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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白頭大幹) 14 – 지리산 반야봉
손가락으로 헤집어 지리산을 만들었다
화를 내는 모습은 신이 아니라 인간일세
맑은 물 계곡 따라 이야기가 흘러간다
몇 년 전에 갑자기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그날은 평택에 출장갔다가 장거리 운전을 하고 돌아오는데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마치 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멈췄을 때 주변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어지럼증이 더 심해져 구토를 하고 가까운 아산병원에 찾아가 진단을 받으니 이석증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의사도 꼭 이석증이라고 단언하지 않고 약간의 빌미를 남겨 놓고 있는 것 같았다. 별다른 치료없이 앉은 자리에서 옆으로 누었다가 일어서고 또 반대방향으로 누었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하라면서 울렁거림을 막아주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렇게 쉽게 첫 번째 이석증 치료가 잘 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또 다시 이석증이 찾아왔다. 얼마 전부터 계단을 오를 때나 옆으로 돌아설 때 약간 발을 헛딛는 느낌이 나고 산에 가서 낮은 곳에 핀 꽃을 사진에 담은 다음 일어서면 빈혈이 생긴 것처럼 어지러워 잠시 서 있어야 했는데 지난 토요일 ( 9월 1일 ) 그 증상이 더욱 커져서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결국 계획했던 대로 설악산 등산을 떠났으나 차멀미 하듯이 속이 울렁거려 휴게소에서 쉬어가길 반복하다가 설악산 들머리인 용대리에 늦게 도착하였고 , 상행중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든 나머지 중간에 영시암에서 하산하였다.
급기야 증상이 나이지지 않고 월요일 출근길에 강남구청에 차를 주차하고 그 앞에 있는 소리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9시30분부터 진료를 시작하는 관계로 한참을 기다렸다가 진찰을 받았다. 갖가지 검사로 이석증인 것 같다( 의사는 확언을 하지 않는다 )는 진단에 따라 치료를 받았다. 치료라는 것이 자리에서 이탈해 다른 곳에 붙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석( 耳石 - 아주 작은 칼슘조각 )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귀 주변에 바이브레이터로 흔들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속이 울렁거리는 구토증을 치료하기 위한 약을 처방해 주었다. 의사는 좀 약성이 강한 멀미약이라고 했다.
어쨌든 이 약을 먹으니 메스꺼운 기분은 없어졌으나 전형적인 이석증 현상은 변함없이 남아 있다. 의사도 금방 낫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는지 수요일에 다시 와서 진료를 받으라 한다. 수요일도 치료와 진료가 월요일과 다름없다. 안대를 끼고 그 안에서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을 관찰하고 어지러운지 물어본다. 그리고 평상에 누운채로 귀 주위를 바이브레이터로 두드리는데 치료하는 아가씨가 너무 열의가 강해서 그런지 피부가 벗겨지도록 강하게 눌러댄다. 그리고 약도 처방을 해주는데 이미 처방받은 약이 집에 있는지라 어쩔가 하다가 혹시 주말사이에 무슨일이 있을지 모르는 터라 약까지 샀다.
토요일 무박산행을 떠나는 날이다. 아직도 울렁거림이 남아 있고 이석증도 여전하다. 평상시같으면 어디 가까운 산에라도 다녀왔을텐데 이런 상태로 밖에 나다니기가 불편할 것 같다. 미리는 이미 금요일에 천주교 피정을 떠나서 일요일에 돌아올 예정이고, 영윤은 회사에서 야유회를 간다고 일찍 나갔다. 혼자서 유튜브도 보고 책도 좀 읽고 잠도 자면서 그냥 금쪽 같은 하루를 소진해버렸다.
혼자서 저녁을 먹고 샌드위치 두 개를 락앤락에 담고 포도 송이를 잘라서 다른 통에 담았다. 물 두병을 챙기니 산행준비 끝이다. 준비는 그렇게 복잡할 것도 없고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면 된다. 다만, 어지러움 때문에 어찌 될지 조금 걱정이 든다. 지리산은 길이 잘 닦여져 있어서 위험한 구간은 없다 해도 무박산행이니만큼 조심해야 한다.
8시 30분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약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혹시 산에서 울렁거림이 생기면 약을 먹어야 한다. 하루 종일 집에 있다 처음으로 밖에 나오니 이석증 증세가 나타난다. 틀림없이 아직 낫지도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엄마 뱃속에서 나온 송아지가 처음으로 땅을 밟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 본다. 그리고 일단 발을 디뎠으니 산행을 갈 참이다.
산행기
전과 마친가지로 두 군데 ( 기흥, 덕유산 ) 휴게소를 들러 새벽 3시 30분경 들머리인 지리산 성삼재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있다. 버스에서 내린 회원들은 세번째 무박산행에 익숙한 듯 아무 말없이 채비를 챙긴다. 항상 함게 하던 한문희 총대장님이 21기 대원들을 따라서 설악산 (점봉산구간)으로 간 탓에 이번에는 전에 이미 백두대간을 완주한 기수 회원들 (이동근, 김용호, 이헌구) 및 김옥신 총무의 가이드로 산행을 진행할 예정이다. 길이 험하지 않은데다 혼란스럽지 않아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가 대간을 타게 된 계기를 제공했던 박민기 씨가 이번 산행을 함께 하기로 했다. 지난 겨울 계방산 산행 때 처음 만났다가 장안산 산행 때 또 우연히 마추치면서 자유인 카페에 가입해서 마침내 백두대간 22기에 합류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이다. 그동안 수시로 산행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지냈지만 막상 함께 등산을 하지 못하다가 남원이 고향인 그가 지리산에 따라 나선 것이다. 그는 우리가 걷는 백두대간 정규코스에서 벗어나 뱀사골과 함박골로 내려갈 예정이라고 한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의 2.6 km 구간은 완만한 오르막이다. 긴 산행의 시작구간이라 앞으로 이어질 구간에 대한 걱정과 기대로 회원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머리에 손에 그리고 허리에 찬 전등 불빛이 긴 행렬을 만든다. 가끔씩 트인 공간을 지날 때마다 잠깐씩 올려다 본 하늘에는 오리온 자리, 큰개 자리 등 별들이 초롱초롱 빛난다. 유독 크게 빛나는 저 별은 새벽을 알리는 효성인가 ? 차가운 밤기운에 긴팔 셔츠와 바람막이를 입었는데도 서늘함이 살갗에 와 닿는다. 그렇게 뜨거웠던 여름이 꼬리를 내리고 물러난 지 고작 2주쯤이나 되었을까 ? 이렇게 차가운 바람이 불어 오니 뜨거웠던 여름은 기억에서 멀어지고 언뜻 겨울에 대한 걱정이 머리맡을 스쳐 간다.
노고단은 옛날 조상들이 산신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던 성스러운 곳이다. 지금이야 차를 타고 성삼재까지 간 다음 잘 닦여진 길을 걸어 노고단에 오를 수 있지만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신라나 고려시대라면 상황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우리 한반도에 삼한이 지배하던 시절까지 그 기원이 올라가는 마고할미에 관한 전설은 지리산 구석 구석에 남아 있다. 물론 마고할미에 관한 이야기가 지리산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한 땅에서 제일 높고 큰 지리산인 만큼 그 전설은 다른 데에 비해 큰 줄기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노고(老姑)는 늙은 시어미라고 풀어 쓸 수 있겠으나 이는 우리나라 말인 할머니 (할미)를 한자화시킨 말이다. 할머니라는 말은 크다는 뜻의 ‘한’과 어머니가 합쳐져 한어머니였던 것이 할머니로 변한 말이다. 그러니 노고단이라는 지명은 원래 ‘할미당’이었다. 그리고 그 할미는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나이 드신 여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대지 (大地)의 신이자 다산을 주관하는 여자신을 이른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제일 높은 제 1 주봉 천왕봉(1,915)과 두 번째 제 2 주봉이 반야봉(1,732) 그리고 세 번쩨 제 3 주봉 노고단(1,507)을 지리산 3대 주봉이라 일컫는다. 신라시대에는 천왕봉 인근에 할미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는데 고려시대에 이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한자로 노고단(老姑壇)으로 고쳐 불렀다 한다.
마고할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처럼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엄하기도 하고 성질도 부리며 또한 정이 깊은 여신이다. 태초에 우주가 혼돈의 세상이었을 때 손을 뻗어 하늘을 위로 떠 받치고 밑으로 뻗어 땅을 하늘로부터 분리해 놓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땅을 판 자국이 산과 계곡이다. 제주도와 육지를 연걸하는 징검다리를 놓으려다 성질이 나서 그만 두었는데 그 때 쓰려던 돌들이 지금의 다도해라고 한다.
마고할미는 지리산 제2봉에 살던 반야라고 불르던 청년을 좋아했다. 그 청년에게 주려고 하얀 도포를 지어 놓고 기다리는데 며칠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밤 하늘에는 휘영청 보름달이 떠 있는데 저 멀리서 하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반야가 달려 오는 것을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마고할미는 벌떡 일어나 자신이 손수 지은 도포를 들고 마주 뛰어갔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 다가 가 보니 그것은 반야가 아니라 산기슭에 하얗게 피어 있는 쇠별꽃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헛것을 보고 뛰어 온 것에 대해 무안쩍기도 하고 또 자기의 사랑에 부응하지 않는 반야에게 화가 난 나머지 마고할미는 손수 지은 도포를 갈기 갈기 찢어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 지리산에 쇠별꽃은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 지금도 지리산에는 쇠별꽃이 자라지 않으며 그 때 마고할미가 찢어 바람에 날렸던 도포자락은 주변 소나무 줄기에 내려 앉아 하얀 풍란으로 자라났다 한다.
노고단은 접근하기가 편한데다 사방이 트여 있어 조망이 좋은 위치다. 밤에는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새벽 동이 틀 때면 또 해돋이가 아름다운 곳이라 한다. 우리가 노고단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어스름 기운조차 없어 전등불 없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꽤 많은 진사님들이 이 돌탑을 향해 자리를 잡고 해가 오르기를 기다리다가 우리가 돌탑으로 가려하자 길을 비켜준다. 그들은 좋은 장비를 갖추고 하늘의 별과 해돋이와 아침 산자락에 퍼지는 운해를 사진에 담을 것이다. 산대장님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노고단 상징물인 돌탑 앞에서 각자 익숙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우리는 천왕봉 방향으로 또 다시 길을 나섰다. 5시 20분 돼지령을 지날 때 오른쪽으로 시야가 트이고 구름위로 옅은 여명이 밝아 온다. 지리산에는 온갖 짐승들이 많이 살아 고개나 봉우리 이름도 동물이름이 많다. 이 돼지령은 무슨 연유로 그리 불리었는지 모르겠다. 노루목이나 토끼봉 또는 묘봉치 등도 모두 동물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리산의 마스코트나 다름없는 곰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봉우리는 없는 듯 하다.
임걸령을 거쳐 반야봉 삼거리에서 배낭을 벗어 두고 반야봉을 올랐다. 성삼재를 출발한지 2시간 30분쯤 걸려 6시 50분에 반야봉에 도착했다. 꽤 널찍한 바위 봉우리 끝에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석이 서 있다. 산행기를 읽으면서 늘 가보고 싶었던 산이다. 지리산 제 2 주봉이다. 이미 해가 하늘길을 많이 올라서 중천에 떠 있다. 천왕봉 위로 해가 떠 있고 그 앞으로 수 많은 준봉들이 어깨를 떡 벌린 채 우뚝 서 있고 그 사이 사이 마치 저녁 연기처럼 아스라이 펼쳐진 옅은 안개 구름이 흐른다. 이른 아침시간이라 그런지 우리 산악회 회원 이외에는 다른 산객이 많지 않다.
지리산에는 벌써 초가을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쑥부쟁이꽃이다. 대장장이 딸들의 기구한 운명에 관한 전설이 묻어 있는 쑥부쟁이 하얀 꽃이 만발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가난한 대장장이 부부가 12명의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인데다 어머니는 아파서 누워 있고 큰딸 혼자서 쑥을 캐다 죽을 쑤어 온 식구가 먹고 사는 형편이라 사람들은 그 큰딸을 ‘쑥을 캐는 불쟁이 딸’이란 뜻으로 쑥부쟁이라 불렀다.
대부분의 꽃에 관한 전설이 그러하듯이 이 쑥부쟁이도 마음씨가 몹시 고왔으니 어느날 산에 쑥을 캐러 갔다가 사냥꾼에게 쫒기는 사슴을 구해주고, 또 멧돼지를 잡으려 파놓은 함정에 빠진 훤칠한 청년을 구해주었다. 사슴은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면 불르라고 이르고는 사라져 버렸고, 잘 생긴 청년은 머지 않은 날에 찾아 오마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여기까지는 참 희망적이고 고무적이다. 이제 쑥부쟁이에게도 좋은 일만 생길것처럼 보였는데, 우리의 옛날 얘기는 그렇게 결말이 나는게 별로 없다. 머쟎아 돌아오겠다던 청년을 그리워 하던 쑥부쟁이는 해가 갈수록 그리움이 커지는 만큼 몸은 점점 더 야위어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산신령에게 지극정성 기도를 올렸다. 그 기도가 산신령을 통해 자기가 구해주었던 사슴에게까지 전해진 모양인지 갑자기 사슴이 찾아와 보라색 주머니에 들어 있는 노란 구슬 세개를 주면서 그 구슬을 입에 물고 소원을 빌면 세가지 소원이 이뤄진다고 말하고는 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제 소원을 이루게 해주는 구슬을 세개나 얻었으니 쑥부쟁이 가족도 잘 살게 되고 모든 것이 해피엔딩이 될 것처럼 보였지만 ….
마음씨 착한 쑥부쟁이는 구슬하나를 입에 물고 어머니의 병이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앓아 누웠던 어머니가 기적처럼 단번에 나아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고 쑥부쟁이는 몹시 기뻐하며 두번째 구슬을 입에 물었다. 두번째 소원은 그녀가 오매불망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던 잘생긴 청년을 보는 것이었다. 자기를 찾아 오겠다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산신령의 영험으로 호출되어 쑥부쟁이 앞에 나타난 그 헌헌장부 잘생긴 청년은 그새 장가를 들어 두 아이를 거느린 가장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여기서 쑥부쟁이도 좀 고민을 했을 법 하다. 그 청년의 운명은 쑥부쟁이에게 남아 있는 세번째 구슬에 달려 있었다. 쑥부쟁이가 그 구슬을 입에 물고 어떤 소원을 말하느냐에 따라서 청년은 가족과 헤어져서 쑥부쟁이에게 올 수도 있고 아니면 사고를 위장한 죽음까지 당할 수도 있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쑥부쟁이는 몹시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에서도 천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 청년이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가 잘 살기를 기원했다. 이 대목에서 쑥부쟁이는 누구와 큰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어머니의 병환도 낫고 청년에 대한 미련도 떨쳐 버리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어머니 아버지와 11명의 동생들과 오손 도손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는데, 그게 그리 쉬운게 아니다. 실연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자기가 그토록 마음속에 끌어안고 있던 남자가 자기를 거들떠 보지 않고 배신한 채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면 기분이 어떻겠나. 쑥부쟁이는 그 청년이 행복하게 잘 살라고 소원하였지만 텅빈 가슴속 구멍은 점점 커져만 갔고 두 눈은 퀭하니 쑥 들어가고 바람만 불어도 흔들릴 만큼 허약해졌다. 전형적인 실연당한 사람의 모습이다. 여기에다 입도 헤 벌린 채 허공을 바라보는 횟수가 잦아지고 쑥을 캐러 가서도 멍하니 서서 그 청년이 사는 동네쪽을 바라보기 일쑤였다.
까실쑥부쟁이
그러다 어느날 쑥부쟁이는 또 동생들을 먹일 쑥을 캐러 가겠다며 산으로 들로 나다니다가 그만 높은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고 말았다. 실제로 쑥부쟁이가 실수로 떨어진건지 그만 세상이 살기 실어져 스스로 떨어져 죽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씨 착하고 순수했던 쑥부쟁이는 세상과 작별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녀가 떨어진 낭떨어지 위 바위틈에는 보랏빛을 띤 흰 꽃잎속에 노란색 꽃술이 들어 있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그 꽃 모양이 마치 보라색 주머니속에 노란 구슬을 물고 있는 쑥부쟁이 같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꽃을 쑥부쟁이꽃이라 불렀다. 지금도 가을이 오면 산기슭 바위틈에 가느다란 꽃대를 세우고 흐느적 거리며 흰꽃을 피우고 서 있는 쑥부쟁이는 저 멀리 산 너머 살고 있는 애인을 기다리는 것 같다.
또 다른 대표적인 가을꽃인 투구꽃은 산길 옆에 도열하여 늠름하게 서 있다. 파란색이랄까 남색이랄까 그 색을 흉내낼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 옆에서 보면 눈까지 가릴 만큼 투구를 깊이 눌러쓴 로마병정 같다. 이 투구꽃은 그 뿌리를 초오(草烏)라고 하여 한약재로 쓰이지만 독성이 매우 강하여 사약의 재료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투구꽃
또 다른 독초인 진범도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마치 오리가 매달려 있는 모양으로 노란빛이 감도는 흰진범이다. 투구꽃과 마찬가지로 뿌리를 진범이라 하여 약초로 사용하지만 독성이 강하다. 어째서 아름다운 꽃은 이렇게 독을 품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흰진범
과남풀 - 관음초(觀音草)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과남풀이라 부른다 한다. 용의 쓸게라는 용담과에 속하는 한약재료이다.
정령엉겅퀴 - 지리산 정령치에서 처음 발견되어 정령엉겅퀴라 부른다. 흰고려엉겅퀴(곤드레)와 흡하아여 구분하기 어렵다.
지리산의 산길은 안전하다. 길표시가 잘 되어 있고 조금만 가팔라도 안전장치를 해 놓았다. 길바닥에는 오랜 기간동안 매끄러운 돌을 날라다 깔아 놓았다. 나무계단과 돌길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녹음이 우거진 산길을 걷다가 가끔씩 조망이 트이면 먼 데까지 이어지는 산그리메를 바라볼 수 있어서 지리산은 참 좋다. 이런 산길가에 피어 있는 예쁜 꽃을 보면서 걷다 보니 삼도봉(三道峰)에 이른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에 걸쳐 있어 삼도봉이라 부른다. 반야봉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된 탓에 발걸음이 어느 한 곳에 잠시 머물기가 부담스럽다. 이곳을 다녀간다는 표시로 인증사진을 찍고는 서둘러 삼도봉을 떠난다.
지리산에는 살아서 천 년 죽어서 또 천 년을 지낸다는 주목(朱木)이 여기 저기 많이 보인다. 오늘 걷는 길에는 주로 활엽낙엽수가 많아 나무그늘을 만들어주는데 삼도봉을 지나 한참 간 곳에 고사목(枯死木)이 많이 보인다. 최근 신문기사에 한라산과 지리산 그리고 소백산의 침엽수림이 말라가고 있다는 기사가 여러 번 나왔다. 기자가 보는 고사목이 생겨나는 원인은 요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지구온난화이다. 기온이 상승하여 겨울에 눈이 일찍 녹다 보니 겨울에도 탄소동화작용을 해야 하는 침엽수가 수분을 충분히 공급 받지 못해 서서이 죽어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 기자의 진단이 맞건 틀리건 지리산 여러 곳에 죽은 고사목들이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새벽 3시 반에 출발한 산행길이 벌써 9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 행렬은 아침을 먹기로 한 토끼봉에 도착했다. 늘 그렇듯이 야생화들과 눈맞춤을 하면서 걷다 보니 내 행선이 더디다. 우리 일행은 하나 둘 앞서 나가고 내가 토끼봉에 도착했을 때 회원님들은 벌써 넓은 헬기장 그늘을 찾아 옹기 종기 모여 앉아 점심을 들고 있었다. 나도 헬기장 한 켠에 둘러 앉아 자리를 잡은 무리에 끼어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었다. 새로 온 여성 회원분이 함께 자리하면서 김밥을 나눠준다. 여기에 포도로 입가심까지 하고 나니 근사한 아침식사가 되었다.
분취
토끼봉이라는 산이름은 전국에 제법 많이 보인다. 오늘 지나온 능선길에 돼지령이니 노루목이니 하는 것이 모두 동물 이름을 딴 것이라 그 유래가 궁금했는데 인터넷을 훓어보니 이 세 가지 동물이름을 딴 지명의 유래가 다 다르다. 돼지령은 멧돼지가 원추리 뿌리를 파먹은 곳이라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고, 노루목은 반야봉에서 피아골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이 곳에서 잠시 완만해지는 모양새가 마치 노루의 목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둘 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유래다. 돼지가 원추리 뿌리를 파 먹은 곳이 유독 여기뿐이 아닐터이며 노루목이든 사슴목이든 뭐든 뚜렷한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하필 노루목이라 불렀는가 하는 데는 적당한 설명이 부족한 것 같다.
토끼봉에 대한 유래는 좀 색다르다. 이 토끼봉의 위치가 지리산 제2주봉으로 일컬어지는 반야봉에서 볼 때 정동쪽에 자리잡고 있어 주역에서 일컫는 24방위 중 묘방(卯方)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좀 어설퍼 보이는 산이름에 대한 설명이지만 우리가 주변에서 늘 접하는 동물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친근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길가에 서있는 큰 바위 습한 곳에는 어김없이 바위떡풀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다. 범의귀과 바위떡풀은 5개의 꽃잎 중 2개가 길어 마치 토끼귀처럼 보인다. 하얀 꽃이 신비롭다.
바위떡풀 - 잎새 모양이 참바위취와 비슷하다.
참바위취 - 꽃이 지고 씨앗이 여물어간다.
수리취
이제 국립공원에서 음주를 금하고 있는 것을 패러디하는 듯 술을 좋아 하는 회원님들은 연하천 대피소에 이르기 전 시원한 나무그늘아래에서 묵을 축인다. 그러나 아직은 과음하지 않는 한 단속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이들은 약간의 술이 들어가면 힘을 얻어 산행을 잘 하는 이들도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약간의 술을 마시는 것조차 단속한다면 지나치다는 의견이 대체로 지배적인 것 같다.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은 법, 이런 금주명령이 내려지는 것은 절제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술을 마시는 바람에 사고를 내는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한 것일거라는 생각이다.
미역취
연하천 대피소는 커다란 저택 같은 느낌이 든다. 숙소와 조리실이 있는 건물이 왼편에 높이 자리잡고 그 계단 아래쪽에는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약수터가 있다. 약수터 뒤쪽에는 키가 큰 구릿대가 하얀 꽃을 피우고 있다. 많은 벌과 곤충들이 꿀을 얻어 먹으려 꽃으로 날아 들고, 많은 목마른 등산객들이 생명수를 얻으려 약숫터로 달려 든다. 넓은 마당 다른 한 켠에는 깨끗하게 단장한 화장실이 있고 군데 군데 야외 테이블이 세워져 있어 산객들이 앉고 서고 간단한 음료와 간식을 먹으며 쉬었다 간다. 연하천(煙霞泉)이라는 이름은 이 대피소에서 가까운 곳에 사시사철 흐르는 작은 개울이 있어 그 곳에서 안개가 피어 오르는 모습을 그려 지은 것이라 한다.
연하천 대피소
연하천 약수터 뒤에 구릿대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가을하늘이다. 뜨거웠던 여름이 좀처럼 끝나지 않을 듯 하더니 태풍 솔릭이 한반도를 빗겨 지나 가고 또 몇 차례 비가 내리더니 이제는 끔찍했던 여름에 대한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졌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누가 말했다던데 어쩌면 이렇게 잊을 수 있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여름 세기적인 무더위로 고생한 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으려면 지금부터 달려오는 짧은 가을을 더욱 알차게 맞아 들여야 한다.
연하천 대피소를 떠나 나무그늘길을 걸어가는데 왼쪽 숲속에 하얀 꽃대가 무리지어 피어 있는 촛대승마가 보인다. 이제까지 사진으로만 보아 왔던 촛대승마를 처음으로 목격했다. 잎은 눈빛승마와 많이 닮았다. 꽃대가 가늘게 높이 올라오고 그 끝에 커다란 양초모양으로 하얗게 피어 있다. 이른 봄에는 눈개승마가 피고 여름 내내 눈빛승마가 꽃봉오리를 올리다가 늦여름 마치 눈자락이 날리듯이 하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는데 이 촛대승마도 그에 못지 않게 풍성하고 아름답다.
촛대승마 - 미나리아재비과 승마속
백두대간 능선길에 지리고들빼기 노란꽃이 즐비하다. 까치고들빼기처럼 땅에 붙어서 자라는 지리고들빼기는 잎이나 꽃이 까치고들빼기보다 조금 더 크다. 오전에는 꽃잎을 앙 다물고 있다가 햇볕이 나는 오후 들어 활짝 핀다. 이 고들빼기는 지리산에서 관찰된 것이라서 이름에 지리라는 말이 들어간다.
지리고들빼기
형제바위에 이르기 전 시야가 활짝 트이는 곳에 이르러 바위위에 올라가 보니 개미들이 높은 공중을 날아다니며 짝짓기에 정신없다. 짝짓기 할 때는 온통 그쪽으로만 집중을 하는지라 곁에 사람이 다가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일에 열중이다. 이리저리 떼를 지어 날아다닌다.
저멀리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길은 지난 회차에 걸었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산행하려는 그날 새벽에 장대같이 퍼부어 우리의 계획을 무산시켜 버렸다. 오른쪽은 남쪽이다. 경상남도 구례군 화개면이고 그 너머로 첩첩산중 산마루가 이리 저리 포개지면서 이어진다. 산을 많이 탄 회원분이 멀리 보이는 곳이 광양 백운산이라 알려준다. 내 눈에는 그 산이 그 산인데 산행에 내공이 쌓이면 산의 면모도 구분이 되는 모양이다.
지리산 형제봉은 달리 부자(父子)바위라고도 부른다. 저 아래 음정마을 맑은 계곡물에 밤마다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가곤 했는데 마을에 사는 총각이 선녀의 옷을 감추는 바람에 선녀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총각에게 몸을 의탁하여 살면서 아들도 여럿 나았다. 그렇게 살면서도 늘 시름에 젖어 있는 선녀가 보기에 안타까운 나머지 총각은 날개옷을 선녀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이에 선녀는 날개옷을 이리 저리 펼쳐보고 찟어진 곳을 꽤매고 다듬더니 주섬 주섬 차려입고 그만 하늘로 날아 올랐다. 엉겁결에 자신의 아내를 잃어버린 총각은 아들들을 데리고 이 산정에 올라 망연자실 하늘을 바라보는 날이 길어지더니 마침내 돌아오지 않는 선녀를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고 그 부자가 흘린 눈물이 계곡을 이루어 음정마을로 흘러 내려 비리내골이 되었다고 한다.
부자바위
진행방향으로 작은 산봉우리 너머로 오늘 행선의 종착지인 벽소령이 보인다. 날씨가 덥지 않아 목은 마르지는 않은데 무박산행 탓에 졸음이 눈꺼풀에 내려 앉는다. 어디 시원한 그늘에 누워 10분만이라도 잠을 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호사스런 생각이다. 여기 저기 곁눈질을 해가면서 사진을 찍고 다니는 동안 천리마 같은 자유인들은 벌써 저 멀리 앞서 가 버렸는데 지체할 시간은 나에게 없다. 오후 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다. 먼저 간 대원들은 앉고 서고 편하게 쉬고 있다. 벽소령 대피소는 리모델링 공사중이어서 간이 매점만 열어두고 나머지 시설은 폐쇄되었다.
벽소령이라는 이름은 ‘겹겹이 싸인 산위에서 떠오르는 달빛이 희다 못해 푸르다’ 라고 노래한데서 유래하였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벽소명월(碧宵明月)은 지리산 10경 중 제 4경을 이룬다. 언젠가 보름달이 뜨는 날 이 별소령 산장에 들어 아름다운 달빛을 마셔보고 싶다.
우리는 이 벽소령 대피소에서 대간길 산행을 마치고 왼쪽 음정마을로 하산해야 한다. 이정표에 쓰여진 것을 보니 하산길이 무려 6.7 km 이다. 천왕봉까지 11.4 km 다. 대원들은 잠시 침묵속에서도 머리를 굴려본다. 마음만 먹으면 천왕봉까지 달려보고 싶어 하는 심정이 선한 눈빛에 비친다. 지난 번 폭우로 인해 포기했던 산길에 대한 아쉬움이 이곳 벽소령에 와서 더욱 크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아쉬운대로 고이 접어 배낭속에 먹다 남긴 간식과 함께 넣어야 한다. 마흔명이 움직이는 대열은 마치 기차처럼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함께 이어서 달려야 한다. 우리는 오후 1시 음정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송이풀 - 송이버섯이 날때쯤 피는 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참까치밥나무 또는 명자순이라 부르는 범의귀과 식물이다. 열매 이름에 까치나 까마귀 등의 접두어가 붙어 있는 것은 사람이 먹을수는 있지만 너무 작거나 씨가 커서 식용하기에 적당치 않은 것을 일컫는다.
둥근이질풀
벽소령에서 음정마을까지는 지루한 임도를 걸어야 한다. 수차례의 빗물에 흙과 잔돌은 쓸려 나가고 굵은 자갈과 큰 돌이 박혀 있어 되도록이면 편한 자리를 밟으려고 요리 조리 피해가며 걷지만 긴 거리를 내려오는 동안 발바닥엔 이미 불이 붙었다. 시선을 던져 바라볼 경치도 없고 시원하게 들리는 계곡물소리도 없는 무료한 임도를 터덜 터덜 걷는다. 길가에 가끔씩 이삭여뀌와 뚝갈꽃도 보이지만 햇볕 잘 드는 임도와 달리 이곳에는 야생화도 무척 드물다. 우리끼리 이곳에 식당을 차리고 예약한 사람들을 1톤 트럭으로 실어다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면 장사가 잘 되겠다고 농담으로 위로한다.
짚신나물
큰엉겅퀴
음정마을까지 1.4 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제 다 왔다는 느낌이 들며 안도한다. 그러나 산행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듯이 마지막 남은 1 km 는 시작할 때의 4 km에 버금가는 거리다. 너덜거리던 자갈길이 끝나고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마을의 지붕들이 내려다 보이고 눈을 치켜 올려다 본 지리산의 장엄한 능선길이 까마득하게 펼쳐진다.
뚝갈
이삭여뀌
높은 지대에서 까마득히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면 구불 구불 길을 구부려서 경사를 완만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지 조 앞에 보이는 곳도 한참 돌아서 내려가야 한다. 누군가 밭 가운데 산소까지 풀을 베어 길을 터 놓았길래 좀 빨리 내려가 볼 양으로 따라 갔더니 길은 산소자리에서 끝나고 그 아래 길까지 고사리밭을 헤치고 가야 한다. 햇볕아래 걸으니 목이 탄다. 배낭에서 남아 있는 물을 꺼내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마신다. 그래도 갈증은 풀리지 않는다. 저 아래 먼저간 회원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인다. 이제 긴 여정이 끝이 났다. 길가 배수로에서 넘쳐나는 물에 발을 씻는다. 하루 종일 20 km 넘는 거리를 무던하게 걸어준 발에 찬물을 부어주니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는 것 같다. 여름날 산행 후 온 몸을 계곡에 담그던 알탕은 지나간 추억이 되었다.
꽃향유
이질풀 - 둥근이질풀에 비해 꽃과 잎이 작고 꽃에 나있는 선이 선명하지 않다.
수까치깨
음정마을로 하산하면서 별동대원들끼리 마을이름의 유래에 대해 얘기했다. 음정박자할때 그 음정(音程)은 아닐테고 음양오행에 관해 얘기할 때 쓰는 그 음정(陰精)을 의미한 거라고 하면서 그럼 어딘가 양정(陽精)마을도 있지 않겠냐고 했는데,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정말 음정마을에서 작은 산을 넘으면 양정마을이 있고 이 두 마을에서 하류로 조금 내려가면 하정마을이 있다. 그 뜻은 분명하게 밝혀놓은 글은 없으나 백두대간길 명선봉과 형제봉 중간지점인 삼각고지에서 북쪽을 벋어 나간 능선의 이름이 삼정능선이며 이는 양정, 음정, 하정을 묶어서 삼정이라 부른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해 놓은 글도 있었다. 누군가 심사숙고하여 마을 이름을 지은 듯 한데 그 자세한 내역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자료를 찾아 보니 음정의 한자는 그늘陰 넷째 천간丁으로 표기한다.
마을 주민들도 이 음정마을이 백두대간에 오르는 길목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듯 스쳐 지나며 바라보는 노인들의 눈매가 선하다. 마을 길목에는 산꾼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정자도 마련해 놓았는데 그 뒤로 폭포처럼 쏱아지는 물이 굉장하다. 마을 끄트머리에 넓은 주차장이 있고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백두대간벽소령이라 쓰인 커다란 돌팻말이 세워져 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숲길로 이어지고 계속 보전되어야 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렇게 해서 무박으로 별을 보며 시작한 산행이 마침내 오후 3시 좀 넘어서 끝났다. 11시간 넘게 걸린 산행으로 몸이 지쳐 있는데다 잠이 부족한 우리들은 버스에 올라 식당으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동안 벌써 잠이 들었다.
우리나라 최대 산군인 지리산을 이제 반이나 밟았을까. 아직도 수많은 능선과 골짜기에는 내가 보지 못한 아름다운 풍광과 아직도 듣지 못한 슬프고 애틋한 전설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수천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느꼈을 애환과 희망과 절망이 바람을 타고 내 옷깃을 스쳐간다. 누군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곳에 숨어 들고 또 누군가는 도망친 자들을 찾아서 이곳에 들어온다. 누구나 살아가는 한평생을 허트이 살지 말라고 저 큰 산 지리산이 나에게 말해주는 듯 하다.
첫댓글 이석증이 그렇군요...힘든 몸으로 산행하시면서 내색도 없이 무사히 함께 산행을 마쳐서 다행입니다..
산행기 잘 보고 읽었어요...! 수고하셨어요.
언제나 행렬의 앞과 뒤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김형의 산행실력이 갈수록 돋보입니다. 이석증 걸리지 않도록 건강 유의하세요...ㅎㅎ
야생꽃을 섞어 만든 산행기는 또한 독특한 멋을 느끼게 합니다. 100인 100색의 삶이 있는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도 천차만별인 것처럼 색다른 호기심을 유발합니다. 이 모든 것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지요, 같은 대간 동지로서 정말 반가운 발걸음입니다.
그렇지요? 꽃을 그림에 넣으면 그림이 아름답고 꽃을 차에 타면 차맛이 향기롭지요. 꽃이든 나무든 어쩌면 우리 인생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이 드네요. 항상 멋진 글과 사진으로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ㅎ형님~ 오랜만에 반가웠읍니다^^ 10년을 골프에 몰입하시다가
이제 등산인으로서 전력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의리에 감사하고 좋은 날 다시 뵈요^^
박형 멋진 고향땅에 가서 좋은 풍경 보고 왔네요. 지리산처럼 넓은 마음 부럽습니다. 혼자서 지라산 계곡길로 헤메고 다니니 그런 용기도 대단하더이다. 항상 산행 조심하고 담배 끊으면 산신령님이 더욱 좋아할 것라고 생각이 드누만..ㅎㅎ
너무나 건장하게 생기신 별동대 작가님이 이석증이라니 믿기지 않습니다.꾸준한 치료가 답이네요.몸 관리 잘하시어 앞으로 쭉 백두대간
완주 하면서 산행기와 야생화의 해설 부탁드립니다.우리 별동대 작가님 화이팅입니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좀 나아졌습니다. 제가 보기보다 좀 허약체질이라서 그런가봅니다. 형님처럼 튼튼하게 잘 자라나야 할텐데요...ㅎㅎ 추석 명절 잘 보내십시요.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빠른 치유 바랍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박한 지식으로 지리산에 전설까지 참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무슨글이나 읽다가 재미없으면 덮고 마는데.산행기에 야생화 설명까지~~
눈을 뗄수가 없게 재주가 좋으신 양산박님~이석증 치료 잘하여 빨리 완쾌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전 성이 이가 아니고 김가 입니다~~~
에궁...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본의 아니게 제가 성희롱을 하구 말았네요. 머리는 김이라고 하는데 제 손가락이 잘못한것 같습니다.