도 복음병원의 설립일을 1951. 1. 15(월)로 밝혔다.(전성은 저, 전영창 전집2, 미루그래픽스, 2013년) 복음병원 설립일은 설립자가 가장 정확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경남구제회 설립일과 복음진료소 설립일이 같은 날 동시에 설립이 되었는지? 아니면 몇 일간, 또는 몇 달간의 시차를 두고 설립이 되었는지는 전영창선생의 관련 문헌 외에는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평소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전영창선생의 인격과 삶으로 볼 때 그 분의 말씀과 장례식 때의 연혁에 근거해서 복음병원 설립일을 1951. 1. 15일로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제54회 경남노회(1951. 3.6~8일)에서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가 승인되었다. 1951. 3. 6일 개최된 제54회 경남노회 촬요에 의하면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승인하고 각 교회는 연보하여 구제회(부산시 광복동 고려신학교 내)로 보내 주시되 연보는 4월 29일 주일 일제히 하여 주기로 함”이라고 결의되어 있다. 이 경남노회 촬요를 볼 때 경남구제회의 설립일은 1951년 3월 노회 이전임은 확실하다 | | | ▲ 경남노회록, 경남구제회 관련 |
4). 전영창의 아들 전성은 선생의 증언 전영창의 아들 전성은 선생은 복음병원의 설립은 아버지 전영창 선생이, 그리고 병원 설립도 1월 달이었음을 증언했다. 자신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전북 무주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때가 1951년1월 말경이었고, 산위에는 눈이 많이 와 있었으며 그때 아버지가 병원차를 타고 가족을 데리러 왔더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귀국(1951. 1. 9)후 복음진료소를 개원했다. 그리고 그 해 1월 말경에 가족들이 빨치산들의 위협 속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의 이사를 위해 전북 무주로 오셨다. 이때 타고 온 차량(봉고형 승용차)에 복음진료소 이름과 병원 표식이 있었다. 이때는 산에 하얀 눈이 많이 있었던 추운겨울 1월 말경이었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무주를 떠나 진주로 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뗏목을 타고 진주 남강을 건너 마산을 거쳐 부산 영도에 도착했다. 그때 병원에는 차량이 2대가 있었다. 그 중에 한 대를 타고 전북 무주까지 오셨다, 그렇게 이사를 온 나는 영선초등학교 2학년에 입학을 하고 5학년 때 까지 부산 영도 병원천막에서 장기려 선생님과 직원들과 함께 같이 생활을 했었다”(2014. 5. 19. 경남 거창에서 전성은 선생이 김세중 목사, 고명길 목사에게 증언) 그러므로 전영창의 복음진료소는 1951년 1월 말 이전에 개원한 것이 확실하다. | | | ▲ 전영창의 아들 전성은 선생의 증언 | | | ▲ 전영창의 아들 전성은 선생의 증언(2015.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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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복음진료소 맹숙희 간호사의 증언(함양 서상 대남교회 권사, 1930. 2.25일생) “복음병원 설립자는 당연히 전영창 선생님이십니다. 1951년 중순 경 전영창 선생님이 불러서 복음진료소로 갔습니다. 월급도 얼마 준다는 말씀도 없으셨고, 전 선생님과 같이 천막에서 생활했습니다. 숙소가 없으니까 낮에 수술했던 수술실 바닥을 씻고, 거기에 전 선생님의 신혼이불을 깔아 주면서 자게 했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때 병원 창고에 가니 난산 분만 때 쓰는 ‘분만감자’라는 기계가 있어서 “저 기계가 왜 창고에 있느냐?” 라고 물으니 “장기려 박사가 부임하기 전 차봉덕 의사가 근무할 때 가져와서 사용했던 기계들이다. 나중에 외과의사인 장기려 박사가 부임한 이후에는 쓸 일이 없어서 창고에 두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삼 년을 같이 근무했는데 어느 날 전영창 선생님이 억울하게 쫓겨났습니다. 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60년 가까이를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때 함께 근무했던 간호사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나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맹숙희 너는 꼭 살아서 전영창선생의 억울함을 풀고 천국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맹숙희(1930. 2. 25일생) 간호사는 그 후 같이 근무했던 김종렬과 결혼하여 지금 함양 대남교회에서 은퇴 권사로, 남편은 은퇴 장로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맹숙희 간호사(조산사)는 당시 24살 처녀 때였으니 그때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외의 많은 증언들을 해 주었다. <2014. 5. 19, 경남 함양군 서상면 대로길 27-14 맹숙희 김종렬 자택에서, 김세중, 고명길 목사에게 증언> 6). 차봉덕의 조카 차진실 사모(남편 박희천 목사, 내수동교회)의 증언 차진실(당시 16세)은 차봉덕의 조카로서 피난시절 고모 차봉덕과 함께 살았다. “1951년 겨울에 전영창 선생이 초량산부인과로 찾아와서 복음진료소를 같이 하자고 권유했습니다.그 권유에 따라 차봉덕 고모님은 영도로 가서 복음진료소를 개원했고 그때 산부인과 기구들도 그곳으로 가져가서 진료를 했어요. 그때 당시 복음진료소는 전란 중의 피난민들과 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전영창과 고모인 차봉덕 의사가 시작했지요. 나중에 장기려 선생님이 오신 이후 다시 초량동으로 와서 차산부인과를 개원해서 저가 결혼할 때까지 살았고 삼일교회 한상동 목사님 밑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했어요.” 차진실은 나중에 한상동 목사님 소개로 삼일교회 전도사였던 박희천과 결혼(한상동목사 주례)함으로 고모 집에서 독립하여 나왔고 나중에 서울 내수동교회를 목회하다 은퇴한 후 지금은 서울서 박희천 목사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다. (2015. 5. 29. 서울 마포구 토종동 138 박희천 목사 사택에서 증언) | | | ▲ 차진실 사모 증언 |
7). 이재술 장로의 복음병원 설립자 및 초대원장 증언 “전영창은 그의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미군과 유엔의 여러 기관을 찾아다니며 의약품과 구호품을 조달했다. 전영창은 유엔 CAC 민사위원회 경상도 팀 소속 노르웨이 의사 넬슨 씨를 만나 복음진료소 운영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넬슨 씨는 진료소 의약품 보조 조로 월 $500씩(1일 50인분)을 지원받아 경영하기로 하고 직원 3명(女의사, 간호원, 총무)으로 진료소를 개설하였던 것이다”. (코람데오 닷컴) 이재술 장로 역시 전영창을 복음병원 설립자로 여자 의사(차봉덕)를 초대원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8). 박영훈장로의 복음병원 설립자 증언 기독교보(2007. 6.9일자) 전영창 선생 추모사 중에서 “전영창 선생님은 귀국하자마자 부산 제일영도교회(실제는 제3영도교회임)를 본부로 삼아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하루는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피난민 여인을 목격하고 병원 설립을 결심 복음구호의원(지금의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때가 전영창 선생님이 34살 때 일이었다.” 로 기록하고 있다. 박영훈 원장은 복음병원 설립 당시에는 학생이었다가 나중에 장기려 박사를 통해 의사가 되고 그 이후 복음병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도 복음병원의 설립자를 전영창 선생이라고 했다. | | | ▲ 황영갑-작은불꽃-자서전표지사진 |
9). 황영갑(차봉덕의 남편)목사의 자서전에서의 증언 황영갑은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복음병원 초창기시절 순회 진료 담당의사로 지원하여 복음병원과 함께 하다가 나중에 차봉덕 의사와 결혼한 외과 의사였다. 그가 나중에 목사가 되어 “작은 불꽃”(1983,류신각)이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이 자서전에서 자기 아내 차봉덕 의사가 전영창선생의 권유로 복음진료소를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 | ▲ 황영갑 자서전 내용 중 일부 |
10). 장기려 박사의 증언 (1) 장기려는 “나의 생애와 확신” (<부산모임>제59호(1977년 6월 35쪽)에서 복음의원에 참여하게 된 것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 후 부산 제 3육군병원에서 일을 돕다가 1951년 7월 부산 영도에서 전재민과 극빈자들을 위한 무료의원(복음의원)을 여러 분들의 힘을 얻어 개설하고 그 의원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때 나의 존경하는 전종휘 박사와 더불어 매일 100명 가량의 무료 진료를 하게 되었다”. 즉 “여러분들의 힘을 얻어 개설하고” 즉 여러분들이 협력했음을 밝히고 있다. (2) 그의 전집 ‘장기려, 그 사람’(지강유철 지음, 홍성사, 2007)에서도 장기려가 6월 30일 제3육군병원을 사직하고 7월 3일 제3영도교회로 갔을 때는 이미 차봉덕 여의사가 설치 운영하는 복음진료소가 거기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미 서울의전 출신의 여자 의사 차봉덕이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한상동,장기려, 전영창은 차봉덕 의사의 진료소를 이어받아 그곳에 ‘복음진료소’를 시작했다....설립자 겸 운영자로는 한상동 목사가, 원장은 장기려 선생이, 그리고 병원 총무는 전영창이 맡았다“(269P), 즉 이미 차봉덕 원장이 진료소를 설치운영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3) 장기려는 복음병원 설립 20주년 기념식 자리에서 “복음병원 설립자는 저 장기려가 아니라 전영창선생이다”라고 증언하였다. 복음병원은 병원설립 20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장기려를 설립자로 기려 공로패를 증정하자 장기려가 단상에 나와서 “우리 복음병원 설립자는 저 장기려가 아닙니다. 저기 계시는 조금순 여사님의 남편 전영창 선생이 설립하였습니다.”라고 정정 발표 하였다. 전영창(1917년생)과 장기려(1911년생)는 평생 서로 존경하며 아끼는 동지로 지냈다. 장기려가 재정에는 재주가 없어서 모든 재정지원과 후원은 전영창이 맡았다. 복음병원을 암남동으로 이전할 때도 모금에 전영창이 앞장섰고, 복음병원 간호사 기숙사를 지을 때도 장기려가 전영창에게 부탁하여 ICCO라는 국제구호단체에 영어문서를 만들어 주도했고, 그 외에도 거제 건강원 건축 시에도 영어행정서류를 작성 지원했고, 두 사람은 평생 우의 있게 지냈고 전영창은 장기려 박사를 평생 거창고등학교 이사로 모시고 함께 했다. 복음병원 설립 20주년 기념식 때 장기려는 당연히 전영창의 병원설립 업적을 알기에 초대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자신을 설립자로 잘못 소개하는 것을 듣고 이를 정정한 것이다. 당시 전영창은 거창고등학교일로 서울출장 가는 선약 때문에 부득이 행사에는 불참했으나 그의 부인 조금순 여사를 대신 참석케 했고, 그 자리에서 설립자 공로패는 자신이 받아야할 것이 아니라 전영창 선생이 받아야 할 것이라고 정정해 준 것이었다. <‘거창고등학교 이야기’(배평모 편저, 도서출판 한걸음, 2000년), 전성은 선생의 증언’>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복음병원의 설립자는 전영창 선생이며, 초대원장은 차봉덕 원장이고, 복음병원 설립일자는 1951. 1. 15이었다. 7. 전영창은 왜 복음병원을 갑자기 떠났을까? 전영창에 대한 탄핵은 고신 태동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린 아픔의 역사이다. 신사참배 반대로 교회들이 분리될 때 교회당의 재산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상동 목사가 초량교회당을 그냥 넘겨주고 나와서 삼일교회를 설립한 경우도 있었지만 곳곳에서 재산권 문제로 고소고발, 다툼과 분쟁, 아픔들이 있었다. 복음의원 역시 직원과 재산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리고 더 넓은 장소로의 병원 이전을 모색하고 있는 시점에 당시 교단 인사들에게는 복음병원 재산권 문제에 대한 걱정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영창에 대한 탄핵도 고신의 태동이라는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해하면 그 때 상황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전영창 자신은 결코 복음병원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당시 인사들이 전영창을 탄핵할 때 억울함에 3일이나 창고 문을 잠그고 단식기도를 드렸다. 전쟁 중에 귀국하여 병원을 설립 전재민들을 치료, 구제하던 자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쫒아 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고 추악한 행위였다.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복음의원)를 설립하여 활동했던 때는 1951. 1. 9~1953년 여름까지였다. 그가 설립한 복음진료소(제3영도교회의 창고, 초대원장 차봉덕)는 장기려 박사가 2대 원장으로 부임한 이후 전종휘 박사 등이 합류하면서 하루에 진료인원이 50명이 아니라 100명 200명으로 늘어 갔다. 더 넓은 장소가 필요하여 복음진료소의 장소를 영선초등학교 옆 공터로 옮겨 3동의 천막을 치고 피난민 구호와 지역의료, 농어촌 순회 진료 등으로 계속 발전해 갔다. 그해 1951. 12. 23일 당국으로부터 ‘복음의원’병원개설 허가도 받았다. 이때 복음진료소 개설과 복음의원 개원 등 모든 운영은 전영창이 총괄 책임자였다. 법적으로도 미국 기독교구제위원회 한국 지회 격이었던 ‘경남구제회’ 전영창이 병원의 대표자였고 이 사실은 당시 교계 인사들도 다 인지하고 있었다. 진료원장은 장기려였으나 병원의 총괄 업무와 운영은 전영창의 몫이었다. 요즘 병원 조직으로 보면 전영창이 복음병원의 설립자요 대표요 이사장이었던 셈이다. 영어에 능통한 전영창은 미군부대와 유엔군을 찾아다니며 각종 구호품과 의약품을 확보해서 피난민들을 구제하고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즉 복음의원은 치료와 구제를 동시에 수행한 의료기관이었다. 당시 환자들만 진료할 뿐 아니라 미군부대에서 얻어온 옥수수가루와 우유로 죽을 만들어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52년도에 고신교단이 출발(1952, 9, 2, 진주 성남교회)되고 고려신학교와 교단이 발전해가는 시점에 복음의원 또한 넘쳐나는 환자들로 영선동의 천막병원(3개동)으로서는 한계에 부닥친다. 그리고 계속해서 무료진료로는 병원경영상 한계가 있었다. 마침 말스베리 선교사가 미군부대가 철수하면서 건축 자재를 복음의원 건축을 위해 후원을 약속하자 복음의원은 고신교단에 마땅한 부지와 건축비 도움을 요청한다. 이것이 복음병원과 고신교단이 관계되는 첫 번째 고리가 된다. 이때 고려신학교의 이전도 필요했던 터라 학교와 병원을 짓기에 적합한 땅을 물색한 곳이 바로 지금의 암남동 34번지였다. 1만3천 평 땅에 복음의원 5천 평, 신학교 8천 평을 사용하기로 하고 건축모금을 시작했다. 부지 구입선금을 지불하는 데는 부산남교회 한명동목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부지구입 헌금으로 인해서 복음병원은 고신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게 된다. 그러나 전국교회가 힘써 헌금도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태부족이었다. 영어에 능통했던 전영창이 앞장서서 미국의 후원교회와 교단들에 모금을 했다. 고신교단 교회들이 1백만 환을 헌금하여 모금하고 말스베리 선교사가 미국 선교부에 3만 달러를 후원받는 등 건축이 어렵게 진행되었다. 이렇게 교단과 병원이 확장해 가는 시점에 전영창에 대한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복음의원은 법인소유도, 교단소유도 아닌 무소유 상태였다. 어쩌면 ‘경남구제회’ 대표요 복음의원의 운영을 총괄했던 전영창 개인소유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다. 고려신학교 역시 오랫동안 한상동 개인 명의로 있다가 나중에 교단 재산에 편입되었던 것처럼 복음병원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교단 분리 시 교회당 소유권문제로 아픔을 겪고 있었던 때라 소유권의 문제는 드러내 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 고신교단에서는 아주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한상동목사가 고려신학교를 이것은 내 개인 재산이요 라고 주장하지 않을 분이었던 것처럼 전영창 역시 복음병원은 내 것이요 라고 말할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영창을 품고 감당할만한 인사가 고신 내에서는 없었다. 그의 인간됨과 꿈과 인격을 품지 못한 교단 주요 인사들은 복음의원을 더 이상 전영창에 맡길 수 없다고 판단을 하고 그를 배제하기 위한 탄핵 구실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교단의 000목사가 미국의 후원교회 대표와 함께 밤 9시경 복음의원을 불시에 찾아와서는 재정장부 일체를 압수(?)하고 회계감사를 강제하고 그 감사결과 전영창이 복음의원이 지원받은 약품들과 의료기계들을 국제시장에 팔아서 축재를 했다고 하고서는 사임을 강요하게 된다. 이에 전영창은 “나는 결코 의약품이나 의료기를 후원받아 그것을 국제시장에 내다 팔지 않았다. 있을 수 없다. 나는 오직 환자들을 치료하고 구호하는 병원을 만들기 위해서 혼신을 다해 충성 했을 뿐이다. 억울하다”고 결벽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영창은 병원 창고(3개의 텐트 중 하나)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상위에 성경책을 펴서 읽으면서 억울함을 기도로 호소하였다. 이때 간호사 3명이 들어가 전영창 선생을 붙잡고 울면서 “선생님 너무 억울합니다. 이럴 수 없습니다.”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당시 전영창 선생이 맹숙희 간호사를 부르더니 “창고 문을 열쇄로 잠가라 나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만 하겠다.”라고 하고서는 3일간이나 문을 걸어 잠그고 금식(단식)기도를 했다. 근무 중 문득 생각이 나서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여전히 양반자세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 | | ▲ 맹숙희(함양서상 대남교회) |
맹숙희는 “전영창 선생의 청빈과 검소한 생활로 볼 때 그 분은 결코 축재하실 분이 아니었다. 전영창선생의 억울함을 언제가는 풀 날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오늘에야 가슴에 한을 풀게 되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증언했다.(2014. 5.19. 함양 서상면 자택에서) “당시 전영창 선생님은 저를 초빙해 와서는 간호사 기숙사가 없자 저녁이 되면 복음의원 수술실 바닥에 선생님의 신혼이불을 깔고서는 자게 해 주었습니다. 그때 병원 천막이 3개가 있었는데 한 동은 병원으로, 또 한 동은 직원 기숙사로, 또 한 동은 전영창 선생님 가족과 장기려 박사가 같이 기거하였습니다. 사모님은 가족들과 병원직원들 양말까지 직접 바느질로 꿰메어 신고 다니게 했을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했는데 부정축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축재를 해서 더 나은 살림살이로 사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전영창 선생님은 너무 억울하게 모함을 받고 쫓겨났습니다.”<맹숙희 간호사 증언> “저희 아버님은 경남구제회와 복음병원시절, 그리고 거창고등학교 시절에도 스스로 도장을 찍어 결재를 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모든 서류나 장부는 담당 직원들로 하여금 직접 관리케 하고 자신은 장부를 작성도 결재도 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구호품으로 받은 의약품과 의료 기구를 국제시장에 팔아 부정축재 했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아버지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요 수치였지요.”(전성은 증언) 그래도 000목사 외 인사들은 전영창을 축재혐의로 몰아붙이고 결국 1953년 노회에서 회계감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전영창을 복음병원에서 파면할 것을 청원했고 그대로 통과되고 말았다. 당시에 전영창의 탄핵에 대해 조수옥, 전성도, 황철도, 김상도, 안용준, 최일영 목사가 그럴 수 없다며 강력하게 항의하고 반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영창의 파면을 강행하자 이에 대한 항의표시로 안용준 목사가 교단을 떠났다고 한다. 또한 전영창의 파면에 격분한 복음의원 직원들(특히 간호사들)도 전영창을 파렴치한 장물애비로 만드는 것에 대한 항의표시로 장기려 박사 외 몇 분을 제외한 전원이 사임을 하여 전영창과 함께 병원을 떠났다. 맹숙희 간호사도 이때 복음의원을 사임하고 떠났다. 1953년 가을이었다.<김종렬 장로, 맹숙희 간호사 증언> 복음의원은 전영창이 떠난 이후에 1957. 5. 28. 복음병원 신축 이전(부산 서구 암남동 34번지, 건평 240평)을 하고 1961. 8. 27. 비영리 의료기관 복음병원 개설 허가(개설자: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1965. 9. 6. 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유지재단에 병원재산이 편입되기 까지 전영창이 설립한 경남구제회도 무려 15년간 존속해 있었다. 물론 전영창이 훗날 수요예배시간에 부산의 000목사를 직접 찾아가 예배를 같이 드리고 모든 교인들이 다 나간 후 예배당 가운데서 서로를 껴안고 울면서 화해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000목사는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고 한 것을 볼 때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전영창 선생이 1953년 가을 복음의원을 떠나 서울로 쓸쓸히 올라가 다시 컨콜디아 신학교에 유학을 떠나고 1956년 귀국하여 폐교직전의 거창고등학교를 맡아 기독교 명문 고등학교로 세워가기까지, 그리고 그가 59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우리 고신교단은 그에게 한 번도 복음병원 설립자로 공적을 치하 하거나 인정을 해 드린 적이 없다. 그는 평생 동안 그렇게 떠난 고신과 복음병원에 대해서 섭섭함을 표현하지 않고 초월적인 자세로 살았다. 자신이 미국서 가져온 5천불이 복음병원 설립 시드 머니가 되었음과 설립 당시 차봉덕 의사를 모시고 온 상황이나 축출될 때의 억울함을 충분히 토로할 수 도 있었겠지만 그는 모든 것을 침묵하였다.어쩌면 일체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그의 높은 신앙인격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고신 교단은 전영창 선생에 대한 명예회복을 한 번도 해 드린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복음병원 역사의 기록도 어정쩡하고 애매하게 왜곡되게 기록하여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복음병원 창립기념일이나 교단창설 기념일 때 지금이라도 그의 후손들을 불러 전영창의 초기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와 복음병원 설립’의 공적을 높이 치하하고 인정해 드린다면 그의 명예도 회복되고 우리 교단이 그동안 섭섭하게 해 드린 것에 대한 다소나마 위안이 되지 않을까 사료된다. 9. 결어 : 전영창과 차봉덕의 복권은 가능할까? 당시 고신의 일부 인사들이 전영창을 파문하고 축출한 그 이면에는 교단 초기 신사참배라는 문제를 겪으면서 장로교에서 축출 될 때 교회당 재산 등 기득권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나와서 외롭게 고신교단을 형성해 온 선배들의 아픔과 고통을 우리는 일견 이해는 한다. 그러나 그런 아픔을 가진 분들이 경남구제회와 복음병원의 설립자인 전영창과 초대원장 차봉덕에게도 꼭 같은 종류의 아픔을 주었다는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요 아픔이다. 전영창의 이름을 복음병원 역사에서 축소 또는 지우기 위해서는 장기려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장기려를 초대원장으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차봉덕의 이름도 자연히 복음병원 역사에서 지워졌고, 복음병원 설립일도 어정쩡한 상태로 지금까지 지내왔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진실해야 한다. 전영창을 복음병원 설립자로, 차봉덕을 복음병원의 초대원장으로 원상복구 한다 해서 우리교단과 복음병원, 장기려 박사의 명예나 위상에 조금도 흠이 될 일이 없다. 장기려 박사는 장기려 박사대로 초창기 복음병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장기려 박사는 자신이 복음병원의 초대원장이라는 말을 한 번도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전영창을 설립자라고 했고, 자신이 제3영도교회에 왔을 때 이미 차봉덕이 복음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다만 후대의 사람들이 전영창을 배제하기 위해 역사를 정확히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다. 벌써 두 세대가 지난 지금은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야할 때이다. 초창기 자신의 전부를 바쳐 헌신했던 분들의 명예는 이제 회복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나 역사 앞에 그리고 그 후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일 것이다. 반세기도 훨씬 지난 지금 교단설립자 한상동 만큼이나 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과 초대원장 차봉덕도 함께 그 공적을 인정하고 역사를 바로 세워 간다면 교단과 복음병원을 위해서도 바람직하고 그 후손들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확신한다. <부록 1> 1. 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은 누구인가? 1) 전영창 선생의 약력 | | | ▲ 전영창은 1917년 12월 26일 전라북도 무주군 여원리에서 출생하여, 1932년 전주 신흥고등 보통과에 진학(16세)하였고, 1938년 일본으로 유학(21세)하여 신호 중앙신학교를 마치고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고, 5년간의 집행유예로 출감하여 조국에 돌아와 주거 제한 속에 활동하였다. 해방 후 1947년 대한민국 정부 1호 유학 여권으로 미국에 건너가 웨스트민스트 신학대학에서 수학(31세)하고 웨스턴신학대학교를 졸업하였다. |
1950년 6.25의 전쟁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여 1951년 1월 15일 부산영도에 천막 2개를 치고, 경남구제위원회를 설립(34세)하여 차순덕, 황영갑, 장기려, 전종휘 박사등과 함께 피난민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설치한 것이 오늘의 고신대학 복음병원이다. 1953년 9월경 혼신을 다해 피난민들을 구호하며 치료해 준 경남구제위원회와 복음의원에서 강제 사임당한 후 재차 도미하여 컨콜디아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1956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마산 인애원 조수옥전도사를 만나는 중 거창고등학교 설립자인 주경중(주남선 목사의 장남)의 권유로 폐교 직전의 거창고등학교에 부임하여 오늘의 명문 거창고등학교를 일구어 내었다. 1958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후원회의 도움으로 구 샛별 초등학교 건물과 부속 농장을 구입하는 기금을 마련하였다. 1967년 10월 18일 전영창의 투철한 교육관과 희생적인 봉사정신이 전국에 알려져 경향신문사에서 주관하는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을 수상하였으며, 1970년 6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한 주동 학생들의 처벌을 거부함으로써 교장 승인 취소를 당하게 되었으나, 그의 교육적 판단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어 대법원에서 승소하여 다시 복직하였다. 1971년 10월 21일 학교 시설 확장을 위하여, 다시 도미하여 그의 신학교 동창인 미국인 로버트 슐러 목사가 시무하는 가든 그로브 교회를 통해 기금을 모금하여 지금의 거창고 본관 건물 750평과 강당120평을 1973년 1월 23일 준공하였다. 1976년 5월 23일 지금의 남학생 생활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 시설을 지원해 준 네덜란드 기독교 협의회 시찰단의 방문을 앞두고 그 준비 때문에 권유받은 담석증 수술을 미루다가 폐혈증으로 악화되어1976년 5월 20일 오후 2시에 수술 한번 하지도 못하고 5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이 개략적인 전영창의 약력이다. 2) 전영창의 신앙과 신사참배 반대, 그리고 미국 유학 전영창의 할아버지 전치선은 일제치하에서 선교사를 통해서 예수를 믿으면 독립도 할 수 있다는 말에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여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그의 아버지 전일봉도 할아버지의 독립정신과 신앙심을 이어받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읍내 장터에서 열변을 토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옥살이를 하였다.전영창 나이 세 살 때였다. 미국장로교 선교사 보이어가 해마다 두 차례 그의 동네로 와서 성찬식을 베풀곤 했는데 이때 전영창은 성구 암송책에 있는 성경구절을 전부 암송하고 소요리 문답까지 막힘없이 다 외우자 선교사는 전영창에게 학비전액을 지원해 주며 신흥고등보통학교에 진학케 해 주었다. 신사참배 강요가 전국을 휩쓸 때 끝까지 이를 반대한 전영창을 눈여겨보았던 신흥고등보통학교 교장 윌리엄 린턴은 전영창이 졸업하자마자 그를 일본의 고베신학교 유학을 지원해 주었다. 1941년 12월 1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신사참배 반대자 일제 단속에 걸려 전영창은 후꾸오까 감옥에 수감되고 투옥 1년 만에 5년간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이곳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조국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임을 깨닫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우찌무라 간조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작정하고 투옥될 때부터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영어공부에 혼신을 다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 통역관 모집에 응시 합격한 후 미 24군단 군목인 브라운 소령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 유학을 하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자 마침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 군목으로 와 있었던 벧종드를 소개해 주었다. 벧종드는 자신의 모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 기특한 청년을 포옹하며 신학교에 편지를 보내 장학금을 받게 해 주었고 개인경비까지 다 부담을 해 주었다. 당시 미군정청 산하 외교업무 담당처는 첫 한국유학생을 위해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여권과 비자를 발급해 줌으로 1947년 4월 건국 이후 최초로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로 유학, 2년 뒤 미시간주 홀랜드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와 공부를 계속 하던 중 1950. 6. 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 3) 전영창의 귀국과 복음진료소 설립 통상 전쟁이 나면 사람들은 살길을 떠나 안전한 외국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그런데 전영창은 오히려 전란에 휩싸인 조국을 향해 귀국을 결심한다. 워싱턴 한국대사관을 찾아갔지만 ‘사태를 관망하고 기라리라’면서 귀국 수속을 해 주지 않았다. 1951. 1. 3일 전영창은 중공군의 참전과 맥아더의 철수 소문을 접하고 학장 존 뮬더박사를 찾아가 귀국허락을 요청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게 되면 나는 조국에 돌아갈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목사가 되어 미국에서 일하는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내 조국을 위해 일을 시키려고 미국에 보낸 것이 아닙니까? 내가 만약 조국에 돌아가지 않으면 주님뿐만 아니라 동포들까지 배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 미국에 왔는데 이제 위험에 빠진 양들을 모른 체한다면 목자는커녕 사악한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을 점령하기 전에 돌아가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배평모, ‘거창고등학교 이야기, 종로서적, 1996. 23-24쪽) 이야기를 들은 뮬더박사는 귀국을 허락하고 수속도 책임질 테니 가족을 미국으로 보내라, 그리고 두주일후의 졸업시험은 치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전영창은 학장의 두 가지 제안을 모두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학장은 이사장과 협의하여 졸업시험을 치르지 않더라도 졸업장을 줄 수 있도록 배려하여1951. 1. 8일 저녁 학장실에서 뮬더박사의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졸업장을 수여했다. 귀국경비는 학장의 친구 게리드윗 목사의 도움으로 해결하였고 게리드윗 목사가 주변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비행기 티켓 값은 물론, 전란중의 조국을 도우려는 전영창을 위해서 미화 5,000불을 별도로 모금을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국에 구호물자를 조직적으로 보내기 위해서 서둘러 “기독교 구제위원회”를 만들고 전영창을 경남지역 총무직에 임명하였다. (김은식, ‘장기려-우리 곁을 살다간 성자’ 봄나무 2006, 60쪽) 1951. 1. 9일 미국 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에 귀국한 전영창은 모금한 5천불을 기금으로 차봉덕 원장을 초빙하여 1951. 1. 15일 복음진료소를 설립하여 전재민들을 치료해 주었고 3년간 영도에서 자신이 설립한 경남구제회와 복음의원을 섬기다가 타의에 의해 고신과 복음의원을 떠났던 것이다. <부록 2> 2. 복음병원 초대원장 차봉덕은 누구인가? 1) 차봉덕의 출생과 교육, 그리고 부산으로의 이거 차봉덕은 1921. 7. 25일 평남 평원군 서갑면 상석리 일제치하에서 차순기(부)와 박영기(모)의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교사들을 통해 예수를 믿은 부모들의 도움으로 평양 정의여학교까지 기차로 통학하며 신앙과 학문을 공부했다. 평양 정의여학교는 1896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가 매티 노블(Mattie W. Noble)을 통해 설립한 기독교계 여자사립학교였다. 그 당시 함께 살았던 할머니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외동 손녀딸 차봉덕에게 “너는 예수를 믿고 결혼치 말고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의사가 되어라” 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1943년 차봉덕은 할머니의 말씀을 따라 서울여자의과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을 하며 어렵게 공부를 계속하여 1948년 서울여자의과대학을 졸업(6회) 하고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인턴을 거친 후 1948년 부산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취업을 했다. 2) 차봉덕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게 된 이유 이때 차봉덕이 부산으로 내려 온 것은 그의 친구 이화주(박윤선목사의 사모)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이화주는 1920년 7월 20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17세때 절친했던 친구 차봉덕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이름도 花珠에서 和主(주님과 화목함)로 바꾼,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친구사이였다. 화주는 21세에 평양 기홀 기독병원과 연계된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기홀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이때 장기려 박사를 만나 그에게서 배웠다. 그녀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출석하면서 옥중 순교하신 주기철목사의 사모 오정모 여사를 수 년여 동안 가까이 모셨고, 해방이 되자 후임으로 오신 한상동 목사님의 신앙지도를 잠깐 받은 것이 부산으로 오는 계기가 되었다. 1949-51년에 고려신학교 예과과정(2년, 성문과)을, 1951-54년에 고려신학교 연구과(3년, 현 M.div 과정)를 졸업하였다. 그녀가 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던 중 지인들의 권유로 1954년에 당시 고려신학교 교장이셨던 박윤선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은 박윤선이 네덜란드 자유대학 대학원 유학 중, 한국에 남아계셨던 김애련 사모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주변에서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 서둘러 박윤선에게 이화주를 중매 하자 평소 존경하던 박윤선을 남편 겸 교수로 평생을 지근거리에서 섬기며 내조하였고 아이들을 양육해서 결혼까지 다 시키고 자신은 2014. 8. 25, 94세로 주님 품에 안기셨다. 이런 이화주가 6.25발발 직전 신사참배 반대신앙을 가진 한상동 목사 등이 계신 부산으로 내려와 있었고 친구 차봉덕에게 신사참배 반대신앙이 있는 부산으로 올 것을 권유하여 부산 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취업하여 오게 된 것이었다. 즉 차봉덕이 부산으로 내려온 것은 이런 이화주의 권유와 신사참배 반대신앙을 찾아 기꺼이 오게 되었고 부산 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1948년)으로 취업을 했던 것이다 3) 부산에서의 개인병원 개원과 가정, 교회생활 1948년 부산으로 온 차봉덕은 부산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잠깐 근무하다가 1950년 초에 초량동에서 ‘차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하여 운영하였다. 그런데 몇 달 안 되어 6. 25 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에는 무수한 피난민들이 밀어 닥치고 있었다. 1.4후퇴 때 동두천에 살던 최찬영 목사 모친이 왔다가 가시기에 배웅 차 부산 역에 가는데 웬 아이가 한쪽 손에 붕대를 감고 목에 수건을 달아 메고서 “아지매 아니야?” 기어 들어가는 소리를 해서 보니 조카 응서였다. “야 너 누구야 응서 아니니? 너 혼자 왔니?” 고함을 치며 따라가 보니 12살짜리 조카 응서 외에16살, 9살, 8살짜리 4명의 조카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영락없는 거지꼴들이었다. 이 4명의 조카들 중 제일 큰 조카가 바로 당시 16살의 차진실이었다. 차진실은 고모의 도움으로 남성여고를 졸업하고, 대구 동산간호학교(23회)에 입학해서 간호사가 되어 부산으로 와서 고모의 병원에 취직하여 돕고 있는데 어느 날 박윤선 박사의 사모(이화주-차봉덕 친구)가 삼일교회 전도사를 중매해서 한상동 목사의 주례로 결혼을 했는데 그가 바로 박희천 전도사(내수동교회 원로목사)였다. 고모는 조카 4명을 다 공부시켜 결혼까지 시키느라 자신은 정작 38세까지 결혼을 못했다. 차봉덕은 조카 4명에게 매일 성경읽기와 성경암송을 시켰다. 심지어 조카들이 새벽기도를 나가지 않으면 아침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신앙훈련을 시켰다. 또한 철저한 주일성수로 주일은 어떤 경우에도 병원 문을 닫았고, 진료 중에 삼일교회 고아들이나 집안이 어려운 환자들은 무료진료를 해 주었다. 특이했던 것은 차산부인과에는 십일조 함이 수납대 옆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어서 매 수입마다 십일조를 구분해서 넣었고 토요일 퇴근 시에는 십일조 함을 개봉하여 정리해서 주일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알고 즐거워 하셨다(차진실의 증언). 4) 차봉덕의 늦은 결혼 피난 온 4명의 조카를 거두어 양육과 교육, 그리고 전영창과의 복음진료소 개원과 차산부인과 개원 등으로 정작 자신은 결혼도 못하고 지내다가 같은 외과의사인 황영갑과 1958년 늦은 결혼을 했다. 남편 황영갑은 중국 길림성에서 출생하여 하얼빈의대 졸업(재학 시 120명중 4~10등 유지), 신의주 방직공장 병원장, 6.25때 인민군 후방 군의관으로 참전, 북한의 후퇴 때 탈영을 하여 미 8군 의무관, 육군본부 정훈감실 문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북에서 이미 결혼을 하여 6.25때 북한에 징집될 때(1950. 9월) 6세, 3세. 1세의 자녀들이 있었지만 6.25 전쟁으로 부인을 포함 전 가족이 사망하자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고려신학교에 입학 신학을 공부하였다. 복음의원 초창기 시절 농어촌 무료진료 전담의사로 지원해서 차봉덕, 장기려와 함께 무의촌 진료를 나갔고 이때 차봉덕을 만나 익히 아는 사이였지만 결혼으로 중매한 자는 그의 중, 고, 대학 시 선배이자 절친이었던 신영희 의사였다. 1958년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어 부산 삼일교회 한상동 목사의 주례로 새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차봉덕의 나이 38세때이다. 이듬해 큰딸 황은경(59년생), 은성(61년생), 은희(64년생) 세 딸을 낳았다. 5) 차봉덕의 동두천 이거와 진주로의 복귀 차봉덕이 1948년 부산으로 와서 10여년을 살다가 황영갑과 결혼 후 부산을 떠나 동두천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의 남편 황영갑의 자서전에서 “우리 내외가 결혼했을 때에 나는 빈털터리요, 집사람도 개업할 돈이 없었다.”고 한 것을 볼 때 당시 두 사람이 조카들과 함께 생활하기에는 매우 힘들었던 것 같다. 이때 큰 조카 차진실은 삼일교회 전도사였던 박희천과 막 결혼(1957.1.17)하여 독립한 이듬해였다. 그때 마침 동두천에 살던 황근옥 선생이 아무 차용증서도 받지 않고 50만원이라는 거금을 빌려주어 병원개업을 해 보라해서 동두천에서 개업을 했는데 병원이 크게 번성하여 주변에 땅도 많이 사게 되고 일 년 만에 황근옥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아 드리고 이자도 넉넉히 계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진주에서 부름이 있었다. 일제 말기에 폐원했던 진주 배돈 병원 후신으로 1955년 8월 15일에 설립된 진주복음병원의 초대원장 한규상(부산 복음병원 내과과장 출신)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을 하자 제2대 원장으로 황영갑을 초빙했고 1959. 9.10일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황영갑은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부인 차봉덕은 진주 우체국 근처에 ‘차봉덕 의원’을 개원하여 진주 최초 부부의사로 병원 일에 힘쓰며 진주교회(전 봉래동교회, 옥봉교회)장로(1961년 장로 취임)로,차봉덕은 여전도회 회장 직을 맡아 14년 동안 교회를 지사충성하였다. 1973년 차봉덕은 남편을 따라 진주로 온지 14년 만에 경영하던 두 병원을 폐원 정리하고 진주를 떠나 서울로 가게 된다. 이는 남편 황영갑이 목회자로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서울 논현동에서 영동제일교회를 개척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황영갑은 복음의원 무료진료 책임자가 되기 전에 이미 1950년대 고려신학교를 졸업했었고 때가 되매 두 사람 다 의사직과 장로직, 여전도회장직을 그만 두고 평생 복음을 위한 목회자로 결단하였다. 차봉덕이 남편의 목회를 위해 진주에서 서울로 떠날 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6) 차봉덕과 황영갑의 목회와 미국 이민 황영갑은 서울 논현동에 영동제일교회를 개척하여 섬겼지만 두 분의 서울에서의 목회기간은 길지 못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갑자기 1976년 12월 세 아이를 데리고 미국 이민 길을 떠나 세탁소 등을 하며 가정과 교회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다가 세 딸을 훌륭하게 키워 자립시키고 2009. 2.17 미국 글렌데일 안식병원에서 88세 일기로 소천하였다. 그의 슬하에는 황은경(59년생), 황은성(61년생), 황은희(64년생) 3명의 딸을 두었는데 모두 미국시민권자로서 남편의 성을 따라 장녀 송은경(황은경) 사위 송기태, 차녀 박은성(황은성) 사위 박해영, 삼녀 여은희(황은희) 사위 여홍평으로 손자녀 송다정(Cass), 박지은(Oliva), 박지혜(Pauline), 박지헌(Teddy),여수정(Crystal), 여평화(Richard)를 두고 미국서 살고 있다. 필자가 차봉덕 관련 자료를 찾던 중 그의 조카 차진실 사모를 서울에서 만나 딸들의 연락처를 받아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세 딸과 통화를 하여 위 사실들을 모두 확인하였다. 이 분들은 어머님이 부산 피난시절에 전영창선생의 초빙으로 복음병원을 설립했다는 것과 진주에서의 아름다운 믿음과 신앙을 언젠가는 어머님 일대기를 정리해서 남기고 싶다고 하였다. 사실 필자가 그동안 수집한 차봉덕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 일제치하, 그리고 6.25와 해방이후 격동기에 전영창의 요청에 아무 조건 없이, 월급도 없이 복음진료소를 설립하여 피난민들과 환자들을 돌보았고, 차진실 등 조카 4명을 거두어 결혼하고 자립시킬 때까지 양육하며 교육시키느라 자신은 정작 결혼도 못했던 아름다운 가족애, 철저한 주일성수와 십일조생활, 부산삼일교회에서 한상동 목사의 지도와 결혼이야기, 진주에서의 14년간의 진주복음병원 인수와 진주교회에서의 여전도회 회장으로서의 모범적인 신앙생활 등 그녀의 주옥같은 신앙생활은 복음병원의 초대원장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한 믿음의 의사였다. 필자가 차봉덕과 황영갑의 출생과 삶을 이렇게 자세히 남기는 것은 차봉덕 의사가 복음병원 초대원장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믿음과 희생, 헌신의 아름다운 의사였음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 | | ▲ 고신역사 포럼 참가자 단체사진 |
<참고 서적 및 자료들> 배평모, <거창고등학교 이야기>. 도서출판 한걸음, 2000. 전성은,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전집 2>, 미루 그래픽스, 2013. 황영갑, <작은 불꽃>, 류신각, 1982. 지강유철, <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2007. 김재도, <고신의료원 50년사>, 현대출판인쇄사, 2001. 박노원, <문창교회 100년사>,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맹호원, <경남노회 회의록 1. 2, 3권>, 角丸인쇄소, 1929. 김기현, <경남노회의 역사>, 쿰란출판사, 2006. 이관호, <경남(법통)노회 상황보고>, 디자인 신창, 2013. 한정건, 이상규편집 <장로교회와 역사>, 고신역사연구소, 2009. 류윤욱,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 쿰란출판사, 2011. 조헌국, <진주에 뿌려진 복음>, 디자인모토, 2015. 와따나베 노부오,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 엘멘출판사, 2002. 조성철, <봄을 찾아나선 별>, 쏠 커무니케이션, 2010. 이상규,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위에> SFC출판사, 2013. 장성철, <제일진해교회 40년사>, 진해예문사, 1985. 한영선, <새벽이슬처럼, 한정교목사 추모전기>, 도서출판 광야, 2003. 이효재, <아버지 이약신목사>, 한림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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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의 글을 이렇게 실어 주셔서 감사해요...
저가 존경하는 천헌옥목사님의 아드님이 이 카페 운영하는것으로 아는데....
꽤 오랫동안 한길로 쭈우욱 달려오신것을 존경합니다.
복음병원 설립자가 장기려가 아님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전영창이 역사에서 제거된것에 마음이 아픕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진리교단이라고 하는 고신이 가장 중요한 복음병원의 역사를 왜곡하면서 어찌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